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제기

   
현재 한국사회는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한국은 해방 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은 최근 10년 동안 여기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교육에 원인이 있다. 현재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교과서가 이런 선진화에 걸맞지 못하다는 것이다. 세계는 국제화를 하고 있는데, 역사교육은 지나친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으며, 세계는 시장경제를 통하여 발전하는데, 사회교육은 경쟁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런 교육체재를 가지고는 한국이 앞으로 더 나갈 수 없다.

최근 한국사회는 이런 잘못된 교육을 고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교과서를 개발하여 학생들에게 자본주의의 시장경제를 바로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또 한국의 역사학자들 가운데서는 현재의 교과서의 역사교육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이것을 수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필자는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역사교과서가 기독교를 바로 다루고 있는가를 살펴 보려고 한다. 사실 한국의 국사교과서는 한국의 종교를 심중있게 다루고 있다. 즉 불교와 유교가 과거 한국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상당한 부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국사교과서가 한국 근대사를 다루면서 한국 근대사회에 새롭게 들어온 기독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다루고 있다. 사실 과거 불교나 유교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 못지않게 한국의 근대사회에 기독교가 영향을 미쳐왔다. 하지만 한국의 국사교과서는 이것을 외면하고 있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한국의 국사교과서 보다는 오히려 금성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의 역사교육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필수과목으로 배우는 국사가 있고, 2, 3학년 때 선택으로 배우는 [한국 근현대사]가 있다. 국사교과서는 국정교과서이며, [한국 근현대사]는 검정교과서이다. 한국 근현대사는 국사에서 보다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역사교육의 비중으로 보아서 국사가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근현대사에 속하고 있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현재의 교과서가 개신교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현재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교육부의 편수방침을 따라서 저술된 것으로 6종이 있다. 이 6종은 금성출판사(주), 대한교과서(주), (주)두산, 법문사, (주)중앙교육진흥연구소, 천재교육(주)이다. 이 6종 교과서 중 제일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한국 근현대사]이다. 금성출판사의 이 교과서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의 반절 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본 논문은 금성출판사의 교과서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가 개신교를 바로 서술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I. “1. 한국 근/현대사 이해”와 서술의 관점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의 “1, 한국 근현대사의 이해”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 이해의 근본 관점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은 내재적 발전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내재적 발전론이란 한국은 17세기와 18세기부터 근대사회에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시장의 발달, 신분제도에 대한 비판, 실학의 등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변화는 근본적으로 18세기 유럽의 산업화에 따른 서구문명의 영향에 근거한 것이며, 이것이 동양사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금성출판사의 이같은 서술을 한국 근 현대사를 보다 큰 맥락에서 이해하지 못한데서 출발한다.

한국 근대사는 민족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한국의 자주독립이란 서구문명을 통한 근대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문제점은 바로 자주 독립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근대화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일제시대의 서술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내용은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하는 반면에 근대화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역사이해는 해방이후 현대사회에 대한 이해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 책은 해방이후 대한민국이 어떻게 건국되었으며, 이것이 오늘의 한국사회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대신에 해방은 민족의 분단을 가져왔으며, 그래서 해방이후 두 개의 조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대한민국의 건국 정신이 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고, 대신 남북한을 공평하게 다룬다는 명목아래 현대 한국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이 대한민국의 학생들에게 읽힐 교과서라는 것을 전제할 때 마땅히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거기에 따른 발전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같은 민족주의적인 역사서술의 관점은 한국 근현대사에 미친 기독교의 역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의 한국은 서구의 근대화의 영향으로 형성된 근대국가이며, 근대사회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서 세계 첨단의 과학기술을 개발했고, 그 결과로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우리 한국이 서구문명을 받아들여서 창조적으로 소화해서 다른 나라에 수출했기 때문에 형성되었다. 이런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한국 근대사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개신교의 역할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과거 불교나 유교가 각각 그 시대의 선진문명을 들여와서 한국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던 것처럼, 개신교도 서구의 근대사회를 한국에 소개해서 오늘의 한국을 만드는데 기여한 것이다. 사실 한국의 긴 역사 가운데 지난 세기만큼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세기는 없으며, 그 한 복판에 개신교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개신교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간헐적으로 언급되고 있고, 그것도 문단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은 단 한 곳뿐이다. 이것은 “2 근대사회의 전개” 가운데 “5장 근대문물의 수용과 근대문화의 수용, 주제 4 문예와 종교의 새 경향” 가운데 5줄짜리의 한 문단(134)이다. 이것도 개신교 선교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고 개신교가 학교와 고아원을 세운 것을 설명하는데 제한하고 있다. 이나마 천주교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이런 개신교의 영향에 대한 축소는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서술과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하다. 동학농민운동이 개항 초기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크지만 한국 근대사 전체를 두고 볼 때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만큼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동학 농민운동에 대해서는 “3장 구국 민족운동의 전개, 주제 1 동학 농민운동의 전개” 77쪽에서 83쪽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으면서 개신교의 출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편향된 역사서술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 인구는 전체 한국 인구의 20%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개신교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한국에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된 설명이 없다면 [한국 근/현대사]는 제대로 쓰여진 교과서라고 말할 수 없다.

II. "2. 근대사회의 전개“와 한국 개신교의 초기 역사

  1.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나타난 한국 근대화에 미친 개신교의 영향

[한국 근/현대사]의 “2. 근대사회의 전개”는 개항초기부터 한일합방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부분에서 개신교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부분은 “4장 개항 이후의 경제와 사회, 주제 4 생활 모습의 변화”와 “5장 근대 문물의 수용과 근대 문화의 형성” 전반에 걸쳐서 산발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는 개항초기의 의식주 생활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전통 음식 문화와 예절도 서양화되기 시작하였다.”고 전제하면서 “크리스트교가 전래되고, 선교사를 통해 서양문화가 들어오면서 서양식 음식과 예절이 자리를 잡아갔다.”고 설명한다(115 쪽). 아울러서 개항이후에 서양식건물이 들어섰는데, 이것은 주로 외교나 종교, 상업시설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설명한다.

[한국 근/현대사]는 서양 의료시설과 기술도입을 설명하면서 선교사들에 의해서 광혜원과 세브란스가 설립된 것을 지적하고 있다(124).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누가 이런 병원을 세웠는지, 이것이 한국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 사실 초기 한국사회에 끼친 개신교의 의료시설을 매우 놀라운 것이다. 선교사들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여성들에게도 의료의 혜택이 미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대한제국시기의 신문에 대해서 설명하는 과정 가운데 개신교계의 신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는다. 더욱이 이 항목을 보다 깊이 설명하는 “활동”란에는 대한제국기 국내의 여러 신문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천도교와 천주교의 신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한국의 근대 언론에 기장 큰 기여를 한 개신교의 신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127). 사실 한국 개신교는 1897년에 아펜셀라의 [죠션 크리스도인 회보]와 언더우드의 [그리스도신문]를 발행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어떤 종교보다도 먼저 발행한 것이다.

이같은 편파적인 서술은 근대교육의 시작에 대한 설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한국 근/현대사]는 한국 근대교육의 시작으로서 1883년의 원산학사를 언급하고, “한 걸음 다가서기”라는 항목아래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128). 그리고 그 뒤 여러 교육제도의 개혁을 언급하다가 개신교의 교육기관으로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들고 있다. 그리고 덧 붙여서 “여기서는 신학과 함께 근대학문을 가르침으로써 조선인들이 서구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129)고 설명한다.

사실 한국 근대교육에 있어서 개신교가 미친 영향은 막중하다. 비록 원산학사가 배재나 이화학당 보다 먼저 세워졌다고 하지만 이것이 한국의 교육제도에 미친 영향은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 비해서 배재나 이화와 같은 기독교계의 학교는 같은 유형의 수많은 학교를 만들어 냈고, 이것은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에 걸쳐서 확산되었다. 이 같은 중요성으로 볼 때 개신교의 교육에 대한 역할은 과소평가되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같은 페이지에 나오고 있는 근대 사립학교 명단에서 경신을 비롯한 수많은 개신교 학교들의 명단이 누락되어 있다(129).

[한국 근/현대사]는 소설과 음악에 미친 개신교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새로운 형태의 문학, 신소설과 신체시”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성경]과 [천로역정]과 같은 크리스트교 계통의 책이 번역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132), 이것만으로는 [성경]이 한국 민족에게 미친 영향을 설명하는 것으로는 매우 부족하다. 한국에 들어온 전통종교들이 자신들의 경전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것에 비해서 개신교는 처음부터 성경을 보통 한국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한글을 민족의 언어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사실 성경은 이 땅의 어떤 책 보다 널리 사람들에게 읽혔으며, 이것을 통하여 한글은 이 땅의 언어가 되어 갔던 것이다.

개신교가 음악에 미친 영향은 비교적 잘 지적되고 있다. “음악 부분에서는 선교사들이 들어와 찬송가를 보급함으로써 서양의 근대음악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133)고 지적한다. 아울러서 1896년 새문안교회에서 부른 대군주탄신경축가를 소개하여 개신교가 근대음악에 미친 영향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2. [한국 근/현대사]의 초기 개신교 인식

이상은 개신교가 한국 근대화에 미친 영향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단원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개신교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 전문을 옮겨 본다(134):
 
개항 이후 서양의 종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와 교세를 확장하였다. 크리스트교는 학교와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육영사업을 하였으며, 서양 의술을 전파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조선사회에 이미 들어와 있던 천주교도 선교의 자유를 얻어 포교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서양종교의 이념은 전통적인 가치관과 충돌하여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특히 지나치게 복음주의를 강조하여 제국주의 열강과 일제의 침략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개신교의 시작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매우 미흡하기 짝이 없다. 개신교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정부의 정책과는 어떤 관계이고, 더 나아가서 개신교가 종교의 자유를 획득해 가는 과정이 전연 설명되고 있지 않다. 개신교의 유입은 불교, 유교의 유입과 함께 한국의 문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한 설명은 전연하지 않고 있다. 사실 개신교는 조선정부의 반대로 초기에는 교육과 의료에 종사하였으며, 세월이 지나가면서 점진적으로 선교의 자유를 얻어 본격적으로 전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알렌이나, 언더우드, 아펜살라와 같은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언급이 전연 없고, 언제, 어떻게 선교가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언급도 없다.

하지만 이같은 개신교의 기원에 대한 설명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평가는 냉혹하다. [한국 근/현대사]는 “서양종교의 이념은 전통적인 가치관과 충돌하여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개신교 초기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물론 개신교의 이념이 조상숭배와 같은 유교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충돌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신교가 전통적인 가치관과 충돌한 것에는 민주사상과 과학사상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조선사회는 유교사회이며, 이것은 신분윤리의 기반이 되었다. 이런 유교사회에 개신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믿었다. 특별히 개신교는 선교의 대상으로 양반계급이 아니라 보통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았고, 그들의 언어인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또한 이것은 조선사회에서 항상 억눌렸던 여성들을 선교의 주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개신교가 마치 조선의 민중과 대립되는 위치에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신교는 오히려 유교의 기득권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오히려 유교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이것은 개신교가 조선의 유교사회에서 소외되었던 평안도에서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같은 오해는 그 다음 평가에서도 잘 들어난다: “특히 지나치게 복음주의를 강조하여 제국주의 열강과 일제의 침략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한국 근/현대사]는 아무런 설명 없이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마치 복음주의가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보다 설명이 요구된다. 서구 기독교는 오래 동안 정교일치의 국가교회제도 속에서 발전하여 왔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서구 여러 국가의 국교가 되어, 국가는 종교를 보호하고, 종교는 국가를 정신적으로 지탱하여 주었다. 16세기부터 근대에 이르기 까지 주로 천주교를 포함하여 유럽기독교의 선교는 이와 같은 국가교회의 선교였다. 따라서 이런 유럽교회의 선교는 유럽의 제국주의의 확장과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복음주의는 18세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부흥운동의 결과로 생긴 기독교의 한 흐름으로, 종교는 어느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결단에 의해서 수용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의 힘에 의한 선교는 의미가 없으며, 복음을 전하고, 진정으로 그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만 참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강조하며, 선교사의 임무는 정치가 아니라 선교라고 믿는다. 따라서 이들은 가능한 대로 정치와 거리를 두려고 하며, 그러므로 복음주의 선교를 제국주의 선교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이 복음주의 선교사들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이 제국주의의 옹호자라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19세기 말 미국은 한국의 식민지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온 것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온 것이 아니라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고 온 것이다. 그래서 초기 선교사들은 가능한 대로 미국정치에도 한국의 정치에도 관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선교사들과 일제의 관계에 대해서도 선교사들이 일제의 침략을 옹호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결론이다. 선교사들 가운데는 일본이 먼저 서구문명을 받아들여서 근대화를 이룬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교사들이 일제의 침략을 긍정했다고 말할 수 없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빨리 서구문화를 받아들여서 근대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조선은 생각만큼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국제정세를 알고 있던 선교사들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역사의 한 흐름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일제의 조선침략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105인 사건이나 3. 1 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그것을 제지 시킨 사람들이 바로 선교사였다. 따라서 [한국 근/현대사]의 초기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매우 편협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3.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초기 기독교관련 보완점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개신교가 미친 영향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과거 불교와 유교를 통해서 동양문화가 한국에 들어온 것처럼, 기독교를 통하여 서양문화가 한국에 들어왔으며, 이것은 근대 한국사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목적이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는데 있다면 오늘의 근대 한국문화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기독교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는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현대사 서술에 있어서 기독교는 충분히 서술될 필요가 있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19세기 후반 잠시 일어났다 사라진 동학에 대해서는 긴 설명을 하면서 기독교의 출발과 그 의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큰 문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근대사회를 설명하려면 무엇보다도 개인주의, 민주주의, 합리주의, 자본주의, 남여평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같은 근대사회의 가치는 어디에서 왔는가? 적어도 기독교는 이런 근대적인 가치를 이 땅에 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동양사회는 가부장적인 집단사회였다. 그 속에서 개개인의 가치는 존중되지 않았다. 이것은 결혼에서도 잘 드러난다. 결혼은 개인의 의사가 없이 가장의 의사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했다. 그러나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결혼은 남녀의 사랑에 근거해야 하고, 남녀의 결단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동양사회는 유교의 신분윤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런 조선사회에 기독교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평등한 인간이며, 이런 점에서 반상의 차이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전통사회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이 모두 평등하게 예배당에 앉아서 같이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남녀, 노소, 부귀 차별없이 같이 예배드린다는 것은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같은 민주의식이 없이 한국의 근대화는 가능하지 않다.

근대사회는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과학정신에 근거하고 있다. 전통적인 미신에 매여 살고 있던 조선사회에 교육과 의학을 통하여 서구의 합리적인 과학정신을 심어준 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과학을 통하여 세상을 설명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이것은 오늘의 한국이 전통에서 벗어나서 근대사회가 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의 축적을 긍정적으로 보며, 이것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는 사농공상이라는 사회 질서 속에서 상업을 천시하며, 노동을 무시하였다.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하였던 여행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조선사람은 일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되는 날 쉬라는 십계명을 강조하면서 노동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이같은 노동의 신성성은 나태하다고 소문이 낫던 한국 사람을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민족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근대 한국 형성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본다.

필자는 기독교가 이 땅에 기여한 것 가운데 하나가 남녀평등이라고 본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부속된 존재였다. 초기 선교사, 특히 여자선교사들은 이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독립된 인간으로서 양성하려고 노략하였다. 또한 일부 일처제도를 강조하여 가정의 근본적인 불평등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초기 기독교는 신앙교육 뿐만이 아니라 가정은 남녀가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III. “3. 민족 독립운동의 전개”와 일제시대의 개신교

 
1.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과 개신교의 역할

일제시대의 한국 근/현대사는 이 부분의 제목이 뜻하는 바와 같이 오직 한 가지 관점, 즉 독립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쓰여졌다. 물론 국권이 상실된 한반도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는 조국의 독립일 것이다. 하지만 일제시대에도 이 땅에 사람들은 살고 있었고, 어떤 형태로든 역사는 전개되어 갔다. 그런데 이 시대의 역사를 모두 독립운동이라는 한 가지 초점에 맞추어 서술한다는 것은 역사는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서술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독립운동 서술에서도 [한국 근/현대사]는 개신교의 역할을 가능한대로 축소하고자 노력하였다. 우선 1910년대 국내의 민족 독립운동 가운데 105인 사건을 설명하면서(167), 이것이 기독교인을 핍박한 운동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05인 사건은 기독교의 성장을 두려워한 일본이 기독교지도자들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음모와 연결시켜 온갖 고문을 자행한 사건이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사]는 이들을 단지 계몽운동 계열이라고만 설명하고 있다.

이같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독교의 역할 축소는 3/1 운동에 대한 설명에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3.1 운동은 천도교 대표 16명, 기독교 대표 16명, 불교대표 1명이 민족의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운동이다.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데에는 기독교의 역할이 매우 크다. 당시 기독교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이 조직을 통해서 3.1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에서는 이같은 기독교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일제시대 개신교가 한국민족에 미친 영향은 민족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평화주의를 주창하는 개신교는 무장독립운동 보다는 민족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에 동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물산장려운동에 주역을 감당하였다. 바로 물산장려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 조만식이가 기독교장로였다. 하지만 이런 물산장려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203-204).

일제의 박해 가운데서도 한국사회는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는 사회주의와 천도교가 한국인의 의식을 높였다고 평가하면서 여기에 못지않게 큰 공헌을 한 개신교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제시대 한국 개신교는 사회 각계층을 자각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지만 한국의 근대적인 청년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YMCA에 대해서조차도 전혀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또한 1920년대와 30년대 한국 개신교가 농촌계몽운동과 절제운동을 대대로 벌였는데 여기에 대한 언급도 전연 없다. 아울러서 형평운동도 개신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이것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는 일제말의 개신교가 신사참배문제로 당한 고통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 역사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개신교의 남장로선교회는 일제 말기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벌여 그 지도자들의 체포, 투옥되는 등 일제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237). 이것을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평양에서 있었던 북장로교선교사와의 마찰을 설명하고, 그 다음에 남장로교와의 갈등을 말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서 지도자의 투옥 못지않게 학교가 폐교된 사건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서 이 사건의 본질은 일본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마찰을 일으킨 것인데, 이런 설명이 없이 단순한 신사참배 반대만 언급하는 것은 내용의 핵심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부족한 느낌을 갖는다.

이와 같은 불충분한 서술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일제의 종교정책을 다루는 부분에서 이 교과서는 “기독교의 경우, 외국 선교사들 때문에 노골적인 단속이 불가능하자 선교사를 우대하고 회유하는 한편, 권력과 밀착된 일본 기독교를 침투시켜 기독교의 친일화를 꾀하였다.”고 말하고 있다(237). 여기에서 이 교과서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사실 기독교는 일제시대 한국의 대부분의 종교에 비해 일본의 영향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일본이 일본기독교를 내세웠지만 이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것은 일제시대 대표적인 친일 기독교인 회중교회가 한국에서 실패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말한다면 기독교의 일본화정책은 실패했다고 보아야 한다.

 

2. 일제시대 한국역사와 기독교의 위치

우리는 아시아 역사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위치를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나라이다. 일본은 이것을 무기로 한국을 침략하였다. 그 명분은 한국을 근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정 부분 서양제국들이 동의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서구세력을 대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항상 서구세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구열강의 비판적인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의 통치영역인 조선에서 일제시대 가장 많은 서구인들은 바로 선교사들이었다. 바로 이 선교사들이 일본이 한국을 근대사회에 걸맞게 통치하는가를 보았다. 사실 선교사들은 일본통치의 비참성을 세계에 알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105인 사건의 진상과 3. 1운동의 상황을 세계에 알린 것이 바로 개신교선교사들이었다. 개신교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선교대상인 한국인 신자들이 겪고 있는 비참함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세계에 알렸고, 이것은 일본이 강압정치를 완화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했다.

일제시대 선교사들과 일본은 일종의 경쟁관계에 있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한국을 개화시킬 수 있는 세력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개화의 물결은 일본을 통해서만 들어 온 것이 아니라 바로 개신교 선교사들을 통해서도 들어왔다. 선교사들은 이 땅에 교육, 문화, 예술, 민간단체등 수많은 근대요소를 들여왔다. 조선총독부는 여기에 대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 구체적인 예가 교육분야이다. 일본은 학교설립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어서 선교사들의 교육을 제한시켰고,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총독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집회를 하는 모든 것이 일본의 허가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어떤 선교사는 일제시대의 조선은 Hermit Nation이 아니라 Permit Kingdom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근본적으로 일본정책의 감시자였고, 경쟁자였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런 선교사와 일본의 갈등의 절정은 1940년 미국선교사들의 철수로 이어진다. 일본은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하고 있었고, 미국선교사들은 스파이로 몰리게 되었고, 개신교는 친미세력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리해서 성결교회같은 교단들은 강제로 폐쇄되는 비극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대사 학자들은 일제시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위치를 보다 거시적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구도 속에서 기독교는 한국을 위해서 일제시대에 어떤 일들을 하였는가? 일제시대 한국 기독교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첫째는 해외의 교회를 통해서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한국 근현대사]는 만주에서 대종교를 통한 민족운동을 언급하면서 미국, 만주, 상해에서 기독교가 독립운동을 위해서 노력한 것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특별히 미국에서 이룩한 독립운동은 교회가 그 중심에 서 있으며, 이것은 현재에도 해외 이민사회의 중심이 교회라는 것에서도 장 나타나고 있다.

두 번째 측면은 국내에서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다. 사실 국내에서 무장독립운동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조선이 합방당한 것은 실력이 없기 때문이므로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실력양성론이 대두되었는데, 개신교의 교육, 의료, 문화, 대중계몽 등은 바로 이런 실력양성론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실력을 양성하는데 한국 개신교는 한국의 어떤 종교보다 큰 공헌을 하였다.

 

IV. “4. 현대사회의 발전”과 개신교의 역할

 

[한국 근현대사]의 마지막 부분인 “4. 현대사회의 발전”에는 아예 개신교라는 단어는 나오고 있지 않다. 이 부분에서 종교는 포괄적으로 한 문단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346)

 

광복 직후 여러 종교계 내부에서는 일제 때 친일행위에 대한 정화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양적 팽창을 하면서 분열하여 새로운 종파가 생겨나거나, 교세 확대를 위해 정치권력과 손을 잡기도 하였다. 1970년대부터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거나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통일운동을 지원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시민운동 등에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국 근현대사]가 한국종교를 보는 근본적인 관점이 나타나있다. 그것은 친일관계, 분열과 정치 유착문제, 민주화운동이나 통일문제이다. 한국의 종교가 갖고 있는 고유한 문제나 역할이 언급되고 있지 못하다. 예를 들면 한국사회의 변화와 거기에 합당한 종교의 역할은 논의되고 있지 못하다.

해방이후 한국의 종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헌법으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일제시대에도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존재했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해방 후 헌법은 정치와 종교를 분명히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을 위반했다고 보는 일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에 불과하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한국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 과거 신라와 고려는 불교국가였고, 조선은 유교국가였다. 하지만 근대한국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였다. 이것은 한국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에서 어느 곳도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대한민국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해방이후 한국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사상적인 대결장이었다. 이런 가운데 남한은 민주주의를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여기에 대해서 북한은 계속적으로 위협했고, 이것은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남한 민주주의의 가장 분명한 기반은 기독교였다. 해방이후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한 기독교인들은 남한으로 월남했고, 이들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독교는 반공세력이 되었고, 이것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인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세계와 연결하는 통로였으며, 이 통로를 통하여 세계의 수많은 기관들이 한국에 와서 봉사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한국의 재건은 이런 국제적인 협조로 인해서 이루어졌으며, 이것의 한 복판에 기독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복음전도 만이 아니라 학교와 병원, 사회사업기관등 수많은 단체들을 설립하여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해방 후 한국교회의 부흥은 이같은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한국 근현대사에 전연 언급되지 않고 있다.

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가면서 한국사회는 급격한 산업화를 경험하였다. 이런 과정 가운데서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밀려들었고, 이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준 것이 바로 개신교이다. 도시에 밀려든 수많은 농촌사람들은 교회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발견하였고, 그리고 교회는 이들에게 건전한 윤리를 제공해 주었다. 18세기 영국의 감리교회가 산업화되는 영국 사회 속에서 건전한 윤리를 강조한 것처럼 20세기 후반 한국 개신교는 이런 역할을 감당하였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산업화의 그림자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박정희의 산업화 독재는 상당한 부작용을 낳았고, 이것은 한국사회의 아픔으로 남아있었다. 한국개신교는 이런 부분에 주목했다. 그래서 도시산업선교회를 통해서 노동운동을 벌였고, 민주화 운동을 통해서 독재와 반대하였다. 한국 개신교의 이런 역할은 주로 진보적인 개신교가 담당하였다. 특히 국제적인 연대를 갖고 있는 한국의 진보세력은 한국정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당한 힘을 갖고 있었다.

해방 후 한국 개신교는 특별히 통일 문제에서 두드러지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북에서 월남한 한국의 개신교인들의 간절한 소원은 통일이었다. 그러나 통일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여기에 앞장 선 것은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북한 기독교와 대화를 진행시켰다. 최근 들어서는 한국 개신교는 이북의 어려운 동포를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해방 후 한국 기독교의 역할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해외 동포문제이다. 사실 전체 한국인들의 10분의 일 가량이 해외에 가주하고 있고, 이런 해외 교포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개신교이다. 한국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해외교포의 역할을 기술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역사는 일제시대 해외의 독립운동은 설명하면서도 현재 한국인의 해외 분포와 그들이 한국의 세계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런 한국 근현대사는 세계화시대에 걸맞지 못한다.

 

맺는 말: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안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한국 기독교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마땅히 받아야할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과거 불교나, 유교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만큼 한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역사교과서의 여기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인색하다. 뿐만 아니라 상당한 부분은 왜곡되어 있으며, 많은 경우는 과소평가되어 있다. 그러면 이같은 현상은 왜 일어나고 있는가?

첫째, 한국 근/현대사가 과거의 역사의 계승에만 관심을 갖는 나머지 오늘의 한국사회의 뿌리를 추구하는데 게을렀기 때문이다. 역사의 일차적인 목적은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한국 근현대사의 목적도 오늘의 한국사회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마라면 오늘의 한국사회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더 이상 과거의 봉건사회가 아니다. 서구화의 영향을 받아서 근대화된 사회이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과학문명, 대중문화 이 모든 것이 사실 봉건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근대사회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근대한국의 뿌리가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역사공부의 하나여야 한다.

한국 개신교는 근대한국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독교를 통해서 수 많은 근대문명이 이 땅에 들어왔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는 개신교의 역할을 보다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한국 근/현대사가 지나치게 폐쇄적인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씌여졌기 때문이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대부분 폐쇄적인 민족주의 개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서구문화를 침입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민족주의에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것은 고정적인 개념이 아니고 항상 새로운 문화와 만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조선의 민족이 유교와 뗄 수 없다면 20세기의 한국은 서구문화와 분리될 수 없다.

이같은 폐쇄적인 민족주의는 투쟁적인 독립운동만 민족주의로 보고, 소위 교육이나 경제적인 발전을 통해서 실력을 양성하자는 실력양성론자들은 기회주의자로 매도되고 있다. 하지만 근대 한국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제와 맞서 싸우는 독립운동가도 필요하지만 근대문물을 배워 실력을 양성하는 실력양성론자들도 필요한 것이다.

이같은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개신교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고 있다. 개신교는 근대사회에 들어온 새로운 사상이기 때문에 한국사의 일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개신교가 한국민족의 근대화를 위해서 노력한 것들은 개량주의적이며, 기회주의적인 것으로 과소평가를 받게 될 수밖에 없다.

셋째, 한국 근/현대사가 지나치게 정치 중심적으로 쓰여 졌기 때문이다. 정치가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정치 이외의 부분은 지극히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특히 종교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사실 한국 근대의 역사에서 어떻게 전통적인 유교사회가 붕괴되어가고, 이런 틈 가운데서 불교나 기독교가 어떻게 성정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특별히 조선시대의 정교일치시대에서 근대사회의 정교분리 시대로 어떻게 이행되어 왔는가에 대해서 아무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정교문리를 지나치게 확대해서 종교를 역사의 영역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 가운데 종교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이것은 당연히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개인의 종교에 대한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면 이같은 문제를 불식시키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개신교의 역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첫째, 한국의 역사학자들과 한국 개신교 교회사가들과의 대화가 있어야 한다. 사실 이만열교수를 중심으로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이런 일들을 꾸준하게 해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노력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특별히 각 대학에 있는 기독교역사학자들과 교회사학자들이 서로 만남을 가져 상호간의 인식의 틀을 공유해야 할 것이다.

둘째, 현재 역사교과서에 대한 보충자료를 만들어서 기독교인 역사교사들과 미션 스쿨에서 이것을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사실 현재 많은 교회사 교과서들이 있지만 이것을 쉽고, 대중적으로 서술하여 역사교사들과 고등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이런 공격 가운데는 우리가 겸허하게 받아들여 반성해야 할 부분도 있지만 또 다른 편에서는 일반인들이 기독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극히 편향된 사고를 가지고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후자의 경우를 위해서 한국 기독교가 한국 근대사회에 미친 역할을 적극적으로 연구하여 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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