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터닝 포인트를 찾으라.

천헌옥 목사 /편집인

오늘날 한국교회의 병폐는 무엇인가? 무기력이다. 누가복음 7:32에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심 같이 물에 물탄 듯 세상물결에 몸을 맡기고 아무 감각 없이 무기력하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를 진단해 보면 크게 세 가지 특성을 가진다. 반복성과 냉소성, 증발성이다. 반복성은 그냥 교회를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교인을 말한다. 아무런 감흥도 없고 그렇다고 애쓰는 부분도 없다. 그냥 세상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신앙의 태도이다. 그러면서 하던 것이니까 반복적, 습관적으로 종교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냉소성을 가진다. 신앙이 뭐 별거더냐? 하는 냉소성이다. 일종의 자기변명과 같은 것이다. 그 냉소성이 교회의 모든 일에 결부되면 교회는 침체되기 마련이다. 부흥회가 뭐 별거더냐? 설교가 뭐 별거더냐? 수련회가 뭐 별거더냐? 전도? 기도? 다 별거 아니더라. 그렇게 냉소적이 되어 활력소를 떨어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증발성은 어떤가? 죽을힘을 다 해 준비한 설교를 듣고, 음 오늘 설교준비 많이 했구먼(냉소성), 그렇게 설교를 듣다가 '그래 그 정도는 해야 성도지' 하는 은혜(?)를 받고는 교회 문밖을 나오는 동안 걸려온 전화 한 통화에 금새 그 은혜는 증발해 버린다는 것이다. 은혜가 성도의 가슴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증발해 버리는 환경이 된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는 소나기처럼 내려오건만 그것을 받을 그릇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에 부딪히지 않을려는지 오히려 반복성, 냉소성, 증발성이 충만하다. 그래서 로봇과 비슷한 무기력한 성도가 되고 그것은 신앙의 위기인 것이다. 우리가 이런 위기를 극복하려면 터닝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

삭개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설자리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 그 인생이 완전히 뒤 바뀌는 역사를 만들었다. 그가 가진 터닝 포인트는 무엇이었던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던 것이다. 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은 삭개오에게는 엄청난 터닝 포인트였다.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주님은 그런 그를 어여삐 보셨다. 그렇게 스스로 터닝 포인트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베도로는 주님이 부활하셨음에도 제자들을 몰고 고기 잡으러 갔다. 자신이 3년이나 버려두었던 옛날 어부 시절 고기 잡던 배로 돌아갔다. 그런 그에게 주님이 찾아온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을 가지고 말이다. 그것이 베드로에게 터닝 포인트였다. 그 이후로 베드로는 단 한 번도 사명자의 길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울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려고 혈안이 되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주님을 만났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음성에 그는 굴복하고 말았다. 그는 완전히 바뀌어서 핍박하던 자리에서 핍박을 받는 자리로 그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자신을 찾아주신 그분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

주님은 우리 인생을 바꾸기 위해 일일이 찾아오신다. 그러나 우리는 무화과나무 위에라도 올라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만히 앉아서 주님은 나를 왜 찾아 주시지 않나하고 볼멘소리나 하면서 반복성, 냉소성, 증발성 신앙으로 살면 결국 무기력해 지고 위기를 자초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여! 무화과나무라도 올라가는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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