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편집인

열두 사도와 사도 바울의 행적을 추척하여 써낸 사도행전후서라는 책이 있다. 토머스. E. 슈미트가 쓰고 윤종석이 옮긴 책을 아바서원에서 출판했다. 저자도 이 책을 역사적 픽션으로 분류했지만 많은 고전들을 참고하며 신빙성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쓰여졌기에 참고할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비록 성경은 아니지만 사도들의 후 행적들을 유추해 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이 책에서 마음이 꽂혀 며칠을 넘어갈 수 없었던 대목이 있었다. 그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은 시몬과 유다가 새로 발굴한 제자들에게 주께 삶을 드리는 법을 가르친 대목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너희는 서너가지를 버려야 한다. 첫째로너희 재산을 버려야 한다. 주를 온전히 신뢰한다면 너희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두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마음으로만 드릴 수는 없다. 마음의 헌신은 너희 보화를 어떻게 하느냐를 통해서만 입증된다. 둘째로너희 가정을 버려야 한다. 부모나 아내를 부양하면 그들에게 도리를 다하느니라 그 이상을 할 수 없다. 대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가정을 얻으라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들로 교제의 식탁이 풍성해지고 사랑하는 자녀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셋째로너희 목숨을 버려야 한다. 너희는 언제라도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단 한번이라도 내일까지 하루는 더 살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너희는 주의 말씀보다 내일을 앞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 하루씩 앞세우다보면 결국 너희는 말씀을 처음 듣기 전보다 더 말씀과 멀어지고, 진리를 전혀 몰랐을 떼보다 더 중한 정죄를 받게 된다.

이 세가지는 주께서 육체로 계실 때 가르치신 것이지만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네 번째 것이 있다즉 너희는 판단을 버려야 한다. 너희는 신성모독이나 위선이나 악을 행했다고 기소될 것이고, 육로나 해상에서 굶주림과 목마름과 온갖 위험을 당할 것이다. 회당장과 로마의 법관과 타국의 관리들이 너희를 위협할 것이고 군중들은 모여 너희를 조롱하며 너희의 죽음을 즐겁게 구경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우를 받는다고 원한을 품거나 너희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면, 너희 원한이 주의 말씀과 성도들에게 독이 될 것이다. 너희 심령은 상실 될 것이고, 너희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릴 것이며, 너희 입은 박해자 앞에서 그리스도롤 부인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너희 몸은 남몰래 여자나 독한 술이나 방종 같은 헛된 위안에 빠질 것이다. 이 모두는 너희가 하나님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에게 합당한 대우를 스스로 판단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너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너희를 택하신 분은 최고의 공경을 받기에 합당하셨으나 최악의 수치를 받으셨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참으로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늘날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면 하나도 제대로 된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네 가지 중에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버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버리지 않은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이 죽으신 후 고기 잡던 배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사명 이전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물론 말꾼인 오늘날의 제자들은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재산을 버리라니요? 그러면 하나님의 형통과 축복을 어떻게 설교하지요? 그것을 교회에서 뻬버리면 무엇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이지요? 요즘 백세 시대라고 하는데,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갈지 모르는데 재산을 다 버리면 남은 생은 무엇으로 살지요? 차라리 일용할 양식을 구함으로 살기보다는 평생 먹을 것 쌓아놓고 주님 걱정 안 끼치는 것이 더 주님을 위한 길이 아니겠느냐고 변명하면서 교회와 마지막이 좋지 못하게 끝나는 우리들이 아니던가?

가정을 버리라는 말도 그렇다.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은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그러지 않았느냐고 반박할 것이다. 제자라면 더욱 솔선수범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주님도 대답이 궁하실 것이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주님 당시에나 합당한 말씀이지 이 시대와는 맞지 않는다고 항변할 것이다. 오늘날 아골 골짝 빈들에 복음 들고 간 전도자들은 자녀들에게 얼마나 투자를 하며, 어떤 교육을 시키고 있는가? 마치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인 양 가족에 올인하는 모습은 주님을 팔아서라도 가족을 부양하겠다는 아버지요 남편이며 자식의 모습이 아니던가?

내 목숨은 어떤가? 그것은 버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재물도 가족도 버리지 못하면서 자신의 생명은 버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특히 순교정신으로 시작한 고신에서조차 이런 고백을 들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진돗개 보다 더 앙칼진 모습으로 서로를 난도질하며 고소하며 법정으로 달려가는 우리들이 아니던가? 내일 하루를 더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무슨 짓이든 다하는 우리들이 아니던가? 물론 주의 교회를 위해 그런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사명을 받았을 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고 고백했던 우리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323장의 찬송가는 불러본지가 너무나 오래 되었다.

판단하지 말라? 주님은 나를 재판하고 능욕하고 조롱하며 죽이는 자들에게까지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지만 우리는 과연 어떤가? 그렇기는 커녕 사랑하고 존경해야할 형제들을 시기질투하고 모함하고 없는 거짓말로 덮어씌우는 우리들은 아니던가?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하면 우리 자신이 너무 부끄럽지 않는가?

사도들이 말하는 기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말씀 앞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밥벌이 하는 직업으로 이 길에 섰는가? 설교는 그들보다 못할 것이 없다. 어떤 성경도 갖다 대면 설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어떤 상황도 잘 변명할 수 있는 언변도 풍부하다.

오늘의 예배를 보라. 돈이 들지 않으면 예배가 되지 않는다. 찬양대, 스트링부, 지휘자, 반주자, CCM 가수들, 모두가 돈으로 움직인다. 헌신은 없다. 교회도 부익부 빈익빈이 통한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물질의 노예가 된, 그러면서 논리에는 약간의 빈틈을 가진 제자라고 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우리는 제자가 되기에 자격미달이다. 한국교회는 이런 자격미달의 자칭 제자들로 인해 병들었다. 그래서 교회나 노회나 총회에서 편법이 난무하고 헌금 도적질이 합법적으로 일어나고,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들어 버렸다. 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지 말라. 그 범인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신 그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진실로 오늘 이 세대를 살리려고 한다면 겉옷 하나까지도 다 빼앗긴 채 벌거벗겨 모든 수치를 드러내신 그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당신은 제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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