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이름에 유난히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이름이 좋은 위치에 기록되어 있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모임이나 단체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헌신할 것인지 보다 자신의 업적을 남기는 것에 더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사람들의 이름을 잘 기억해주지 않는다. 또 그런 사람들에 의해 역사가 발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역사는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살면서도 자기소임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에 의해 발전하고 진보하는 법이다.

1873년 5월1일 아프리카 선교사로 일생을 바친 리빙스턴이 평소 엎드려 기도하던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의 사랑에 감동받고 그의 사역에 동참했던 현지의 원주민들은 리빙스턴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9개월의 긴 운구 과정을 거쳐 영국으로 옮겨와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이 긴 운구 과정과 장례식의 전 과정에 한 순간도 리빙스턴의 시신 곁을 떠나지 않았던 두 사람의 흑인이 있었다. 쿰바와 수지로 알려진 리빙스턴 선교사의 조수들이었다. 어쩌면 역사는 리빙스턴의 이름만 위대하게 기억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이 낯선 이름의 두 흑인이 비서와 통역자와 길 안내자, 그리고 경호원의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더라면 리빙스턴의 사역은 원천적인 장애에 직면했을 것이다.

세상은 위인의 이름을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이 이름 없이 헌신했던 사람들도 기억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결혼시키기로 하고 신부감을 구하기 위해 자기 집의 늙은 종을 먼 곳 메소포타미아로 보내는 내용이 창세기 24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 직무를 훌륭히 수행했고 그때 선택되었던 리브가는 선민의 조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큰 일을 감당했던 늙은 종의 이름이 명시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단지 짐작으로 아브라함이 아꼈던 엘리에셀이 아닐까라고 여길 뿐이다. 그는 이름을 남기지 않았으나 주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맡은 일을 지성을 다해 완수했다.

내 이름을 세상이 기억하면 어떠하고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떠한가? 세상이 기억해도 실패한 삶이 허다하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향기로운 삶 또한 수 없이 많다.

사순절이 막바지에 이르고 우리 모두는 고난의 주를 묵상하며 그의 희생을 본받으려 다짐한다. 그러나 근본으로 돌아가서 희생을 말하고 헌신을 다짐하기 전에 세상에서 무명하나 하나님 앞에서는 유명한 자가 되어야 하는 기독교인의 존재양식을 제대로 확립했으면 싶다. 이 세상의 순례를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날 내 이름을 부르며 환영하실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이름 없는 삶을 아쉬워하지 않는 초연함이 우리 삶에 숨 쉬어야 한다.

각 정당들의 공천 싸움을 지켜보면서 교회 문화 속에는 저런 추태가 없는지를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름은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면 그것으로 감사할 뿐 아닌가?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지만, 죽어서 이름 대신 향기와 감동을 남김이 나를 아끼고 품어 준 세상에 대한 진정한 도리가 아닐까 싶다. 그까짓 이름이야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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