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인터넷에서 칼빈의 5대 교리중 제한적 속죄와 성도의 견인 부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어 뜨거운 논쟁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알고 전체적 맥락이 어떠한 가를 알지 못했는데 이번에 문제를 제기하고 논쟁의 중심에 섰던 박창진 목사(부평시민교회)가 오랜 기간 동안 논의를 계속해온 경인노회 신학위원회가 이번 봄 노회에서 정권위원회 구성을 신청할 것을 결정한 것을 알고 자신의 입장과 신학에 대한 신앙고백을 본지에 송고해 왔다.  

코람데오닷컴은 혹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그의 신학과 신앙고백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이에 그 전문을 싣고자 한다. 판단은 독자가 할 것이고 경인노회도 이 글을 읽고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개인의 주장이 코람데오닷컴의 신학과 신앙에 다를 수도 있지만 이 글은 박창진 목사의 확실한 주장이 무엇인지 알리고자 하여 싣는 것임을 재차 부연해 둔다.

 

박창진 목사의 기고문 전문

전권위원회 회부를 앞두고 

   
 

이번 경인노회 때에 저의 신학 사상과 관련하여 전권위원회가 구성된다고 합니다. 저는 칼빈주의 5대 교리 중에서 성경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한적 속죄와 성도의 견인 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후 덕유산에서 전국 대학생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황창기 목사님께서 주강사이셨는데, 이전에 듣던 설교와는 아주 새로운 시각이었고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때에 저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언급하며 어떻게 구원이 영원한 지를 질문했는데, 답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일단은 기존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하며 열심히 배웠고 배운 대로 가르쳤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목회하며 성경을 연구하면서 어떤 내용에 대해서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성경 해석 원리를 일관되게 적용하며 성경을 연구하면서 저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내용들을 다른 이들과 나누면서 확신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그 내용들을 영광스러운 교회의 회복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온라인상에서 토론도 지속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어떤 목사가 노회의 신학위원장께 저의 신학 사상을 제소하였습니다. 신학위원회에서는 저를 불러 사실 관계를 확인하며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는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노회에서는 신학위원회에서 저의 신학 사상을 살피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저는 속죄에 있어서 제한적 속죄가 아닌 보편적 속죄가 성경적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죄 자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기에 모든 사람, 모든 세상, 모든 만물을 위하여 죽으셨고 택한 자들이 그 효력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회복, 만물의 통일과 충만, 마지막 때에 온 세상에 대한 주 예수님의 심판이 가능한 것은 모두 예수님의 속죄 사역에 토대를 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택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고 택자들만이 그 효력을 누리는 것이라면 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상세한 내용은 영광스러운 교회의 회복’(CLC) 123-147, ‘성경 해석 잘해야 부흥이 보인다’(영교회) 233-238, ‘성경적 구원론과 성경적 교회 건설’(영교회) 42-54쪽에 있습니다.

저는 견인에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고 조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표현이 가진 성경적인 의미가 절대적인 구원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며 그 회복된 관계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잘 정의된 바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의지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시라는 실제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회복된 관계를 누리는 것으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7:21). 현재적으로 주님과 사랑하며 현재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현재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지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26-27). 바울 사도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2:12)고 했습니다. 그는 거룩함과 구원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히 성화를 강조하는 표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면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6:7-8). 히브리서 기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모든 자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했습니다(5:9).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고대 교부들은 선행 구원 교리를 확립하였던 것입니다. 사도들로부터 직접 듣고 배웠던 이들로부터 지속적으로 교회에 가르쳐졌던 사안입니다. 선이란 하나님의 뜻이기에 선행 구원 교리는 예수님의 말씀-7:21-의 명사화입니다. 종교개혁 이전까지 이 부분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과 순종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동일한 의미였던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바늘과 실의 관계라기보다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로마교는 과거에 그 교리를 악용하여 면죄부를 판매하기까지 했습니다. 잘못된 것은 선행 구원 교리가 아니라 그것을 악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성경이 가르치는 선행 구원 교리를 폐기합니다. 선행 구원 교리를 바울 사도가 말씀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과 대치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경이 말씀하는 이신칭의를 오해하고서 생겨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관련하여 모든 행함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 언약의 시대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옛 언약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하는 것을 행함이라는 말로 정죄한 것입니다. 그는 옛 언약의 율법이 아니라 새 언약의 율법 곧 성령님의 율법 준수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자유게시판 274번에 있습니다. 루터는 아기를 목욕시키고 더러워진 목욕물만을 버려야 했는데 아기까지 함께 버리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성화 장에서는 거룩한 행실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선행 구원과 같은 의미입니다. 거룩한 행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견인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모든 이들이 절대적으로 주를 보게 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행실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행실을 절대적으로 보장해 주실 때에만 웨신의 두 주장이 동시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거룩한 행실을 보장해주신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곧 그 말씀을 듣는 신자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신뢰함으로만 거룩한 행실이 보장됩니다. 지난 교회 역사와 오늘날의 교회 현실도 거룩한 행실의 절대적 보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행실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주셨다는 교회 역사에서의 악행이나 부끄럽기 그지없는 행태가 반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으로 여겨지는 본문들은 모두 그 말씀 앞에서 신자가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음으로 다르게는 순종하지 않음으로 영원한 구원에서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배교하는 경우(딤전 1:19-20, 6:4-8),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저버리고 사는 경우(25:14-30), 결정적인 범죄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경우(고전 6:9-11)입니다.

절대적 견인론의 신학적 토대가 칼빈의 예정론과 이중선택사상입니다. 예정론은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한번 구원하신 이들이 영원한 구원에 변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변덕을 부리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중선택사상은 교회적인 선택에 속한 이들과 개인적인 선택에 속하는 이들이 있고 개인적인 선택에 속한 이들은 영원한 구원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주장들은 모두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한 것입니다. 예정론의 잘못과 관련하여서는 토론방 30번 글에 적었습니다. 이중선택사상의 오류에 대해서는 신학방 21번 글에 있습니다.

삼위이시며 한분이신 하나님, 그분께로부터 주어진 한 말씀, 그 말씀 위에 세워지는 한 교회, 신자들의 한 믿음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분이시라는 것은 수적인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인 개념입니다. 수적으로 3이고 그 관계성에 의해서 한분으로 말씀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렇게 말씀한 바울 사도나 그 말씀을 들은 그 당대의 교회가 아주 쉽게 이해하였던 부분이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어떤 신비가 아닙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해석 잘해야 부흥이 보인다’ 121-134쪽에 있습니다. 그분으로부터 한 말씀이 주어졌음에도 사람들의 잘못된 이해로 인해 여러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 교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개신교의 여러 교단과 그 안에서의 여러 교파입니다. 믿음도 여러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 대해 중병에 걸린 어머니와 같다는 평을 하고 있으며 저는 이에 동의합니다. 회복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교회 곧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부흥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을 갈망하면서 여러 말씀과 여러 교회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상태에서 잘해보자고 말합니다. 잘못된 토대 위에서 잘해보자는 것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치며 온전한 회복은 가능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개인의 영원한 구원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거듭난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신자가 적지 않습니다. 외람되지만 목사들에게 이런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급이 없을 뿐 영원한 구원에는 변동이 없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진정한 회개에 있어서 심각성이 뒤처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하나님의 최종 심판에서 어두운 가운데 쫓겨나서는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요. 상급에 대한 오해에서도 하루 속히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광스러운 교회의 회복’ 188-193쪽에 있습니다.

지금의 신학위원장은 저와 관련된 안건은 노회에서 다룰 사안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총회에 올려서 신학교를 통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전권위원회 구성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제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이전 신학위원장님께 보내었고 그분은 신학교의 유해무 교수님께 평가를 의뢰했습니다. 학교에 오라고 하셔서 찾아가서 만났을 때에 강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저의 지금 상황이 신학적 논쟁에 휘말려서 치중할 때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상황이라면 제가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며 유보하고 목회에만 전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개혁주의 교회를 이루고난 후에 이야기하자고 하셨습니다. 이는 저를 염려하셔서 보호하시려는 사랑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수용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신학위원장께 사과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간의 생각을 할 시간을 가지고 답변을 드리겠다고 하고서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견해를 철회하는 것이면 사과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유보하는 것이기에 사과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과는 철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에 교수님은 이전 신학위원장께 사과하러 갈 것이니 좋게 처리되도록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은 제 견해가 잘못되었다고 교수님이 평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제가 사과하러 가지 않자 전권위원회 구성으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사실 관계를 가려야 하는 신학적 견해에 대해 목회적 상황으로 평가하며 제 견해가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지금 저의 목회가 사실은 부끄러운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하려는 것인지 답답합니다.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라도 성경적으로 합당하면 들어야 하는 것이 신자의 바른 모습인데 안타깝기만 합니다. 십계명에 대한 논쟁-자유게시판 260번 글-에서도 확인되는 바와 같이 기존의 생각을 어떻게든지 고수하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제 견해를 영광스러운 교회의 회복’, ‘성경해석 잘해야 부흥이 보인다’, ‘성경적인 구원론과 성경적 교회 건설에서 밝혔습니다. 최소한 신학적인 평가를 바랍니다. 신학적인 견해를 정치적인 논리로 접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장로교에 소속되어 있으니 장로교에서 따르는 것을 따라야지 그 안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논리입니다. ‘오직 성경으로를 말하면서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주장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교리로만 정죄하는 것은 정치 논리라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저와 생각이 같다는 장로교 목사들도 만났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 사실을 개인적으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개혁주의는 교리이든지 생활 방식이든지 성경의 원리로 지속적으로 살피면서 그 원리를 따라 개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위이시며 한분이신 하나님, 한 말씀, 한 교회, 한 믿음의 회복으로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아가는 모습을 소망합니다. 힘없는(?) 한 목사의 허공을 치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을 공유하고 함께 그 길로 나아가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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