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오후 서울 종로 5가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한목윤, 위원장 전병금 목사, 서기 정주채 목사) 발표회가 열렸다. “한국교회의 위기와 미래”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발표회에서 이성희 목사는 "한국교회의 위기와 미래"에 대해 발표했다. 다음은 이성희 목사의 발표문 전문이다.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의 성장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 중국은 당(唐)대에 기독교의 한 종파인 경교(景敎)가 전래되었으나 정착하지 못했고, 근래에는 1802년 영국의 모리슨선교사가 마카오를 거쳐 중국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일본은 1872년 요코하마에 최초의 교회인 ‘카이간’(海岸)교회가 세워졌다. 타이완도 1872년 캐나다 선교사 맥케이가 ‘단수이’(淡水)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모두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최근 중국에서는 기독교가 성장하고 있지만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일본의 기독교인은 전 국민의 1%가 되지 않는다. 타이완의 기독교는 25만 명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나라보다 늦게 기독교가 전래된 한국교회는 세계기독교사에서 가장 급속 성장한 교회로 기록되고 있다. 기독교역사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1884년 첫 선교사 알렌이 들어온 때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우리나라에 1,500여 명의 외국선교사가 입국하였다. 작은 한반도에 이렇게 많은 선교사가 복음을 전래하였다는 것은 한국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손길이다. 그리고 한국 초기선교사역은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일이었다. 복음과 교육과 의료가 중요한 선교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 일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신 예수님의 3대 사역과 일치하는 일이다. 지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967만6천 명으로 한국 제일의 종교로 발표되었다. 한국교회 선교의 성공요인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교사들의 선교전략의 덕이다.

한국은 지난 60여 년 동안 엄청난 발전과 성장을 거듭하였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600번이 넘게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정전이 되었지만 지금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다. 지난 60여 년 동안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한다. 글로벌 시대에 한국인의 위상도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자신 보다 훨씬 높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에 흩어져 사는 세계 제일의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한인 디아스포라는 178개국에 동포 726만 명이 흩어져 있다. 디아스포라로 알려져 있는 유대인은 100여 개국에 730만 명, 화교는 130여 개국에 4,543만 명이 흩어져 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가장 잘 적응하는 생존력이 강한 민족이 되었다. 또한 180개국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을 만큼 국격(國格)도 높아졌다.

이 모든 것이 선교의 공이며, 복음의 덕이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교회가 매 10년마다 수적 배가를 기록할 때 한국경제도 가장 가파르게 수직 성장하였다. 한국교회 성장과 한국경제 성장은 동시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등 한국의 근대화는 한국교회의 선교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를 통계적으로 보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매 10년마다 양적 배가를 이룬 교회이다. 세계기독교사에서 유래를 발견할 수 없는 성장을 한국교회는 이룬 것이다. 그러나 급속 성장한 교회는 급속 쇠퇴한다는 일반 이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국교회도 그 전철을 반복하는 조짐이 드러나고 있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며, 사회의 교회에 대한 폄훼는 도가 넘었으며, 교회 내부의 자괴감도 증폭되고 있다. 이런 변환기에 한국교회의 위기와 미래에 대한 총론적 진단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한국교회의 위기, 그 원인과 현상

현재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은 미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짙은 안개속이다. 더구나 포스트모던 시대는 초고속의 변화의 시대로 미래를 전망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 이런 시대적 현상은 미래의 목회전망을 비관적, 부정적으로 보일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이런 어두운 하늘에서 작은 빛줄기는 더 밝게 빛나고, 위기가 또 다른 기회라는 의미에서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지혜와 위로부터 내려오는 소망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2014년 8월 프란시스코 교황의 한국방문으로 개신교는 새로운 위기를 실감하게 되었다. 교황의 방문을 천주교는 교회의 위상 높이기에 최대한 활용하여 천주교회가 아니라 국가적 행사로 활용하였다. 대형교회를 중심한 개신교의 사회적 신인도와 위상의 추락과 대비하여 천주교는 홍보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앞으로 2-3년 내에 개신교인 100만 명이 천주교로 개종할 것이라는 이른 예측도 한다. 조상제사허용, 음주허용, 타종교 특히 불교와의 교류 등을 통하여 천주교는 사회와 소통하는 포용력이 있는 종교로 인식되고 반면에 개신교는 배타적이며 사회와 소통되지 않는 ‘꼴통 보수’ 종교라는 오해를 교황의 방문으로 더 깊이 심어 주었다. 이런 때에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며, 개신교의 복음적 신학적 노선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는 사회와 소통하며 사회의 약자들, 소수자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소통과 접근양식을 갖추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가 양보할 수 없는 성경적 진리와 개신교의 신학과 교리를 고수하는 ‘호교’(護敎)적 교회이면서 동시에 ‘통큰’ 포괄적 선교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우선 한국교회의 위기는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말씀’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골’의 위기이다.

최근 어느 리서치회사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는 마치 ‘블랙홀’과 같다. 이런 현상에서 미래를 본다는 것은 ‘시계제로’의 절망적 상황이다. 통계적으로 국민의 22.1%를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인이지만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9.4%에 불과하며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44.6%이다. 연령별로는 50대가 가장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으며, 종교인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신뢰하지 않으며, 지역별로는 서울이 가장 신뢰하지 않는다. 신뢰하지 않는 이유로는 언행일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의 내부적 비리와 부정부패, 타종교에 대한 비판적 배타적 태도, 강압적 선교 등이다. 최근 수년 동안 한국의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천주교이며 그 다음이 불교 그리고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사회봉사 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행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신뢰도가 낮은 것은 지도자의 자질이 다른 종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우수하지 못하다고 하는 평가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교회 각 교단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 내지 쇠퇴 추세이다. 한국교회는 물질주의, 성장주의, 개교회주의, 목회자의 윤리문제 등 현상을 바르게 진단하여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며 교회를 새롭게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의 위기는 비만에서 오는 성인병 신드롬이다.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침몰 사고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국가적 혼란이었다. 사고의 배후에 있던 구원파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단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구원파의 실체가 천하에 드러나고 이단 교주들의 행태가 공개됨에도 불구하고 이단과 사이비가 갈수록 한국교회와 사회를 어지럽게 할 것이다. 21세기를 영성사회라고 한다.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영성이란 성경이 말하는 영성과는 다른 잡된 영이며 악한 영이다. 교회가 건전한 영성을 사회에 제공하지 못하면 사회는 사악한 영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한 결 같이 21세기에는 이단과 사이비가 횡행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 외에도 영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의 영성이 있으며, 동서양의 신비종교가 영성을 가지고 있으며 건강을 위한다는 ‘기(氣)’나 ‘요가’ 등도 영성의 일종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 무속인이 약 60만 명이라고 한다. 최첨단 과학시대에 무속인이 줄지 않는 까닭은 무속을 민속종교로, 무속인을 무형문화재로 미화하기 때문이다. 연간 무속인의 복채 등 총매출이 8조원을 상회한다고 한다. 이런 이단과 사이비, 한국의 전통 무속 등이 한국교회의 선교를 방해하는 저항세력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한국인의 혼합주의적인 전통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2019년 한국교회는 경제적으로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경제전망에 의하면 한국의 경제로 그리 밝지 못하다. 한국의 대외 경제를 견인하던 삼성전자나 현대기아자동차 등도 성장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할 만큼 수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구 5천만 명의 우리나라로서는 내수로 경제를 활성화하기는 역부족이다. 한국은행에 의하면 국내총생산 증가률과 고용률은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였지만 이것 또한 전망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 최저임금제, 주 52시간 상한제 등으로 경영인연합회와 노동계의 이견은 경상수지의 악화를 예견할 수 있다. 이런 한국은행의 경제 전망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에서 보는 체감경기는 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이런 한국의 경제적 상황은 교회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 동안 교회성장기에 한국교회는 몸을 많이 불렸다. 이제 다시 재정을 긴축하거나 교회의 사업을 축소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구나 2018년 성직자에 대한 과세의 실시로 교회 회계의 복식부기 등 새로운 현안이 교회 재정을 어렵게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한국경제의 위기와 맥을 같이한다.

미래현상들인 편의성을 대변하는 ‘일회성’(disposability), 교통수단의 발달로 말미암은 ‘이동성’(mobility),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의 극대화인 ‘양극화’(polarization) 등도 한국교회 위기에 직격탄이 되었다. 내 교회라는 소유의식보다 필요할 때는 어느 교회나 갈 수 있는 교적이 없는 교인들이 양산되고 있고, 이동성의 발달과 주5일 근무제로 주말이면 어디엔가 가야하고, 양극화 현상으로 명목상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미래현상은 탈종교화를 부추기고 기복적 종교로 기독교를 타락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공동체의 위기를 통해 한국교회의 위기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모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에 중요한 시간이었다. 십계명 두 돌비와 성막건축 도면을 하나님께서 모세와 공동체에 주시는 시간이었다. 말씀과 성막은 광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도구였다. 그런데 백성들은 모세가 보이지 않자 그들을 이끌 신을 만들자고 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공동체의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그들의 첫째 과오는 그들을 이끄는 신이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대신 모세를 신격화한 ‘인본주의’의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들의 둘째 과오는 금으로 신을 만들면 그들을 이끌 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가장 비싸고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만들어야 그들을 이끌 신이 될 수 있다는 ‘금본주의’의 과오를 범한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를 위기에 빠지게 한 두 가지 과오는 인본주의와 금본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사건 또한 한국교회의 위기의 원인을 살펴볼 수 있는 성경적 근거이다. 성전을 숙정하신 예수님께서 한국교회를 보실 때 같은 의미에서 채찍을 드실 수 있을 것이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상업주의’ 행위를 예수님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고 지금도 깨끗케 하시려고 채찍을 드실 것이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집을 자기들의 교권으로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자릿세를 받고 파는 교권을 행사하였다. 예수님은 지금도 ‘교권주의’에 대하여 채찍을 드실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에돔 사람인 헤롯이 아닌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지은 성전을 보시며 정교 혼합의 부산물인 성전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지금도 혼합주의의 사고와 신앙을 배격하시려 채찍을 드실 것이다. 성전에 제사하러 오는 사람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성전에 와서 성전세로 돈을 바꾸고 적당히 제물을 사서 드리는 형식적 제사를 예수님이 보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판을 치고 있는 ‘형식주의’에 대해 채찍을 드실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현상도 한국교회 위기의 원인이라고 하지만 지도자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한국교회의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일꾼의 자격을 열거하고 있다. 구약과 신약은 각각 일꾼의 자격을 논한다. 구약에서는 출애굽 공동체의 일꾼들을 세울 때에 그 자격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출 18:21)라고 한다. 신약에서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일꾼을 세울 때에 그 자격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행 6:3)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영성을 갖춘 인물을 의미한다. 진실하여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는 도덕성을 갖춘 인물을 의미한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는 영성적 인물이다. 칭찬 받는 사람은 도덕적 인물이다. 구약과 신약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교회 공동체 일꾼의 자격은 ‘영성’과 ‘도덕성’이라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 등의 일꾼의 자격은 한 결 같이 영성과 도덕성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성경은 도덕성을 자세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덕성은 삶의 영성이다. 영성이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 도덕성이라면 도덕성도 영성에서 비롯된다. 교회 지도자의 도덕성의 회복은 교회의 가치를 높여줄 것이며 위기를 극복하게 할 것이다.

어느 책에 교회가 쇠퇴할 때 나타나는 신드롬이 이렇게 정리되었다. 첫째는 예배보다 회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교회에 대한 관심보다 교회가 세운 연합기관들에 더 관심이 집중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성경 말씀을 상징화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상징화하여 성경의 가치를 축소하는 것은 교회를 쇠퇴하게 하는 일이다. 한국교회는 우리보다 앞서 교회의 위기를 경험한 구미교회를 통하여 위기의 요소들을 제거하여 교회의 본래적 모습을 회복할 때 본질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교회의 미래

기독교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영성적 기능(spiritual function)이며 다른 하나는 예언자적 기능(prophetic function)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영성적 기능을 가진 영성적 종교이며 동시에 예언자적 기능을 가진 예언자적 종교라고 한다. 교회 사가들은 유럽 교회가 급속도로 쇠퇴한 원인은 예언자적 기능에 지나치게 치중하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예언자적 기능에 지나친 무게를 둔 것이 교회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면 교회가 쇠퇴하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능의 균형 감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영혼구원과 더불어 사회구원의 책임을 동시에 가진 영적 공동체이며 사회적 기관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래교회의 몇 가지 패러다임을 정리해본다.

 

1. 정보목회

현대사회를 후기 산업사회 혹은 탈 근대 사회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보 사회라는 명칭은 가장 현실적이며 타당한 현대사회의 표현이다. 그래서 현대사회를 지식사회(Machlup), 전자기술사회(Brezezinski), 후기산업사회(Bell), 새로운 산업사회(Galbraith), 초산업사회(Toffler), 혹은 고도기술사회(Naisbitt)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래학자들은 정보를 ‘숨은 설득자’(hidden persuader)라고 부른다. 현대 사회에 가장 영향력 있는 힘의 근원이 정보이다.

21세기를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정보 사회라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1989년에 이미 21세기는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1989년은 동구권이 붕괴되던 해인데 동구권의 붕괴란 정보 사회의 구도로 세계가 재편되었다는 의미이다. 정보 사회의 기조는 산업 사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정보가 사회의 중심이 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정보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보사회는 산업사회와는 달리 부지런함 보다 정보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승리한다. 정보 사회는 독점이 아니라 공유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정보 사회를 살아야 하는 우리는 정보 네트워크를 가져야 하며 모든 지식과 소유의 공유로 전환해야 한다.

산업사회를 지나면서 우리가 흔히 듣던 3D 현상이 있다. 더럽고(dirty), 어렵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것은 회피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최근 정보사회의 3D 현상은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해야 하는 새로운 현상이다. 디지털(digital), 디엔에이(DNA) 그리고 디자인(design)이 신 3D 현상이다. 이 셋은 정보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습득해야 할 것들이다.

정보사회는 이전의 산업사회와는 달리 효율성이나 효과성보다 유연성이나 창의성이 더 중요한 사회이다. 정보사회는 조직의 혁신 방안도 구조조정이나 리엔지니어링 그리고 모듈레이션 등으로 발달하게 되므로 정보 마인드로 변화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정보사회는 인간의 위상도 상당히 달라진다. 인류의 1차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혁명 시대는 자연을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였고 2차 혁명인 산업혁명 시대는 기계를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였지만 3차 혁명인 정보혁명 시대는 사람을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화두는 ‘4차 산업’이다. 산업의 중심이 3차 산업인 상업, 금융, 보험, 수송 등에 국한 시키고 이제는 4차와 5차 산업의 개념까지 확대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4차 산업이란 정보, 의료, 교육, 서비스 산업 등 지식 집약적 산업을 총칭하며, 5차 산업이란 패션, 오락 및 레저산업을 가리킨다. 세계경제포럼이 지난 2016년 1월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을 화두로 제시하면서, 4차 산업혁명을 디지털 혁명에 기반으로 한 물리적 공간, 디지털적 공간 및 생물학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기술융합의 시대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목회의 패러다임에도 상당히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우리 시대의 목회적 환경에서 정보의 발전과 흐름을 알지 못하면 사회의 변동을 인지할 수 없다. 급속도로 진보하는 사회를 읽지 못하면 사회를 구원하기는 더욱 어렵게 된다. 교회는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로서 정보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정보는 결코 사회를 구원하는 도구는 아니다.

 

2. 가정 중심 목회

산업 사회와 정보 사회의 차이를 개미 사회와 거미 사회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개미란 부지런히 일하여 모든 먹이를 독점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산업 사회에서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소유하게 되었으며 소유를 독점하던 시대이다. 그러나 거미는 개미가 아니다. 거미는 공중에 거미줄을 치고 사는 생물로 부지런히 일하는 타입이 아니라 좋은 길목에 거미줄을 치고 기다리다가 먹이가 걸리면 잡아먹는다. 정보 사회는 부지런함 보다 정보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승리한다. 정보 사회는 개미 사회와 같이 독점이 아니라 공유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정보 사회를 살아야 하는 우리는 정보 네트워크를 가져야 하며 모든 지식과 소유의 공유로 전환해야 한다.

21세기는 정보사회이기 때문에 산업사회와 같이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는 사회가 아니라 가정에서 업무를 하며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이다. 실제로 갈수록 재택산업(在宅産業)이 발달하며 컴퓨터만 들여다보며 일하는 직업들이 점점 많아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출퇴근이 없어질 미래 사회에는 부부사이가 좋은 가정은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은 지옥같이 변할 것이다.

미래 사회는 가정중심주의로 변한다고 한다. 피자를 비롯한 음식물이 가정으로 배달되고, 세탁물이나 생활용품들이 가정으로 배달되며, 선물도 택배회사에서 배달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상거래가 가정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은행업무도 집에서 홈뱅킹으로, 쇼핑도 가정에서 홈쇼핑으로, 심지어는 공부도 학교에 가지 않고 홈 스쿨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가정중심주의 시대인 21세기를 앞두고 그리스도인은 가정을 잘 추스려 모범적인 가정이 되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미래 교회는 어떤 형태의 교회이든지 가정 중심의 교회, 가족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미래 교회가 가정중심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미래 사회는 가정 중심으로 변화하며 사회의 진보가 가정 중심으로 되기 때문이다(cocooning). 둘째는 미래의 가정이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게 되고 가정이 해체되며 파괴되는 과정이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신세대가 개인주의적이듯이 미래 가정은 다세대의 가정 보다 핵가족이 극대화될 것이고 가족이 분열되고 이산되는 경우가 흔할 것이다. 이런 다양한 미래 교회에 대한 예측은 가정이 사회생활의 중심이 되며 결과적으로 여성이 사회의 중심이 될 것을 예측 가능케 하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인 폴 케네디(Paul Kennedy)는 21세기에 한국이 세계 중심국가가 되는 이유 다섯 가지를 말하면서 첫째로 유교중심적 가정중심주의가 남아있다고 하였다. 그는 명절이면 전 국민의 절반이 고향으로 가는 민족은 한국 사람밖에 없다고 하였고 한국의 가정중심주의의 중앙에는 항상 어머니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가정을 잘 지키는 것이 새로운 밀레니엄에 세계의 으뜸 국가가 되는 비결이라는 말도 된다. 둘째는 한국의 고유문화이며 한국 문화의 중심은 한(恨)이다. 셋째는 한국인의 교육열이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을 가지고 있으며 매년 엄청난 사교육비를 쏟아 붓고 있으며 최근에는 헌법재판소에서 과외금지를 위헌이라고 하였다. 넷째는 한국 젊은이의 엘리트 정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는 창업 정신이라고 하였다. 최근 한국의 벤처기업 창업률은 세계 최고이다.

 

3. 감동 목회

사이버 시대의 특징은 3F 즉 패션(fashion), 감각(feeling), 팬시(fancy)이다. 감동 시대에는 목회도 감동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객만족’이라고 하던 것이 이제는 ‘고객감동’이라고 한다. 이제는 만족 정도로는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느낌을 주어야 하고 감동이 흐르게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고객인 교인들에게 만족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사회는 신상품 등으로 감동과 자극을 줄 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보다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목회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기존의 목회구조를 전환할 수 있는 대체 목회상품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의 노력이 교인들로 하여금 만족의 차원에서 감동의 차원으로 영적 수준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경쟁력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안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 성직자에서 교인으로 교회의 중심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교회의 목표를 세계 최고, 세계에 영향을 주는 교회로 바꾸어야 한다. 셋째, 교회의 목표나 경쟁의 수단이 양(quantity)에서 질(quality)로, 크기(size)에서 가치(value)로 바꾸어야 한다. 넷째, 기업에서 일회성 고객을 평생 고객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듯이 교인을 일회성 교인에서 평생 교인으로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이버 시대의 교회는 목회자가 교인에게 만족을 줄 수 있도록 의지가 있어야 하며 전 교인이 이에 함께 참여하게 될 때에 만족에서 감동으로 전환될 것이다. 우선 내부 고객인 기성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불편을 느끼지 않게 만들어 주어야 하며 이러한 내부 고객의 만족은 결국 외부 고객인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자연히 만족을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감동이 없어지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으로 변하였다. 예수님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시대를 비판하셨고(마 11:17), 바울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무정하여진다고 하였는데(딤후 3:3) 이런 세상에 감동을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동시에 중요한 일이다. 감동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감동이 필요하며 감동이 없는 사람들이 감동을 원하게 된다.

좀처럼 감동하지 않는 현대인은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감동한다. 기독교의 진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장 감동하지 않을 것 같은 교인이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감동을 하고 이런 감동의 원천은 모든 교인들에게 동일하다. 감동이 있는 교인이 생동하고 생동하는 교인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 목회자는 순간순간 교인을 감동시키는 감동사가 되어야 한다.

 

4. 영성목회

21세기는 영성의 시대이다. 교회가 영성적이지 못할 때에 사회는 사이비, 이단이 많아진다. 영성이란 말은 우리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영성이란 말은 기독교에서 독점하는 용어가 아니라 다른 종교와 학문의 분야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영이란 원래 하나님의 숨을 의미하듯이 영성이란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숨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의미한다. 고대 교부의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영성이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하였다. 실제로 영성이란 ‘그리스도와 일체된 삶’을 의미하며 기독교의 영적, 종교적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한다.

교회는 이러한 미래인이 추구하는 영성의 제공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회에 건전한 영성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하며 사회에 영성을 제공할 능력을 항상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 외에도 영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비 기독교적 영성과 다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영성을 가져야 하며 사회에 제공하여야 한다.

양극화(polarization)는 사이버 시대 시대적 특징이다. 경제적으로도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가 두드러지고 있으며 이런 양극화 현상은 지식 정보와 신앙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영성적 양과 질도 시간이 갈수록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서 영성적으로 충만한 사람과 영성적으로 빈곤한 사람의 간격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말기에 주신 말세에 관한 가르침의 한 부분이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와 누가 복음의 므나의 비유는 같은 내용의 비유인데 이 비유의 결론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것이다. 21세기에는 영성이 있는 자들은 더욱 간절히 준비하며 풍성하게 될 것이며 없는 자는 있던 것마저 빼앗기고 영적 빈곤 상태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가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얻게 된 중세풍의 형식과 거품과 깨기 힘든 두꺼운 껍질을 가지게 되었는데 교회는 과감하게 이러한 거품을 걷어내고 껍질을 깨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중세에서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영성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고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영성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요청이다. 인간의 삶이 기술화되고 조직화될수록 인간은 기술에서 초연해지고 조직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심리를 동시에 가지게 되며 이러한 해방의 돌파구로 영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기복적이라는 자타의 비판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왔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 기독교사에 나타난 한국 교회의 모습은 기복적이 아니다. 1960년대에 제3공화국이 출발하면서 국가의 기조는 가난에서의 탈피였고,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로 바뀌었다. 경제성장이 국가의 시책이 되므로서 교회도 “잘 살 수 있다, 부자가 되어야 한다”로 바뀌었다. 이전까지 한국 교회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예수 믿고 천당”이 전도요, 설교의 핵심 주제였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다시 교회의 본질적 영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5. 평신도 목회

지난 시대의 성직 패러다임(clerical paradigm)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평신도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 이전의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의 종속적 관계에서의 협력자이었으나 미래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의 동등한 관계에서의 동역자가 될 것이다. 칼 조지(Carl George)는 미래 교회를 메타교회(Meta-church)라고 하였는데 메타교회의 목회자는 소그룹을 통한 교회활동을 강조하고 평신도 훈련을 위한 일에 많은 시간과 힘을 투자해야 한다고 하였다.

평신도는 목회자와는 달리 적절한 훈련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목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교회의 잠재적 자원이다. 목회자는 교회에 영향을 많이 주지만 언제나 유동적이며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교회의 조직을 장악하는 것은 목회자의 이동시 교회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는 교회의 안정된 구성요소로서 잘 훈련된 평신도는 안정된 교회의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크래머(Hendrick Krammer)는 평신도를 ‘동결된 자산’이라고 하였다.

교회의 어원과 정의에서 보는 대로 교회란 특정한 목적에 의하여 모인 하나님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주체가 항상 하나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교회도 그 주체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전제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교회의 평등의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의 개혁의 목표는 탈 성직주의와 탈 제도주의이다. 루터는 평신도의 사제성과 보편적 사제성을 강조하였고 만인제사장설을 주창하였다. 복음은 모든 신자들의 소유물이며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의 제사장직을 사제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공유물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오랜 로마교회의 전통 가운데서 평신도는 성직자와 대칭적인 의미를 가진 일반 교인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평신도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개신교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계급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기능적으로 구분하여 평신도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한 하나님의 도구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모두가 하나님의 일꾼이며 교회의 봉사자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간의 성직자 중심의 편중된 교회 구조를 평신도 중심의 분산된 교회 구조로 조정이 되어야 한다. 성직자에게 편중된 교회 구조를 평신도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교회와 성직자 개인에게 유익이 될 것이고 또 미래 교회는 자연히 성직자 중심의 구조에서 평신도 중심의 구조로 전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6. 교육 목회

사이버시대는 인류공동체가 보편화되는 우주적 사회로서 이동성(mobility)이 극대화되는 사회이다. 세계의 모든 도시와 인구가 오늘날처럼 이동률이 심하고 이직률이 심한 때는 일찍 없었다. 잦은 이사와 여행은 사회를 기존의 사회현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유목민적 사고의 사회로 탈바꿈하고 공동화를 촉진하게 할 것이다. 도시의 변화는 이동성을 가속화하며 이러한 이동성의 발달은 교회로 하여금 기존의 목회구조를 무력화할 것이다. 실제로 대도시에서는 심방 중심의 목회가 점차로 어려워질 것이고 심방목회의 대행물이 속히 제공되어야 할 시점에 왔다. 미래사회의 이동성의 발달과 미래인의 일회성의 발달은 교회의 소유개념 보다 대여개념이 발달할 것이고 이러한 변화는 심방목회에서 탈피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 대안은 평신도의 영성적 양육 즉 교육목회가 될 전망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회의 변동 요인은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을 요청하게 된다. 이전의 목회란 새벽기도, 심방, 설교 등으로 함축할 수 있었고 심방에 가장 많은 시간을 소모하였지만 사회의 변동은 목회에 있어서 심방의 효율성을 감소하며 비중을 저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동은 목회의 대안을 요청하게 되고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교육목회가 심방목회의 대안이라고 제안하는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다. 교육목회를 통하여 비로소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할 수 있으며, 교인 양육의 결과 보다 과정에 관심을 두는 목회이므로 가장 진솔한 목회이며, 유동적인 미래 교인들에게 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목회이며, 미래 사회의 변동과 목회자의 목회관을 가장 쉽게 교인들에게 전달할 수 있으므로 목회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심방 중심의 목회는 교육 중심의 목회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7. 소그룹 목회

산업 사회와 정보 사회의 근본적 차이 가운데 하나는 규모에 대한 이해이다. 산업 사회의 경제를 규모경제라 하며, 기업을 규모기업이라 하는 반면 정보 사회의 기업은 중소기업이라고 하다. 그래서 정보 사회를 중소기업의 시대라고 한다. 산업사회는 규모가 큰 기업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정보사회는 규모가 큰 기업이 아니라 작고 전문성을 가진 기업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란 말은 정보사회에 적합한 시대적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고 실제로 작은 것이 아름답게 보일 때가 오고 있다.

대형 기업과 대형 교회가 가능했던 산업 사회와는 달리 정보 사회는 기업도 교회도 작아져야 한다. 산업 사회를 거치면서 교회도 대형 교회 중심의 교회가 되었고 여의도에서의 대형 전도 집회가 가능했었지만 이제는 소형으로 변화되는 추세에 있다. 대형 교회도 소그룹을 통한 대형이어야 한다.

교회 네트워크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할 미래 교회는 거대한 몸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 네트워크에 유연한 소그룹적인 교회가 강할 것이다. 미래교회는 소그룹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 소그룹의 교회 혹은 소그룹적인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 비록 대형교회라 하더라도 소그룹 교회는 공룡처럼 비대하거나 항공모함처럼 둔한 사역이 아니라 세포가 제대로 활동하여 교회의 모든 사역의 신경조직까지 스며들 수 있다. 소그룹의 교회란 교회의 사이즈가 대형이냐 소형이냐가 아니라 훈련을 통한 소그룹을 가진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그룹이란 미래 교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회의 경쟁력과 세계화를 가능하게 할 중요한 요인이다.

소그룹에 대한 이해와 실제적 예를 통하여 소그룹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도의 교제가 결여되어 있는 현대 교회, 특히 대형교회에서 소그룹은 친밀한 교제가 가능하다. 둘째, 설교는 질문이나 토의 등이 불가능하지만 소그룹을 통한 훈련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하여 말씀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셋째, 일반 목회에서는 목회적 관심에서 소외되는 교인들이 많이 있을 수 있는데 소그룹 목회는 개인에게 목회적 관심을 기울일수 있고 양질의 목회를 제공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이다. 넷째, 소그룹은 상호 격려와 후원을 통하여 교인 상호간의 신앙 성장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다섯째, 소그룹은 목회자 자신이 개인의 신앙성장을 관찰할 수 있으므로 소그룹 훈련뿐만 아니라 설교나 심방 등 목회 전반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여섯째, 소그룹은 인간관계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전도를 가능하게 하고 피전도자도 소그룹을 통하여 빠른 시간에 친숙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일곱째, 임상적으로 볼 때에 소그룹에 참석한 교인들이 소그룹에 참석하지 않고 예배에만 참석하는 교인들보다 성장이 훨씬 빠르다. 여덟째, 소그룹은 모든 교인들을 목회자의 목회지침대로 양육할 수 있다. 미래 사회의 급진적 변화는 교회로 하여금 소그룹을 통한 교인의 훈련을 통하여 극복하고 제자 만들기를 가능하게 할 것이며 교회의 지속적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8. 리더십 목회

전환기의 목회는 목회자의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강력한 목회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대이다. 지금까지의 목회자는 일반적으로 권위적인 리더십의 소유자였고, 소위 카리스마적인 목회자가 교회성장을 이루었던 것도 사실이다. 카리스마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리더십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리더십 보다 권위적인 표현이 강한 것이다. 물론 권위적인 것이 리더십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리더십이란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것보다는 화합적이고 협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행정학에서는 교회행정을 세 가지 용어를 가지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용어는 교회행정의 세 가지 형태이다. 첫째는 리더십(leadership)이다. 리더십이란 지배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환상을 제시하는 업무(envisioning task)와 모델을 만드는 업무(modeling task)이다. 둘째는 관리(management)이다. 관리란 기획하는 업무(planning task)와 감독하는 업무(monitoring task)이다. 셋째는 경영(administration)이다. 경영이란 보조하는 업무(supporting task)와 향상시키는 업무(enhancing task)이다. 이와 같은 정의에서 보면 리더십이란 목회자의 행정업무이며, 관리란 장로의 행정업무이며, 경영이란 집사의 행정업무이다. 교회행정이란 어느 한 직제가 가지는 독점적 업무가 아니라 모든 직제가 고유한 업무를 가진 교회의 업무이다.

위에서 본대로 리더십이란 통제와 지배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제공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리더십이란 조직 운영에 있어서 구심적인 힘을 형성시키는 것이며 조직의 공동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하나로 나아가게 하는 역량이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사람을 이해해야 하며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강력하고 창조적인 리더십을 갈망하고 있다.

교회는 좋은 지도자를 원하고 지도자는 강력한 리더십을 원한다. 교회의 리더십은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며, 의미 있는 예배를 드리게 하며, 그리고 지역 사회에 대하여 활기 찬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책임이 있다. 결과적으로 목회자의 리더십은 성도들에게 영향을 주며 교회의 모양을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리더십을 상실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현대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갈망은 강력하고 창조적인 리더십이다. 미래 사회는 그 변화의 다변성과 급속성에 비추어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이 요청되며 이러한 요청은 미래 교회에도 예외가 아니다. 목회자의 리더십은 교회의 방향성을 좌우하며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요인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권위적 목회의 틀을 벗어나서 리더십 있는 목회로 전환하여야 할 것이다.

 

9. 디아코니아 목회

그간의 한국교회의 성장세가 주춤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한국 교회의 성장 신드롬은 사회를 외면하고 위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교회가 사회를 외면한 결과로 교회가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성장 신드롬은 기세가 꺾이고 있으며 이제 다시 한국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회성장 신드롬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의 교회성장기는 그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했던 은총의 기회이다. 이제는 교회성장이라는 상향 중심의 목회관에서 벗어나 성숙이라는 외향 중심의 목회관으로 전환해야 할 때이다.

미래교회는 자기중심적 교회관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할 것이며 이미 부분적으로 이러한 중심이동 현상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났다. 그 동안의 교회의 관심은 교회성장이었고 선교는 개인영혼구원 혹은 교회성장이라는 제한적 의미를 가졌지만 정보 사회에서의 교회의 관심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본질적 물음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래서 선교의 개념도 개인구원이라는 제한적 개념에서 개인구원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통전적(holistic) 개념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새로운 변형의 시도는 사회봉사로 교회의 관심이 전환될 것이다.

디아코니아는 ‘케리그마’와 ‘코이노니아’와 더불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기능과 교제하는 기능과 봉사하는 기능은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중요한 기능들이다. ‘케리그마’의 내적 기운이 ‘코이노니아’라면 ‘케리그마’의 외적 작용이 ‘디아코니아’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는 교회를 봉사자의 집단(Group of ministers)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교회가 ‘디아코니아’를 상실하면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 가지를 지향하는데 상향(upreach)과 내향(inreach)과 외향(outreach)이다. 상향은 교회의 첫째 목표이며 교회의 존재이유이다. 이것은 예배와 전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내향은 보이는 교회의 모습이며 힘의 집결을 의미한다. 이것은 훈계이며 축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외향은 실제적 교회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다. 이것은 전도이며 돌봄(caring)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앤더슨(Leith Anderson)은 베이비붐 이전세대(Pre-Boomers), 베이비붐 세대(Baby Boomers), 베이비 거부세대(Baby Busters)의 특징을 베이비붐 이전에는 선교와 기도, 성경공부에 관심을 가지던 교인들이 베이비붐 세대에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베이비 거부세대에는 복지와 관련된 프로그램이나 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이버시대의 교회는 교회 성장이라는 제한적 선교의 의미가 아닌 디아코니아를 포함한 통전적(holistic) 의미의 선교를 지향하고 교회 성숙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이버시대에 교회에 남아있는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디아코니아와 관련된 것들일 것이며 교회는 사회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10. 문화 목회

흔히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문화는 이제 취미나 여가 활동이 아니라 인류의 가치이며 나아가 생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버 시대는 문화 시대이다. 문화가 발달하며 타문화가 존중되는 시대에 교회는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고 사회의 문화를 기독교 문화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문화적 차원에서 볼 때 가장 시급한 것은 기독교의 문화를 사회에 뿌리내리는 일이다.

문화란 사회 구성원의 행동과 사회 체계를 형성하고 이들을 조합 연결하여 동일한 이념 가치관을 형성하는 영향력의 본체라고 한다. 인간의 이념과 동기를 지배하는 원동력인 문화를 교회는 사회에 심음으로 사회 문화를 기독교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기독교는 사회의 바른 문화를 창출해나가는 원동력이 되어야 하며 전통 문화의 보존자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세계민족사를 보아도 역사 속에서 소멸한 민족은 전통가치와 문화를 소홀히 여긴 민족들이다. 원나라, 청나라가 이런 나라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통 가치와 문화를 보존하고 동시에 건강하고 새로운 사회 문화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의 발달은 문화의 발달에 연유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발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의 k-pop이나 드라마 등을 통하여 한류가 세계를 지배한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며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 공감을 얻은 결과이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발달을 추구한다면 한국사회의 문화의 발달을 교회가 담당해야 할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21세기를 지배하는 민족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단일민족이다. 둘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다. 셋째, 교육과 기술에 투자한 민족이다. 교육과 기술은 미래 사회와 산업의 발달에 중요한 기간(基幹)이 되므로 교육과 기술에 대한 투자는 미래를 위하여 중요한 준비이다. 위의 설명을 통하여 문화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우리나라는 21세기를 위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또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문화를 창조하느냐 라고 하는 기본 물음을 통하여 교회는 사회를 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의 자신을 위한 성장 위주의 교회에서 타인을 위한 성숙 위주의 교회로 탈바꿈해야 하며 이러한 사회를 위한 노력은 사회를 위한 노력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한 자구적(自救的) 노력이 될 것이다. 사이버시대를 맞이하는 한국 교회는 한국의 문화를 세계화하는 매체로서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의 기독교화 혹은 기독교 문화의 사회화를 위한 노력을 극대화하여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한국교회는 현상적 위기에서 탈출하고 미래적 전망과 기대감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살아야 한국 사회와 민족에게 희망을 제공할 수 있다.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나고 삼일운동 100주년을 한해 앞둔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다시 개혁의 정신으로 가다듬고 민족을 이끌 힘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런 모습을 갖추려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엄숙하고 활기에 넘치는 모습을 따라야 할 것이다.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백성들의 마음은 감동 그 자체였을 것이다. 출애굽의 목적지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이다. 광야는 교회의 모형이며, 가나안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다. 가나안으로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교회생활의 끝이며, 교회생활의 목적이다. 가나안으로 행군하는 모습에서 한국교회의 위기극복과 미래전망의 큰 틀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언약궤를 앞서지 말고 뒤 따라 가야 한다. 여호수아 3:3에는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고 한다. 언약궤는 ‘법궤’(레 16:2), ‘증거궤’(출 30:6), ‘여호와의 궤’(수4:11), ‘하나님의 궤’(삼상 3:3), ‘주의 능력의 궤’(대하 6:41)등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이다.

제사장들이 제일 앞에 선 것은 언약궤를 메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사장은 인간적인 권위나 아론의 자손이라는 혈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제일 먼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었다. 어느 시대나 제사장이 앞장 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기 때문이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앞장 설 자격조차 없으며, 제사장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배달꾼에 불과한 것이다.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의 해이었다. 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표어를 끊임없이 외쳤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개혁을 단행한 후 1521년 보름스국회에 소환되었다. 국회에서 루터는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철회하지 않았고 국회가 끝나자 루터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피신하였다. 바르트부르크성에 피신한 루터가 한 일은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9월 흔히 ‘9월 성경’이라 부르는 신약이 출간되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개혁은 1517년이 아니라 1521년에 시작된 것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전래는 1884년 알렌이 첫 선교사로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다음 해인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와 장로교와 감리교가 전래되었다. 그러나 이전인 1882년 이미 한글성경이 한국 땅에 들어와 있었다. ‘로스번역’이란 쪽복음을 서상륜이 이 땅에 반입하였던 것이다. 당시 성경은 한글성경이었고, 한문을 사용하던 사대부라 불리던 상류사회가 아니라 한문을 사용하지 않던 90%의 일반 서민이 선교의 대상이었다. 선교사 보다 성경이 먼저 들어온 한국교회는 성경적 교회이다. 한국교회가 다시 성경 본질로 돌아가 성경적 개혁을 이루어야 위기를 벗어나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스스로 성결하게 해야 한다. 여호수아 3:5에는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고 한다.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두 번째 준비는 스스로 성결하게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결’을 명하였다. 성결한 자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거룩한 땅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명령한 성결은 영적 성결, 마음의 정결한 자세를 가다듬으라는 말이었다.

거룩하다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카데쉬’로서 ‘잘라서 떼어놓다’라는 의미이다. 헬라어는 ‘하기오스’인데 ‘분리되다’는 뜻이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표준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떨어져 구별되는 것이며, 탁월하고 비범해지는 것이다. 거룩한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는 차별되어야 하며, 거룩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조직이라 하지 않고 ‘유기체’라고 하며,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을 잘라내어 버려야 하며, 세상 사람의 삶의 방식과 차별성을 가진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거룩한 것이며 동시에 속된 것입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성속’(聖俗)의 신학적 개념이다. 성속의 구분이 없이 중립적인 것을 우리가 성과 속으로 만들어버린다. ‘묵상주의자들은 간혹 성과 속의 이분법에 빠지는 우를 범한다’고 한다. 무엇이든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려고 한다. 그러나 거룩한 무리인 성도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무한 책임이다.

신학에서는 구원을 논할 때, 세 단계의 구원으로 설명한다. 첫째는 예수를 믿고 의로 인정받는 ‘의화’(義化)의 단계이다. 둘째는 매일 성결의 삶으로 거룩하게 변화하는 ‘성화’(聖化)의 단계이다. 셋째는 마지막 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들어가는 ‘영화’(榮化)의 단계이다. 그런데 우리가 의로 인정받는 구원은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편의 강도는 평생 흉악한 강도의 삶을 살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다음 교회생활을 통하여 성결의 삶을 사는 것은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다.

‘의화’의 상징인 출애굽은 많은 시간을 요하는 것도 아니고 질서 있게 줄을 서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의 상징인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많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과 요단강 도하를 단시간에 성취하게 하기 위하여 홍해와 요단강을 갈라주셨다. 그러나 ‘성화’의 상징인 광야생활은 40년이란 긴 시간을 요하였다. 4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는 훈련의 시간이었으며 그 훈련의 내용은 성결 곧 거룩성이었다. 교회는 구원받은 다음 죽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성결의 훈련을 받는 곳이다. 이 성결의 훈련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어야 한다.

루터와 칼뱅은 30여년 시대적 차이가 있었다. 루터가 종교개혁 1세대라면 칼뱅은 종교개혁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리적이었다면, 칼뱅의 종교개혁은 제네바를 중심으로 한 사회개혁으로 실제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로마서가 루터의 개혁의 교과서였다면 야고보서는 칼뱅의 개혁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시대의 종교개혁은 사회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개혁은 루터를 넘어 칼뱅으로 나가야 하며, 성경적 원리에서 사회적 실천으로 나가야 하며, 머리에서 가슴으로 진보하여야 한다.

2019년은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일제 강점기간 동안 많은 독립운동이 있었지만 1919년의 삼일독립운동은 어떤 독립운동보다 민족적인 운동이었다. 당시 우리 국민은 1,600만 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300만 명이 천도교인이었고, 기독교인은 20만 명으로 전 국민의 1.3%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투옥자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였다. 삼일운동의 첫날은 전국 9개 지역 도시에서 동시에 일어났는데 서울을 제외한 8개 도시는 기독교인이 중심이었고 만세운동의 장소가 교회였다. 타 종교에 비해 수적 열세였던 기독교계가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적 애국관과 부활신앙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07년은 한국교회사에 기리 남을 흔적을 남긴 해이다.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어 7명의 최초의 목사가 탄생되었고, 한국교회에 최초로 독노회가 결성되었고, 일곱 목사 중의 한 사람인 이기풍목사를 독노회 창립기념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또한 그 해는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해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성령운동과 부흥운동이 1919년까지 이어져 한국교회가 만세운동의 주체세력으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다시 민족의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뜨거운 성령의 체험과 부흥운동이다.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는 한국교회가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한국교회가 다시 말씀의 근원으로 돌아가(ad fontes), 교회의 본질인 거룩성을 회복한다면 다시 민족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교회, 민족을 이끌어갈 수 있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은 교회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과정이다. 한국교회가 뼈를 깎는 개혁의 정신으로 자정(自淨)과 변화를 이루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시대적 힘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를 이루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성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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