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머리'라는 표현이 있다. 대통령 당선자가 공석에서 쓰기 시작하면서 요즘 뉴스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단어로 '일의 중요한 내용과 절차'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 정치가와 기업가는 물론 같은 그룹 내에서도 자신의 처지에 따라 일머리에 대한 태도는 첨예하게 달라진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대운하 건설이나 영어공교육 등에서 대립각이 심화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충돌을 이상하게 볼 필요는 없다. 미래 사회로 갈수록 모든 영역이 전문화되고 세분화되는데,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은 1960년대에 1000여종이던 직업이 2000년대는 3∼4만 종류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그만큼 이해관계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모든 이의 입맛에 맞는 정책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그렇더라도 평생을 파편화된 자신의 지식에만 갇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사회적인 불행이다.

자신의 생각에 갇힌 자들은 자신이 경험적으로 보고 들은 것이 전부인 줄 안다. 이런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도마형 인간이라 말할 수 있다. 도마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서 창에 찔린 흔적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었다. 현대 사회는 아무리 설명해도 절대로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도마형 인간으로 넘치고 있다.

그러면 자신의 눈과 귀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적 사고가 서로 간에 깊이 파인 첨예한 대립각을 해결하는 열쇠라고 해도 실제적이지 않다면 기만적인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태어난 지 20개월 만에 뇌막염으로 시력과 청력을 잃고 말도 하지 못하는 삼중장애자인 헬렌 켈러에게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녀는 어떻게 보지도 듣지도 못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보고 듣는 세계와 이것이 차단된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은 튼실한 상상력과 부단한 훈련이었다. 헬렌은 피아노 위에 손을 얹고 진동을 느끼면서 들었고, 마루판의 진동을 발로 감지하고 공기의 움직임을 느낌으로 무용수들의 춤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통합적 사고에 이르는 길은 헬렌처럼 육신의 눈과 귀를 넘어서서 손과 발로도 듣고 보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자신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파편적인 지식과 경험의 옷들을 벗어 버리고 상대방을 이해할 때까지 눈으로 그려보고 몸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훈련을 통한 통합적 사고의 기준점은 첫째 '국가와 사회에 진정으로 유익한가?'이고, 둘째 '그 유익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직은 좋은 덕목이지만 감사가 없는 정직은 시비주의자로 전락할 수 있다. 은혜와 진리의 조화, 사랑과 공의의 조화가 같은 맥락이다. 사랑의교회는 정직과 감사를 두 축으로 하는 정감운동을 우리 사회의 상처를 아우르고 분열을 통합하며 나라를 선진화하는 통합적 사고의 틀로 삼고 있다.

미시간 주립대학의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은 '생각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현대 화가들의 놀라운 작품들은 수동적인 보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관찰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헬렌처럼 손으로도 듣고 발로도 볼 수 있을 때까지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자. 이럴 때 이 민족은 상대방의 약점 때문에 나의 강점이 파괴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상대방의 강점 때문에 나의 약점이 보완되는 선순환의 쾌거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멀리 있던 친지가 함께 모이는 설에 각 가정마다 마음으로 이어지는 깊은 소통의 축복을 경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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