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동 목사님을 그리워 하며.

천헌옥 목사

1972년부터 필자는 삼일교회에 등록하여 한상동 목사님을 조금 가까운 곳에서 교제할 수 있었다. 그분의 설교는 제대로 기억하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아직도 뇌리에 쟁쟁히 남아 있는 것은 언제나 또 거의 모든 설교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분은 확실한 투쟁신앙이 있었다. 1973년 고려신학대학에 입학원서를 낼 때 흔쾌히 나의 추천서를 써 주셨다. 1974년 1월 필자가 결혼을 하는 날 당시 한 목사님은 삼일교회를 은퇴하신 후였는데 주례를 해 주시면서 획기적인 선언을 하셨다.


"오늘 결혼은 내가 학장으로서 마지막이며 또 목사로서 은퇴이후 이제 마지막이 될 것 같지만 획기적으로 개혁의 시발점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하셨는데 그 획기적인 일은 바로 결혼 예배 시간을 1시간으로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의 결혼 예배는 빠르면 1시간 30분 평균 2시간 어떤 이는 2시간 30분을 해서 여름날에는 신부가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로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1시간만 하시겠다니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참 빨리도 마쳤다. 지금은 일반 예식장에서는 10-15분이면 끝나고 목사가 주례를 해도 20-30분 안에 다 마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그 일을 시발로 점차 결혼예배의 시간이 짧아진 것은 사실이다. 교단의 어른이 하셨는데 어찌 본보기가 아닐 수 있었겠는가.

한상동 목사님이 은퇴를 앞둔 해였다. 어느 주일인가 헌금 시간이었다. 목사님은 헌금자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고 있었다. (그 때는 모든 교회가 그랬다) 십일조 명단을 다 부르고 감사헌금 명단을 부르는데 "방 석대씨 감사헌금 하셨습니다."


교회 의자에 방석을 깔기 위하여 헌금을 했는데 이 집사님이 현금이 없어서 작정을 했다가 몇 달 뒤에 그 작정헌금을 드렸던 것이다. 그것을 "방석대"라고 앞면에 쓰고 뒷면에 자기 이름을 썼는데 목사님은 뒷면은 보지 못하시고 앞면에 적힌 방석대를 방 석대씨로 불렀던 것이다.

그제야 목사님은 급히 그 봉투 뒷면을 보시더니 “아 어느 집사님이 낸 방석대금 작정한 것 내셨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엄숙한 예배시간이었지만 교회는 온통 웃음바다가 되고 방 석대씨는 오랫동안 우리의 화제 거리가 되었다.

모임에서도 다 온줄 알면서 "누가 안왔나? 방석대씨가 안 왔구먼..."  하고 웃기도 했으니까 가히 그 위트의 위력이란 어디까지인지 끝이 없이 이어져 한참을 즐겁게 하였다.

한상동 목사님에게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트레이드마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 유명한 축도였다. 그분이 축도를 하면 정말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를 감싸는 듯한 포근함을 느끼는 것이다. 


드디어 한 목사님이 은퇴를 하시게 되었다. 마지막 설교를 하시고 축도를 하신다. "지금은............." 그 순간 누가 처음인지 모르게 모든 교인들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쳐 소리를 죽이지 못하고 그야말로 목놓아 펑펑 울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눈물의 축도였다.

축도만으로도 성도를 울릴 수 있는 그런 카리스마를 가진 목사가 그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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