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 목사님께 드리는 질문

   
 김영봉 목사님. 한 번도 얼굴을 마주 대하고 정식으로 뵙지도, 인사하지도 못하고 좋은 글과 책으로 그저 거울을 보는 듯 희미하게 뵙기만 하는 제가 감히 인사를 드립니다. 바울이 큰 핍박과 환란 가운데 낳은 교회인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향하여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라고 했는데(살전 2:17), 저는 얼굴을 뵌 적은 없지만 마음으로는 목사님이 왠지 가깝게 느끼고 있답니다. 멀리 계신 것이 못내 안타깝지만, 그리워하고, 존경할 만한 선생이 제게 있다는 것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학자로서 쓰신 <마태복음 주석 II>는 지금도 마태복음 이해의 전거로 자주 사용합니다. 그리고 <사귐의 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본질과 정신, 방법까지 찬찬히 일러 주셔서 배운 바 크고,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어찌하든지 부자가 되겠다고 안달복달하는 세태에 일침을 가하고 정도를 밝혀 주셔서 기쁘게 읽었습니다. 이럴진대 실제로 만나게 되면, 글을 통해서 알던 실체를 경험하면 흥분과 기대로 떨릴 듯 합니다. 학자와 목사, 말과 글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제게 김 목사님은 한 모델인 까닭입니다.

 최근 <기독교 사상> 2월호에 실렸던 목사님의 설교문, “성경에는 성공이 없다”를 인터넷 상에서 우연찮게 낚게 되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내려 받아 천천히 읽어 보았습니다. 성공 신화의 기독교 버전인 고지론과 청부론이 기승을 부리는 때에 시의적절하고 성서 신학자다운 논리와 깊이, 설교자와 목회자의 열정과 영성이 곳곳에 묻어나더군요. 성경에는 성공이 없고, 있다만 성실만이 있다는 말씀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성실 보다는 성공을 탐하는 우리의 얄팍한 신앙을 꼬집을 때는 아프면서도 참 시원했습니다. 성실이 성공이라는 말씀에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목사님. 그럼에도 예전부터 한 가지 여쭙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질문이 아니라 반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 자신이 반론을 입론할 자신도 없었고, 만약에 반론이 되면 지금까지 제 자신이 생각해 왔던 것들과 암묵적으로 충돌한다는 것을 알기에 주춤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목사님의 글에 아주 사소한 것이기에 침소봉대하여 ‘아니요’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닌데다가 현실적으로 그랬다가는 목사님의 죽비의 한 외침에 나가떨어질 것이 환히 보이기에 조심스레 여쭙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이렇게 의문점을 풀어 보려고 합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경의 다양성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저는 모름지기 신학이라면 성서와 일관된 논리(coherence)와 더불어 현실에 적합한 적응력(relevance)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실 이론 정합성과 현실 적합성은 딱히 분리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간단히 일치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찌되었건 논리의 미적 아름다움과 실천의 변혁 능력이 우리 시대에, 아니 모든 시대의 신학의 당위이자 요청이라고 봅니다. 해서 몰트만은 신앙은 언제나 상관성과 정체성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하는 것이겠지요.(<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3-32)

 우선 성경에서 과연 성공이 없는가를 골똘히 짚어 보았습니다. 김이곤 선생의 논문 “구약 성서의 유형물질적 사유”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구약 성서의 고난 신학>) 그 글이 쓰여진 연대로 미루어 짐작건대 우리 역사의 지평에 유물론이 맹위를 떨치고 신학 역시 유물론적 사유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으로 봐서 그분의 글은 유물론적 신학의 정초와 얼마의 관련이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성서는 잘못된 현실을 은폐하고 합리화하는 관념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는 변혁적이고 물질주의적 사고 유형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259)

 하나님이 구체적 물질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것과 인간이란 물질적 존재라는 것을 추적하시면서 그분이 내린 결론에 가까운 한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역사 이해는, 실로 야훼를 해방하고 심판하는 ‘역사의 신’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땅과 생명을 허락하는 ‘풍요의 신’으로 이해하기도 하는 구약적 이해를 잘 반영하고 이T다고 하겠다.”(279)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희망은 “하늘, 땅, 곡식, 그리고 포도주와 기름의 회복과 결부된다”(281)고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쟈크 엘룰의 말을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엘룰은 그의 책, <하나님이냐 돈이냐>에서 부의 위험성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부를 다루는 곳에서 구약이 신약과 달리 부에 대해 긍정적이며, 물질적 보상과 축복으로서의 부가 용인되고 있다고 합니다.(71-80)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논리는 성경을 과장한 논리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이 논리가 비록 칼빈주의의 왜곡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경 본문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논리는 구약성경에 매우 충실한 논리나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71)

 

물론 김이곤 선생이 당신의 논문이 그리스도인들의 성공 신학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된다면 놀라서 펄쩍 뛸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의 의도는 구약의 물질적 사고가 역사 변혁적이라는 것이지 번영 신학의 합리화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엘룰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위의 인용문은 지극한 예외에 해당되지요. 돈의 권세가 제 깜냥도 모르고 하나님 자리도 넘보는 마당에 그런 조그마한 빈틈이 결국 아담과 하와의 잘못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이는 두 사람의 글을 오도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고, 잘못 적용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다시 밝혀야 오해를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첨언한 것입니다.

 저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를 야훼 신앙 속에 편입시켰던 이스라엘의 지혜와 희망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구약에 등장하는 의로운 부자들, 부를 추구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을 구함으로 풍성한 축복을 향유했던 족장들이 부를 하나님의 축복의 현상으로 기술하고 있는 구약의 본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더 나아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징조로 여겼던 이들에게 물질적 부와 자녀의 출산은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으로 여기던 구약의 백성들의 신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성서의 다양한 본문과 사상을 어느 하나로 축소하지도 않으면서, 일관되고 조화롭게 풀어내는 것이 어렵고도 중요한 과업입니다. 부와 관련해서 가난이 복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부와 가난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다고 그 한 말씀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래서 삐져나오는 본문을 우격다짐으로 일치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신대원생 시절의 구약 선생님은 누누이 구약을 구약으로 읽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지요. 어차피 유대교가 아니고 기독교인 한에 있어서 종내는 신약으로 구약 해석의 지침과 기준을 삼더라도 처음부터 너무 성급하게 다가서면 안 된다고요.

 그래서 저는 예전에 목사님과 김동호 목사님 사이의 청부론 논쟁에 “축복과 기복의 가파른 경계에서”라는 서평(<공격적 책읽기>, 1장)에서 두 분의 입장을 ‘자발적 가난’과 ‘자발적 나눔’으로 편의상 구분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이 해석학적으로 우선권을 지닌다는 원칙을 고수한다면, 그래서 맘몬은 우리 삶에 신이 되고자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을 견지한다면, 재물의 전적인 포기를 가르치는 마가복음과 재물의 올바른 사용을 가르치는 누가복음이 그리 대립적이지 않다고 적었습니다.

 요는 김이곤과 엘룰의 글을 통해서 본 바로는 성경에는 어떠한 성공도, 축복도, 부요함도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요? 그리고 그것은 성서의 다양성과 성서를 성서로 읽어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요체가 다소 어긋나지는 않는지요? 단지 성공이라는 단어 자구 하나만 가지고 성경, 특히 구약의 성공 이해를 재단하는 것이 제게는 조금 과하게 보이는데 어리석은 제게 깨우침을 주시기를 청원합니다. 혹여 어쭙잖은 저의 글이 천박한 실용주의와 실증주의의 복음 선포, “부자 되세요” “성공 하세요”라는 구호가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질곡을 바로잡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지 저어하면서 질문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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