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편집인)

어린 시절 이름 때문에 많은 놀림감이 되었다. 헌옷이 뭐냐? 차라리 새옷이라 하지. 그럴 때마다 이름을 지어주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하루는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는지에 대해 아버지께 여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니, 함 생각해 보거래이. 법헌 자에 구슬옥, 그래서 憲玉인데, 네 마음이 법과 같이 맑으라고 지은 이름이야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그때부터 이름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입으로 말을 뱉기 전에 3분만 생각하면 실수를 면하고 싸움도 그친다고 한다. 부부지간에 친구지간에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그러나 “니, 함 생각해 보거래이”라는 말을 누구에게서 듣는 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에게 찾아와 그 말로 유혹하고 타락의 길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에덴동산에 찾아온 “니, 함 생각해 보거래이”

하나님은 아담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모든 과실은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겼고 하와가 왔을 때, 그 하와에게도 신신당부를 하면서 아예 나무의 근처에도 가지 말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사람을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려고 선악과를 몰래 따다가 하와를 속이거나 먹어보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하와에게 이렇게 말한다. “니, 함 생각해 보거래이. 하나님이 설마 먹고 죽는 열매를 만들어 동산에 두었겠냐? 결코 죽지 않는다.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거야. 아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잖아? 그러면 선악을 알게 되는데 뭐가 나쁜 거냐? 니, 함 곰곰이 생각해 보거래이.”

하와는 며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선악을 알아야 죄를 안 지을 것 아니냐. 깊히 생각할수록 맞다는 확신이 든다. 그래서 남편이 그렇게 금지하였지만 그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보고 판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찾아가 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였다. 이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결코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따서 먹어보니 죽기는 커녕 맛만 있었다. 그래서 남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남편에게도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걸작품인 사람은 타락한 것이다.

 

칸트에게 찾아온 “니, 함 생각해 보거래이”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1483-1546)가 95개조 반박문을 내놓고 종교개혁을 시작하기 까지 세상은 로마 가톨릭에 눌려 있었다. 함부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루터 이후 200여년이 지난 뒤 칸트(1724-1804)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마귀는 칸트에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칸트는 생각해 보았다. 당시 사람이 인식하는 것은 합리론, 즉 인간의 이성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지식이냐, 아니면 경험에 의한 것이냐 하는 논리의 충돌이 있었는데, 칸트는 어느 한쪽에 서지 않고 둘을 합치는 일을 한다. 인식의 형식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지만 그 인식의 내용은 경험으로 얻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과거의 철학은 인간에게 전혀 올바르지 못한 자리를 부여하여 인간을 외부 사물과 상황에 완전히 의존하는 기계로 만들었다. 과거의 철학은 인간을 세계 속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능동적인 사람이다. 인간은 그 자신이 근원적으로 그의 표상과 개념의 창조자이며, 그의 모든 행위의 창시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칸트가 종교철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는 [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와 [만물의 종말]을 내놓았다. 칸트에서 하나님을 주제로 하지 않으면서 그 피조물인 인간을 논의하는 철학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인간은 이 세상의 부속물이 아니라 주인공이며, 그 자신이 모든 것을 만드는 창조자이며 창시자라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은 사람이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지도하는 신이라고만 생각하게 하였다.

칸트가 46세쯤에 헤겔(1770-1831)이라는 사람이 태어난다. 그는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과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을 종합한 자신의 철학을 절대적 관념론으로 주장하면서 등장한다. 관념론은 기본적으로 사고, 이념, 이성, 정신을 앞세운다. 그러나 이 가운데 피히테는 자아(정신) 쪽을 좀 더 강조하는 편이었고, 셸링은 자연 쪽에 조금 더 치우친 편이었다. 그리고 헤겔은 이 두 사람의 철학을 종합하려 했다. 그는 인식의 세 단계를 정립하면서 변증법적 3단계의 논리를 성립하였다. 헤겔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서게 하는 철학을 굳건히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게로 가있는 사람들의 눈을 사람에게로 향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헤겔학파 중에는 복음서를 일종의 신화라고 주장하는 슈트라우스라는 신학자가 있었다. 그가 그런 사상 위에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출간하자 헤겔학파는 둘로 나누어지는데, 좌파에는 실존주의자와 유물론자들이, 우파에는 역사학파와 낭만파가 속해 있었다. 좌파가 진보적이고도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다면, 우파는 정치와 종교에서의 기존 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보수적 성향을 나타냈다.

어쨌든 그의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현대의 세 가지 중요한 철학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 그리고 실용주의다.

 

마르크스에게 찾아온 “니 함 생각해 보거래이”

마르크스(1818-1883)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거래이”라는 질문을 받은 것 같다. 그는 헤겔학파의 극좌파의 일원이었지만  헤겔철학의 타협적 경향,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 그 원리와 현실의 사회관계 및 그 변혁의 과제 사이에서 발견되는 불일치를 발견하고 헤겔로부터 이탈, 더 나아가서는 청년헤겔학파에도 만족하지 않고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연구로 나아갔다.

유물론의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질적이다.”라는 말은 정신보다는 모든 존재(사람을 포함한)는 물질로 규정한다. 거기에 영혼과 하나님은 존재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 그는 하나님이 없는 유토피아를 이상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주의(맑시즘)이다. 그리고 그에게 기회가 왔다. 1847년에 마르크스는 브뤼셀에 살면서 여기에서 비밀결사 '공산주의자동맹'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제2차 대회는 마르크스와 유물론자 엥겔스에게 그 강령의 초안을 의뢰했다. 이렇게 해서 유명한 『공산당 선언』(1848년 3월 발표)이 나오게 되고,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 입장이 거기에서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이 없는 유물론에 기초한 공산주의로 인해 얼마나 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성도들이 피를 흘렸는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철학은 사람을 살리는 철학이 아니라 죽이는 철학임을 절실히 깨닫게 한다. 결국 니체에 와서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언하게 된다.

 

프로이트에게 찾아온 “니, 함 생각해 보거래이“

프로이트(1856-1939)는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였다. 정신분석학자인 그에게 찾아온 마귀는 “니, 성에 대해서 함 생각해 보거래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의 성 이론은 당시 유럽인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때 마귀는 적절한 시기에 그를 찾은 것 같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만 해도 유럽인들은 타인의 사생활을 언급하는 것은 터부시 해왔다. 비록 상류사회가 성적인 문란으로 가득 차 있었을지라도 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 금기를 깨고 성문제를 공론화했다. 그의 지론은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인 욕망이 있는데, 그 중 성욕을 억압하면 큰 문제가 발생하기에 성욕은 반드시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는 두 종류의 억압을 이야기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억압(억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억압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욕망을 드러내야 하고 사회적으로는 저항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의 제자 중에 빌헬름 라이히(1897-1957)가 있었다. 그는 정신분석과 공산주의를 접목하여 욕망의 문제를 사회적 계급관계로 결부시켜 오르가즘 이론을 세웠다. 오르가즘 이론이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고 계급 없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 3회에 오르가즘이 필요하다는 이론이다.

칸트, 헤겔의 인간중심의 철학에서 인권이 나온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서 유물론적 인간의 행복이 나온다. 프로이트와 라이히에서 성적만족 이론이 나온다. 이들의 생각, 철학은 어떤 무엇을 하기 위한 기초 이론이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곧 인권을 흔들 수 없는 절대 가치로 둔 성평등, 성적취향, 동성애, 동성결혼 등이 나오게 한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배제한 유물론적 사관에서 소위 말하면 철학자들이라고 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단은 99%가 틀려서가 아니라 1%가 틀려서다.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의 주장이나 이론은 사람이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에 단 하나만 깨고 우리식으로 살자고 하는데 뭐가 나쁘냐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한다.

그들이 깨자고 하는 것은 많은 율법 가운데 단 하나이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 중에서 한가지일 뿐이지만 가장 중요한 질서이다. 그런데, 동성애를 허용하자는 말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암묵적으로 지지하기도 하고 침묵하기도 한다. 그것은 모두가 동질적 동성애 찬성론자들이다.

그러나 교회가 그 하나를 허용하면 깨진 바가지는 시간이 지나면 오염된 물이 가득 차게 될 것이 뻔하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그것이다.

마귀는 오늘도 어떤 사람에게 찾아가 그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지 모른다. “니, 함 생각해 보거래이” 그래서 사람의 논리와 철학으로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다. 사회는 그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의 말씀, 성경 안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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