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종교 개혁자 나바르의 마가렛(Marguerite de Navarre, 1492-1549)

김형렬 목사(호주 울릉공 한인 장로교회 담임, 코닷 연구위원)

최근 '기독교 사상'은 프랑스의 위그노 역사를 소개하여 종교 개혁의 이해를 넓혀주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개된 잔 달브레는 프랑스 내의 종교 개혁 운동이 루이 13세에 의해 궤멸되던 1628년까지 지속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이다. 나바르 왕국의 여왕으로서 잔 달브레는 1560년 이후 위그노 운동의 지도자로 개혁 신앙을 수호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그녀 이전에 그녀의 어머니 나바르의 마가렛 역시도 프랑스 종교 개혁에 지대한 역할을 한 여성이기도 하다.

나바르의 마가렛은 우리가 잘 아는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1494-1547)의 누나이다. 프란시스 1세는 칼빈이 기독교 강요의 서문을 기록하여 헌사한 바로 그 왕이다. 여성 개혁자들을 연구한 Rebecca Van Doodewaard는 나바르의 마가렛의 생애와 그녀의 공헌에 대해 이렇게 알려 준다. 마가렛은 어려서부터 프랑스 왕위 계승자였던 동생 프란시스 1세와 함께 왕실의 교육을 받아 언어, 철학, 역사, 문학 그리고 신학 등을 공부했다고 한다. 17살이 되던 1509년 알렉숀의 공작인 찰스와 결혼을 했고, 이 시기 즈음에 복음적 설교와 토론을 통해 마가렛은 구원의 믿음을 얻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515년 프랑스 왕이 된 동생 프란시스 1세는 어떤 악도 없이 모든 덕과 은혜를 갖춘 여인으로 존경한 자신의 누이 마가렛을 지병으로 인해 왕비의 역할을 잘 수행 못하던 자신의 아내를 대신하여 공적으로는 여왕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카톨릭 국가였던 프랑스 내에서 마가렛은 자신이 지위를 활용하여 개혁자들을 보호했고, 나아가 프란시스 1세가 종교 개혁을 정치적으로 보호하기를 희망했었다. 실제로 마가렛은 자신의 친구들 중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동생에게 탄원하여 이들을 석방하기도 했다. 이 중에는 시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수세기 동안 사용케 한 매롯(Marot)이라는 인물도 있다. 1523년에는 베르퀸(Berquin)이라는 최고의 지성인들 중 한 명이 체포되었으나 그녀의 도움을 통해 놓임을 받기도 했다. 그는 2년 후에도 구속되어 위기에 처했다가 마가렛의 도움으로 자유를 얻었으나 1529년 다시 체포되어 순교했다.

나바르의 마가렛(Marguerite de Navarre)프랑스와 크루엣의 크레용 작품 /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

1525년은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는 수치스러운 해이기도 했다. 이때에 마가렛은 동생이 포로로 잡혀있던 곳을 찾아 가서 자신의 동생을 돌보며 그가 풀려나도록 외교적 협상을 벌여 결국 동생이 풀려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동생의 존경심은 더 커졌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 전쟁으로 인해 그녀의 남편 역시도 사망을 하여 그녀는 미망인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후 그녀는 나바르 왕 앙리 달브레와 재혼을 하게 되었고, 그 때로부터 프랑스를 떠나 새로운 수도 나바르의 네락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나바르 왕국은 종교 개혁의 가르침이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가 마가렛에 의해 새로운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 앙리는 그녀의 신앙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한 번은 그녀가 자신의 처소에서 비밀리에 개신교 예배와 성찬을 진행하던 일이 왕에게 알려져 분노한 앙리에 의해 뺨을 맞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가 이 일을 프란시스 1세에게 알리자 분노한 왕은 자신의 누이를 보호하기 위해 전쟁으로 위협을 가했고, 이후 앙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녀의 개신교 예배와 교리들에 대한 연구를 허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프란시스 1세는 마드리드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개신교를 금하고 개혁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프란시스 1세는 마가렛이 1528년 낳은 딸 잔 달브레를 카톨릭 신앙으로 교육코자 하여 누나에게서 빼앗아가 버리기도 했다. 가까웠던 남매의 관계는 이로 인해 손상되었고, 마가렛은 자신의 개신교 신앙으로 인해 큰 신앙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프랑스의 종교 개혁에 지속적으로 관여했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직접 시인으로서 개신교적 사상을 발표했다. 1531년 발행되고 1533년에 재판이 나온 그녀의 작품은 소르본의 신학자들에 의해 루터주의적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사건은 프란시스 1세에 의해 무마가 되었지만 이후 둘 사이의 신앙적 간격이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다음 해 1534년 프래카드 사건 이후 프란시스 1세는 이단들에게 사형을 명하는 강경책을 발표하게 되었고, 이때로부터 마가렛은 개혁신앙의 확산보다는 개신교 성도들의 보호에 힘을 쓰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왕국으로 지도적인 위그노들을 초청하여 이들을 보호하였고, 그녀의 식탁에 개혁자들을 초대하여 성경과 교리에 대하여 함께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칼빈이나 다른 개혁자들이 이곳 나바르 왕국에서 안전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1538년 칼빈이 제네바 시에서 쫓겨났을 때에는 그 곳의 개혁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칼빈을 쫓아낸 다른 지도자들을 쫓아내어야 한다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나바르의 마가렛은 그녀 자신의 개혁 신앙에 충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내의 많은 개신교도들의 안전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에 헌신한 여성이다. 물론 그녀의 영향력이 프랑스에만 미친 것은 아니다. 영국 개신교인 영국의 국교회를 지키고 유지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 앤 볼린은 1514년 이후부터 헨리 8세의 누이 프랑스 여왕 메리의 하녀(maid)로 거의 7년을 프랑스에서 보낸다. 당시 하녀는 신분이 낮은 여인이 아니었다. 앤 볼린의 아버지는 외교관이었고, 그녀는 음악, 언어, 문학 그리고 시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상류층 여성으로서 왕비를 섬기는 자리에 있었다. 앤 볼린 연구가들은 이 시기에 앤이 나바르의 마가렛을 만났을 것으로 보고 있고, 그녀의 인문주의와 개혁자들에 대한 옹호를 접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아마도 이 시기에 앤 볼린이 복음주의(개신교)에 강한 내적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본다면 마가렛의 영향력 아래에서 개신교 신앙을 가진 앤 볼린은 이후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엘리자베스를 낳은 것이 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은 단순히 자신이 정치적 입장에 의해서 국교회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 앤 볼린의 가르침 안에서 스스로도 카톨릭을 떠나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바르의 마가렛은 프란시스 1세의 일관적이지 않았던 초기 종교 정책을 설명하는 한 이유가 된다. 그녀의 개신교 신앙은 적어도 1534년 프래카드 사건 이전까지의 프랑스 종교 정책의 혼선을 일으킨 한 원인이도 하며, 이후 나바르 왕국을 통해 위그노와 개신교도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함으로 프랑스 개신교 운동을 전개한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물론 이것은 딸인 잔 달브레와 이어진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의 딸 역시도 이런 운동을 통해 루이 13세 시기까지 프랑스 개혁 운동이 지속될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또한 마가렛 자신의 인문주의적 소양을 통한 활동들에서도 그녀의 개혁적 영향력은 적지 않았으며, 이러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영국의 앤 볼린을 통해 개신 교회가 영국에서도 비록 형태는 달랐지만 존속할 수 있도록 하는 큰 힘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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