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미포 준비모임, 3.1운동 100주년 기독교인의 현실 참여를 점검한다

수많은 역사적 사례연구를 통해 3.1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적 결단으로 일으킨 만세운동'이라는 견해가 나왔다.  2018 미래교회포럼(대표 박은조 목사)을 위한 제3차 준비모임이 은혜샘물교회 새가족실에서 준비위원들과 관심 있는 목회자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2일 열렸다.

환영 인사하는 박은조 목사(좌), 사회 이세령 목사(우)

3.1운동 당시, 정교분리 관점 만연

이번 준비모임에 강사로 나선 김승태 소장은 3.1운동이 일어났던 당시의 상황을 “정교분리”라는 용어로 정리했다. 그 당시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 정부까지도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일본은 식민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미국은 선교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정교분리 방침을 세웠다. 이런 정교분리 정책이 주도하던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비신앙적인 것이라고 보는 관점들이 많았다.

김승태 목사(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개인적 신앙 결단으로 3.1운동에 참여

그러나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신앙적 결단 때문에 현실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이승훈 장로와 신석구 목사와 같은 분들에 의해서 이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승훈 장로의 경우 사업의 목표가 돈을 벌어서 자신의 가문을 세우는 것이었다. 양반 자격을 사고 서당을 세우고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 그의 최종목표이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인생 목표가 바뀌었다. 나라와 민족을 세우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그는 평양신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3.1운동 때문에 옥고를 치르고 그 후 민족 교육의 사명 발견하고 내가 비로소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고백했다. 자기 가문 빛내려는 목표가 예수 만나고 나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2018 미래교회포럼(대표 박은조 목사)을 위한 제3차 준비모임이 은혜샘물교회 새가족실에서 열렸다.

신석구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1907년 예수 믿고 나서 변화되었다. 예수 믿기 전의 삶이 사적인 삶이었다면 후의 삶은 공적인 삶이었다. 신석구 목사는 “교역자가 정치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가?”라는 고민이 있었다.  새벽마다 이 제목으로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4000년을 이어 내려오는 강토를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가 왔을 때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도 큰 죄이다.’라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신앙의 결단을 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민족대표로 나섰다.

2018 미포 3차 준비 모임 참가자들

3.1운동에 참여한 당시 기독교인들의 축복관

김 소장은 3.1운동 당시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당시의 신앙은 사사화 되지 않았다. 개교회주의는 없었다. 교회의 공공성이 살아 있었다.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자세가 있었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공공의 선을 위해서 타 종교인들과도 연대하고 합력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아프지 않고 잘 사는 것을 복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의를 추구하며 사는 것을 복으로 여겼다. 3.1운동을 주도한 기독교인들은 지금과는 다른 축복관을 가지고 있었다."

미포 준비 모임에서 토론하는 참가자들

개인적인 신앙 결단으로 3.1운동이라는 공공의 역사 일어나

발제 후에 포럼 참가자들의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선교사들조차 정교분리를 가르쳤는데 어떻게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걸고 3.1운동이라는 현실 정치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는가?” 결국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은 이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 하나님의 역사에 당시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응답했다. 진지한 토론 끝에 하나님 앞에 개인적인 신앙의 결단으로 3.1운동이라는 공공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결론을 맺었다.

한편, 미포 관계자들은 8월 중에 한 번 더 준비모임을 갖고 연말에 열리게 될 2018 미래교회포럼의 주제를 확정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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