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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의 위기는 기회인가?

지난 11월 14일 단양에서 있었던 2017 미래교회포럼 둘째 날 제4포럼에서 이성구 목사(시온성교회)의 사회로 ‘장로교회의 위기는 기회인가’라는 주제로 임희국 교수(장신대 교회사)가 발제하고 홍성철 목사(코닷 연구위원)가 논찬했다.

임희국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교회사)

임희국 교수는 미국 장로교회의 상임총무 커트 패릭의 글을 인용해 전 세계 개혁교회의 위기상황을 전했다. 교회분열의 원인에 대해서는 “성경해석 불일치, 인종차별, 권력 투쟁 등”을 꼽았다. 그런데 “그런 위기는 종교개혁 정신 회복, 세상 악의 세력에 저항하는 정의 선포, 만인 제사장 직분 회복, 그리고 언제나 연합과 일치의 기회”라고 주장했다.

‘장로교단 총회장 선출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해서는 “장로교회 교단 총회의 수장인 총회장의 선출과정에서 크고 작은 불미스런 사건이 거의 해마다 일어나고 있다. 그 사건의 중심에 금권선거가 있다.”면서, “교단의 최고 지도자인 총회장은 교회 권력의 중심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총회장이라는 칭호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총회장이라고 혼돈하게 할 수 있다. 총회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인 동시에 교단 총회의 대표이며, 총회 석상에서의 의장이므로 ‘의장’이나 ‘대표’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또한 “장로교회가 총회장을 뽑는데 대의제도였다.”는 점을 주지하며 총회장 선출에 있어서 “노회총대 50%를 청년 여성 총대(25%), 신학교 교수, 전문인, 법조인 총대가 25%를 구성하고 대의정치를 구현하자.”고 강조했다. 다음은 임 교수 발제문 전문이다(지면 상 각주 생략).

 

글순서

가. 시작하면서

나. 칼뱅 개혁교회의 유산

1. 칼뱅 신학의 강조점 4가지

2. 칼뱅 개혁교회의 확산 :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 독일

다. 한국 장로교회의 형성과정과 정치원리

1. 한국 장로교회의 형성과정:

공의회시기(1893-1906), 독(립)노회 조직(1907)

2.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원리

3. 한국 장로교회의 총회 조직(1912년)

라. 장로교회 교단 총회장 선출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1. 총회장 선출을 둘러싼 우려와 근심

2. 총회장 선거제도 개선을 위한 개신교 교파(교단)들의 방안과 실천 :

기성, 나사렛, 예장합동, 예장통합, 기장

3. 장로교회의 거듭남을 위한 총회장 선출의 개선방안

 

가. 시작하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세계 개혁교회의 가족(Family)이다. 개혁교회의 역사적 기원은 151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된 츠빙글리(U. Zwingli)의 종교개혁이고, 그 다음 세대의 제네바 종교개혁자 칼뱅(J. Calvin)과 취리히 종교개혁자 불링어(Heinrich Bullinger)로부터 그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국 장로교회 (전)상임총무 커크패트릭(Clifton Kirkpatrick)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의 개혁교회를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대륙에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이 상황을 3가지 점에서 살펴보았다. 첫 째로 세계의 변화 속도는 나날이 더욱 빨라지는데 비하여 개혁교회는 500년 전통에 매여서 고리타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역동적 은사운동으로 활발한 오순절교회와 독립 초대형교회(mega church)들이 세계 곳곳에서 부흥하고 있는 현상을 볼 때, 개혁교회는 예배형태로부터 교회생활 전반까지 소통의 방식을 새롭게 고안해야할 때이다. 둘째로 개혁교회의 교인 수가 도처에서 감소하고 있다. 미국 개혁교회의 교인 수는 1960년대의 절반 정도이다. 이처럼 북미, 유럽, 호주, 그리고 아시아 등지에서 개혁교회가 쇠퇴하고 있다. 그런데 교인 수 감소보다도 더욱 더 심각한 점은 교회의 영적 활력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교인 수 감소와 교회 재정의 축소는 목회자의 일자리 감소로 연계되고 있다. 셋째로 개혁교회의 첫 세대인 칼뱅은 교회의 일치를 위해 최선을 다해 힘썼는데, 그의 유산을 이어받은 개혁교회는 곳곳에서 분열을 경험했다. 분열된 이유는 신학논쟁, 성경해석의 불일치, 인종차별, 이민사회의 갈등(미국), 권력투쟁 등등 다양하다.

커크패트릭은 그러나 위기는 곧 내일을 위한 기회라고 보았다. 이를 위한 과제는, 첫째로 개혁교회는 항상 5가지 종교개혁정신과 개혁교회의 유산을 역동적으로 회복해야 한다. 둘째로 개혁교회는 세상 속에서 악의 세력에 맞서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실천해 왔는데, 예를 들어 독일 나치즘에 맞선 바르멘신학선언(1934), 인종과 계급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벨하르(Belhar)신앙고백, 경제정의를 위한 아크라 신앙고백(2004) 등이다. 셋째로 개혁교회는 교회 내 계급을 타파하는 만인사제론과 모든 교인 어느 누구나(유대인-이방인, 종-자유인, 남자-여자(갈 3:28))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서 수평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이 전통이 계승되어야 한다. 넷째 개혁교회는 언제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면서 우리(개혁교회)가 “가장 올바른 교회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다른 교회와 교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포용한다. 다양성 속에서 일치. 개혁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갖고 있으면서 연합과 일치(에큐메니칼)를 지향한다.

커크패트릭 목사의 글을 참고하면서 한국 장로교회의 현 상황을 살펴보면.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한국의 산업화 이래로 향후 약 30년 동안 한국 개신교(장로교회)는 2천년 세계 기독교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때의 교회 성장이란 대도시 교회의 교인증가와 재정확대를 뜻한다. 교회 성장은 주로 서울 여의도를 중심으로 대중 집회와 전도대회를 통해 일어났다. 그러나 인구의 도시 집중에 따른 농어촌 인구의 감소로 말미암아 농어촌 지역의 교회는 나날이 쇠퇴하였다. 2017년 오늘, 한국 산업화 시대의 종식과 함께 한국 교회의 물량적 성장 시대도 지나갔다.

오늘의 한국 개신교(장로교회)는 현재와 미래의 교회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다. 개신교 교파들은 산업화시대에 엄청났던 교회성장이 1990년대 중반 이래로 둔화(鈍化)되는 경험을 하였고 또 최근에는 교인 수의 감소를 염려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다음 세대의 교회를 불안해하면서 교인 수의 급격한 감소현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2005년도에는 10년 전(1995) 대비 개신교 교인 14만 4천명이 감소했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장로교회(예장통합) 교단 총회는 2012년부터 3년 내리 계속해서 교인 수가 감소한다고 발표했다. 2016년 통계에 따르면 교인 수가 5만5천명이상 감소했다. 더욱 더 우려스러운 현상은 교회학교가 없어지는 교회들이 더러더러 나타났고, 특히 청년부가 없어진 교회들도 나타난다고 했다. 이처럼 교회학교의 학생 수가 적어짐에 따라 미래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지 마음이 점점 무거워 져가는 오늘이다.

그동안에 이러한 위기를 감지한 장로교 예장통합교단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성장을 위해 교회부흥 전도운동을 전개해 왔다. 예를 들어 ‘만사(1만 교회 4백만 성도)운동’, ‘100만인 전도운동’, ‘어린이·청소년 전도운동’, 그리고 ‘예장300만성도운동’(2008년) 등이었다. 이 운동들은 한 편 교회갱신을 통한 부흥을 추구했고, 또 다른 한편 교회의 공공성과 사회 공적책임의식을 되살리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심히 추락해 있는 상황에서 전도운동은 새로운 혁신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 전도운동은 산업화 시대의 물량적 교회성장을 추구했던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고 평가 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된 교회는 항상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원리가 지금의 한국 장로교회에게 또 다시 중요하다. 오늘의 교회 개혁은 생명의 하나님이 한국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롬 8:2)에 순종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갈 5:24) 할 것이고, 이에 ‘사랑, 희락, 화평’ 등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갱신의 당면 과제라고 본다. 이를 위해 성도들이 깨어 기도할 때이다.

그런데,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아직도 여전히 산업화시대의 경제성장에 기댄 물량적 교회성장을 그리워하면서, 그 성장이 멈춰버린 오늘의 현실을 교회 위기로 진단하고 있다. 이 진단은 재고(再考)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한국은 저(低)출산과 초(超)고령사회에 진입하여서 인구 감소를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교회 역시 이 현실에서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서 장로교 예장통합 교단의 주일학교가 날로 축소되고 청년세대가 사라져가는(전체교인의 2%) 현실을 –괴롭고 아프지만- 일단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저 성장 시대의 현실에서 교회는 물량적 성장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누룩처럼”(마 13:33) 사회 모든 영역으로 확산(침투)되도록 증언해야 할 때이다.

 

나. 칼뱅 개혁교회의 유산

1. 칼뱅 신학의 강조점 4가지

칼뱅 신학에서 으뜸되는 강조점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는 성경 안에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성령의 역사(=성령의 내적 증언 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를 설명하며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다. 그는 둘째로 하나님의 주(主)되심을 강조하면서, 이것은 인간이 주님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하면서 오직 그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라 강조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고백은 전적으로 자유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고백이다. 셋째로 칼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삶의 열매는 도덕성과 윤리 실천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칭의)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데 이를 위해 율법(율법의 제3사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칼뱅은 넷째로 국가교회 체제를 빈대했다. 이 점에서 그는 츠빙글리의 교회론과 크게 달랐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의회와 손을 잡고 교회와 사회를 개혁했는데, 칼뱅은 의회 권력에 기대지 않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교회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구현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성도에게 엄격한 신앙교육과 경건훈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교회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4가지 직분을 창안했다. 그것은 설교자(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교사, 장로(성도의 교육과 훈련을 위한 치리), 그리고 집사(사회봉사, 섬김)였다. 이 직분들은 결코 교회 내 계급질서를 형성하지 말아야 하고 직분 자들은 상호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역할을 맡고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칼뱅의 교회론은 장로교회 정치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2. 칼뱅 개혁교회의 확산

칼뱅이 슈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 머물던 기간에(1538-1541년) 교회론을 확립하였는데, 그가 새로 시작하려는 교회는 신앙고백 위에다 세우는 것이었다. 고대 기독교 시대에는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 위에다 교회가 세워졌던 역사를 성찰하면서, 바로 그러한 신앙고백 위에다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칼뱅의 이러한 교회론은 루터의 교회론과 매우 달랐다. 루터교회의 근간인 아우구스부르그(Augsburg) 신조(1530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설교)되고 성만찬이 집행되는 곳에 교회가 성립된다고 보았다. 칼뱅은 그러나 설교와 성만찬과 더불어 신앙고백에 대한 성도들의 분명한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1541년 –독일 레겐스부르그(Regensburg)에서 가진 신앙대화(Religionsgespräch) 이후에- 쓴 글에 따르면, 교회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 백성의 모임(에클레시아)인데, 이 모임은 보편적이고 참되며 사도적인 가르침에 따라 다 함께 한 목소리로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의 가르침을 받고 하나의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입었다. 이에 근거한 교회 일치란 다양성 속에서 조화(condordia)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화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체로서 존중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루터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가 계시며 교회의 울타리를 가시적으로 명확하게 둘러칠 수가 없다. 그런데 칼뱅의 입장은, 교회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당연히 계시지만 이 교회는 눈에 보이는 형태를 띌 수밖에 없고 이렇게 눈에 보이는 교회인 성도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한 교회치리(Kirchenzucht)를 칼뱅이 강조했다. 즉, 교회엔 그리스도의 양떼(=성도)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는 목자(목회자)가 있어야 한다.

칼뱅개혁교회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신앙고백 중심의 교회가 형성되었다.

1) 프랑스 칼뱅개혁교회인 위그노의 신앙고백인 Confessio Gallicana(1559년). 위그노는 기존 카톨릭교회와 갈등을 빚으면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위그노 전쟁으로(1562-1598년). 수 천명의 위그노가 한꺼번에 순교자의 반열에(바돌로메의 밤(1572년)). 황제 앙리(Heinrich) 4세가 낭트칙령(1598년)을 통하여 위그노에게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또 동등한 시민의 자격을 보장.

․낭트칙령 이후에 위그노는 프랑스에서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고 정신적인 영향력이 증대. 루이(Ludwig)14세의 치하에서 또 다시 박해시대가 시작. 1685년 낭트칙령 폐지, 수 많은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나서 다른 이웃 나라들로 피신. 예를 들어 독일 브란덴부르그의 선제후(Kurfürst) 빌헤름(Friedrich Wilhelm)이 포츠담 칙령(1685년)을 통하여 위그노를 받아들임. 독일의 위그노는 그 이후로 이 나라의 경제, 문화, 학문의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공헌을.

2) 네델란드 칼뱅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은 Confessio Belgica(1561년). 당시의 네델란드는 스페인의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독립전쟁(1566-1609)을 치렀다. 이 기간에 칼뱅개혁교회는 독립을 위한 투쟁정신의 모태로. 이리하여 칼뱅개혁교회는 네델란드의 국민적 신앙/국가종교로.

․이 시기의 네델란드는 ‘자유의 나라’. 신앙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는 가운데서 17세기에 네델란드는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번성

․칼뱅개혁교회 안에서 심각한 교리논쟁. 주제는 이중예정설 - 아르미니우스 논쟁. 아르미니우스(Jakob Arminius, 1560-1609)가 칼뱅개혁교회 정통주의의 엄격한 예정설에 반박, 그런데 도르트레히트 총회(Synode von Dordrecht(1618/19))는 이중예정설을 채택.

․새로 설립된 대학(Leiden, Groningen, Utrecht)에서 칼뱅개혁교회가 발전. 대표적인 신학자는 Giesbert Voetius(1588-1676), Johannes Coccejus(1603-1669)-계약신학, Hugo Grotius(1583-1645)

3) 스코틀랜드 칼뱅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은 Confessio Scotica(1560).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자 존 녹스(John Knox, 1505-1572)를 통하여 칼뱅개혁교회가 자리잡음.

4) 영국(England) 칼뱅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은 39(로이루어진신앙고백서(1563년)

․1534년에 황제 헨리(Henry) 8세를 통하여 새로운 국가교회인 성공회(anglican Church)가 설립. 엘리자베스 1세가 다스리던 시기에(1558-1603) 성공회는 신학적으로 칼뱅개혁교회를 채택, 그런데 예배와 교회법은 가톨릭의 형태로 머물러 있었음.

․퓨리탄이즘 운동이 16세기 중반이래로 칼뱅개혁교회의 사상에 영향을 입음. 성화(거룩한 삶), 특히 도시 시민들의 도덕성과 윤리적인 삶을 강조. 이러한 운동은 점차 국가교회(성공회)와 지배계층(왕권을 포함)에 대한 비판세력화

․국가가 공권력으로 퓨리탄을. 수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갔고, 먼저 네델란드(자유의 나라)로, 그리고 그 다음에 신대륙 북 아메리카로. 그 이래로 퓨리탄은 미국의 프로테스탄티즘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

․혁명기간에(1640-60), 퓨리탄이즘이 성공.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정치 지도자로.

․퓨리탄(회중파 Kongregationalisten)이 장로회파(Presbyterianer)와 대립. 양쪽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1646)을 통하여 가르침과 교리에서 일치점을 찾았는데, 그런데 교회이해에 있어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음. 회중파는 낱낱의 개인에게 완전한 자유보장을, 장로회파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함과 동시에 대의제도를 주장

․크롬웰이 사망한 이후에, 감독제도의 국가교회가 다시 득세. 스튜어트(Stuart) 왕이 영국을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드려는 시도, 실패(명예혁명, 1688년). 1689년에 “관용칙령 (Toleranzakte)이 선포되어 프로테스탄티즘에게도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 그렇지만 매우 제한적이었다.(제한적 시민권). 또한 이러한 보장정책에 가톨릭교회는 제외되었음

․혁명기간에 퀘이커 단체가 크게 부각(“Society of Friends”). 이 단체를 George Fox가 설립. 이 단체는 여성의 권리(남성과 동등한 권리), 감옥제도의 개선, 나중에 노예해방을 주장.

․퓨리탄의 신앙서적이 다른 나라에 소개(독일 등). 이를 통하여 퓨리탄이즘은 독일의 경건주의의 뿌리가 됨.

5) 독일의 칼뱅개혁교회의 신조는 “하이델베르그신조”(1563년) 이 신조에 이중예정설이 없음.

․유럽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독일에서는 칼뱅개혁교회가 미미한 존재. 그러나, 이미 1613년에 독일 브란덴부르그의 군주(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Johann Sigismund)가 칼뱅개혁교회으로. 그런데, 이 경우에 백성들은 루터교회로 남아 있고 군주만 칼뱅개혁교회으로. 따라서 지기스문트는 1555년의 평화협정을 스스로 폐기처분.

1560년에 팔츠 주의 군주(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 3세가 칼뱅개혁교회로 옮겨감. 그리고 칼뱅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인 하이델베르그신조를 제정.

 

다. 한국 장로교회의 형성과정과 정치원리

1. 한국 장로교회의 형성과정

1) 공의회(Council) 시기(1896-1906)

한국 장로교회는 1912년 총회를 조직하기까지 공의회(Council)시대(1893-1906)와 독(립)노회 시대(1907-1911)를 지나왔다.

먼저, 1884년부터 1898년까지 미국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회 등 4개 교단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조선)으로 들어와서 사역하기 시작했다. 내한 선교사들은 협의체 조직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를 구성한 선교사 알렌·언더우드·헤론이 1889년에 호주 장로교회와 연합하여 “장로교 선교연합공의회”(The United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장로회공의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1년 뒤(1890) 호주 출신 선교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s)의 사망으로 연합공의회가 폐지되었다. 1892년에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내한(來韓)하자 남·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장로교 정치를 쓰는 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라 일컫는 모임을 조직했다. 그 직전에, 1891년 호주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 5명이 내한(來韓)했다. 1893년에 3 개국(미국, 호주, 캐나다) 장로교회 4개 교단에서 각각 한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이 ‘공의회’(Council)를 조직하였다.

공의회시대는 두 단계(시기)로 나누어진다. 1893년부터 1900년까지는 “선교사 공의회”시기(제 1기)였고, 1901년부터 1906년까지는 “합동공의회”시기(제 2기)였다. 제 1기에는 외국 선교사들만이 치리회의 회원이었고, 제 2기에는 선교사와 한국 교회 “총대”들이 합동하여 치리회의 회원이었다. 제 2기의 회원은 한국인 장로 3명, 조사 6명, 외국 선교사 25명이었다. 1893년 공의회가 출발할 때만 해도 한국 교회를 대표할 만한 토착인(조선인) 지도자가 없었는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01년에는 장로와 조사 등으로 구성된 토착인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되는 공의회시대는 1893년부터 1906년까지 장로교회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의회는 치리(治理)기구로서 그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잠정적인 기구로서 “장래(將來)에 적법(適法)대로 설립”되는 “치리회”가 나타날 때까지 한시적으로 존속한다는 전제아래 시작되었다. 공의회는 개혁 교회 신앙과 장로교 정치를 사용하는 단일(單一) 교회(교단)설립을 목표로 삼았다. 공의회는 각 도(지역)에 당회권을 가진 위원회(sessional committees)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했다. 공의회의 관할 지역이 전국에 걸쳐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에 하부 조직(일종의 대리회)으로 공의회위원회(committees of the council)를 두었다. 1901년까지는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지역의 평양공의회위원회와 나머지 지역의 목사(선교사)가 속한 경성공의회위원회, 이렇게 두 개 위원회만 있었다. 그 해에(1901) 호남지역의 전라(도)공의회위원회와 영남지역의 경상(도)공의회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 이듬해(1902)에는 함경도 지역의 함경(도)공의회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공의회위원회의 감독아래 당회위원회가 있었는데, 이 위원회는 세례후보자 심사, 성례 계획, 권징 시행, 그리고 장로 선거 준비 등 나중에 개 교회의 당회가 담당하게 되는 모든 기능을 수행했다. 개 교회가 실시하는 장로 선거는 공의회위원회의 허락아래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한국 장로교회에서 장로선거는 1900년에 처음 실시되었고, 그리고 1904년까지 25명의 장로가 장립했다.

1901년에 선교사와 한국인 총대가 함께 참여하는 합동공의회의 이름을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로 정하였다. 이 공의회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 의논하는 회의체였다. 이 공의회는 장차 탄생할 노회의 근간이 되었으며, 계속해서 노회를 거쳐 총회에 이르는 장로교 치리과정의 체계를 예상하며 조직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는 1907년 (한국의) 독(립)노회가 조직되기까지 한국인 교회 지도자를 훈련시켰다. 한국인 총대는 아직 교회 일 처리에 완숙하지 못했으므로, 치리권은 영어를 사용하는 회의에서만 행사했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회의에서는 한국인 총대들 사이의 친목도모와 또 총대들이 교회운영을 배우고 실습하는 장이 되었다.

1904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의 규칙이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이 규칙은 공의회의 목적이 한국에 (서양 교회의 선교부로부터) “독립(한) 교회”를 세우는데 있다고 밝히면서, 이 독립 교회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신앙을 인정하고 장로교회(presbyterian) 정치를 사용하게 될 것이라 천명했다. 공의회의 규칙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조직 개편이었다. 기존의 공의회위원회는 노회위원회(小會, Presbyterial committees)로 개편되었고, 노회위원회는 아직 당회가 구성되지 아니한 교회를 돌보며 당회권을 행사했고, 당회가 조직된 교회에게는 그 당회로 하여금 한글로 기록한 회의록을 만들어 보관하도록 했다. 노회위원회는 장로와 집사의 선출을 허락하는 권한을 가졌고 또 직분자로 선택된 임직 예정자를 6개월 동안 교육시켜서 안수 받아 임직하도록 했다. 노회위원회는 또한 목사후보자를 시취하여 양성할 책임과 권한을 지니지만 -아직은 정식 노회가 조직되지 아니했으므로- 목사안수를 주지 못했다. 노회위원회는 그러나 한국인 조사에게 -특별한 경우- 그 지역 관할 선교사의 감독 아래 원입교인을 문답하여 교회로 받아들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조선예수교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대한제국(한국)에서 토착 장로교회를 세워나가는 절차를 밟는 일이었다. 맨 먼저 신앙의 표준을 확립하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공의회는 1904년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5천부를 간행하기로 결정했고, 1905년에는 교회헌법준비위원회가 이른바 “12신조”(1904년 인도 장로교에서 제정)를 대한제국(한국) 장로교회의 신조로 제안했다. 이 제안서가 1907년 대한제국(한국) 장로교회를 조직하는 독(립)노회에 제출되어서 1년 동안 임시로 채택되었다가 1908년에 완전 채택되었다. 하지만 교회정치의 형태에 관하여는 아직 여러 가지로 논의 중이었다. 공의회가 1905년에 이 문제를 진지하게 토의했지만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또 다시 1906년에 이 문제가 논의되었고, 웨스트민스터(영국 장로교회) 정치모범대로 제정한 정치형태가 공의회에 상정되었지만, 공의회는 1년간 더 연구하기로 결의했다. 1907년에, 한국의 독(립)노회가 창립되도록 결정된 상태에서, 마지막 회기로 모인 공의회 자리에서 웨스트민스터 정치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인쇄한 문건이 제출되었다. 공의회는 웨스트민스터 정치원리와 형태가 아직은 미숙한(연약한) 한국 장로교회에겐 상당히 무리일 것이라 판단하여 장로교의 일반 정치원리에 기초하여 단순하고도 간단하게 제정된 정치원리를 사용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장차 한국 교회가 (이대로) 잘 자라서 장로교의 교리에 익숙하게 되면 그 형편에 맞는 정치체제를 제정하는 것으로 결의했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 독(립)노회가 창립될 때에는(1907) 간단하고도 단순한 형태의 정치제도가 제출되었다.

대한제국(한국)에서 장로교회 독(립)노회가 조직되면(1907), 이제까지 공의회가 주관하던 대부분의 업무가 노회로 이관될 것이기 때문에, 공의회는 1906년에 잔무처리규칙제정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한국어를 사용하는 공의회는 노회가 설립된 다음에 폐지하기로 했고, 노회 총대는 목사와 장로만으로 참석하도록 하며, 총대에게 발언권과 투표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서, 독(립)노회 창립 직전에 모인 공의회는 이제까지 행사(行事)했던 치리권을 노회에다 넘겼다. 또한 영어로 논의하는 공의회는 계속 유지하되 이 공의회는 선교사들의 연합사업과 관련된 업무(신학교관리, 찬송가 발간, 일본인과 중국인 전도 업무, 사전 발간과 신문 발행 등)를 다루기로 했다. 영어사용 공의회는 새로운 이름을 가졌는데 “미슌”로 정했다.

 

2) 독(립)노회 조직: (1907)

1907년 9월 17일 평양에서 “”(이하, 독(립)노회)가 조직되어 대한제국(한국) 장로교회가 본궤도로 올라섰다. 독(립)노회는 내한 선교사들이 상호 협력과 연합 사업을 하면서 형성된 에큐메니컬 정신(연합과 일치)의 결실이었다. 만일 내한(來韓) 선교사들에게 협력과 연합의 정신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한국 장로교는 처음부터 몇 개의 교단으로 나뉘어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연합과 협력의 정신으로 한국 장로교회의 독(립)노회가 조직되었고, 또 이 정신이 한국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이 점이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1907년 9월 17일, 제 1회)”의 서문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셔 우리나라 인민을 도라보샤 〔미국〕남쟝로교회와 북쟝로교회와 〔영국〕〔오스드렐냐〕 장로교회와 〔가나다〕쟝로교회의 쥬를 밋는 모든 형뎨자매들의 마음을 감동식혀 이 네곳교회 총회로 션교사를 택명하야 이곳에 보내시매... 이 네곳총회에서 특별히 대한국 장로회 로회를 세우기로 허락난고로 장로회 회쟝 마포삼열 목사께셔 네곳 총회의 권을 엇어 한국교회에 로회되난 취지를 설명하시되... 쥬 강생 일천구백칠년 구월 십칠일 오정에 한국로회를 설립한후 대한에 신학교 졸업학사 닐곱사람을 목서로 쟝립하고 대한국 예수교장로회 로회라 하셧스니 이는 실노 대한국 독닙로회로다.

독(립)노회의 서문은 한국 장로교회의 출발선언문이라 말할 수 있다. 장로교회의 기초 조직은 ‘노회’(presbytery)인데, 위의 서문은 한국 장로교회가 한편 외국 선교부들의 연합과 협력의 결실이고 또 다른 한편 외국 선교부로부터 독립하는 “독(립)노회(獨老會)”로 시작한 것을 선포했다. 1893년 선교사들이 공의회를 조직하여 여기까지 오는데 13년 세월이 걸렸다.

독(립)노회 산하 7개 대리회가 전국에 조직되었는데, 경충-, 평북-, 평남-, 경상-, 황해-, 전라-, 함경대리회였다. 5년 뒤, 총회창립에 따라 독(립)노회 산하의 대리회가 노회로 성립되었다. 즉, 전국 7개 노회로 총회가 결성되었다. 전국의 지역분계에 따라 경기, 충청남북, 강원을 합쳐서 “경충노회”, 함경남북은 “함경노회”, 경상남북은 “경상노회”, 전라남북은 “전라노회”, 황해도는 교세가 강하므로 “황해노회”, 그리고 평안남도와 평안북도 역시 교세가 강했으므로 각각 노회를 조직하였다.

 

2.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원리

“”(=독노회)는 종전까지의 노회위원회를 –앞에서 언급한- 대리위원회(Sub-presbyteries)로 바꾸었다. 그렇지만 그 이름만 바뀌었지 하는 일은 여전히 동일했다. 노회는 전국의 각 대리위원회에 장로 피택과 목사후보자의 시취 그리고 목사 위임(installation)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대리위원회로 하여금 오늘날 노회의 기능과 역할을 하도록 했다.

제 1회 독노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가 제안한 신경과 정치를 채택했는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12신조를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으로 보고받으며 이것을 1년 동안 임시로 채택하고 계속 검토하기로 결정했다. 제 2회 독노회(1908)는 12신조와 소요리문답을 완전 채택했다. 정치규칙도 동일한 절차를 거쳐 채택되었다. 정치규칙은 이미 제1회 노회록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이라는 제목으로 첨부되었다. 이 규칙은 독노회가 창립되기 직전에 제안되었고, 또 이 규칙은 1922년에 제정된 헌법으로 대체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1907년 이래로 5년 동안의 독노회시기가 있었고, 1912년에는 한국 장로교회의 총회가 창립되었다. 이로써 독노회 시대는 마감 되었다. 장로교회의 치리는 당회, 노회, 총회로 이어지는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에 앞서 제5회 독노회(1911년)는 이제까지 치리권을 행사한 도당회(都堂會)에게 그 권한을 폐지하기로 결의했다. 총회의 창립과 더불어, 총회는 대리위원회의 조직을 폐지하고 또 영수회와 제직회에게 치리권을 허락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와 함께 평신도 교역자 노릇을 해 온 조사와 개 교회 지도자인 영수제도의 존속여부를 놓고 논의했다. 총회는 독노회의 신경·소요리문답·정치규칙을 그대로 이어받아 존속케 하는 한 편, 곧 바로 총회의 헌법을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표준삼아 개정하고자 했다. 즉, 1907년에 채택된 교회헌법을 그대로 유지하려 하지 않고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따른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자 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1922년의 총회는 웨스트민스트 정치원리를 채택하여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는데, 이 정치원리는 미국 장로교회가 해석한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었다.

이 정치원리는 네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대의주의, 집단 지도주의, 입헌주의, 관계주의였다.

① 대의주의는 투표로 선출된 직원에 의해 교회가 운영된다는 뜻이다(제1장 제6항). 교인이 항존직 직원을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는 점은 변경될 수 없는 장로교 정치 원리이다. 위임목사를 선출할 때 공동의회가 선거하는 것(제15장 제1-4항), 또 장로와 안수집사가 세례교인의 선거로 선출되는 것이(제13장 제1항) 이 원리에 근거한다. 또한 하급회의가 상급회의로 파송하는 총대를 선거로 선출하는 것도 대의주의 원리를 표현한다.

② 집단 지도주의는 교회가 목사나 장로 혹은 어느 개인의 결정이 아니라 치리회의 집단지도체제를 통해 운영되는 원리이다. 이는 집단적인 결정이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한 개인이나 소수가 결정하는 것보다 위험이 적다는 생각이 반영되었다. 집단 지도체제는 장로 동등의 원리(parity), 다시 말하면 목사와 치리장로의 동등의 원리로 연결될 수 있다. 이것은 노회가 임직한 목사와 개 교회 교인 대표인 치리장로가 함께 치리회를 조직하도록 한 규정과 관련된다. 치리회는 목사와 장로가 모두 있어야 조직이 구성되고 또 목사와 장로가 모두 출석해야 성수가 된다.

③ 입헌주의는 장로교회가 헌법에 따라 다스려진다는 원리이다. 1922년 한국 장로교회가 제정한 헌법은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따라 신앙고백서(신경, 소요리문답 등)와 규례서(예배모범, 권징조례, 정치 등)가 모두 갖춰진 최초의 교회헌법이었다. 신앙고백서는 교인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믿으며,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를 선포한다. 성경 안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가장 권위적인 표준이 되지만, 신앙고백서는 간결한 형태로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장로교회는 신경과 요리문답을 포함한 신앙고백서를 가지는 것이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 신앙고백서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기준을 제공한도고 본다. 신앙고백서가 교회의 믿음을 가르친다면, 규례서는 교회 정치와 예배와 권징의 원리와 내용을 제시한다. 1922년 헌법의 규례서는 교회정치, 예배모범, 권징조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이렇게 헌법에 규정된 대로 정치와 예배와 권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장로교회의 확신이다.

입헌주의는 대의주의와 직접 연결되는데, 회중에 의해 선출되어 권한을 위임받은 교회 직원은 헌법에서 규정된 범위 안에서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장로교의 규례서는 목사, 장로, 집사의 권한과 직무,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치리회의 권한과 직무를 상세하게 규정했다.

④ 관계주의는 교회가 하나라는 성경적 원리에 기초해 있다. 장로교회는 온 세상 모든 기독교인이 한 분 주님,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으며(엡 4:5-6) 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고전 12장)고 믿는다. 따라서 홀로 고립된 장로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다. 온 세계의 장로교회는 마치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관계주의는 당회, 노회, 총회로 이루어지는 치리회 조직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치리회는 유아독존적인 회가 아니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치리회의 권한과 직무는 헌법에 규정돼있다. 치리회는 또한 법(규칙)에 근거하여 대표를 세워서 모든 일을 처리한다. 당회가 지교회를 다스리고, 노회는 그 지역의 교회와 교역자를 다스리며, 총회는 교단 소속 모든 지역 노회/교회의 공통 관심사에 대한 관할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관계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치리회는 총대를 선출하여 상급회의에 참여하는데, 당회는 노회에 참여할 치리장로를 선출하고, 노회는 총회에 참여할 총대를 선출한다. 또한 상급 치리회는 하급 치리회를 감독할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있다.

 

3. 한국 장로교회의 총회 조직(1912년)

1912년에 한국 장로교회는 총회를 조직하여 창립했다. 이로써 토착교회의 성립이 가시적으로 완료되었다. 총회의 창립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910년 8월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일본제국이 대한제국(한국)을 식민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미 1905년 을사늑약이래로 실질적 통치권을 잃어버린 대한제국이 한일 강제병합이후 일본제국으로 편입되었고, 그때부터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때, 1912년에 한국 장로교가 스스로 헌법을 제정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총회체제를 창립한 것이다. 장로교회의 총회는 국권을 상실당하여 식민 지배를 받는 국가에서 어느 정도 자치권과 자율성을 가진 교회 조직체였다. 이 교회는 식민지 상황에서 칼뱅 개혁교회의 유산을 이어갔다. 그래서 교회는 이 시기에 1919년 3.1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했고, 질병퇴치운동, 농촌경제살리기 운동(1929-1937), 다양한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디아코니아(교회의 사회봉사)를 실천했다.

 

라. 장로교회 교단 총회장 선출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1. 총회장 선출을 둘러싼 우려와 근심

장로교회 교단 총회의 수장인 총회장의 선출과정에서 크고 작은 불미스런 사건이 거의 해마다 일어나고 있는데, 그 사건의 중심에 금권선거가 있다. 교단의 최고 지도자인 총회장은 교회 권력의 중심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본다.

총회장을 뽑는 선거에서 금품이 오가는 일이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치료 불가능한 만성 고질병처럼 여겨지고 또 일반 교인들에겐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그 실망감에 비례하여서, 교인들의 목회자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도 떨어지고 있다. 적지 않은 교인들이 직장과 사회에서 자신이 “교인이라고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는 현실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교회에 대한 자긍심을 상실한 교인들이 머지않은 장래에 ‘가나안 교인’이 될까봐 우려된다.

 

2. 총회장 선거제도 개선을 위한 개신교 교파(교단)들의 방안과 실천

이러한 상황을 걱정하던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가 총회장 선출에서 금권선거를 방지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 개선방안을 발표했고 또 일부 교단에서는 이미 이를 실천하고 있다.

1) 기성(기독교성결교)

*선거 총대자격: 목사 장로 10년차 이상인 자(대의원)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진다.

*선거 후보자격: ▴교단의 지방회 회장을 역임(46개 지방회),

▴지 교회의 부동산을 유지재단에 귀속,

▴선거 공탁금을 해당(시무) 교회가 지급

(공탁금은 선거당락 여부와 상관없이 반환하지 않음)

**선거공영제(2005년도 이후) : 교단 총회가 선거관리위원회(7명) 선임, 임기 3년

▴선거관리위원회의 임무: 선거홍보, 입후보자 등록 및 취소, 선거운동 관리,

부정선거 여부 신고접수,

▴선거운동: 선거관리위원회가 주관

각 후보의 추천자 10명을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운동자로 승인,

후보가 대의원을 직접 만날 수 없다.

45일 동안 선거운동

(예배인도, 부흥회, 단합대회, 향우회, 음식제공 등 불허)

▴선거홍보물은 단 1회에 한하여 제작

유인물 신문잡지를 통한 선거운동 불허,

▴선거비용은 후보자 본인 부담(=돈 않쓰는 선거)

2) 나사렛교단

*총회 대의원(800명)은 현직 목사와 담임 전도사(은퇴교역자(65세 직전은퇴자)도 포함),

평신도 100명 당 1명

*전국 6개 지역의 실행위원(각 2명)이 선거관리, 감독(총회장)후보 추천,

*감독후보자 자격은 교회 담임, 교회의 부동산(토지, 건물 등)이 유지재단에 귀속,

7년 이상 교단법규와 사회법으로 징계받은 일이 없어야, 신용불량자 아니어야

*선거공탁금 없음

*감독(총회장) 선거는 대의원이 무기명 투표, 2/3득표자로 선출

선출된 감독을 나사렛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감독이 한국으로 와서 인준

*감독 선거제도의 장점 : 누구나 감독후보에 -> 금권선거, 과열선거 없다.

감독과 임원의 팀웤이 좋다

개 교회가 총회에 내는 상납금이 의무

*감독제도의 단점: 총회의 권한(권력)이 감독에게 집중(인사권, 총회재산관리,나사렛학교 인사)

실행위원회가 감독을 견제함으로써, 감독과 실행위원회의 갈등 소지

감독 후보자의 리더십 검증이 불가능

*대안 모색 : 선거의 효율성 재고 - 현재 대의원 수(800명)를 줄여야

감독 후보 리더십을 검증할 수 있어야

감독 선거를 3차 투표까지만 해야

3) 예장합동 교단 – 전국 1만 1천 교회

*총회장 후보 자격: 총회 총대 10회 이상, 공탁금(8천만원, 매년 5% 상승, 발전기금 성격)

*전국 3개 지역 : 서울+서부, 중부, 영남

**총회장 제비뽑기 : 금권선거 방지

*현행 총회장 선거제도의 단점: 선거 공탁금이 후보자에게 부담, 재미없는 총회

*문제점: 총회장이 제비뽑기로 선출되지만 여전히 총회장 1인에게 집중된 권한(권력)이 문제: 총회장은 모든 대외 연합기관들의 대표직과 직결(예, 연합기관, 방송국, 대학 등)

*제비뽑기 단점 보완책 : 제비뽑기를 통해 선거인단을 구성(총대의 30%),

선거인단이 총회장 투표(금권선거 예방)

 

4) 예장통합 교단

*성경적 선거방식인 “맛디아식” 총회장 선출을 제안했다. 이 방안은 총회장에 입후보자들에 대해 일차적으로 총대들이 투표를 해서 상위 2인을 최종 후보자로 정한 다음에, 온 총회가 하나님께 기도한 후, 제비뽑기로 총회장을 선출하자는 안.

이 방법은 기성, 기장, 예장합동 교단의 총회장 선출과 차이가 있다. 총회장에 입후보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하는 경우에, 역량이 미달된 후보가 총회장으로 뽑힐 가능성이 있다. 또는 역량은 갖추어 있지만 총회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어갈 가능성이 있는 후보가 총회장으로 뽑힐 수도 있다. 그러나 맛디아식 선출 방법은 모든 입후보자를 후보군에 올려놓고 1차 투표를 하면서 자격 미달이나 엉뚱한 방향으로 총회를 생각하는 입후보자를 이 투표에서 낙선을 시키고 자격을 갖춘 최후의 후보자 2 명만 남겨두고 제비뽑기를 하는 방법.

*맛디아식 제비뽑기는 최종 결정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신앙적인 결단과 총회장 선거의 과열양상을 막자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제안되었다. (후보자가 거의 모든 총대를 부적절한 금권동원으로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해도, 떨어질 확률이 50%나 되므로 금권선거 운동을 포기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맛디아식 제비뽑기의 한계: 총회장 후보자들이 최종 2인의 후보에 들기 위해 여전히 과열된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다. 50%의 확률이면 적은 확률이 아니기에 일단 50%안에 들고 보자는 심정으로 선거 운동에 뛰어들 후보자가 나올 수 있다.

*대안과 새로운 제안: 최종 후보를 3인으로 선출하는 방식. 이럴 경우에 당선 확률이 33%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열 선거운동을 상당히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역맛디아식 제비뽑기”(김명용 교수의 제안)- 먼저 모든 후보자를 대상으로 기도한 후 제비뽑기로 2인을 선출한 후, 이 2인을 총회장 후보로 놓고 투표하는 방식. 선거 운동을 지나치게 과하게 벌이고 또 엄청난 금품을 살포해도 제비뽑기에서 뽑히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과열된 선거 운동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 그런데, 제비뽑기로 선출되는 2인이 역량이 미달된 후보라면 어떡하는지? 또 총회의 방향(신학)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후보라면?

*맛디아식 제비뽑기은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대의 민주주의식’ 장로교회 정치원리에 역행되는 치명적 한계가 있다.

 

5) 기장(기독교장로회) 교단

**선거공영제 실시(2015년부터) : 선거공탁금 1천만원

총회장 선거를 총회가 주관하여 서울경기, 중부, 영남 등지에서 후보 공청회

(공청회는 후보자들이 교단의 발전방향, 교단 정책 등을 토론, 청중 질의)

개별 선거운동이 금지(문자나 메일은 5회 이내로)

*장점: 선거운동 간소화, 선거비용 절감, 금권선거 근절

선거운동을 공적인 자리에서 공개토론으로(후보자 인물 변별력이 용이함)

*아쉬운 점: 공청회 토론문화가 아직 미성숙, 뒷거래 가능, 단 1회의 공청회로 후보자 변별이 미미

*개선 가능성: 공청회제도가 선거 문화로 정착되면 공청회가 축제의 장으로 정착될 것

 

3. 장로교회의 거듭남을 위한 총회장 선출의 개선방안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를 정리해보면, 교회(당회, 노회, 총회)운영의 원리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들의 유기체적 연결과 상호 협력에 있다(고전 12: 12-27).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들이 질서 있는 조화를 모색하는 가운데 헌법에 따라 운영된다. 장로교회는 교인들이 대표를 선출하는 ‘대의제도’(代議制度)를 채택했다. 대의제도의 진정한 의미는 ‘모두 다 같이 그리스도의 뜻을 찾아’ 지혜를 모으고 합의점을 찾아서 함께 하나님의 청지기 노릇을 하는데 있다. 노회는 장로교회의 기본이 되는 행정기관으로서 그 권위가 양(兩) 방향으로 작용하는데, 노회산하 개 교회와 상회인 총회의 행정기관으로 향한다. 개 교회의 당회는 그 교회가 처해 있는 곳(장소, 공간)에서 사역을 수행하도록 노회에게 위임받아 수행한다. 그러므로 개 교회의 지도와 감독을 노회에게 위임을 받은 당회가 맡는다. 총회는 장로교회의 최고 치리기관이다. 총회는 일 년에 한 번씩 정기 회의를 갖고, 노회에서 선출된 총대(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이러한 장로교회의 정치원리에 따라 교단 총회장 선출이 개혁되는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1) 총회장을 뽑는 총대 선출의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총회장은 현재 총대(대의원)의 투표를 통해 선출된다. 또한 총회의 총대는 노회에서 선출되는데, 이것부터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즉, 노회가 선출하는 총회총대를 3년 조로 정하되 해마다 전체 총대의 1/3이 물갈이되도록 개편하면 바람직하다고 본다. 노회에서 선출된 총대가 3년 동안 총회에 참석하면, 최소한 그 다음 3년 동안에는 총대로 선출되지 말도록 규정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총대의 세대교체도 이루어질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노회에서 선출되는 총회총대가 전체 총회 총대의 절반(50%) 정도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청년과 여성 대표의 총대가 전체 총회 총대의 사분지 일(25%), 또 전문인(신학교 교수, 평신도 법조인, 경제인, 문화예술인 등) 총대가 전체 총회총대의 사분지 일(25%)로 구성되면 바람직할 것이라 본다. 청년 총대는 교회의 다음 세대를 위하여, 또 전문인 총대는 사회 각 방면 전문화 시대에 상응하는 총회를 위하여, 그리하여서 1년에 1회 모이는 교단 총회가 교단이 나아갈 방향을 잡고 정책을 세우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총회는 교회 박람회와 축제를 겸해서 개최하면 바람직 할 것이다.

2) 현재 장로교회의 각 교단마다 총회장 선거제도 개혁에 힘을 쏟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선거공영제’(기성, 기장) 도입과 총회장 선출의 ‘제비뽑기’(예장합동, 예장통합 추진중) 방식이다. 이것의 핵심은 금권선거를 방지하자는데 있다. 그러나 선거제도가 개혁되더라도 여전히 총회장의 손에 막강한 권력이 쥐어져 있다면, 총회장이 교단 권력의 정점에 있다면, 총회장 임기가 끝나고 이어서 그 다음엔 연합기관들의 수장이 되고 이사가 되어서 교권을 유지 확대한다면, 총회장 선거제도 개선과 개편이 얼마나 실효성을 거둘 수 있겠는지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제도의 개편보다는 사람의 갱신(거듭남)이 우선이라고 본다. 즉, 교단의 모든 총대가 총회 석상에서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한다. 이것은 칼뱅의 유산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다. 또 이것은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노회에서 선출된 총대와 교단의 총회장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종과 일꾼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종과 일꾼에 불과한 총회장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교황처럼- 높은 지위에 오르고 권력을 차지하려 한다면, 그 총회장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져야 할 것이다. 교회를 담임하는 교역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종과 일꾼에 불과한 담임목사가 담임목사직을 아들・딸・사위에게 세습하려는 시도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것이고, 교회를 사유화하는 것이며, 그리고 교회의 사도성과 공교회성을 헤치는 행위이다.

3)교단 총회장의 명칭을 장로교회 정치원리에 맞도록 변경하기를 제안하고자 한다. 총회장의 칭호를 ‘의장’이나 ‘대표’로 바꾸는 것이다. 총회장이란 칭호는 장로교 총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총회장이라고 혼돈하게 할 수 있다. 총회장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인 동시에 교단 총회의 대표이며 총회 석상에서는 의장이다. 총회의 대표와 의장인 총회장에게 주어진 권위와 권세는 그 직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막강해야 한다. 그래서 장로교회 총회장에게 주어진 역할과 기능에 따라 그 호칭을 의장이나 대표로 바꾸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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