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을 다시 찾았다. 기름유출 사고로 해안이 온통 검게 변했던 두 달 전에 비해 겉으로는 악몽 같은 사고를 상기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러나 인적이 드문 곳에 깊숙이 들어가면 아직까지도 검은 기름덩어리가 여기저기 상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태안의 기름유출 사고를 계기로 한국교회봉사단이 처음 만들어질 때만 해도 매스컴에서는 한국 교회의 일회성 이벤트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난 지금도 교인들이 주축이 된 수고의 땀방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섬김의 본이신 예수님을 주(主)로 모신 기독교인들에게는 섬김의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기에 봉사와 섬김은 신앙인의 체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기독교의 대사회적인 봉사활동은 양극화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사회의 커다란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다. 2003년 한국보건사회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복지 시설의 61.7%가 개신교였으며, 천주교가 19.8%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이러한 봉사의 힘은 기름제거에 투입된 인원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으로 조사되는 것에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민족의 심장이 한국 기독교의 섬김과 수고의 맥박으로 고동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적인 냉대를 받고 있는 듯한 모습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신 세상이 교회를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이기에 그럴 수도 있지만, 정말 가슴 아픈 것은 같은 지체 내에서의 자해 행위에 가까운 공격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의 깊은 상처를 받는 데 있다. 최근 한 기사에 실린 “일부 목회자들이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한국 교회를 때리는 ‘몽둥이의 소품’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한 목회자의 깊은 시름에 대다수 목회자들이 공감할 것이다. 지체끼리의 날카로운 공격으로 어처구니없는 피흘림은 멈추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서로를 사랑의 줄로 매고 형제의 고통의 짐을 함께 지는 영적인 동고동락의 전통이 있다. 필자는 태안에서의 초교파적인 봉사활동 속에서 다시금 하나됨의 빛을 보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교단도, 직분도, 나이도 초월하여 모두가 너나없이 사랑과 섬김의 줄을 매고 수고의 땀을 흘리며 하나가 됐다. 이것이야말로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예수의 피 값으로 녹여지고 하나가 되는 주의 몸 된 교회만의 독특한 소우주성이 아니겠는가?

경험에는 탁상공론을 무력케 하는 내공이 있다. 이번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수십만 명의 교우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봉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국 교회가 하나 되는데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이들의 귀한 섬김의 수고가 지역 교회와 삶의 현장에서도 이어지고, 나아가 한국 교회의 연합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숙제가 아닌가 한다.

지난 한국 교회의 120년은 조국 근대사의 120년이었다. 그 중에는 회한의 눈물을 뿌릴 일도 있었지만, 이에 비교할 수 없는 수많은 자랑스러운 이야기들이 근대 역사의 페이지마다 깊이 스며있다. 지금 우리는 설 연휴와 함께 시작된 사순절의 중도에 서 있다.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난도 함께 져야 하는 것처럼, 한국 교회가 이 민족의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이 민족의 십자가도 마땅히 함께 져야 할 것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우리에게는 태안에서 경험하였던 섬김의 수고와 하나됨의 은혜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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