정부의 역할과 기능은 시대와 더불어 변해왔다. 19세기 국방과 치안질서 유지라는 소극적인 정부관에서 이제는 국민의 생활과 직결된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확대해가면서도 전자정부 시스템처럼 방만한 살림을 효율적으로 줄여나가는 작은 정부 큰 역할이 강조되는 시대에 들어와 있다. 

 

이에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또한 차기 정부의 국가정책의 기조를 ‘창조적 실용주의’로 설정하고 정부조직을 ‘작은 정부 큰 역할’을 위한 개편을 진행하고 있다.


530여 만 표차라는 표심이 보여주듯이 제17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다른 어느 정부 때 보다 특별하다. 이는 외환위기로 인한 IMF체제를 금모으기 국민운동을 통하여 극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생, 경제 분야에서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경제는 나아지질 않고 있고 청년실업문제도 특별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BBK를 비롯한 여러 가지 난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대통령’,‘경제살리기’를 슬로건으로 내어 건 이명박 후보에게 부동의 표심을 모아준 것이다. 또한 경제분야를 비롯하여 사회, 정치, 문화, 통일 등 사회 전반을 양극화로 몰고 간 ‘참여정부’를 심판하고자 하는 민심의 결의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정부는 지난 참여정부의 실패를 거울삼아 여와 야, 진보와 보수, 부와 빈 등 사회 곳곳이 양극화 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 대통합과 사회대통합, 정치대통합을 이루는 대승적인 통합의 정치를 이루어 나가야 하며,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의 중심에 있는 사교육과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여 국민이 편안하게 잘 사는 나라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특히 새로운 정부의 출발에 있어서 국민적 지지와 협력은 물론이거니와 국민 5분의 1이상의 유력한 사회 주도세력인 교회의 올바른 기능과 역할도 더욱 요구되어진다.


이러한 시기에 제성호 박사의 ‘이명박 정부와 한국교계의 역할’이라는 주제의 글을 통하여 이명박 정부의 방향을 되짚어보고 한국교계의 역할을 정리하여 보는 것은 시기적으로나 의미적으로 대단히 시의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저자는 ‘이명박 정부와 한국교계의 역할’이라는 주제가 보여주듯이 저자의 글은 크게 둘로 나누어 이명박 정부의 출범의 의미와 정책방향에 대하여 전반부에 다루고 있으며, 중반과 후반부에서 교계의 역할에 무게를 싣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1) 이명박 정부의 출범의 의미와 정책방향

저자는 이명박 정부 출범의 의미와 정책방향에서 첫째로 ‘작은 정부 큰 시장(민간주도)’을 표방하고, 정경유착을 반대하며,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치를 중시하는 신보수주의를 주도세력으로 보고 있으며, 둘째로 이명박 정부를 ‘제2의 건국’ 또한 ‘선진화 1기, 원년 정부’로 보고 있다. 셋째로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북한을 개혁개방, 인권개선, 민주화의 단계적 실현을 구현하되 한미동맹을 활용한 대북화해협력정책, 저자는 이를 ‘신 포용정책’이라 표현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실사구시와 창조적 실용주의를 통하여 국리민복의 정치를 실현하는 5년이 될 것으로 저자는 평가하고 있다.


저자는 이명박 정부의 주도세력을 ‘신보수주의’로 정의하며, 이명박 정부를 제2건국의 1기 원년정부로 부르고 있다. 저자는 본 글(p.13)에서 산업화세대의 수고와 민주화 세대의 성과에 대해서는 대단히 높이 치하하면서 자긍심으로 이어갈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결론에 가서 참여정부의 무능과 오만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강하게 단절시키는 느낌이다.

 

또한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신포용정책’이란 표현을 통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지향한 정책을 이어간다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필자도 참여정부를 두둔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난 역사에 대한 냉정하고도 합리적인 판단을 통하여 참여정부의 긍정과 부정을 평가하고 버릴 것은 과감히 배제하고 계승할 부분은 기꺼이 이어나가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 참여정부의 실패의 근본 역시 초기 참여정부가 이전 정권들에 대하여 모두 배제하고 부인하며 폄하하고 심판하고자 하는데서 기인하였다고 본다. 구세대를 모두 배제하고 386세대 코드인사로 편중된 진보세력은 민주적 대통합의 정책형성과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결국 사회통합, 국민통합에 실패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의 양극화만을 심화시키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명박 정부는 그야말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에 따라 참여정부의 공과(功過)를 냉정하게 진단하고 단절이 아닌 수정과 계승의 역사를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대북정책에 있어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자는 ‘신포용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국민의 정부의 ‘포용정책’을 한 단계 나아가 계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내어놓은 3단계에서 보면 한미동맹강화를 중심으로 북한의 개혁개방, 인권개선, 민주화의 단계적 실현을 추구하려고 한다.

 

물론 지난 정부가 남북관계에서 친북 일관 정책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전혀 추구하지 않았던 북한의 인권과 민주화 문제 즉, 북한이 체제 위협 요소로 주장하고 있는 민감한 사안을 진행함에는 신중한 정책방향 설정이 요구되어지며, 상호주의를 위한 대북외교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이를 ‘신포용정책’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성격상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저자는 ‘일류국가 희망공동체 대한민국’등 그간 한나라당이 언론을 통하여 보인 이명박 정부의 정책기조는 ‘일류국가(선진한국) 건설, 창조적 실용주의, 국민통합, 경제살리기’로 귀결시키고 있으며, 그 외 주요정책과제로 일하고 섬기는 실용정부, 자율과 자치가 확대된 교육제도, 실천적 자치정부, 아시아문화허브로서 문화코리아, 한미동맹 강화와 북핵폐기, 전략적 대북개방정책 등으로 요약하고 있다. 결국 저자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과제를 ‘경제살리기’와 ‘국민통합’이라는 2대 국정과제로 귀결하고 있다.


새로운 정부는 저자가 귀결시키고 있는 2가지 국정과제를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서민경제 회복을 위한 경제살리기는 우선 사회전반에 만연한 양극화를 일소하고 사회적, 국민적 통합을 이루어나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해 새로운 정부는 우선 여당 내 통합을 이루어내는 정치가 요구된다. 국민들은 독단이 아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과 아울러 이를 뒷받침하는 일치된 여당의 움직임을 통하여 정부정책이 추진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특히 통합을 위한 포용의 정치가 요구되어진다. 참여정부는 북한에 대해서는 넓은 포용정책을 구사하였으나 도리어 국내 여타 정치세력에게는 포용의 정신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였다. 포용(包容)이란 ‘상대를 아량있고 너그럽게 감싸 받아들임’을 뜻한다. 정부여당이라는 맏형 입장에 서서 야당의 질타와 대응도 너그럽게 감싸 안기도 하고 야당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가려운 등도 긁어줄 수 있는 포용력이 있을 때 국민들이 새로운 정부를 맏아들처럼 믿을 수 있는 신뢰감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포용의 정치가 실현될 때 비로소 참여정부에 들어와서 심화된 이데올로기적 양극화와 빈부의 양극화, 그리고 지역적 양극화 현상을 누그러뜨리고 서로를 품고 함께 사는 동반자 사회를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이다.    

 2) 이명박 정부와 한국교계의 역할


저자가 본고의 중반부터 후반 결론부까지 무게를 싣고 있는 것은 한국교계의 역할이다. 저자는 이명박 정부의 2대 국정과제인 ‘경제살리기’와 ‘국민통합’을 성취함에 있어서 ‘경제살리기’는 정부의 의지와 노력을 통하여 주도해 나갈 수 있겠지만, ‘국민통합’은 그야말로 시민사회와 종교계, 특히 한국교계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청되는 사항임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교계의 역할을 다음의 8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1)통치자를 위한 기도 2)내적치유와 화해자로서의 국민통합의 조력자 3)취약계층 구제를 통한 사회적 양극화 해소 4)청소년 문화공간과 프로그램 등 문화서비스 제공 5)올바른 역사관 고취와 자긍심 부여 및 바른 통일관과 대북관 교육 확산 6) 대북문제에 균형적 인식을 가지고 남북한 교회 교류 및 양측정부 당국간 중개의 기능 7) 법질서와 공권력의 존중 및 교회의 모범을 통한 향도적 역할 8) 건전한 정책제언과 선의의 비판자 즉 선지자적 교회의 역할이다.


필자는 저자가 본 논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8가지 한국교계의 역할’에 대하여 적극 동의한다. 그러나 이 8가지 제안들은 대정부, 대사회를 위한 교계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있다. 여기에 좀 더 원론적인 대사회에 대하여 갖추어야할 교회의 참모습과 관련하여 부언을 몇 가지 더 한국교계에 요청하고자한다.


첫째로 예언자적 교회로서의 시대적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시대를 초월하여 영속적으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또한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가시적 조직체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교회는 개인과 국가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과 일치에 이르게 함으로써 참된 개인력과 국가력을 발전시키도록 촉구할 사명이 있다.

 

더 나아가 교회는 국가가 최고선을 추구하도록 촉구하는 종교적 임무이상의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가 권력의 유혹 앞에서 굴복하여 신에게서 난 본래적 권위를 변질시킬 때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비판과 저항을 선포해야한다. 이러한 교회의 기능이 바로 제사장적 사명과 예언자(선지자적)적 사명이다.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사장의 중보자적 위치와 하나님의 대언자로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두 가지 사명이다.

 

협의의 의미로 해석할 때 제사장적 사명을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예배와 말씀의 사명으로 볼 때 예언자적 사명은 교회를 포함한 대 사회, 대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사 속에 있는 진보와 보수 두 그룹은 한 쪽은 사회를 향한 그리고 다른 한쪽은 개인을 향한 사명만을 강조함으로 제사장적 사명과 예언자적 사명의 온전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였다.

 

교회는 교회 안, 밖의 개인적인 영혼을 향한 회개와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위한 사명도 중요하지만 사회와 국가의 정의실현과 성경적인 최고선 추구를 촉구할 사명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종교와 종교지도자들의 부패는 물론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속적인 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선포하고 성경적인 올바른 길을 제시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는 치유의 사명(Healing Ministry)을 감당해야한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은 치유의 사역이셨다. 현대 사회의 질병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각종 환경오염과 파괴, 가족의 붕괴, 문화의 변질, 인간관계의 단절과 인간성 파괴 등이 심각하게 우려할 상태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해 치유의 범위가 단순한 개인의 영혼과 정신, 몸의 치유를 넘어 가족과 사회, 문화, 환경에 이르기 까지 전 영역으로 확대되었고 대단히 절실한 상황에 이르러 있다.

 

누가 이 병들고 무너진 사회를 바로 잡을 것인가? 게리콜린스는 교회가 사회를 치료하는 공동체로서 가장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먼저 치유받은 성령의 공동체로서 병들고 상처받고 이로 인해 소외되고 멸시받는 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상처에 기름을 붓고 싸매고 위로할 사명이 바로 교회에 있는 것이다.

 

교회는 치유의 사명(Healing Ministry)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에 극복되지 못한 영적인 상처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치유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며, 또한 인간의 욕심으로 가득 찬 부정과 부패의 사회와 사단의 유혹에 뒤엉켜 있는 어두움의 문화를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치유하고 또한 온전한 치료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통하여 병든 사회를 치유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여 나가야 하는 것이다. 


셋째로 교회의 갱신(Renewal)이 사회개혁(Reformation)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교회 갱신(Renewal)은 개신교를 뜻하는 Protestantism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내적인 문제는 물론 외적인 부정과 부패에 대하여 강하게 저항하고 고쳐나가는 개신교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어휘이다. 개신교(Protestantism)의 태생 자체가 기독교의 개혁과 갱신이라는 산고를 통하여 출발한 것이기에 교회의 갱신(Renewal)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교회의 제사장적 사명과 예언자적 사명은 1차적으로 교회의 갱신을 불러오게 하며, 2차적으로는 사회의 개혁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다. 현재 한국교회 내부에서도 목회자뿐만 아니라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갱신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사회개혁을 부르짖기 이전에 한국교회 안의 썩은 곳을 도려내고 오염된 곳을 먼저 수술하는 제 살을 도려내는 자정의 노력이 요구된다. 

 

개신교를 출발시킨 마틴 루터나 존 녹스, 쯔빙글리 등의 종교개혁자들도 본질적으로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그 범위는 성경적 토대 위에서 사회를 바라보게 하고 종국에는 필연적으로 사회 전반에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는 사회 개혁으로 확대된 것이다. 교회나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기준이 성경적(Sola Scriptura)이라면 그들의 개혁운동은 교회나 사회 어느 한 면에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의 개혁은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들의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각 각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그 구성원 바로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의 갱신에서 출발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개혁의 출발점은 교회의 갱신인 것이다.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물권주의, 세속주의, 인본주의, 권위주의 등을 제 뼈를 깍는 살신의 자세로 도려내며 잘라내는 자정의 노력을 할 때 비로소 세상의 빛과 소금의 맛을 회복할 수 있으며 성육신을 통하여 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에 온전히 전하여 질수 있을 것이다.   


넷째로 저자는 한국교계의 네 번째 역할로 ‘청소년 문화공간과 문화 프로그램 등 문화서비스 제공’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필자도 이는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문화부분에 대하여 좀 더 확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민족은 극동아시아 지역의 작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중국, 일본과 더불어 독립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최초의 목판인쇄본인 다라니경을 비롯하여 세종대왕의 천문학 측정 도구인 혼천의,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 측우기,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훈민정음, 이조백자, 고려청자 등 세계적인 유산들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민족은 중국에 조선족으로, 러시아에서 고려인으로, 미주에서는 코메리칸(Korea-American)으로 불릴 정도로 세계 각처로 흩어졌어도 민족의 고유 언어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에서도 뛰어난 민족으로, 러시아에서도, 미주에서도 유태인을 뛰어넘는 민족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러한 한민족의 문화 창달의 능력이 수많은 주변국가와의 생존경쟁 속에서도 한국의 역사가 지속가능하도록 만든 정신적인 자산인 것이다.

 

그러므로 독창적인 문화창달 문화컨텐츠의 개발은 한국교계의 좁은 폭을 넘어 이명박 정부가 선진한국, 문화코리아를 지향한다면 문화민족, 문화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먼저 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교계는 이러한 문화창달의 컨텐츠와 마당을 제공하는 데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감당해나가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21세기 선진한국, 글로벌한국을 만드는 일에 정부와 교회는 상호견제 및 보완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21세기 위대한 국가를 만드는 일은 새로운 정부만의 일이 아니다. 사회 각계각층의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여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저자도 결론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때로 잘하고 있는 정부의 일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도와야 하겠지만 때로 잘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교회가 예언자적 사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고 바로 외쳐줌으로써 상호 견제하고 보완하는 역할을 통하여 21세기를 위대한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선교사적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21세기 세계선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계획된 국가이다. 이 사명 또한 국가의 지향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귀한 글을 쓰신 제성호 교수님과 이 포럼을 주관한 한국교회언론회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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