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부흥회를 인도했다. 수원과 용인 지역이 만나는 지점의 작은 상가교회였다. 개척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교인 수는 고작 열댓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절반이 멀리 사는 할머니들이었다. 담임하는 후배 목사는 그 누구보다 열정이 넘쳤고 성실했고 유능했다. 그러나 대규모 최고급 아파트 밀집 단지에서 급성장하는 신흥 교회들에 밀려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나라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다. 사모의 어두운 그늘이 마음에 걸렸지만 아이들은 밝고 착하게 자라고 있었다. 중3인 아들은 목사가 되고 싶단다. 너무도 대견스러워 몇 번이고 안아주고 싶었다. 오후에 짬을 내어 주변 지역의 대형 교회들을 탐방했다. 소문에 듣던 대로 으리으리한 건축물들을 지어놓았다. 몇 천평 규모에 최고의 건축 공법으로 사람들을 끌 수 있는 충분한 시설물들을 갖추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수천명으로 급성장한 교회들이 많았다. 주보를 보니 등록하는 새 신자가 매주 수십명에 달했다. 신도시가 개발되어 수만 세대의 아파트가 급속히 들어서다 보니 얼마든지 가늠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파트 구석구석을 다니며 교인들을 실어나를 대형 소형 버스를 여러 대 보유하고 있는 교회도 많았다. 대형 교회의 배후에는 물론 목회자의 기도와 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날 저녁 몇 명 안 되는 교인들을 모아놓고 집회를 할 때 종교시장의 빈부차를 절감했다. 경쟁에 이길 제반 조건을 갖추어 놓으니 가만히 있어도 차고 넘치는 교회들이 있는가 하면 월세도 제대로 못낸 채 허탈감에 빠진 교회도 부지기수다. 엄청난 자본과 상품가치를 보유한 대기업을 결코 소기업이 이길 수 없는 이치가 아닐까. 그렇다. 신도시의 교회 현실이야말로 냉혹한 자본주의 논리가 판치고 있었다. 그날 강사인 내가 은혜를 받았다. 교인들이 전부 나와 특송을 했다. 할머니 권사님 한 분이 자꾸만 눈물을 훔쳤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모두가 너무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음정도 박자도 제대로 맞지 않는 찬송이었지만 수백명의 성가대원들이 부르는 노래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바로 그 순간 도시의 유목민들을 유인하기 위해 최적의 조건을 구비한 교회들이 오버랩되었다.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할 텐데도 교인 쟁탈전은 그 끝을 모르는 듯 보였다. 내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수많은 교인과 더불어 할렐루야를 외칠 때 상가 한 구석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역자들이 있다. 이제 그만하면 됐습니다. 작은 교회도 살립시다! 김흥규 내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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