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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장로, 1.5%의 기독교 인구가 20% 이상 역할 감당한 3.1 운동 기억하자!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는 미포 세미나

2018 미래교회포럼 준비 세미나가 지난 3월 19일 천안에 위치한 하나교회(담임 오병욱 목사)에서 있었다. 미포 사무총장 이세령 목사의 사회로 박은조 목사(미포 대표 회장) 기도하고 지형은 대표(지앤컴리서치)가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신앙의식’, 이만열 장로가 ‘3.1만세운동과 종교계의 역할’을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특히 이 장로의 강의는 내년 3.1운동 100주년 준비를 위해 마련되었다.

2018 미포 준비모임에서 발표하는 이만열 장로

이만열 교수는 1919년 당시 1.3∼1.5%의 기독교 인구가 3.1운동에서 행한 역할은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기독교도의 참여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일제의 박해도 다른 종교에 비해 컸다”고 했다.

“제암리교회당에서는 비신자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29명이 희생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 달이나 늦게(10월 4일 개회) 그것도 그 해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3.1운동으로 '미참'(未參)한 상황에서 열린 장로교 제8회 총회에서는, 사살·타살 52명(각 노회 보고), 체포된 신자 3,804명(이 가운데 목사·장로 134명: 장로교 전체 목사·장로 1,024명 가운데 13%에 해당)이나 되었다.” 다음은 이 교수의 발표문 전문이다.

2018 미래교회포럼 준비 세미나가 지난 3월 19일 천안에 위치한 하나교회(담임 오병욱 목사) 소예배당에서 있었다.

 

3.1만세운동과 종교계의 역할

 

이 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머리말

3·1운동은 3·1만세운동, 3·1독립운동 혹은 3·1혁명, 3·1대혁명으로도 불려졌다. 역사 용어는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느냐와 관련이 있는 만큼, 위의 용어들은 3·1운동을 인식, 강조, 해석, 적용하려는 시대적 및 사상적 맥락과도 연결된다. 용어가 달리 불려졌다고 해서 그 실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용어는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보여주며 나아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넓고 깊게 영향을 미친다.

3·1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혁명’이라는 용어가 이미 등장했다. 이점은 이미 학술적인 쟁점으로 이미 등장했지만, 그것은 이미 그 사건을 바라보는 역사적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한 시대 역사를 움직였던 일련의 ‘사건’을 의미한다. 그러나 ‘혁명’은 그 운동력이 체제를 바꾸었거나 거기에 준하는 것이어야 한다. 선진들이 이미 ‘3·1혁명’이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 그것은 독립운동적 측면에서는 ‘민족혁명’적 성격을 가졌다고도 했고, 전근대적인 정치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정치사회체제를 재래했다는 점에서는 ‘민주혁명’으로 보았다. 3·1운동 100주년이 닥아오는 이 시점에 그것을 ‘운동’으로 그냥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혁명’으로 재정립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역사를 새롭게 읽어가야 하는 우리의 과제이면서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3·1운동에 대한 관점과 평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천되어 왔다. 우선 운동의 주체와 관련하여 과거에는 33인 중심으로 이해하려 했지만 최근에는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는 쪽으로 중심이 옮겨졌으며, 따라서 서울 중심의 3·1운동 이해에서 지방의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3·1운동은 과거에는 ‘독립운동’으로서만 인식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뤄왔으나 최근에는 점차 한국의 민주운동과 관련하여 인식하려는 경향이 확대되고 있다. 아마 이점은 앞으로 더 확대 심화될 것으로 생각된다. 또 3·1운동의 원인론도 과거에는 1차세계대전의 전후처리과정에서 나타났던 민족자결론의 국제적 요인이 컸다고 봤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국제적인 요인 못지 않게 일제 강점 이후의 수탈과 피압박 상황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3.1운동과 사회주의와의 관련성도 점차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3·1운동에서 나타난 폭력성과 관련된 문제도 과거에는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에 매여 비폭력적 운동으로 규정했으나 최근에는 운동과정에서 일제의 폭력에 항거했던 민중의 폭력적 측면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 글은, 제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3·1만세운동과 그 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종교계의 동향과 역할을 정리하는 데에 있다. 거족적인 이 운동이 어떤 경위를 거쳐 이뤄졌으며, 그런 과정에서 종교계의 역할이 어땠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강점 후 일제는 일체의 집회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고 포고를 통해 민간에서 무기를 갖지 못하도록 했으며 몇 차례의 조사를 통해 갖고 있는 무기마저 신고하여 몰수해 갔다. 그 때문에 종교계 이외에는 민간이 스스로 집회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3.1운동 같은 거족적 민족운동을 조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여기서 종교인들의 역할이 나타날 수 있었다. 3.1운동은 그 발화만으로 본다면,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종교계가 연합하여 이룩한 거대한 민족운동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글은 3.1만세운동 전체를 설명하면서 종교계의 역할이 어땠는가를 부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1. 3·1운동의 태동과 그 배경

 

3·1운동의 태동과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당시의 국내의 식민지적 상황과 세계사의 흐름을 간단히 살피면서 3.1만세운동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간략하게나마 살피고자 한다.

 

[일제의 무단통치] 3·1운동의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일제 강점기 한국민이 당한 피압박 상황에 있다. 일제는 강점 후 일체의 언론, 결사, 집회의 자유와 정치, 사상의 자유를 박탈했다. 1914년에는 지방행정구역을 정리하여 종래의 마을(동 리)과 면, 군을 대폭 줄였는데 이는 행정효율을 명분으로 종래의 조선적인 전통과 향토의식을 단절시키고 일본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조선 민중을 향한 일제의 강압적인 조치들은 일상행활을 겁박했고 치안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인을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즉결에 의한 통제로 나타났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치안대책은, 1911년 1만 8천여명에 달하던 즉결처분이 1918년에는 8만 2천명으로 늘어난 데서도 잘 드러났다. 동맹파업도 1916년에 6건에 362명이던 것이 1918년에는 50건에 4,500여명으로 늘어났다. 생활형편도 1914년에 평균 1석당 평균 15원선이던 쌀값이 1917년 말에는 석당 20원 선이 넘었고 1919년 3월에는 40원을 상회하게 되었다. 이는 일제 강점 초기, 식민지 백성의 삶을 옥죄고 있는 사회 경제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일제는 1915년 교육관계규칙을 개정하고 포교규칙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신앙생활에도 간섭하려고 했다. 기독교계 학교의 고등보통학교의 승격을 빌미로 일본 교사의 채용과 일본어 교육의 강화, 채플과 성경공부를 폐지하도록 유도했다. 미션스쿨의 설립 목적에서 중요시하는 선교적 목적이 배제되고 일본의 언어와 역사를 강조하고 일본적 신민됨에 역점을 두게 함으로써 일제가 추구하는 식민지교육을 강화하려고 했다. 한편 포교규칙을 제정하여 포교당을 설립하거나 그 책임자를 세울 때에는 당국의 허락을 받도록 했다. 이는 일제의 통치 정책이 한국인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제약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3·1운동에서 종교인들이 많이 관여하게 된 것은 이런 이유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국제정세와 민족자결론] 3·1운동은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11일에서 본다면 100여일 만에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를 새로 필요로 하는 나라들이 식민지를 이미 많이 갖고 있는 나라들로부터 그것을 빼앗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유럽의 기독교 문명세계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유럽은 세계의 패권을 잃고 비유럽권인 미국과 러시아에 그것을 넘기게 되었다. 전쟁 종결에 앞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교전국 쌍방에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평화조건 14개조를 제시한 적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민족자결 원칙이다. 민족자결 원칙은 오스트리아제국과 러시아제국 및 터키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백인기독교도들에게 적용하려 한 것으로 아시아 아프리카의 비백인, 비기독교도 식민지 민족에게 적용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알바니아와 발틱 삼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8개국의 유럽 나라들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 해방과 독립을 맞게 된 것 외에, 아시아 아프리카 피지배 민족으로서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적용받아 독립한 민족은 하나도 없었다. 베르사이유 조약안 440개 조항 가운데 조선 문제는 포함되지 않은 것을 물론이다. 이런 상황을 간파한 동경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조선에 적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민족자결 원칙이 승전국 식민지에 적용되지 않았지만, 3·1운동은 전승국 제국주의자들의 의도에 개의치 않고 세계사적인 반전을 기하려고 했다. 민족자결의 원칙이 적용범위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니 현실적으로 승전국 식민지에 적용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은 이 원칙을 보편적으로 적용시켜 보려고 시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선을 제압했다고도 보인다. 이를 두고 민족자결주의라는 복음을 “제 것으로 만들려고 용감히 일어선 최초의 민족이 우리 민족”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민족자결의 원칙을 보편적으로 우리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일본도 당황했지만, 동구의 약소민족에게만 적용하려던 다른 전승국가들도 놀랐을 것이다. 민족자결 원칙의 전제는 어떤 나라든 다른 민족을 전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제국의 전제적 지배가 부당한 것처럼 일본의 조선 통치도 부당하다는 것을 3·1운동은 폭로했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피압박 민족 가운데서 윌슨의 원칙을 자기의 운명에 적용시켜 궐기한 최초의 봉화가 3·1운동이었다.”

 

[신한청년당과 국내외 독립운동]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세계사의 움직임을 간파한 해외독립운동가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중국에 망명한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한진교·조용은·조동우 등은 1918년 8월 20일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그 해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라 파리강화회의에 대표파견을 논의했다. 이는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Charles R. Crane)이 중국을 방문하는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미국은 중국이 종전 후의 강화회의에 참석토록 권하고 있었다. 이 때 크레인을 면담한 여운형 등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식민지 처리원칙으로 ‘민족자결 원칙’이 논의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파리 평화회의에 한국 대표(김규식) 파견에 대한 협조를 구했다. 또 「한국 독립에 관한 진정서」2통을 작성, 평화회의의장과 미 대통령에게 전달해 주도록 부탁했다.

김규식은 여비가 마련되자 1919년 2월 1일 상해를 출발하여, 3월 13일 파리에 도착,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하고 독립청원서를 강회회의에 제출했다. 김규식은 뒤이어 도착한 헐버트(H.B.Hulbert)와 조용은·여운홍·이관용 등의 도움을 받아 5월 10일에는 한국독립항고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했고 또 여러 문서를 작성, 각국 대표와 언론에 배포했다. 그 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식의 신분은 신한청년당 대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바뀌었다. 거의 같은 무렵에 미국에서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파견을 추진하고 있었다. 대한인국민회의의 안창호는 1918년 12월 1일,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제출을 위해 정한경·이승만·민찬호를 선정, 파견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여권발급이 불가능했다.

상해에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다는 소식은 독립운동계를 고무시켰다. 신한청년당은 국내와 일본, 만주·노령 지역에 대표를 파견, 독립운동을 권고했다. 국내에 몇 차례에 걸쳐 선우혁·장덕수·서병호·김순애·김철 등을 파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준비토록 했다. 특히 선우혁은 평안도 지역으로 들어와 이승훈·양전백·길선주 등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을 논의했다. 일본에도 조용은·장덕수·이광수 등을 파견, 독립운동을 논의하고 이광수는 2·8독립운동의 선언서를 작성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한편 여운형 등은 만주와 연해주를 방문,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독려했다.

 

[대한독립선언과 2.8독립선언] 3·1운동에 앞서서 「대한독립선언서」와 「2·8독립선언」이 발표된 것은 3·1운동 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앞서 1917년 7월에는 신규식·박은식·신채호·조소앙·신석우·박용만 등 14인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는 1910년 융희 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우리 국민에게 주권을 이양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면서 일본의 주권강탈은 무효이며 국민주권론을 실행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제시한 것이다. 그 뒤 1919년 2월, 만주, 노령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대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39명의 명의로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대한독립선언서」에서는 해외독립군이 국내 동포의 위임을 받아 활동한다는 것과 ‘육탄전쟁’에 의한 항일독립전쟁을 주장했다. 이와 함께 1919년 2월 8일에는 동경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 선언을 통해, 한민족이 유구한 역사를 가졌고 역사상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음을 천명하고, 사기와 폭력에 의한 일제의 국권탈취의 불법성과 침략성을 고발했다. 4개항의 결의문 중에는 민족자결주의를 한국 민족에게도 적용시켜 줄 것과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겠다고 주장한 대목이 보인다.

 

[고종의 崩御와 因山]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에는 파리강화회의라는 국제적 상황 못지 않게 국내적인 상황 변화도 있었다. 1919년 1월 22일에 고종이 승하했는데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고종독살설’은 민족적인 울분을 촉발시켰다. 국장일을 3월 3일로 정하게 되자 은밀히 진행되던 독립운동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인산을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남대문 역 하차 인원이 매일 평균 1,500~1,600명이던 것이 2월 26일에는 3,000여명, 27일에는 6,000여명으로 늘어났다. 많은 ‘불온 인쇄물’이 전국적으로 살포, 전달되었다. 그 즈음 동경 유학생들이 추진한 「2·8독립선언」은 국내의 독립운동 분위기를 만세시위운동으로 상승시켜 3·1만세운동으로 연결,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인산일이 3월 3일로 결정되어 그 전날을 거사일로 잡으려 했으나,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측을 고려하여 3월 1일로 잡았다.

 

 

2. 3․1 운동과 종교계

3·1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및 불교계 지도자들이 앞장 섬으로 이뤄졌다. 그런 점에서 이 운동은 종교계의 연대와 선도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당시 종교계가 앞장 서게 된 데에는 강점초기의 일제의 강압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간단히 지적했다. 일제는 의병 등 조선인의 반제저항세력을 소탕하는 한편 기존의 모든 사회 단체를 해산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의 시민의 기본권을 철저하게 탄압했고 아울러 무기를 압수하는 등 조선인의 저항수단도 제거해 갔다. 일제 무단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봉건적 신체형인 태형(笞刑)을 부활시키고 범죄즉결령도 실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 유지되는 합법적인 공간은 종교적인 행사 밖에 없었다. 3·1운동이 종교계에 의해 선도된 것은 이런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일제 강점 초기의 종교계] 일제 강점 초기에 교단 조직을 가진 종교단체는 천도교를 비롯하여 기독교․불교․유교․천주교 등이 있었다. 이 중 가장 강력한 중앙조직을 갖고 있었던 것이 천도교였다. 천도교는 1860년대 최제우의 동학에서 시작, 1894년의 ‘동학혁명’을 거치는 동안 한 때 박해를 받았으나 1900년대에 들어와 대정비하기 시작했다. 1904년 ‘갑진(甲辰)개화운동’ 후 1905년 12월에 동학이란 명칭을 천도교로 변경했다. 천도교는 정치활동을 계속하려던 일진회(一進會)계의 천도교인들을 출교시키면서 교회를 정비하는 한편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오세창․양한묵 등 문명개화론계의 교인들을 중용하여 교리와 교회조직을 근대적으로 개편했다. “천도교는 ‘인내천(人乃天)의 이념과 보국안민(輔國安民)․광제창생(廣濟蒼生)의 교리에 따라 천도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모색하였다.” 또한 포교에 힘쓰면서 한국의 독립과 계급간의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다. 천도교가 제 1차 대전 후 새로운 세계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한국의 독립을 모색하려 한 것은 자신의 종교적 이념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1880년대에 선교사의 입국으로 시작된 기독교는 20세기에 들어와 성경을 번역 간행하고 교회를 세우며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등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은 미국의 남북 감리회와 미국의 남북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및 호주 장로회 등 6개 교단이었고 한말에 이르러 성결교․구세군․안식교 등도 수용되었다. 한국인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장로회가 1901년에 평양에, 감리회는 1905년에 서울에 각각 신학교를 세웠고, 평양과 서울에는 기독교계 전문학교도 설립했으며, 선교 지회가 설치된 도시에서는 중등학교를 세워 교육했다. 교회의 조직도 크게 발전하여, 남북감리회가 연회를 각각 조직했고, 장로회는 1907년 독로회 조직에 이어 1912년에는 총회를 조직, 산하에 7개의 노회를 두고 있었다. 기독교는 수용당시에는 반봉건사회개혁운동에 힘썼고 한말에는 대부흥운동과 국권수호운동에 힘썼으며 일제 강점과 더불어 ‘105인 사건’과 사립학교법개정 및 포교규칙 등으로 신앙생활에도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기독교가 선교사들과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는 늘 경계하고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현재 20만을 상회하는 교인을 확보하고 있었다.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의 기반 위에서 몽골 침략과 임진왜란 때에는 호국불교의 전통을 발휘했으며 중생 구제와 공동체의 수호를 목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승려의 도성출입이 금지되어 왔는데, 1895년 일본 승려 사노(佐野前勵)의 건백서로 도성출입이 풀리게 되었다. 그 후 일본 불교의 침탈이 가속회되어, 1908년에는 조선불교의 종명이 원종(元宗)으로 선포되었고, 1910년 대종정 이회광은 원종을 일본 불교 조동종과 연합시키려는 매종적 분위기를 확산시켜 갔다. 1911년 1월, 박한영․진진응․김종래․송종헌․백용성․오성일․한용운 등이 임제종(臨濟宗)을 수호하는 운동을 벌였는데, 이는 조선불교계의 자주성을 천명하는 운동이었고 한국 불교의 일대 종풍혁신운동이기도 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1911년 6월 사찰령을 공포, 30본산제를 실시하면서 모든 사찰의 자치권과 운영권을 총독부에 귀속시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한용운은 1918년 9월부터 불교계를 역사화․시대화하기 위해 종합교양잡지 『유심(唯心)』을 창간했다.

3.1만세운동 당시 한국의 유림(儒林)은 어땠을까. 여기서 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 33명에 보이지 않는 유림을 거론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유교계에서는 ‘3․1독립선언’ 뒤에 유림 137인 명의로 발표한 ‘파리장서’를 작성한 적이 있는데, ‘3․1독립선언서’가 발표되기 직전에 유림에게 서명하도록 권유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도교․기독교 측에서 처음 움직임이 있을 때 유림의 대표젹인 김윤식․윤용구 등에게도 민족 대표로서 나서줄 것을 교섭한 적이 있으나 그들은 소극적이었거나 거절했다. 이럴 무렵 한용운이 경남 거창에 있는 지방 유림 대표 곽종석을 예방, 접촉을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또 성주의 김창숙에게도 유림의 참여를 권유했으나 모친의 병환 때문에 미루다가 2월 그름께 상경했으나 그 때는 연서(連署)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김창숙은 유림이 참석하지 못한 데 대해서 통곡하며 아쉬워했다. 이렇게 유림은 천도교․기독교․불교계와는 달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가 없었지만, 그 뒤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종교계의 참여와 3․1운동의 전개] 3·1운동이 태동하는 데에는 몇 가지 흐름이 있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각 종교단체의 독립운동 시도와 관련이 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룹으로 천도교와 기독교 측을 들 수 있는데, 해외독립운동가들과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간파한 두 종교계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립만세운동을 구체화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이 중심이 되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그에 발맞춰 국내와 일본, 만주·노령 지역에 대표를 파견, 독립운동을 권유하고 있던 그 때 국내에 대해서도 몇 차례에 걸쳐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독립운동 준비를 권고했다. 당시 일본과 만주 연해주에 몇 사람이 파견되었을 때, 선우혁은 평안도 지역으로 와서 이승훈·양전백·길선주 등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독려했다.

천도교 중앙총부는 예년에 없던 특별조치로서 1919년 1월 5일부터 49일간 특별기도회를 개최했다. 1월 상순부터 천도교측의 권동진·오세창·최린은 교주 손병희를 사저인 상춘원으로 자주 방문, 국내외 정세를 보고했다. 이 때 손병희는 “천재일우의 호기를 무위무능하게 간과할 수는 없다”고 격려하는 한편 1월 중순경에는 박영효를 방문, 박영효 윤치호 손병희 세 사람의 명의로 한국 독립을 위한 국민대회 개최를 작성, 총독부에 제출하는 데에 협조해 달라고 했으나 확답을 받지 못했다. 이 무렵 최린은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등과 함께 송계백 등 도오쿄오의 2.8독립운동 추진 인사들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 후 1월 하순에 최린 오세창 권동진은 손병희 집에서 회합, 독립을 선언하기로 하고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와 귀족원․ 중의원, 파리강화회의의 열국 위원들,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도 한국 독립을 위한 청원서를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 무렵 손병희의 적극적인 격려에 따라 독립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라는 세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독립운동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그 사회의 신망받는 인물들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구한말의 윤용구·한규설·박영효·윤치호와 교섭, 그들을 내세우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자 젊은 종교인들이 스스로 나서게 되었는데, 이 때 최남선이 최린을 방문, 기독교측에서도 움직임이 있다는 정보를 나누게 되었고, 김도태를 파견, 정주의 이승훈에게 상경해 주도록 연락을 취했다. 당시 이승훈은 선천의 사경회에 참석하고 있었으나 연락을 받자 2월 11일 상경, 김성수의 별저에서 송진우․현상윤과 만나 천도교측의 의사를 듣고 그 이튿날 정주로 돌아가 평안도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협의하게 되었다. 그런 후 이승훈이 신분 은폐를 위해 평양 기홀병원에 잠시 입원한 적이 있는데, 이 때 남산현 교회의 신홍식 목사와 길선주 목사의 문병을 받게 되어 서울과 선천에서 협의된 일을 설명, 이들의 동의도 구하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신홍식 목사의 동의를 얻게 된 것은 그 전까지 장로회와 감리회가 각각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 때 두 교단이 접촉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승훈이 장로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동안에 서울에서는 감리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있었다. YMCA 간사로 활동하며 서울의 감리회 중앙교회 전도사로 있던 박희도와 기독신보사의 서기로 근무하며 감리회 정동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박동완을 만나 독립운동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2월 18일 경에 평양의 신홍식 목사가 서울에 와서 YMCA의 박희도를 만나 평양에서의 장로회측과의 접촉을 알려주었다. 서울에서는 또 세브란스의 이갑성도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평안도 정주와 평양, 서울에서 움직이고 있던 기독교측의 개별적인 모임들은 이승훈을 통해 하나로 정리되어 갔다.

이승훈은 정주․평양 등의 관서지방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준비하면서 2월 17일 상경했다. 그가 서울에서 박희도의 방문을 받자 신홍식 목사와 접촉한 바가 있음을 확인해 주었고, 박희도와 함께 신홍식․정춘수(원산)․오화영 목사와도 만나게 되었다. 감리회와 장로회의 공식회합이 이뤄진 셈이다. 19일 밤에는 이갑성의 집에서 감리회․장로회의 합동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이 모임에 감리회 측에서 박희도․신홍식․오화영․현순, 장로회측에서는 이승훈․이갑성․안세환이 참석하게 되었다. “이 회합에서 천도교와의 연합독립운동을 승인하게 되고 천도교와의 연락책임자로 이승훈을 지명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회합날자가 분명하지 않다.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측은 23일 함태영의 집에서 모여 천도교측과 연대하여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승훈․함태영을 교섭대표로 하여 24일 밤 천도교측의 권동진․오세창․최린을 만나 양측의 협동전선을 성립시켰다.

2월 20일경부터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은 서로 만나 거사일시와 장소를 협의하고 거사에 따른 업무도 분담했다. 독립선언서의 기초와 인쇄는 천도교측에서 맡고, 지방 분송은 기독교측과 협력키로 했다.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와 귀족원에 전달하는 업무는 천도교 측이,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에 전달하는 일은 기독교측이 맡았다. 양측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를 각각 십수명씩 선정토록 하고, 불교측도 연명에 참가하게 되었다.

불교계와의 연대는 한용운을 통해 이뤄졌다. 앞서 언급한 바, 한용운이 계동에서 발행하던 『유심』지의 필자 중에는 최린․최남선․유근․이광종․현상윤 등 한학자 민족운동가 승려 등이 있었다. 『유심』 3호를 간행할 즈음인 1918년 12월초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어 한용운을 자극했다. 이 무렵 한용운과 최린이 은밀히 만나는 것을 계기로 불교계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용운은 3.1운동 계획 당시 임제종 설립운동의 주축세력을 불교계의 민족대표로 참여시키고자 했으나, 사찰들이 깊은 산 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당시 서울에 올라와 있던 백용성 한 사람만 민족대표로 참여시킬 수 있었다. 이 때 두 분에게 영향을 받은 중앙학림 재학의 청년승려들이 독립선언서 배포에 널리 힘썼다.

 

 

3. 3․1만세운동의 전개

3․1만세운동의 전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자료와 연구들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상론하지 않겠다. 다만 독립만세운동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지역과 남녀노소, 신분과 이념, 종교와 신앙의 벽을 넘어 혼연일체로 승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국내외의 운동 상황과 그 결과를 언급하는 선에서 그치고자 한다.

[3․1만세운동: 국내] 1919년 3월 1일 낮 12시 경부터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이기 시작하여 오후 2시까지 길선주·유여대·정춘수·김병조 4명을 제외한 29명이 참석, 이종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서 최린이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을 통고했다. 대표 29명은 손병희를 필두로 다섯 대의 자동차에 분승, 일경에 연행되었다. 불참한 4사람 중 세 사람은 그날 늦게 도착했고, 김병조는 상해로 탈출했다.

그 시각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대표를 기다리고 있던 학생대표 10여명이 태화관에 와서 대표들의 파고다 공원 합류를 요청했으나 손병희의 반대로 대표들이 움직이지 않게 되자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에 나서게 되었다.

3월 1일 당일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은 서울을 포함한 8-9곳이다. 확인된 곳은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정주,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이었다. 첫날 만세운동에 이어 그 이튿날에는 함흥, 해주, 수안, 황주, 중화, 강서, 대동 등지에서 일어났고, 사흘 째 되는 3월 3일에는 고종의 인산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산, 개성, 사리원, 수안, 송림, 곡산, 통천 등지에서 일어났다. 만세시위운동은 4월말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4월 이후 만세운동이 퇴조하게 된 데는 일본 군경의 가혹한 탄압 외에,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문제를 논의하지 않기로 했다는 보도가 운동의 추동력을 고갈시켰기 때문이다. 그 뒤 만세시위운동 대신 대중조직운동과 무장투쟁이 나타나게 된 것은 민중들이 가졌던 뜨거운 독립열망 때문이었다. 4월 1일 67회나 일어나 정점을 이루었던 만세운동은 4월 11일까지 매일 10회 이상 일어났다. 50회 이상 일어난 날만 3일(3.27, 4.2, 4.3)이 있었고, 30회 이상 일어난 날도 15일이나 되었다. 시위참가자는 서울의 수십만을 비롯하여 의주 3만명, 강화읍 2만명, 합천 삼가 1만명, 삭주군 8천명, 선천읍 6천명이나 되었다.(이정은, 위의 글) 시위는 총 2천(일제측 1,524)회가 넘었고 연인원도 202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 통계는 50명 이상 모인 곳만 통계를 잡은 일제 경찰 통계에 의한 것이지만,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1년 간 1천만명이 참여했다는 증언도 있다.

서울의 3.1운동에 대해 이런 묘사도 있다. “미리 뭉쳐 있던 청년 학생 중심의 행동대가 가두시위 행렬을 시작하여, 40∼50만 군중이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면서 종로 덕수궁 앞 진고개 남대문 거리 등의 시내 주요 가로를 완전히 독립 전선으로 만들”었고, 3월 3일 “국장(國葬) 당일에는 공경하는 마음에서 시위를 피했지만, 연일 가두시위를 벌이고 학생은 휴교하고 상인은 철시하고 직공들은 파업하고, 관리에게는 퇴직이 권고되었다. 조세 납부를 거부하기로 동맹을 맺고, 『독립신문』이 발간되며, 임시정부 수립 방안이 논의되며, 매국하고 적과 내통하는 무리가 탄핵되었다. 북악산과 북한산 꼭대기에 대극대기(太極大旗)가 펄럭이며, 독립문 편액에 색채를 덧칠하였다.”

3.1운동은,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을 주장했지만, 일제는 무도하게 총검으로 무차별 살육을 감행하여 한국인 사상자를 많이 내었고 교회, 학교 등 재산상에도 많은 손해를 입혔다. 46,948명이 체포, 투옥되었고(3월~5월), 2만명에 가까운 이들이 미결수 혹은 기결수로 수감되었으며, 15,900여명이 부상당했고, 7,500여명이 살해당했다. 47개의 교회당과 2개의 학교, 그리고 715채의 한국인 민가가 소각당했다.

 

[3.1만세운동의 해외 확산] 3.1운동은 국내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다. 한말 이래 해외로 나간 한국민이 거주하는 곳에서도 일어났다. 중국의 동북지역(만주)과 러시아 연해주, 미주 지역에서 각각 일어났다.

중국의 동북지역(만주) 지역은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로서 19세기 후반기에 한국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고, 일제 강점하에서는 삶의 터전을 잃은 한국인들이 남부여대하고 찾았던 곳이다. 3.1운동 당시 북간도에는 35만, 서간도에는 25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북간도에서는 간민회 간민교육회 등의 항일운동 단체가 있었고, 서간도에도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등의 교민단체가 있었다.

국내의 만세운동 소식이 들려지자 3월 13일 연길현 용정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원근 각처에서 모인 한인들과 12개 한인학교 학생들도 합류하여 용정에서 약 3만명이 운집했고, 이 때 ‘독립선언포고문’이 선포되었다. 이어서 15일부터는 연길현 이도구․두도구․용두산․수산리․국자가․구사평․마패시․화전자․삼도구 등지에서 수백명 혹은 수천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했다. 화룡현에서도 3월 13일부터 5월 1일까지 14~5차례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3월 18일의 청산리 시위는 기독교도와 천도교도와 협력하여 신자들과 학생들 900여명이 모여 시위운동을 했다. 왕청현에서도 4월 16일 백초구의 5000여명을 비롯하여 7차에 걸쳐 2만 3000여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훈춘현에서도 용정 시위 1주일 후인 20일부터 시작하여 훈춘을 중심으로 연일 수천명이 계속했고 시위 후에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무쟁투쟁을 준비하거나 국내정진대를 선발하기도 했다.

서간도의 만세운동도 유화현․통화현․환인현․관전현․장백현․흥경현․안도현․즙안현․안동현 등지에서 계속되었다. 압록강 대안의 집안현에는 우리 동포가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3월 17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어 대회구에서는 천도교인 60여명이 독립만세를 불렀고, 대평구 굉석분에서는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400여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날 납석차 교회에서도 기독교인․천도교인 600여명이 집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을 했다. 집안현의 경우 4월에 10여 차례나 만세운동이 있었다.

노령 연해주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1918년 2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운형이 노령을 방문했고, 1919년에 들어서는 동경유학생 대표가 문창범을 만났다. 2월 25일, 전로한족중앙총회는 니콜리스크에서 전로국내조선인회의를 개최했고, 여기에 간도 훈춘 지역에서도 대표를 파견했다. 국내 3.1운동 소식이 북간도 지역을 거쳐 연해주로 전해지자 3월 15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에 나섰다. 3월 17일 니콜리스크에서는 국민의회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문창범은 니콜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와서 11개국 영사관과 러시아 관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이 밖에도 니콜리스크, 라즈돌노예, 녹(둔)도, 스파스크 등지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연해주에서는 국내진공작전을 위한 동지 규합에 나섰고, 3월 26일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노인동맹단’이 조직되어, 이해 7월 강우규 의사를 파견, 9월 2일 서울역 앞에서 신임총독 사이토(齋藤實)에게 폭탄을 투하했다.

미주에서는 1919년 3월 9일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내 3.1운동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 소식을 서재필과 이승만․정한경 및 대한인국민회 각 지방회에 알렸다. 안창호는 이날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를 열고 이승만․정한경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는 독립의연금을 모집, 5월 26일까지 3만 388달러를 모급했다. 이런 모금은 뒷날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는 데에 활용되었다. 한편 4월 14일부터 16일까지는 필라델피아에서 ‘자유한인대회’가 열려 150여명이 모였다. 의장 서재필은 한국독립을 위해 미국의 여론을 일으키는 데에 노력했다. 한편 이 해에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선교부에는 ‘한국의 사정’(The Korea Situation)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여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문제에 대한 미국 교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4.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근대 한국사에서 3·1운동은 가장 위대한 역사적 사건의 하나다. 3·1운동은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을 뿐만 아니고, 세계 제 1차대전 후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재편성을 시도하던 때에 세계사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는 그 역사적 의의만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3·1운동의 민족사적 의의] 3·1운동은, 한국의 역사학계나 평가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불한이나 사회주의권에서는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그 역사적 의의는 새롭게 해석되는 등 생명력을 더해가고 있다.

3·1운동은 일제의 강점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찾으려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일제는 강점 후 기만적인 선전을 일삼았다. 한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도 분통해하지 않는 ‘열등민족’이라느니, 일제의 ‘개혁정치’에 열복(悅服)하고 있다느니 하면서 자신들의 기만적인 식민통치를 호도하려는 선전활동을 계속했다. 3·1운동은 이같은 기만적인 선전의 허구성과 일제의 거짓된 ‘개혁정치’의 실상을 폭로했다. 아울러 일제가 강점 10년 동안에 행한 통치가 한민족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하는 무단통치였고, 한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수탈통치였으며, 한민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민족말살통치였음도 아울러 폭로했다. 이 거족적인 몸부림은 한민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자유와 평등, 평화와 공존에 바탕한 완전자주독립임을 드러냈다. 일제가 3·1운동 후에 형식적으로나마 무단통치를 폐지하고 문화통치를 표방하게 된 것은 이 운동으로 강점후 10년간의 통치 자체에 심대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의 문화통치라는 것도 종래의 식민통치를 더 교활하게 비튼 것이었다.

3·1운동은 근대 한국민족운동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한말 한국 민족주의운동은 성리학에 바탕한 척사위정계, 서양의 근대적인 문물을 수용하여 사회 개혁과 부국강병을 실현하자는 개화운동계, 조선후기 농민운동(민란)을 통해 성장시켜온 반봉건 반외세를 표방해온 민중운동계로 구분된다. 이들 민족주의운동의 흐름은 반봉건․반침략․근대사회 건설이라는 관점에서 일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 앞에서는 서로간에 연대성을 공고히하여 사회개혁과 국권수호에 적극 대처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 흐름은 서로 갈등, 분열하여 민족주의의식을 동태화시키지 못했으며, 일제 강점하에서도 융합하지 못해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3·1운동은 한말 이래 여러 갈래로 산만하게 흩여졌던 민족주의 흐름을 하나의 물줄기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새로운 동력으로 만들어 민족주의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말하자면 3·1운동은 민족운동의 여러 지류들을 모아 통합된 에너지를 창출하는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3·1운동은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비롯하여, 그 뒤의 여러 가지 형태의 민족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3·1운동으로 자신감을 얻은 민족주의세력은 만주와 러시아령에서 무장독립투쟁을 강화하여 독립군 부대를 한․만, 한․러 국경지역에서 국내에 진공시켜 일본군을 공격, 승리하였다. 3·1운동 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등은 3·1운동으로 역량이 강화된 무장독립군의 투쟁의 결과였다.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단체가 40여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은 바로 3·1운동이 거둔 성과라고 할 것이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로 새롭게 부각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건립으로 구현된 민주공화정운동이다. 3·1운동은 민주공화정의 토대 위에 대한민국을 건립토록 했다. 이는 3·1운동이 ‘3·1혁명’으로 불려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민주공화정 운동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3·1운동 때다. 3·1운동 이전의 국권회복운동은, 왕조를 회복하자는 일종의 복벽(復辟)운동이었다. 복벽적 독립운동의 목표는 국왕과 양반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일종의 전근대적인 봉건사회로 회귀하는 것이었고, 대한제국의 회복을 의미했다. 그러나 3·1운동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이 세우고자 한 국가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였다. 법정에서 재판관이, 당신들이 세우려고 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냐고 물었을 때, 이승훈 등 대표들은 구왕조의 회복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라고 했다. 이 이념에 따라 건립된 것이 대한민국이고, 이를 운영하기 위한 정부가 임시정부였다. 한성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그리고 상해의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로 나타났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정부를 건립하자는 운동은 우리 역사에 유례가 없었던 혁명적 사건이었다.

3·1운동에서 뚜렷이 나타났고 상해 임정을 통해 구현된 민주국가 설립 논의는 한말에 이미 나타났던 것이다. 특히 「대동단결선언」(1917)에서 “황권(皇權) 소멸의 시(時)가 즉 민권(民權) 발생의 시”라고 하여 국민주권을 기초로 하는 민주국가 건설을 천명한 이래 「대한독립선언서」(1919.2)에서 역시 민주주의를 천명하게 되었고, 「2·8독립선언」(1919.2) 역시 한민족의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했다. 3·1운동의 민족대표들 역시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구상했던 바, 결국 그 해 4월 11일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을 통해 이를 구체화시켰다. 상해임시정부가 임시약법을 제정할 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하여 그 민주공화정 이념을 담아냈던 것이다. 따라서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약법(임시정부 헌법)은 한국 민주운동사에서 민주공화정 이념을 처음으로 실현시킨 일련의 단계이면서 구체적인 성과라고 할 것이다. 민주공화정으로 이제 모든 국민은 평등권과 자유권을 가진 주권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3·1운동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평민지도자가 등장하게 되는 것도 이와 관련된 의미깊은 변화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3·1운동은 우리 역사상 민족독립운동과 민주건설운동을 한꺼번에 담보한 중요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의 민족사적인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 3.1운동이 일어나자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중국에서는 손문계의 『국민일보』를 비롯한 각종 신문과 영자신문 등에도 보도되었다. 천두슈(陳獨秀) 리다자오(李大釗) 부사년(傅斯年) 등이 한국의 3.1운동을 소개했다. 미국에서도 ‘뉴욕타임스’ ‘연합통신(UP)' 등에서 3.1운동 관련 기사를 자주 다루었고, 미국 의회의 정치인들 중에서도 관심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특히 미국 캐나다 교회가 관심을 갖고 ‘한국의 사정’을 간행하여 교회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영국은 일본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 때문에 초기에는 관심을 표하지 않았으나, ‘제암리 사건’ 만행에 대한 서울 영사관의 보고와 주일 영국 대사의 현지 보고를 받으며 현지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일본과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가진 데다 3.1운동이 자신들의 식민지 문제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고 이 문제에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3·1운동은 세계 반제(反帝)운동과 약소민족해방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우선 3·1운동은 세계 제1차대전후 강대국에 의해 재편되고 있던 새로운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에 대해 도전한 최초의 저항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의는 뚜렷하다. 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서는 전승 연합국이 패전국에 대한 전책(戰責)을 과중하게 부과시켰고, 패전국 식민지에 대한 처리방안도 전승 강대국에 유리하도록 조정되고 있었다. 이것이 말하자면 1차 대전 이후에 형성된 새로운 세계질서인 베르사이유체제였다. 그 체제는 3·1독립선언서에서 염원하고 있던 ‘폭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는’ 것도 아니고, 제국주의의 강권침략 시대가 새로운 형태로 여전히 온존, 고수되는 신체제였다. 식민지 강대국이 피식민지 민중의 전쟁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전쟁 기간 중에 약속한 약소 국가․약소 민족의 자주독립을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오히려 식민지 수탈체제를 강화하고 있었다.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원칙도 영국 프랑스 등의 반대로 패전국 이외의 식민지, 특히 유럽의 백인 지역 이외에서는 적용될 수가 없었다. 그 말은 민족자결원칙이 아시아 아프리카에 있는, 전승국의 식민지나 전승국의 지배아래 있는 약소민족에 대해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도 전승국 일본의 강점하에 있었기 때문에 민족자결원칙이 적용될 수 없었다.

3·1운동은, 바로 이같은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강권·침략주의에 도전하는 세계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 전승국은,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되는 것을 계기로 도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약속할 것같이 보였지만, 오히려 강권·침략주의를 전승국 중심으로 더 고수하였다. 이 때 한민족은 3·1운동을 통해 전승국의 하나로서 베르사이유체제의 수혜국이라 할 일본에 저항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전승국의 이익을 튼튼히 담보하기 위해 성립시켰던 베르사이유체제에 도전했던 것이다. 베르사이유체제는 그 허구성과 한계성이 얼마 안가 드러나게 되었고, 세계는 곧 제 2차대전으로 걷잡을 수 없이 굴러가게 되었다. 3·1운동은 베르사이유체제에 최초로 도전했다는 점에서 그 세계사적인 의의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3·1운동이 이같이 세계의 또 다른 형태의 강권·침략주의에 맞서는 선행적인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에, 베르사이유체제 성립 과정에서 최초로 약소민족의 울분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여파는 다른 약소민족 약소국가에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독립운동이나 국권회복운동에 자극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3·1운동은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을 비롯하여 동방식민지 예속국가 인민들의 민족해방투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 몇가지를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3·1운동은 중국 북경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5·4운동’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자주 이 소식을 전했다. 당시 북경대학 교수로서 신문화운동의 지도자였던 천두슈(陳獨秀)는 「조선독립운동지감상」에서 3·1운동을 격찬하면서 중국민족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또 당시 북경대학생들의 잡지 『신조(新潮)』의 편집인이었던 시부년(傅斯年)도 3·1운동이 ‘혁명계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극찬하고 중국학생들과 국민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한편 해외 5·4운동에서는 중국인들의 국민대회에 한국 청년들이 참여, 반일문서를 돌리고 선두에서 반일투쟁을 선동했다. 때로는 임정 간부들이 중국 학생들에게 반일강연을 하기도 했다. 5·4운동이 일어난 데에는 중국의 특수한 내적인 조건이 성숙되어 이루어진 것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이같은 사례들은 한국의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3·1운동이 인도 국민회의파의 비폭력 독립운동과 인도차이나 반도․필립핀․아랍의 일부지역의 독립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1919년 4월 5일부터 시작된 인도의 ‘사티야그라하(Satyagraha, 眞理把守)’ 운동은 외부적인 자극으로서 3․1운동이 일정하게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3․1운동이 아시아 제국의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이해한 박은식은, “우리 민족은 맨주먹으로 분기하여 붉은 피로써 독립을 구하여 세계 혁명사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그 세계사적인 의의를 극찬했다. 박은식의 이같은 평가가 바로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라고 생각된다.

 

5. 3·1운동과 기독교

[삼일운동과 기독교]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천도교 불교와 제휴하여 이 운동을 선도했다. 그러나 기독교계사 당시 선도적으로 참여했음에도 역사의식의 결여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 나아가 3.1운동 후에 훼절한 기독교 인사들 때문에 기독교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3.1운동에서 기독교지도자들은 처음에 독립청원을 내자고 했으나 천도교와의 합작과정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다. 천도교 측도 독립청원과 독립선언이 혼재해 있다가 독립선언으로 정리되었다. 또 다른 종교와의 합작에 동참할 수 있는가, 목회자가 정치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회의한 기독교 지도자가 있었고, 3월 1일 당일 선포식에 참석하지 않은 4명이 모두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이런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당시 조선 원로들이 독립불능론, 시기상조론 등을 언급할 때, 그래도 그들은 자신이 죽어야만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 이런 태도는 공판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3.1운동은 준비·점화 단계에서 전국적인 만세운동 단계, 그리고 새로운 방향 설정을 모색하는 '정리 단계' 혹은 국가건립 단계로 넘어갔다. 우선 준비(점화) 단계에서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은 거사일시와 장소를 협의하고 거사에 따른 업무도 분담했는데, 독립선언서의 기초와 인쇄는 천도교측에서 맡고, 지방 분송은 기독교측과 협력키로 했고,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와 귀족원에 전달하는 업무는 천도교 측이,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에 전달하는 일은 기독교측이 맡았다. 독립선언서명자를 모집키로 하여 16명의 기독교인이 서명했는데 5명이 더 서명자로 지원했으나 시간이 늦어 취소되었다. 점화단계의 48인 중 24명이 기독교인이다. 천도교와의 합작에 앞서 기독교계는 적어도 세 갈래(서북 장로교, 북감과 남감, 2.8독립선언에서 보이는 재동경Y 등)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첫날 봉화를 든 것은 기독교계였다. 그러나 중앙조직이 약한 기독교계가 천도교로부터 5천원을 빌렸지만, 5천원의 용도는 대부분 여행경비(중국 일본 만주와 국내 3,170원, 수감자 가족생계비 640원, 독립선언서 발송비 250, 기타 경비 80원)에 사용되었다.

지방화․전국화 단계의 기독교의 역할은 주목할 만하다.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있으면 대부분 기독교인들 중심이었다. 예를 들어 3월 1일 첫날 서울 외의 8곳이 대부분 기독교계 중심이었고, 의주와 평양은 목사들이 주동하였다. 천도교측과의 합작도 보이는데, 운동의 주동세력이 뚜렷한 지역이 311개로 나타나는데, 기독교(78지역)·천도교(66지역) 그리고 양교 합작지역이 42개 지역이다. 전국화 단계에서 기독교인의 참여정도와 관련, 체포·투옥자를 통해서만 숫자를 파악할 수 있다. 6월 30일까지 투옥자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하였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이고,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1%였다. 이 통계는 바로 기독교인의 운동량을 계량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방 자료를 보면 기독교인 여부가 빠진 경우가 많다.

이 통계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때 한국의 인구가 1,600만 명 정도였는데, 기독교인은 1918년 현재 20만(장: 160,913, 북감:41,044, 남감:10,740, 계:212,703)을 상회하여 한국 인구의 1.3∼1.5%를 차지하였다. 거기에 비해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주동세력면에서 25∼38%, 체포·투옥면에서 17∼22%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대략 20∼30%로 계량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당시 1.3∼1.5%의 기독교 인구가 3.1운동에서 행한 역할은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다시 천도교의 교세와 비교해 보자. 1919년 3월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법정 진술에 의하면(그러나 이 진술은 신뢰성이 없다), 명부등재자 300만 명, 의무 부담자 200만 명이라고 하였다. 그의 진술대로라면, 이는 기독교세의 10배에 달하는 교세다. 거기에다, 19세기 말 이래 민족주의운동의 중요한 흐름인 민중사상계[東學]를 이끌어 온 세력으로, 사상면이나 교세면, 그리고 민중동원 능력면에서 광범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3.1운동에서 활동한 역량은 그보다 숫자에서 본다면 10분의 1 정도의 세력밖에 되지 않는 기독교보다 절대적인 수치에서도 뒤떨어지고 있다. 이것은 반대로 기독교가 이 운동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기독교도의 참여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일제의 박해도 다른 종교에 비해 컸다. 제암리교회당에서는 비신자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29명이 희생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 달이나 늦게(10월 4일 개회) 그것도 그 해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3.1운동으로 '미참'(未參)한 상황에서 열린 장로교 제8회 총회에서는, 사살·타살 52명(각 노회 보고), 체포된 신자 3,804명(이 가운데 목사·장로 134명: 장로교 전체 목사·장로 1,024명 가운데 13%에 해당)이나 되었다. 총회에 보고한 노회의 보고는 '대한(조선)독립운동' 혹은 '독립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이 전국화되는 단계에서 기독교가 갖는 문제 또한 없지 않았다. 3월 1일 선언 당일 기독교 대표 16명 가운데 4명이 불참하였는데, 그 이유가 납득된다 하더라도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또 당일 서울의 선언발표 장소를 명월관[泰和館]으로 옮긴 것이 선교사 베커(Becker)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기독교 운동의 한계와 관련된다고 할 것이다. 일제가 폭력으로 나오는 데도 교단적 차원의 대응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제암리의 만행을 세계에 알려 그 여론을 환기하는 데는 선교사 스코필드(Scofield) 등의 노력이 있었다. 끝으로 당시 장로교·감리교 연합기관지인〈기독신보〉등의 보도 태도는 일제의 언론 검열때문이었다고는 하나 그 대응이 대단히 미약했다고 지적된다.

 

[한국 민족운동과 기독교] 이처럼 기독교가 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기독교의 민족관이나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교육이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한말이래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민족운동의 전통을 적극 참여의 배경으로 지적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아시아·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기독교 국가의 침략을 당하였으나, 한국은 일본이라는 비기독교국가에 의해 침략을 당함으로써 기독교 이념에 입각한 독립운동이 가능했다. 한국의 기독교 민족운동은 한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을사늑약이 이뤄진 1905∼1910년 사이의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으로 장인환의 스티븐스 암살, 전덕기의 을사오적 처단 미수, 안중근(가톨릭)·우덕순(기독교)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미수 등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또 기독교계의 교단 조직화가 이 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점은 앞에서 간단하게 지적했다. 또 일제가 강점한 후 기독교회의 예배를 방해하고 설교에 제재를 가하는 등 종교적인 자유마저 박탈하려 했다. 특히 금주·금연에 관한 설교나 '다윗과 골리앗'을 주제로 한 강론도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다 강점한 지 얼마 안되어 벌인 '105인 사건'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려 한 사건이었다. 1915년에는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고 포교법을 제정하여 기독교학교의 성경공부와 채플 등을 금지하고 선교를 방해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에 대한 생존권을 위협한 데다 이제는 신앙의 자유마저 빼앗아 버리려는 것이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도 궐기치 않을 수 없었다.

끝으로 우리는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행동에서 그들의 신앙과 민족사랑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이미 모세·삼손·다윗·다니엘의 사적 등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와 대비하고 있던 한국인들은, 3.1운동의 만세시위가 한창일 때, 기독교회가 작성한〈독립단 통고문〉을 뿌렸다. 내용은, ① 매일 3시에 기도하고, ② 주일은 금식하고, ③ 매일 성경을 읽는데, 월요일-사 10(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화요일-렘 12(유다가 멸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 수요일-신 28(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받아 고통받게 되리라는 예언), 목요일-약 5(고난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기도와 인내할 것을 권면), 금요일-사 59(죄지은 백성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예언), 그리고 토요일-롬 8(성령이 주시는 생명,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등이었다. 여기서 민족운동을, 신앙고백 위에서, 신앙운동과 함께 진행시킨, 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킨 것을 엿보게 된다.

 

맺는말

3.1운동은 일제 강점 초기 생존권조차 박탈당한 한국민이 당시 세계의 한 조류인 민족자결주의의 흐름을 기민하게 활용하여 일으킨 민족독립운동이요, 이와 함께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주사회 건설운동이기도 했다. 이 운동은 비폭력의 방법으로 동양 평화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를 이룩하려는 세계사적 목표와도 연결되었다.

3.1운동에서 나타난 핵심적인 정신은 우선 민족독립과 인간해방을 위한 자주(자유)정신을 들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정치․사상․신앙․문화적 자유를 의미했다. 이는 곧 “민족의 자주적인 존영을 위한 정치적 자유”와 “민족의 생존권을 위한 경제적 독립”, “언론․집회․결사를 위한 사상적 자유”, “민족문화 창달을 위한 자유”를 의미했다. 또 3.1운동에서 나타난 ‘민주 정신’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의 건설로 구체화되었다. 군국주의 일제가 이 땅에서 ‘식민지근대화’를 앞세워 자유와 창의성을 말살하고 있는 동안에 한국민은 망명지의 어려운 여건 하에서 민주적으로 정부를 조직하고 민주 훈련을 실험해 갔다. 한국 민주화의 여정이 이렇게 깊었던 것은 그 뒤 서구화로 포장된 이승만의 위장민주주의와 일제 군국주의 아류인 박정희의 유신민주주의를 극복하는 데에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이민족 겸제(箝制)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독립정신은 자주정신의 발로다. 일제 강점기에 끊임없는 항일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이 자주정신 때문이다. 자주민은 자기 스스로 원하는 정부를 만들어냈다. 민주적이고 다수의 합의에 의해 이뤄지는 공화제는, 3.1운동의 혁명적 열정을 바탕으로 임시정부 운동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919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실험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도록 하겠다는 3.1운동의 결정적 산물이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운동은 3.1운동을 계기로 확연하게 드러났으며 그 이전과 이후를 구분할 수 있는 경계선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은 선진들이 이미 사용해 왔던 ‘3.1혁명’이라는 용어로 대체되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본다.

 

[이 글은 2014.2.26 민족문제연구소 주최, <3.1운동 제 95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3.1정신 재정립의 현재적 의의”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것을 첨삭 개고한 것이다.]

김대진  wisestar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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