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법을 어기고 명성교회 세습 통과 시킨 동남노회 존재 이유 있는가?

성희찬 목사(마산제일교회 담임)는 “종교개혁과 한국장로교회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11월 13일과 14일 단양관광호텔에서 개최된 2017년 미래교회포럼 첫째 날 “장로회정치원리에 비추어 본 노회 실태”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2017 단양 미포가 열린 단양관광호텔

성 목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노회 운영실태 중 변화와 개혁이 필요한 부분을 △행정업무의 집중, △시찰기능의 전무함, △목사후보생들에 대한 소홀한 관리 감독, △노회교회들 사이에 믿음 통일을 위한 노력, △부당한 교권, △ 노회결정의 올바른 시행과 유익 등 6가지로 들었다.

특히 “노회가 당회와 동일한 치리회로서 (개체)교회를 시찰해야하는 본래의 직무보다 노회원간의 교제의 장으로 혹은 투표선출에 더 관심이 많다.”고 지적하며, “개체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노회라면 존재할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성희찬 목사의 발표후 참가자들의 질의가 이어졌다.

또한 “올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소양을 갖춘 목사를 양성해야 하는데, 목사고시는 갈수로 가벼워지고 있다.”고 우려를 표하며, “교회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노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찬하는 방석진 목사

논찬을 맡은 방석진 목사(말씀전원교회 담임)는 노회의 역기능을 언급하며, 예장 통합이 2013년 제98회 총회서 절대다수 찬성으로 세습방지법을 가결했지만, 동남노회가 김하나 목사 위임청빙안을 통화시킴으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방 목사는 언권과 투표권을 가지고 부당한 교권을 형성하는 은퇴목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성 목사의 의견에 동의한다며, 무임목사에게 언권만 주는 것처럼 은퇴목사에게도 언권만 허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음은 성 목사의 발제 전문이다(지면상 각주는 생략 됨).

성희찬 목사가 '장로회정치원리에 비추어 본 노회 실태'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장로회정치원리에 비추어 본 노회 실태

성희찬 목사(마산제일교회)

 

I. 서론

1884년 선교사의 첫 내한 이후 23년이 지난 1907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발회되었다. 길선주 목사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회록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노회를 세우신 주님을 찬송하고 있다:

“신령하고 크도다 아름다운 노회여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사도와 문도를 택정하여 세우사 천국의 복음을 전하여 만민을 영혼을 구원하게 하셨으니......미국 남 장로교회와 북 장로교회와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의 주를 믿는 모든 형제자매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이 네 곳 교회의 총회로 선교사를 택정하여 이곳에 보내시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선교사들이 갑신년에 이곳으로 나와 도를 전한 지 이십 삼년 동안에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온 자가 십여만 명이라 곳곳이 장로를 장립하며 교회를 설립하여 영미 양국 선교사들과 한국 각처 장로들이 모여 교회 일을 의론하나 그러나 아직 한국 목사를 장립하지 못한 고로 노회를 이루지 못하고 그 회 이름을 장로회공의회라 칭하고......이 노회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십자가를 튼튼히 의지하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고 세상사람 앞에 영화로운 빛이 되며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한 노회를 이루어야 하겠다하시고 주 강생 1907년 9월 17일 오전에 한국 노회를 설립한 후에 신학교 졸업 학사 일곱 사람을 목사로 장립하고 대한국 예수교 장로회 노회라 하셨으니 이는 실로 대한국 독립 노회로다 할렐루야 찬송으로 성부 성자 성신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세 아멘.”

위에서 본 대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대한국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개회하면서 노회를 가리켜 ‘신령하고 크도다 아름다운 노회’라고 부르며 이러한 노회를 세우신 성부 성자 성령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바로 그 노회가 종교개혁 500년과 독노회 설립 110년을 맞은 2017년 이 시점에서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찬송과 자랑이 아니라 염려가 되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장로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당회 외에 노회와 총회 등의 치리회가 있다는 점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시작부터 성경적인 교회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였다. 동일한 신앙과 동일한 고백을 토대로 (개체)교회들은 하나이며, 그래서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또 함께 신앙과 행위의 순결을 보전하며 함께 협력하고 서로를 섬길 필요도 절감하였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도시와 나라에서는 지금의 노회에 해당하는 조직이 세워지게 되었다.

예수님은 교회들이 연합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고(요 10:16), 이를 위하여 기도하셨다(요 17:20-21). 예수님은 신자들이 한 교회에 회집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한 목자 곧 우리의 주님 아래 있는 것과 사랑과 통치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며 위하여 일하셨다. 사도들도 교회가 연합해야 할 필요와 교회가 서로 복종할 것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11장, 15장 21장에서 증명되듯이 초대교회는 한 노회의 정치 아래에 존재하였다.

노회를 통한 교회들의 연합을 중시하는 장로교회의 이러한 원리는 다른 교파의 연합 원리와 비교할 때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첫째, 로마천주교처럼 감독정치를 취하는 교회들은 개체교회들의 상호 연합이 아니라 성직자의 교계제도(hierarchy)를 통해 모든 것을 위에서부터 결정하고 조정을 하여 획일적인 연합을 이루려고 한다. 둘째, 회중정치체제를 따르는 교회들의 경우는 당회나 노회, 총회의 결정에 구속력이 있지 않고, 교인들이 최종결정을 내린다. 그래서 개체교회들의 연합에서 내린 결정은 하나의 조언에 불과하다. 셋째, 루터파 교회와 국가교회 등이 속한 지방정치체제(territorial system)에서는 개체교회의 상호연합보다 정부나 국가에 더 권위를 두고 있다. 이에 대해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특히 신약의 원리를 따라 각 개체 교회가 함께 연합하여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치리회로 모인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장고신 헌법이 규정한 노회의 직무를 보면 이러한 정신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교회정치 132조 노회의 직무):

1. 그 구역 안에 있는 당회, 개체교회, 목사, 강도사, 전도사, 목사 후보생, 소속기관 및 단체의 총찰

2. 각 당회에서 제출한 건의, 청원, 문의(질의)및 진정의 접수처리

3. 각 당회에서 제출한 소원, 상소, 위탁판결을 접수하여 처리

4. 목사후보생의 고시, 교육, 이명, 권징의 처리

5. 목사의 자격고시, 임직, 위임, 해임, 전임, 이명 및 권징의 관리와 처리

6. 개체교회 장로의 선택과 임직 및 자격고시 관장

7. 전도사의 자격 고시

8. 각 당회의 당회록 및 미조직교회의 행정록의 검사와 그 합법여부 표시

9. 진리와 권징에 대한 해석

10. 교회의 신성과 화평을 위한 개체 교회 시찰

11. 개체교회의 설립, 분립, 합병, 폐지, 당회조직 관장

12. 개체교회 및 미조직 교회의 목사청빙 관장

13. 개체교회와 미조직 교회의 전도사업의 지도관장과 교육 강화로 인한 영적 유익도모

14. 개체교회 및 미조직교회의 재정 및 관리의 방침지도

15. 총회제출의 청원, 건의, 문의, 진정, 소원, 상소 및 위탁판결의 처리

16. 총회제출의 노회상황보고

17. 총회총대선출

18. 총회지시 실행

19. 개체교회와 산하기관의 재산권 문제 처리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기원과 목적을 따라서, 그리고 헌법이 정한 대로 우리의 노회가 그렇게 운영되고 있는 것일까?

 

II. 노회운영의 실태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노회의 기원과 목적을 염두에 두고 현재 우리 노회의 운영 현실을 살펴보자.

1. 치리보다는 행정에 집중되어 있다

치리회로서 노회의 직무는 한마디로 말하면 ‘치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신앙고백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30장은 교회권징에 대해 고백하고 있는데, 곧 교회 직원들이 본래 하는 직무의 성격이 곧 ‘치리’(government)임을 밝히고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자기 교회의 임금이시오 머리로서 국가공직자와는 구별하여 교회 직원들의 손에 ‘치리’(=government)를 맡기셨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30:1).

위 고백은 우리에게 중요한 몇 가지를 교훈하고 있다:

첫째, 오직 그리스도만이 자기 교회의 임금이요 머리로서 자기의 교회를 치리하신다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교회정치’는 그리스도의 왕직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둘째, 이제 이러한 그리스도의 치리는 그가 세우신 교회 직원을 통해 자신의 교회에 계속된다는 점이다.

셋째, 나아가 이 치리의 성격은 영적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치리는 곧 말씀과 권징을 통해 천국의 열쇠를 사용하여 천국을 닫기도 하고 열어주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직원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는데, 그들은 이 열쇠로써 정죄하기도 하고 사죄할 수도 있으며,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말씀과 권징으로 천국을 닫고, 회개한 죄인에게는 필요에 따라 복음의 사역과, 권징의 해벌로 천국을 열어 줄 권한을 가진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30:2).

따라서 노회는 각 개체교회의 치리회인 당회가 총대에게 치리의 권위를 위임하여 파송한 것에 근거하여 당회와 동일한 치리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즉 장로교회는 회중교회와 달리 파송되는 총대에게 주는 천서를 발행할 때 이를 통해 신임장 이상으로 천국열쇠의 권한을 위임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같이 장로교회에서 노회는 당회와 동일한 치리회로서, 당회처럼 그 직무가 동일하게 ‘치리’이며 또 천국열쇠를 시행하는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31장(대회와 공의회)은 치리회의 결정은 ‘이것들이 말씀과 합치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결정한 권세 연고로도 하나님의 규례 곧 말씀으로 그렇게 정한 규례로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노회의 치리는 예장고신의 경우 교회정치 제132조 노회의 직무에 비교적 잘 드러나 있는데, 특별히 열거되는 첫 번 째 직무에서 그 핵심을 볼 수 있다: “그 구역 안에 있는 당회, 개체교회, 목사, 강도사, 전도사, 목사 후보생, 소속기관 및 단체의 총찰.” 즉 노회의 주된 직무는 각 당회가 위임한 권위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구역 내에 있는 교회, 당회, 목사 및 교역자, 소속기관 및 단체를 다스리며 돌아보며 살피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말씀과 권징을 통해 교회들의 연합과 화평과 거룩을 위하는 치리와 목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노회의 현실은 지금 어떠한가? 노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개교회주의로 인하여 이러한 치리의 직무, 노회 구역 내에 있는 교회와 당회, 목사 및 교역자, 소속기관 및 단체를 다스리며 돌아보며 살피는 것에 소홀히 하고 있고, 시간에 쫓겨 그냥 형식적으로 대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당회록 검사를 제대로 하는 노회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할 정도이다. 어떤 노회원들은 우리가 왜 노회로 모이는지 그 필요성에 대해 깊이 공감하지 않는다. 차라리 노회로 모이는 에너지를 전도나 선교에 쏟고 사랑하는 일에 더 힘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상당수의 젊은 목사들은 노회에 간신히 겨우 억지로 참석한다. 노회로 모이더라도 임원선출이나 총회총대선출에 더 관심이 많고, 노회가 노회원들의 교제의 장으로 혹은 명예와 힘의 각축장으로 점점 변모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까지 한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노회의 직무는 교회연합과 거룩과 화평을 위한 치리가 아니라 거쳐야 할 복잡하고 까다롭고 귀찮고 거추장한 행정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관공서의 까다로운 행정절차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개체교회가 장로를 세우기 위해 노회에 증원 청원을 하여 노회의 허락을 받고, 개체교회 당회가 주관하는 교육을 6개월 받은 후에 노회가 관장하는 고시를 치는 등 거치야 할 절차를 불필요한 행정으로 생각한다. 이 사안을 다룰 때 그리스도와 그의 치리를 의식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라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즉 우리 스스로 치리를 행정으로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노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치리를 옆으로 제쳐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치리가 아니라 행정이 된 현실은 교회헌법조항의 변화, 특히 장로의 직무 조항의 변화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예장고신의 『교회정치』제66조 장로의 직무를 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직무가 “1. 목사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목사와 협력하여 할 직무 중에 하나가 행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 이 ‘행정’은 1922년 『교회정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인데, 1929년 『교회정치』에서부터 개정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는 독소조항이다. 즉 1922년의 『교회정치』제5장 치리장로 4조 장로의 직무를 보면 무엇보다 “치리장로는 목사들과 협동하여 치리와 권징의 사를 관리하며 지 교회 혹 전국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통솔하나니라”고 하였다. 즉 목사와 함께 장로의 직무 중 주된 것은 ‘치리’와 ‘권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 쓰인 ‘치리’라는 용어가 1929년부터 개정이 되어 ‘행정’이라는 말로 바뀌어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2011년 예장고신의 『교회정치』제66조(장로의 직무) 1항도 장로의 직무를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는 일’이라고 하여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는 치리회로서 치리가 본질적인 직무라는 것을 규정하는 당회의 직무를 크게 약화시킨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는 ‘치리’의 성경적, 교회정치적 의미에 무지한 처사이며, 오늘날 당회가 행정에 집중하는, 당회의 본래 직무에서 크게 어긋난 길로 들어서는 개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정에 대해 박병진 목사가 오히려 ‘훌륭한 개정’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치리는 행정과 권징을 내포하는 단어기도 한 까닭에 행정과 권징으로 변경한 것은 조문의 뜻을 더욱 명확하게 한 훌륭한 개정으로 여겨진다.” 설사 치리 안에 행정이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치리’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행정과 권징만을 삽입한 것은 명백히 큰 오류로 보인다.

왜 한국장로교회의 장로가 목양적 역할을 하지 아니하고 행정에 치중하는지, 그 역사적이고도 구조적 원인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또 1922년의 『교회정치』에 나타난 장로의 직무 중에서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조항이 있다. 즉 당시는 장로의 직무로서 “장로는 교인과 함께 기도하며 위하여 기도하고, 교인 중에 강도로 인하여 발생하는 결과를 찾아보며...”라고 하였는데 ‘교인과 함께 기도하며’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장로는 교인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교인 중에서 교인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직무이기 때문이다. 교인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을 심방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치리가 행정으로 바꾸어진 것은 장로의 직무와 당회의 직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연장선에서 노회의 직무가 또한 어떻게 하여 치리에서 행정으로 변하게 되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시찰 기능이 약화 혹은 전무하다

노회의 직무 중에서 시찰 역시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장고신 교회정치는 ‘교회의 거룩과 화평을 위한 시찰’을 규정하고 있다(132조 1항, 10항). 그래서 노회는 관내의 일정구역 단위로 시찰회를 두어서 개체교회를 총찰 즉 시찰하도록 하였다. 시찰의 영어 단어는 ‘visitation’인데, 이는 라틴어 ‘visitare'에서 온 것으로서 방문 혹은 심방을 뜻한다. 따라서 시찰회는 교회를 방문하여 교회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노회가 구역단위로 세운 조직이다.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는(행 15:41) 등 자주 교회를 방문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힘을 썼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중세시대에 교회시찰은 주로 감독(주교)을 통하여 시벌을 과하기 위하여 시찰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국가공직자와 함께 시찰을 하기도 하는 등 본래의 목적이 변질되기도 하였다. 왜곡된 교회시찰이 성경적으로 회복된 것은 1546년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 도입하면서였다. 칼빈은 『제네바교회정치』에 교회시찰에 대한 규정을 삽입하였는데 시찰의 목적은 제네바 지역 교회들의 순수한 교리 유지와 성실한 권징을 위해서였다. 또 교회들의 화평을 추구하였다(고전 14:33, 40). 따라서 시찰활동은 교회들이 상호감독을 통하여 교회의 화평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활동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말씀에 수종을 드는 사역이며 상호 감독의 행위이며 고자세의 권리행사가 아닌 형제로서 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전통을 따라 한국장로교회는 노회마다 시찰회를 두어 소속 교회들을 시찰하고 중요사건은 협의 지도하며 노회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특별히 조선예수교장로회 1922년 헌법을 보면 『시찰위원들이 시찰위원 특별 심방 시 문답』이라는 지침 아래 각 교회 형편을 시찰하도록 하였다. 이 지침은 예장고신의 경우 1980년 헌법까지 있었으나 1992년부터 생략 된 것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1. 목사에 대한 문답

-진실한 마음으로 복음의 말씀을 힘써 전하십니까?

-공적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항상 부지런히 예비하십니까?

-교인의 집을 자주 심방하며 1년에 몇 번 씩 심방하며....

-우환 중에 있는 자를 특별히 심방하십니까?

-매일 자기 영혼과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는 시간이 합하여 몇 시간이 되십니까?

-지난 1년 간 어떤 새 서적을 읽으셨습니까? 어떤 신문과 잡지를 읽으십니까?

2. 장로에 대한 문답

-할 수 있는 대로 구역 내에 있는 교인을 심방하여 권면하며 같이 기도하십니까?

-교인을 살펴보고 당연히 치리할 사람을 당회에 보고하십니까?

-우환당한 자를 부지런히 심방하십니까?

-본 교회에 기도회에 항상 출석하며 친히 설교도 하고 기도도 하십니까?

-자기 집의 권속을 회집하고 가족 기도회를 드리십니까?

-매일 예정하고 은밀히 기도하는 시간과 성경을 연구하는 시간이 있습니까?

3. 당회에 대한 문답

-정기회로 왕왕 회집하십니까?

-교회 청년을 교육하며 그 행위를 살피십니까?

-유아들에게 어린 문답과 소요리문답과 본 교회 신조를 고수하는 방침이 있습니까?

-성례는 1년에 몇 번씩 시행합니까?

-총회 혹은 노회에서 작정한 각항 연보를 수합하였으며 각각 얼마나 되십니까?

4. 제직회에 대한 문답

-본 교회 목사의 생활비는 얼마나 드리십니까? 그 생활비가 족한 줄로 생각하십니까? 매 정한 기일에 즉시 지불하십니까?

-본 교회 교인들이 각종 연보를 합당하게 드리십니까?

-제직회는 몇 회씩 회집합니까?

그런데 종교개혁의 시찰 전통을 보면 시찰의 1차 대상이 목사라는 점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개혁가 루터는 감독(주교) 대신 군주가 시찰을 하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군주가 이 사역을 맡는 것에 대해 그가 주저한 것이 사실이지만 두 차례의 시찰 결과를 보고나서는 오히려 군주들을 독려하였다. 왜냐하면 시찰 결과가 심각할 정도로 매우 나빴기 때문이었다. 상당수의 설교자들이 복음에서 크게 벗어나 설교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당시 삭슨의 군주인 요한 프리드리히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설교자들을 정부의 도움으로 해임하는 것만큼 당신이 기독교적인 사역을 행하는 것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루터는 시찰을 위해 실제적인 제안까지 하는데, 즉 지역을 여러 구역으로 분할하며 일정한 지침을 가지고 시찰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1527년 6월 16일에 지침이 공표되기에 이른다. 시찰의 목적은 무엇보다 설교자의 가르침과 행실에 대한 것이었다. 또 개혁가 칼빈의 『제네바교회정치』(1546년) 역시 시찰의 우선 목적은 목회자의 설교(내용과 방식)와 생활, 그리고 환자심방여부 등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시찰 기능이 노회에서 얼마나 시행되고 있을까? 실제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데, 1992년 헌법개정에서『시찰위원들이 시찰위원 특별 심방 시 문답』조항이 삭제된 것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전에는 특정한 교회와 목사를 겨냥한 표적 시찰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이마저도 사라졌고, 그래서 어떤 노회는 시찰위원이 시찰에 속한 모든 담임목사들인 경우도 볼 수 있다.

개교회주의가 득세하는 이때에 교회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특히 미조직교회와 미자립교회의 형편을 살피는 시찰 없이 어떻게 교회들의 연합과 거룩과 화평을 추구할 수 있을까?

3. 목사 후보생을 포함하여 목사 고시, 임직 및 관리 감독이 소홀히 되고 있다

종교개혁 당시 각 지역 노회들이 생긴 유래를 보면 주로 목사회로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칼빈이 목회한 제네바인데, 매주 목요일에 회집한 치리회와 매주 금요일 오전에 회집한 성경연구와 토론 모임(이때는 일반 교인도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금요일 오후에 회집한 목사의 양성과 선출, 임직과 이동, 추천서 발급, 목사들의 생활 등을 다루는 모임(이때는 목사들만 참석하였다)에서 볼 수 있다. 임종구 박사는 그의 책 『칼빈과 제네바목사회』에서 목사회의 오전 성경연구모임은 칼빈의 방대한 주석의 배경이 되었고, 오후의 모임은 취리히 협약을 비롯한 교리의 일치와 발전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칼빈은 개혁을 단순히 성상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교회건설을 위해서는 목사가 바르게 선출되고 검증되어 적법하게 임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무엇보다 교리의 일치와 바른 신학을 가지는 것, 목사의 윤리 문제를 다루기 위한 장치들이 있어야 했다고 지적하였다.

최근 예장고신총회에 목사고시에서 논문 과목을 삭제할 것을 청원하는 안건이 상정되었다. 즉 교회정치 제16장 제175조는 목사고시 과목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는데 즉 ‘논문’(신학의 요긴한 문제에 대한 논문)과 ‘주해’(성경 중 한 장 혹 몇 절에 대한 주해)와 ‘기록설교’(고시 설교에 사용할 설교 1통)이다. 이 중에서 논문을 삭제해달라는 안건이 상정되었고, 총회는 숙의결과 현행대로 하기로 가결하였다. 해당 노회가 논문 과목 삭제를 청원한 배경을 보면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논문작성법에 대하여 가르치는 교과과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졸업할 때까지 논문은 선택으로서 대부분 학생들이 논문을 쓰지 않기 때문에 목사고시에도 논문을 선택으로 하든지 아니면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목사는 강단에서 설교할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요긴한 문제에 대해 강의와 토론과 논쟁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온갖 사이비와 이단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교인들에게 설교 이상으로 복음의 중요한 교리를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전달하고 가르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국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1645년)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목사의 소명을 확인하는 절차로서 목사 고시의 규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시하였다:

“(1) 시취할 자를 형제처럼 온유한 심정으로 대하되 특히 각 사람의 신중함과 겸손과 자질을 볼 것이다.

(2) 그는 성경 원어 실력에 관하여 시험을 치되, 시험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읽고 어느 부분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것으로 한다. 여기에서 결점이 드러나면 다른 학문에서는 좀더 철저히 조사를 하되 논리학과 철학을 습득했는가를 시험할 것이다.

(3) 어떤 신학 저자들을 읽었으며 가장 통달하고 있는지, 또한 신앙의 근거들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그 안에 포함된 정통 교리를 모든 불건전하고 그릇된 주장들에 대항하여, 특히 현대의 오류들에 대항하여 변호할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할 것이다. 또한 그에게 제시하는 성경 구절의 뜻과 의미를 잘 알고 있으며, 양심의 문제들에 대한 지식, 그리고 성경의 연대기와 교회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는지를 시험할 것이다.

(4) 만일 이전에 공적으로 설교하여 판단할 수 있는 자의 인정을 받은 일이 없다면 노회는 그에게 상당한 시간을 배정하여 노회 앞에서 주어진 성경 본문을 강해토록 할 것이다.

(5) 그는 그에게 주어진, 신학의 일반적 논제나 논쟁에 관한 논문을 라틴어로 배정된 기간 안에 작성할 것이며, 노회에서 그 논문을 요약한 명제를 발표하고 그에 대한 논증을 할 것이다.

(6) 그는 사람들 앞에서, 곧 노회 혹은 노회가 임명한 몇몇 말씀의 사역자가 임석한 가운데서 설교를 해야 한다.

(7) 그가 부름을 받은 자리와 관계하여 그의 은사의 정도를 고려할 것이다.

(8) 설교의 은사를 시험하는 것을 제외하고, 그는 두 날에 앞에서 이야기한 과목들의 시험을 치를 것이며, 노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더 여러 날 동안 시험을 볼 것이다.

(9) 이전에 목사로 임직되었다가 다른 임지로 옮기려 하는 사람은 그의 임직 증명서와 그의 능력과 행실에 대한 증명서를 가져올 것이며, 그 자리에서 설교함으로써 그 자리의 적임자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것이고, (만일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더 시험할 것이다.”

칼빈의『제네바교회정치』(1561년) 역시 소명 없이는 목사 직분을 가질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소명을 확인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목사 자격시험을 치르는 것과, 둘째는 목사회 즉 오늘날의 노회에 속하여 성경연구와 권징 등의 감독을 받게 하였으며, 셋째는 일정한 임직예식을 통해 임직하도록 규정하였다. 특히 목사자격시험의 경우 첫째는 교리와 관련되었는데 이는 성경에 대한 건전하고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와 이를 어떻게 적절하게 잘 교인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생활이었는데 이로써 그의 품행과 자기절제력을 살폈다고 하였다.

성경과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 오늘 우리 노회는 얼마나 목사후보생을 검증하고, 목사를 고시하여 임직하며, 또 이들의 교리와 생활을 감독하고 있을까? 목사후보생은 물론, 강도사에 대한 감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전도목사, 기관목사, 무임목사의 경우 노회마다 형편이 다를 수 있겠으나 대개 노회의 감독을 받지 않는 사각지대에 속해 있다. 이들이 노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감독은 물론이고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혹 임원 선출이나 총대 선출 시에 평상시와 다른 관심을 나타낼 정도이다. 또 목사고시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하기 위해 얼마나 공평무사하고도 신중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고시를 시행하는가? 또 목사임직은 어떠한가?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는 임직하는 날에는 온 회중이 엄숙히 금식하라고 하였다: “임직은 임직될 자가 섬길 그 교회에서 거행될 것이며, 임직의 날에는 회중이 엄숙히 금식하여 더욱 더 간절히 그리스도의 규례들과 그들의 유익을 위한 그의 종의 수고에 복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어떤 이익을 위해 유력한 자들이 서로 임직식 순서를 맡기 위해 애를 쓰려고 하고, 노회원은 온데 간데 없고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과 교인들이 대신 노회 자리를 채우고 있고, 금식이 아니라 웃음과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이 우리의 풍경이지 않는가?

4. 믿음의 통일을 위한 연합이 부족하다. 특히 교리, 예배, 정치, 권징에서.

수도 하이델베르크를 중심으로 독일 팔츠 지방에서 일어난 교회들의 개혁은 한 마디로 바름과 같음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름이라는 것은 교리에서 ‘바름’을 나타내는 것이고, 같음은 교리와 나아가 예배와 정치, 권징에서 ‘같음’ 즉 통일을 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차로 작성된 것이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이었고, 그리고 이 교리문답은 『팔츠교회정치』(1563년)에 수록되어서 예배(예식)와 정치와 권징과 함께 다루어졌다. 이같이 종교개혁 당시 교리문답과 교회정치(교회법)은 교회개혁을 위해 항상 동반되는 짝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는 스코틀랜드와 영국 교회 사이에 믿음의 통일을 위해 소집되었고 그 결과 신앙고백서와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 교회정치, 예배지침이 작성되었다. 즉 각 문서의 첫 면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스코틀랜드와 영국과 아일랜드 왕국들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 사이에 믿음의 통일을 위한 언약(the covenanted uniformity in religion)의 일환으로 가결”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의 경우 바로 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토대로 헌법(교리표준-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 관리표준-예배지침, 교회정치, 권징조례)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의 목적은 교리와 예배와 정치와 권징에서의 바름과 같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우리 노회를 통해 얼마나 이 믿음의 통일을 이루어가고 있는가? 과연 이러한 목적으로 우리 헌법을 사용하고 있는가? 믿음의 통일을 위해 가장 수고할 치리회는 노회이다. 혹시 우리의 경우 교리와 예배와 정치와 권징이 아닌 다른 것에서 통일을 기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위에서 아래로 교단과 교단의 통합을 서두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밑에서 위로 교리와 예배, 정치, 권징에서 진정한 믿음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노회에서 무엇보다 종교개혁 당시 노회의 시작처럼 목사회가 구심점을 이루어서 어떤 것보다도 이 믿음의 통일을 위한 노력을 위해 앞장 서야 한다.

5. 부당한 교권의 형성 및 갈등이 커져 가고 있다

종교개혁가들이 가장 우려한 것은 부당한 교권이었다. 여기서 교권(敎權, church power) 이라 함은 교회의 권한 혹은 교회의 권세를 가리키는데, 이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직원의 손에 주신 권세로서 마침내 회중에게 미치는 권세이다. 또 이 권세는 말씀과 권징을 통한 천국의 열쇠 사용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 특성은 영적인 것이다. 결국 교권의 목적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세만이 회중과 온 교회에 나타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가들이 작성한 신앙고백과 교회정치 등을 보면 직분 간에, 그리고 교회들 간에 동등성을 아주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기들의 교회역사에서 교권이 부당하게 행사될 때 주님의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지 못할 뿐 아니라 회중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그리스도의 권세가 교회와 치리회에서 왜곡되며 짓밟히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한 직분이 다른 직분 위에 군림하지 못하고, 동일한 직분을 가진 자들이 서로 군림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또 큰 교회가 작은 교회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돌트교회정치 83조; 프랑스신앙고백서 29-30). 심지어 이들은 노회장이나 총회장이 각 치리회의 대표가 되고 그 회보다 높게 되는 것과, 치리회의 의장이 연임되는 것, 개체교회를 노회와 총회의 지회로 생각하는 것도 경계하였다. 그 중심은 교권이 부당하게 형성되고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새 우리의 경우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이 사라지고 개체교회는 물론이고 노회에서도 부당한 교권이 형성되고 있고 심지어 이를 둘러싸고 갈등이 격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노회나 노회 소속 기관과 중요 부서의 임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암투를 벌이며, 또 노회에서 목사와 장로가 서로 협력하기 보다는 서로 자기들 권익을 대변하면서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장이 되고, 또 시찰과 시찰, 혹은 특정한 계파와 세력 간에 대결하고 반목하는 장이 되는 등 노회를 통해 정당하게 나타날 교권이 남용되고 있고 있다. 최근에는 노회마다 은퇴목사가 늘어가면서 은퇴목사회 혹은 원로목사회가 하나의 힘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 또 개교회주의처럼 자기 노회의 이익을 앞세우는 개노회이기주의가 나타나서 노회와 노회의 사이의 연합을 저해하고 총회의 결정을 따르지 아니하며 진정한 믿음의 일치와 교회의 화평을 가로막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6. 노회의 결정이 회중의 믿음과 생활을 유익을 주지 않으며 노회의 결정에 대한 바른 자세가 퇴색해져가고 있다

노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지면서 노회원이 먼저 노회의 결정을 권위 있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노회의 결정이 각 개체교회의 회중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으며 교인들은 노회가 무엇을 결정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다. 노회에 파송된 총대들도 노회의 결정을 자신들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파송한 자기 교회에 굳이 알리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노회가 각 개체교회 교인의 믿음과 생활에 유익을 끼치고 교회건설에 선한 영향을 제공하는 것이 없다면, 아니 나아가 노회가 개체교회 교인들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면 노회가 과연 존재할 이유가 우리에게 과연 있는 것일까?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31장(대회와 공의회)은 치리회가 회집하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 ‘보다 나은 치리’와 ‘교회를 더 잘 세우기 위하여’(고후 10:8; 13:10),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나은 치리와 교회를 더 잘 세우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대회 또는 공의회라고 불리는 회의가 있어야 한다. 개체교회의 감독자와 다른 직분자들은 파괴가 아니라 교회를 세우도록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들의 직무와 권세에 의해 이런 회의를 소집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마땅하다고 판단될 때마다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장로교회에서 노회는 본래 신적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그 결정은 항상 구속력이 있다. 심지어 노히의 결정이 성경에 일치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만드신 권세 때문에 존경과 복종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1:2). 치리회의 결정에 순종하는 것은 법과 형식 이상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회중교회와 다른 점이다. 장로교회는 노회의 결정을 ‘조언’(advice) 이상으로 구속력을 가진다고 믿지만 회중교회는 노회의 결정이 개체교회에 주는 조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치리회인 노회를 우리는 지금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가?

물론 노회의 결정은 믿음과 생활의 법칙인 성경과 나란히 혹은 성경 위에 둘 수 없으며, 믿음과 생활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노회나 총회를 가리켜 성(聖) 노회, 성(聖) 총회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신자는 치리회로서 노회에 대하여 맹종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역사를 통해 개인의 신앙생활에 해독을 끼치는 치리회, 의인을 벌하거나 진리를 매장하는 타락한 치리회가 항상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마 26:59; 막 10:17; 행 4:15; 6:15).

 

III.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현 노회의 운영 실태를 장로회정치원리와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살폈다. 노회마다 형편이 다르고 우리 주변에 모범적인 노회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 노회의 현 운영 실태는 그렇게 밝지만은 아닌 것 같다.

종교개혁 500년과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발회 100년을 맞아 어떻게 하면 다시 성경적인 노회와 종교개혁의 전통에 선 노회를 회복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의 개혁을 위한 작은 시작의 차원에서 개혁가 칼빈과 신 칼빈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를 통해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칼빈은 “교회개혁의 필요성”이란 논문에서 예배와 교리를 사람의 영혼에, 교회정치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였다:

“교회의 통치와 목회의 직무, 그 밖의 질서가 성례와 함께 몸에 비유된다면, 한편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규칙을 정하고 또한 인간의 양심으로 하여금 구원의 소망을 갖게 만드는 근거를 지시하는 교리는 영혼인 바, 바로 이 영혼이 몸에 호흡을 주며, 몸을 활기 있게 하고 활동하게 하며, 요컨대 몸으로 죽어 무용한 시체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어서 칼빈은 교회정치는 곧 예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당시 중세교회 부패는 우선 이신칭의의 교리가 왜곡되면서 이것이 예배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사람(자신)에 대한 바른 지식으로 나타나지 못함으로 참된 경건이 사라지고, 그 결과 교회의 영혼인 예배와 교리가 부패하게 되고 나아가 교회의 몸인 교회직원과 치리회의 부패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칼빈의 견해를 따르면 우선 개체교회의 강단에서 이신칭의의 교리가 순전히 전파되어 교인의 믿음과 생활에 회복될 뿐 아니라 이에 근거하여 특히 우리 공예배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바르게 드러나는 예배가 되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겠다. 그리고 이를 노회가 돕고 격려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좋으리라 생각이 든다.

한편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책, 『교회개혁에 대한 논문』(Tractaat van de Reformatie der Kerken)에서 교회역사에서 교회의 개악(改惡)은 주님을 향한 첫 사랑이 식어진 교회직원들에 의한 감독의 부패와, 나아가 교리와 예배의 부패로, 마침내 교인의 부패로 이어지는 과정이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카이퍼의 견해에 의하면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는 세속화가 교회개악의 출발이며, 그 다음 교회개악의 과정은 치리회에 의한 감독의 부패라고 하였다. 그리고 카이퍼는 교회개혁 역시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과 개혁이전에 부흥에서 시작한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노회 개혁을 위해 우선 개체교회의 교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마음의 부흥이 일어나는 것에 주력하면서 이를 위해 당회와 더불어 노회가 이러한 개체교회들의 영적 부흥을 독려하고 감독하며 살피는 것이 순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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