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제가 작년 종교개혁기념주일에 우리교회에서 설교했던 내용입니다. 그래서 좀 긴 느낌도 있고, 부족한 부분도 많지만 문득 생각이나서 나누고자 올립니다. 부족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라며, 그래도 우리 코닷운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다. ‘싸움닭’과 같은 성향의 사람이 아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피스메이커-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우리 주님은 평화의 주님이시다(에베소서2:14-18). 주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이 모두 우리의 평화와 관계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도 평화의 나라다(로마서14:17). 평화란 그만큼 중요한 기독교의 특징이다. 그리스도인은 평화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때로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평화를 만들기 위해 저항해야 할 때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개신교도들이다. 프로테스탄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로테스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것에 대하여는 항의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우리는 <평화주의자>가 되어야 하면서 동시에 <저항정신>을 가진 개혁자들이 되어야 한다. ‘중국인은 불의는 참지만, 불이익은 못 참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불이익은 참을 수 있지만, 불의는 참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불의에 대하여는 참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

  ‘행동하는 신앙인을 위한 자끄엘룰의 묵상집’(찰스 링마)을 읽었다. 자끄엘룰은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개신교 사상가로, 특별히 ‘현대세계와 신앙의 관계’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한 교수이다. 그 책들에 나오는 몇 구절을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절실한 <저항정신>을 생각하고자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저항정신’이 있어야 한다. ‘야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이다. 산상설교의 8번째 복(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이 그것을 말하고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평화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저항하다가 핍박받는 삶이다. 그래야 천국을, 하늘의 상을 얻을 수 있다.

  자끄엘룰의 묵상집은 1년 365일 매일 하나씩 묵상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1월1일 첫 페이지에 <저항>이란 제목을 달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축복하고 사회에 영적인 가치를 불어넣어야 하지만, 이 세상의 세속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분명히 대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악과 억압에 대항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3월28일엔 <조류를 거슬러서>라는 제목으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조류에 거슬러 헤엄치는 존재”라고 말한다. 바울사도도 그렇게 말씀했다(로마서12:2).
  12월1일엔 <세상에서>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이 우리를 만들어 간다.”고 경고한다.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 부르셨다(마태복음5:13-14). 그런데 우리가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세상이 우리를 세속화 시킬 것이란 말이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2월4일에 독일의 중상류층 대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 배경 덕분에 디트리히는 나치 하에서도 목사와 신학교교장으로 활동했고, 나치에 정보요원으로 ‘채용’되기도 하는 등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앙양심을 좇아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모든 특권을 과감히 버렸다. 그는 단지 유대인 크리스천들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 독일의 박해에 반대하여 정면으로 발언한 몇 안 되는 독일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국 히틀러 암살 계획에까지 가담하게 되었다. 그런데 1943년 4월5일 체포되고, 결국 1945년 4월 9일에 처형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는 할머니 율리 본회퍼의 영향으로 대학시절부터 저항을 향한 확고한 길을 걸었다. 1933년 4월에 모든 유대인들의 사업체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그런데 연세가 90세나 되시는 할머니께서는 나치 돌격대원들을 지나치고 통행 차단물들을 통과하여 자신이 항상 다니던 유대인 상점에 갔다. 할머니는 상점에 들어가기 전에 통해 차단물 앞에 서 있던 나치 돌격대원들에게 “나는 버터를 늘 사던 곳에서 산다우.”라고 말했다. 1936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디트리히는 장례식에서 할머니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타협하지 않을 권리, 자유인으로서 자유롭게 발언하기, 사적이며 공적인 삶의 성실함과 단순함 - 할머니는 이런 것들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히틀러와 히틀러의 유대인 정책에 반대했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한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떤 미친 사람이 무고한 행인들에게 차를 몰고 돌진하는 것을 본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그저 그 끔찍한 재앙을 지켜보다가 부상당하는 사람을 돌보고  죽은 사람들을 장사 지내는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운전자의 손에서 억지로라도 운전대를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를 암살하는 일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의 추도식에서 영국교회의 지도자 조지 벨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고귀한 순교자 무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신앙을 가진 영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악의 공격에 저항한 것을 대표하며, 또한 인간양심이 도덕적이며 정치적으로 불의와 잔인함에 맞선 것을 대표합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참으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들이다(에베소서2:20). 그렇다면 우리도 신앙과 양심을 따라 세상의 악과 불의와 잔인함에 맞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에 대항하여 저항해야 하는가?
1. 무엇보다도 먼저 타락한 자아, 세속적인 자아에게 대항해야 한다.
  자신의 속에서 일어나는 육체와 마음의 정욕에 저항해야 한다.
(제자)마태복음16:24/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위 말씀은 앞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라고 질책하신 후에 하신 말씀이다.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속적 욕망을 저항해야 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저항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모세)히브리서11:24-26/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 그렇게 하기 위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한다.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아무도 자기 힘으로 못한다(갈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2. 불의한 타인의 요구와 불의한 국가권력에 저항해야 한다.
(모세)히브리서11:27/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의 부모)히브리서11:23/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산파)출애굽기1:17/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 디트리히 본회퍼는 “교회는 국가가 범한 악한 일에 강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설교와 회의에서 계속 주장했다. 당시 독일에는 히틀러를 지지하기로 서약하고 아리안조항(부모나 조부모가 유대인인 사람들은 정부 기관에서 일할 수 없도록 금지한 법)을 받아들인 독일 개신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이 있었고, 그런 주장에 반대하여1934년에 결성된 고백교회가 있었다. 고백교회는 히틀러의 정책들에 반대하는 목사들의 비공식적인 조직체였다. 본회퍼는 고백교회에 가담하였다.
  이만열국사편찬위원장은 작년 10월 6일, '한국교회와 과거사 극복'을 주제로 열린 한 심포지엄에서,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부터 신군부 정권까지 협력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 때는 한국교회가 부정선거까지 모의했고, 5.16 이후 군사정권에 협력했을 뿐 아니라 전두환을 축복해줬다.”고 말했다.
  예언자적인 외침은 포기하더라도 ‘용기’가 없어서, 정권에 대해 비판은 못할망정 정교 분리한다면서 한편으로 축복을 해준 것은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3. 부당한 교회의 결정에도 저항해야 한다.
마틴 루터도 면죄부, 연옥등 교회의 잘못된 결정에 반기를 들어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교회정치 원리 제1조 ‘양심의 자유’)
  양심을 주재하시는 이는 하나님 뿐 이시다. 그(하나님)가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그 말씀에 위반되거나 탈선되는 사람의 명령이나 교리를 받지 않게 양심의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종교에 관계되는 각 항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자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
-개인의 신앙양심의 자유가 우선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1장 3항)
1. 교회가 보다 나은 정치와 보다 나은 건덕을 위해 일반적으로 총회와 공의회라고 불리우는 회의가 필요하다....
2....이 회에서 발표한 명령이나 결정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는 한... 그것들을 만드신 권세 때문에 존경과 복종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3. 사도로부터 모든 총회와 공의회는 전체회의나 지방회의의 구별 없이 과오를 범할 수도 있으며, 여러 번 과오를 범했다. 그러므로 그 회의를 신앙과 생활의 법칙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에 있어서 도움으로 여겨야 한다.
* 우리의 조상들도 제38회 장로교단 총회가 신사참배 가결했지만 불복하고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 그러므로 어떤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잘 판단할 수 있도록 진리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성경을 많이 공부하여야 한다.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 우리 모두 주님처럼 평화주의자가 되기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주님의 평화가 임하고, 하늘의 평화가 이루어지기 바란다. 그런데 이 땅에는 평화를 깨뜨리는 불의한 세력들이 있다. 그것이 때로 우리 자신이기도 하고, 혹은 국가권력, 심지어 교회의 결정도 그럴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공의와 신앙과 양심을 따라 저항해야 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더라도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주님의 나라 평화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게 하여야 한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하늘의 상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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