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두 목사(오레곤주 유진중앙교회 담임) 부부, 아들 내외와 함께 오레곤 해안가에서

네 아이들을 기르며 신학을 공부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월요일에 집을 떠나 한 주간 동안 수업을 마치고 금요일 야간열차를 타고 밤을 꼬박 세워 아침에 귀가하면 반갑다고 달려와 안기는 천사들은 올망졸망한 네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쌓인 피로는 사라지곤 하던 전도사 시절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주님이 가슴에 새겨주신 두 구절의 말씀은 심신이 약해질 때 마다 자신을 다시금 돌아 보게하고 마음을 다잡게 하곤 하였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16:24의 말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구절이고 다른 하나는 마태복음 10:37절,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는 귀절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 보다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예사롭게 볼 수 없었습니다. 교회 생활은 늘 우등생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비친 목회자 아버지상은 늘 엄격하고 자로 잰 듯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아이들도 아버지를 닮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늘 떠나지 않았습니다. 둘째가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낯선 잠바 하나가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사주지도 않은 옷이 어떻게 이곳에 결려있지?” 그 때 집 사람이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둘째 녀석이 친구 잠바를 빌려 입고는 갖다 주지 않았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의 마음에는 어떤 불안한 생각이 마음을 요동치게 하였습니다. 아들을 불러 않혀 놓고 나무랐습니다. “예야, 친구의 옷을 빌렸으면 바로 돌려 주어야지 몇일 씩이나 우리 집에 두면 그 친구는 무엇을 입니? 당장에 돌려 주어라. 그것은 도적질이나 다를 것이 없지 않니?” 아버지의 호통소리에도 아들은 용서를 구하기는 고사하고 그게 무슨 큰 잘못이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 보았습니다.

“너 이제 보니 예사롭게 이런 행동을 해 왔구나! 잠바 뿐 아니라 네 친구들 물건들도 마음대로 가져오고 돌려주지 않곤 하지 않았니? 함께 파출소로 가 보자구나. 어쩌면 네 친구 부모들이 잃은 물건을 신고라도 하지 않았는지 의심되는 구나.“ 이 말을 하면서 아들이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기를 내심 바랐습니다. 그러나 전혀 요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말을 거둘 수도 없었습니다. 아들의 멱살을 잡고 파출소 문을 두드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이 놈은 제 아들입니다. 혹시 친구 물건이라도 뺏은 것이나 훔친 것이 없는 지 알아 봐 주세요. 버릇을 고쳐야 겠습니다.“ 얼떨떨하게 저의 말을 듣던 순경이 이름과 주소를 묻고는 컴퓨터를 한참 들여다 보았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 씩씩거리며 집에 돌아왔지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어떻게 어린 아들에게 그렇게 냉정하게 할수 있어요? 아무리 목회자라도 아빠가 아니어요?“ 집사람의 투정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당연히 목회자와 같이 삶이 철저하게 맑아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고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을 한국에 남겨두고 미국으로 떠나 이민 목회 생활을 하게 된 것은 한참 후였습니다. 가족을 기다리는 동안 가장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한국에서 함께 생활할 때 따뜻하게 가족을 보살피지 못하였다는 자책감과 미안함이었습니다. 가족 초청은 1순위라 넉넉잡아 한 해 정도면 입국이 가능할 것이라고 변호사가 힘을 주어 말하였지만 차일피일 입국은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삼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입국 비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이미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때라 출국이 불가능하였고 큰 딸은 결혼한 상태라 가족과 함께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아래로 남은 딸과 아들은 엄마와 함께 포틀랜드 공항에서 지루하게 느껴지는 입국 절차를 마치고 영주권 도장을 받았습니다.

출구에서의 만남은 기적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둘째 아들의 대견스러운 모습을 보는 순간 지난 날 속을 썩이던 모습은 멀리 사라졌습니다. 마냥 기뻤습니다. 그리고 감사하였습니다. 공항에서 집까지는 자동차로 족히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그렇게 짧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아들은 어릴 때 모습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영어를 배우는 걸음마로 시작하는 미국 생활의 시작이었지만 정착을 염려하던 부모의 걱정을 하나하나 벗겨 주었습니다. 이민 교회의 불안하고 어려운 실상을 전혀 모르는 순진함이 오히려 더 감사하였습니다. 대학 생활을 하는 4년 동안 두 가지의 아르바이트로 새벽 한시 이전 까지는 집에 들어 온 적이 없었습니다. 곤한 잠을 깨우고 어김없이 아침 일곱시 반에는 학교를 향하였습니다. 무척 안스러운 마음이었지만 겉으로는 늘 강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빠로서 아들에게 학비라도 보태주고 무엇인가 능력있는 아빠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지만 한인이 별로 많지 않은 작은 이민 교회의 형편으로서는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쩌다가 아들을 불러 미화 20달러를 손에 쥐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하거라“라고 당부를 해 봅니다. ”예 알았어요“ 언제나 아들의 대답은 간단 명료하였습니다. 훗날 어머니는 교우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글세, 아빠가 아들에게 쥐어 준 20불 짜리 지폐는 바로 제 손으로 다시 들어오곤 했답니다. “ 교우들은 한 바탕 웃곤 했습니다.

그 아들이 꿈에도 그리던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회사에 취직하게 된 것은 졸업을 앞둔 그해 5월이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직장을 따라 아들은 미련 없이 멀리 타 주로 훌쩍 떠났습니다. 그의 빈 방에는 아들이 평소에 앉아 밤을 지새우고 하던 책상 하나와 책꽂이에 몇 권의 책이 덩그러니 꽂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닳고 닳아 헤어진 작업복 바지가 그대로 걸려 있었습니다.

집을 떠난 후 참으로 오랜만에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교우들은 아들을 만난 듯이 반겼습니다. 아들을 운전석 옆에 태우고 참으로 오랜만에 태평양 바다가 펼쳐진 오레곤 서부 해안가를 찾았습니다. 십여 년 전 그 아들이 미국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방문하였 던 이곳 저곳을 다녀왔습니다. 집을 떠나기 하루 전에 아들은 말했습니다. “아버지, 자동차가 너무 낡았네요. 오늘 오후에 저랑 차를 보러 가요.” 아들은 삼만 불이 넘는 자동차를 선뜻 사주고 이튿날 훌훌히 곁을 떠났습니다.

11월 9일, 2017년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