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연구원 현안진단 제 178 호 2017년 12월 15일 (금)

※본지에 기고되는 논문이나 나의주장, 칼럼은 순수한 기고자의 주장임으로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고문이 코닷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전체적인 내용이 소극적(부정적)이든 적극적(긍정적)이든 독자에게 주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판단될 때 게재합니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지난 12월 13일 북한이 먼저 핵 포기를 약속해야 한다는 기존의 입장을 바꿔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미국의 『포린폴리시』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이래 평양에 내놓은 가장 명확한 외교적 접근법”이라고 평가했고, CNN은 ‘평양에 대한 공개초청장’이라는 논평을 내놓았다.

그동안 『현안진단』은 제177호를 비롯해 비연계 병행의 접근법에 따라 조건 없는 대화에서 시작할 것을 여러 번 촉구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일관되게 ‘북한의 핵 포기 의사’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고 한국과 일본이 이러한 입장에 동참했다. 문재인 정부도 미국과의 공조를 내세워 이러한 전제조건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번 틸러슨 장관의 조건 없는 대북 대화 제안은 그 자체로 환영할 일이지만, 과연 미 행정부 내에서 조율된 의견인지는 단정 짓기 어려우며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벌써부터 “지금은 때가 아니다”는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고 틸러슨 국무장관이 경질설에 맞서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는 분석도 있어, 과연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일지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하지만, 미 국무장관의 입장이 미국 외교당국의 공식입장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국무부 내에서는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미 행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으로 연결 짓지 않더라도 적어도 이 시점에서 미국이 최대한의 유연성을 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조건 없는 대화의 재개는 그동안 문재인 정부가 밝혀온 대북정책 기조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미국 발 국면전환의 신호를 과연 북한이 수신(受信)할 것인지에 있다. 지난 9월 조셉 윤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북한이 60일 동안 추가 도발을 하지 않으면 이것을 대화 조건의 이행으로 간주한다’는 이른바 ‘60일 법칙(the 60-day Rule)’을 제시하였고, 10월에는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라바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이를 재확인한 바 있다. 북한이 60일 넘게 추가적인 핵·미사일 시험을 자제한 것도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북한의 ICBM 추가발사와 대북 군사행동론의 한계

단군신화에 따르면, 호랑이는 굴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100일만 견디면 인간이 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이를 다 채우지 못하고 굴을 뛰쳐나왔다. 그런데 북한은 미국이 약속한 60일을 넘기면서 추가적인 탄도미사일 발사를 자제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20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자, 11월 29일 또다시 ICBM급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여 굴을 뛰쳐 나왔다.

이번의 미사일은 정상각도로 발사했으면 미국 수도 워싱턴까지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추정되었다. 북한이 ‘60일 법칙’을 지켰음에도 미국이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강행한 데 대한 반발인지, 아니면 당초 계획대로 발사한 것인지 의견이 갈린다. 그보다는 꾸준히 준비해 오다가 테러지원국에 재지정 되자 이를 핑계로 시험발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ICBM 시험발사에 따라 미국사회가 또다시 들끓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3개월 내 북핵 해결설’, ‘대북 선제타격론’이 횡행하면서 또다시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과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 내의 군사행동론은 커다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현실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군사행동에 나서기에는 북한이 레드라인을 한참 넘어 레드존의 한복판에 와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틸러슨 미 국무장관의 조건 없는 대화 제의도 실효성 없는 대북 군사행동론의 허점을 파고든 것으로 보인다. 어찌 보면 기술적인 완성이 채 검증되지 않은 화성-15형의 시험발사를 놓고 ‘국가핵무력의 완성’을 서둘러 선언한 데 대한 북한정권의 다급함을 간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미국이 열어놓은 기회의 창을 최대한 활용해 남북관계 복원과 북핵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만들어내느냐 여부이다.

‘미국의 판단’이나 ‘북한의 선의’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번에 잠시 열린 ‘기회의 창’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최근의 상황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북한은 9월 15일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을 시험발사한 뒤 추가적인 도발이 없이 60일을 넘겼지만, 미국은 아무런 보상을 제공하지 않았고, 한국 정부도 미국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북한이 미사일의 추가 발사를 멈춘 지 63일째인 11월 17일, 6자회담 수석대표인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조셉 윤 미국 한반도특별대표는 제주도에서 만나 ‘60일 법칙’의 수정을 시도했다. 한미 양국은 ‘북한이 실제로 핵·미사일 시험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선언을 통해 이를 공개적으로 약속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미국은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제재와 압박 조치를 내놓았다. 11월 20일(현지시간)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의회에서 올라온 테러지원국 재지정 법안에 서명했다. 또한 미 공군의 최신예 스텔스전투기 24대를 비롯해 한미공군의 항공기 230대가 동원된 대규모 연합공중훈련인 ‘비질런트 에이스(Vigilant ACE)’가 12월 4~8일 실시된다고 예고됐다.

미국이 ‘60일 법칙’의 수정을 시도하고 고강도 제재·압박 조치를 추가로 내놓은 데는 북한의 책임이 결코 작지 않다. 북한은 10월 7일에 열린 당중앙위 제7기 2차 전원회의에서 국가 핵무력 건설 완수, 자력자강을 강조하면서 대화국면으로의 전환 가능성을 부인했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국장도 10월 20일 모스크바비확산회의에서 “핵무기를 대상으로 한 협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며 대화 가능성을 차단했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미국 내 협상파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미국은 북한이 추가도발의 일시중지가 제재와 압박의 성과라고 과신한 듯 스스로 설정한 ‘60일 법칙’을 어기면서까지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북한 역시 추가 도발을 일시중지하면서도 ‘60일’이 채 지나기 전에 핵·미사일 개발과 실전배치를 계속하겠다는 강경입장을 표명함으로써 미국의 불신을 자초했다.

현재의 한반도 위기상황을 미국의 판단이나 북한의 선의(善意)에만 맡겨놓아서는 평화의 다리로 넘어갈 수 없다. ‘60일’ 동안의 국면관리가 실패한 데는 미국과 북한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그렇다고 우리 정부의 책임도 결코 적지 않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조건 없는 대화를 얘기했지만, 지금까지 우리 정부가 보여준 태도를 보면, 정작 어떻게 대화와 협상의 동력을 살려나갈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 사람들은 한국전쟁 이후 적대세력에 포위되어 있다는 피포위의식(被包圍意識, siege mentality)에 사로 잡혀 있다고 한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한국이 러시아, 중국 등 옛 사회주의국가들과 수교하자 북한 특유의 피포위의식은 더욱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피포위의식이 오늘날과 같은 핵·미사일 개발과 보유로까지 나아가게 됐다는 분석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북한뿐만이 아니다. 우리 한국의 많은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혹시 미국이 우리를 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를 피방기의식(被放棄意識, sense of abandonment)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미국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를 먼저 살피고 미국에 매달리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미국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한국의 정치인이나 언론이 먼저 나서 미국의 이익과 입장을 옹호한다. 미국은 한국이 추진하려는 어떤 외교정책이나 대북정책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면 당연히 우려를 표명한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언론들은 우리의 국익을 고려하기보다 미국의 국익에 따른 우려를 대서특필한다.

결국 국가전략에 입각한 우리 정부의 정책은 그것이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따져지기도 전에 미국의 전략과 상충되는 것 아니냐가 먼저 따져지고, 필경 한국이 무슨 힘이 있어 한반도문제를 주도할 수 있겠는가라는 냉소를 받으며 비판의 무대에 세워지는 것이 구조화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방기의식’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

그 동안 우리나라의 일부 정당과 언론은 국내 전문가들이 조건 없는 대화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눈치를 살피면서 북한과 대화에 나서기보다 미국, 일본과의 대북 압박공조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문재인 정부의 일부 관료들조차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다가 틸러슨 국무장관이 조건 없는 대화를 말하니까 적지 않게 당황하는 눈치다.

이제 우리 정부는 상대적으로 여론의 부담을 덜 안은 채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해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됐다. 또다시 미국의 눈치를 보다가 남북관계 복원의 기회를 실기해서는 안 되며, 적극적인 자세로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면 미국 행정부와 의회를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만약 남북대화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 정부는 비정치적인 교류·협력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정치·군사적인 현안을 주제로 내걸고 정면 승부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한반도 상황은 교류·협력에서 시작해 점차로 정치·군사문제로 넘어가는 기능주의적인 접근에 머물기에는 너무 심각하고 긴박하다. 그런 점에서 남북대화가 시작되면,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규율할 새로운 법규범으로서 남북기본협정의 추진 문제를 주된 의제로 남북대화의 테이블에 올려놓아야 한다.

지금 우리 정부는 북핵 해법으로서 ‘입구로서의 동결, 출구로서의 폐기’라는 단계적 해법을 내놓고 있다. 현재 북한이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기 때문에 쉽게 핵무기 폐기를 수용할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동결 단계’에만 협상의 초점을 맞출 경우 자칫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해 준다는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조건 없이 대화국면이 마련된다 하더라도, 진정성과 고도의 협상전략을 통해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의 목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번이 북한을 멈춰 세울 수 있는 마지막 대화의 장이라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동력의 확보 차원에서 한반도 평화협정의 추진 문제를 남북대화나 남북·미·중이 참여하는 한반도평화포럼의 의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최근 들어 북한은 한반도 평화협정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이 아무리 국가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해도 국제법적인 체제 안전보장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평화협정 논의는 비핵화 협상의 동력이 될 수 있다.

우리 정부가 한반도문제의 해결에 본격적으로 나설 경우 국내외적으로 적지 않은 난관과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다행히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70%를 넘는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어 국정의 동력을 잃지 않고 있다. 이러한 국내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반도문제의 운전대를 미국으로부터 넘겨받아야 한다. 우리가 운전대를 확실하게 잡게 된다면 북한당국도 결코 우리 정부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미국을 설득하고 북한을 대화·협상으로 끌어당겨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한 진검승부를 준비할 때가 되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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