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온유 /시조시인

20여 년 전에 혼자서 백김치를 담구겠다고 겁 없이 일을 저지른 적 있었다. 배추는 지금 생각하면 50포기 정도는 됐던 것 같은데 그 때는 산무더기처럼 높아 보였다. 이렇다는 말도 없이 마당 가득 배추를 부려 놓고 간 형부를 원망하며 백김치에 들어 갈 견과류와 과일, 채소를 준비하고 요리책을 펼쳐 놓고 한 포기 한 포기 김치소가 빠지지 않게 명주실로 묶어가며 온 신경과 마음을 다해 담갔다. 그렇게 하루 종일 담근 백김치가 색깔도 예쁘고 모양도 예쁘게 항아리로 한 가득 했다. 항아리 크기는 내 허리까지 올라오는 크기였으니 절대 적은 양은 아니었다. 혼자서 그 많은 김치를 다 했다는 뿌듯함으로 며칠은 든든했는데 나는 자꾸 그 항아리 속이 궁금했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그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곤 했다. 며칠 됐나, 맛이 어떤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김치 이파리 하나를 뜯어 먹어 봤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는 말을 그 때 처음 실감했다. 쓰디쓰고 찝찔하고 이건 김치 맛이 아니었다. 세상 어디서도 먹어보지 못한 이상한 맛이 그렇게 정성을 쏟아 만든 백김치에서 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배추도 배추지만 그 안에 들어간 재료값이 얼마며 내 정성은 또 어디서 보상을 받을 것이며, 이 많은 김치를 어디다 어떻게 버린단 말인가! 하여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잠도 못 잤다. 그 항아리를 들여다보는 게 겁이 날 정도였다. 안절부절 하며 세상 걱정근심은 혼자 다 갖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는 내게 동네 어른 한 분이 오셔서 무슨 큰 일이 있기에 얼굴이 그렇게 상했냐고 물었다. 나는 울먹거리며 사정을 말 하니 그 어른이 어디 한 번 보자며 그 항아리로 갔다. 나는 그 어른이 항아리에서 김치 줄기 하나를 떼어 내어 입으로 가져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치 무슨 중대한 결정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내 온 몸 근육과 신경 줄이 내 눈동자로 죄다 쏠렸다.

사진은 정온유님의 작품이다.

“에휴~ 김치가 미쳤네. 괜찮아. 일주일 지나면 아주 맛있게 익어 있을 거야. 그때까지 항아리 뚜껑 열지 말고 있어.”

나는,

“김치가 미쳐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어른이

“그럼~ 이렇게 한 바탕 미치고 나야 제 맛을 찾아. 아유~ 걱정 말아. 맛있겠구먼.”하며 웃었다.

정말 마법처럼, 그 어른 말처럼 김치는 일주일 뒤에 엄청난 맛을 갖고 내 마음고생에 보답을 해 왔다. 정말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해 겨울 나는 오로지 그 백김치랑만 밥을 먹었다. 며칠을 앓아누울 정도로 마음고생 한 것쯤이야 괜찮았다. 맛있는 것으로 다 보상이 되었다.

 

그날 이후,

‘김치가 미친다고?’에 대해 생각의 굴을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에 미치는 건 철학’이다.

역사도, 사람 관계도, 무엇 하나 미치는 과정 없이 온전히 바로 서기는 힘들다는 생각이다. 물론 신앙도 마찬가지다. 미치는 과정은 성숙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어른이 되면서 깨닫는다.

미치는 과정은 항상 혼란스럽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그 몸부림을 지독하게 “잘” 앓고 나면 더 나은 성숙한 모습들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역사․문화도 그렇고 사람 관계도 그렇다. 신앙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게 “잘” 미쳐갈 때 내 육신은 힘들고 아팠으나 영혼은 더 없이 행복하고 건강했다. 육신이 힘들고 아픔은 현실의 것들에서 오는 혼란이다. 그 혼란스러움이 신앙 안에서 정리 되는 기간을 잘 견뎠을 때 하나님은 내게 엄청난 선물을 주었고 그 선물로 인하여 지금껏 내가 산다. 육신은 영혼을 이기지 못한다. 결국 내 육신도 영혼 따라 건강해지고 행복해 졌다.

우리 “잘” 미쳐 보자. 못 견뎌서 망가지지 말고 잘 견뎌 보자.

이 겨울 “잘 미쳐 보자.” 그래서 올 봄엔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대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관계로 거듭나 보자. 그러면 더 견고하고 단단해 진 관계가 될 것이니.

 

우리 “잘 미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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