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편집인)

오늘날 우리는 흔히 좌파, 우파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진보와 보수를 대신하는 말로 쓰고 있다. 단순히 좌파와 우파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때는 프랑스 대혁명(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 당시로 올라간다.

당시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추구했던 자코뱅 파는 의회의 왼쪽 부분에 앉았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던 지롱드 파는 의회 오른쪽에 앉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좌석의 위치를 가지고 좌파, 우파로 부르다가 이후 진보적인 성향을 '좌파'라고 하고, 보수적인 성향을 '우파'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다.

비슷한 말로 '좌익', '우익'이라는 용어 역시 같은 뜻으로 쓰인다.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를 뜻하는 이 말도 실제로 진보와 보수를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사람들에게 좌파의 사상을 심어준 헤겔과 마르크스까지 가보면 답이 있지 않을까 해서다. 물론 헤겔(1770년)보다 45년 앞서 살았던 칸트가 있지만 필자는 헤겔에서 시작하려 한다. 왜냐하면 헤겔학파는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 출판을 계기로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졌는데, 좌파에는 실증주의자와 유물론자(아마 이 계열에 마르크스가 있지 않았나 본다)들이, 우파에는 역사학파와 낭만파가 속해 있었다. 좌파는 진보적이고도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다면 우파는 정치와 종교에서 기존 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보수적 성향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은 야훼라는 이름을 부르기조차 어려워했다. 예수 이후 초기 기독교는 엄청난 박해 속에 존립이 위태로울 지경에 까지 이르렀지만 성령의 강한 능력으로 교회는 살아 역사했고 오히려 AD 313년 밀라도 칙령 이후 기독교는 제왕적 자리에 앉았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쟁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루터 이후 300여년이 흐른 후 독일에서 헤겔이 등장한다. 그는 유신론을 철학적 기독교라는 범신론으로 개조시킴으로 진정한 기독교 정신을 상실시켰다.

그의 사상을 따랐던 칼 마르크스가 등장한다. 그는 하나님을 배제한 파라다이스를 꿈꿨다. 기존의 질서는 하나님이 세운 것이기에 그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것이 소위 맑시즘이다. 그 맑시즘이 스탈린에서 실패하자 거기에 휴머니즘을 얹어 네오맑시즘을 만들어 냈고 그것이 지금 온 세상을 덮어가고 있다. 지금의 좌파는 바로 그런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진보와 보수 

진보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현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사회 체제를 개혁함으로서 변화를 추구하는 입장을 따른다. 사회변혁은 제도 개혁을 통한 방법도 있을 수 있고, 혁명 등 급진적인 방법을 통한 변혁도 있을 수 있는데 앞의 경우처럼 제도 개혁을 통한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을 <온건한 진보>라고 본다면, 혁명 등을 통해 빠른 시일 내에 사회 변혁을 시도하려는 세력을 급진 또는 극좌파라고 한다.

반면 변화를 바라지 않고 기존의 사회체제제도를 유지함으로서 사회의 현상 유지를 지속시켜 혼란을 피하려는 집단을 보수파라고 분류하는데, 보수파 역시 기존 체제를 유지하되 잘못된 제도를 수정해 가면서 사회 발전을 추구하려는 집단을 온건 보수, 기존 체제 유지를 위해서 물리력 동원을 불사하는 집단을 극보수 혹은 극우파로 분류하게 된다.

 

기독교는 보수인가?

기독교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목사들까지 서슴없이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하면서 그 정치 노선을 따르고 보수를 비판한다. 과연 옳은 것인가? 보수는 기존 질서를 지키는 것이 보수이다. 그 기존 질서는 하나님이 세운 질서이다. 사탄은 그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엄청난 도전을 아담 하와에서부터 시도해 왔다.

맑시즘은 급진적 변혁을 시도하여 공산주의를 시도했던 나라들마다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엄청난 핍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했다. 스탈린이 구 소련을 감옥화하자 맑시니즘들이 모여 새로운 길을 모색했는데, 그것이 네오맑시즘이다.

소위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무장한 네오맑시즘은 동성애 등으로 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라는 사람을 사용한 사탄의 2차 공격이다. 필자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 아담 하와를 공격하여 타락케 한 것이 1차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으로 구원 받은 자들의 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2차 공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네오맑시즘은 종교개혁의 꽃을 피운 유럽을 삼키고 청교도가 세운 미국까지 장악했다. UN의 요원들이 이런 사상으로 무장하여 세계 각국에 동성애를 합법화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딱 한 가지 인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이렇게 야단일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다. 중요한 기둥이 하나 무너지면 교회가 지켜온 하나님의 질서는 도미노처럼 무너질 것이다. 소돔 고모라가 그랬다. 천하 역사에 사탄은 그것이 저들의 전략이었다. 마치 낙타가 처음에는 코만 천막에 들였다가 점점 천막을 차지하고 주인은 밖으로 쫓아내는 그런 전략이고 그것이 지금 온 세계에 먹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당연 보수에 속하였고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광의적으로 보면 세상의 정치적 보수들은 그들이 불신자일지라도 사실 기독교의 질서를 지키는 일에 함께하는 동지들이다. 우리가 그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회를 지키는 것이다. 지금 교회는 저들의 한 표에 운명이 걸려 있다.

이렇게 말하면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어디 갔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 하는가? 그들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리하는 것은 저들이 양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양심에 하나님의 계명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타락하여 1-4계명은 흐려졌지만 5-10계명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새겨있다. 그리고 그 양심의 법은 그것이 죄라고 분명히 말한다. 물론 화인 맞은 양심은 그것마저도 부인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양심을 가진 보수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물론 더 나은 삶을 위한 진보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리하더라도 하나님의 법을 깨트리지 않는 선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유물론자의 산물인 네오맑시즘과 교회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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