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로 날아간 편집장의 첫번째 이야기

한국에서는 77세면 벌써 활동을 접은 나이지만 전화선을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40 대 청년이었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오성광 목사(호주 시드니중앙교회 담임 목사)와 이탈리안 포럼에서 만난 홍관표 목사는 목소리 그대로 이제 60 초반 같은 건강한 모습 그대로였다.

▲ 홍관표 원로 목사

시드니에서 홍관표 목사에게 붙어다니는 명칭은 다양하다. 시드니 최초의 원로목사, 시드니 교회의 아버지, 시드니의 어른 등등 시드니 사회에서도 무시 못 할 장로로 통한다. 그야말로 큰 어른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홍목사에게 자문을 받고 또 지도를 받는다. 아직도 주일 마다 설교 스케줄이 꽉차있다.

▲ 옛날 추억을 더듬으며 환한 미소를 지으시는 홍관표원로목사

뿐만 아니라 각종 행사에 초청을 받는다. 세미나 강사로, 신학교의 특강으로, 젊은 목사들 보다 더 바쁘게 활동한다. 아마 그래서 그의 얼굴은 세월을 거꾸로 돌려 놓은 듯 정지되어 있다. 그렇게 건강한 비결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그냥 웃으면서 나는 저녁에 집에 있으면 배가 고파 죽겠다는 말을 대신했다. 그날은 정말 참 잘 잡수셨다. 아마도 소식(少食)하도록 철저히 목사님을 관리하시는 사모님에게 건강의 비결을 돌리시는 듯했다.

▲ 배경이 좋지 않다며 여러 곳에서 기꺼이 포즈를 취해 주신 홍목사

1981년 호주로 건너오라는 요청을 받아

홍관표 목사는 81년 시드니에 오기 전에 고신대학(본과와 함께)에서 사무장을 지내면서 교수를 했다. 그러면서 성동제일교회(현 재송동교회)를 개척설립 했다. 오순옥 전도사가 홍관표 목사를 위해 자신의 마지막 헌신을 드린 것이었다. 그런데 시드니에서 오라고 하니 오 전도사가 결단코 반대를 하면서 금식을 시작했다고 한다.

▲ 후임 오성광 목사와 함께 선 홍관표 목사

그런데 어느 날 홍목사를 불러 호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고 하면서 가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기도 중에 이상을 본 것이었다. 바다 건너편에 항아리가 놓였는데 모두가 빈 항아리였다고 한다, 그것을 채울 사람은 홍목사여서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깨달은 오전도사는 비로소 홍목사를 놓아 주었다.

그리하여 1981419일 부활주일에 Sydney Burwood Girls High School 강당에서 한인중앙교회로 모여 창립예배를 드렸고 오늘날의 시드니중앙교회가 된 것이다. 20011215일 정년 은퇴를 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은퇴와 원로라는 명칭은 시드니에서는 대단한 역사적 단어이다. 왜냐하면 아직 아무도 가지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 필자와 함께 오성광 목사 홍관표 목사,

한상동 목사와의 숨은 이야기에 밤은 깊어가고.

한상동 목사와 홍목사는 참 절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한목사와 홍목사가 탁구를 즐기다가 갑자기 한 목사가 홍목사, 나 아무래도 몸이 이상하다. 병원에 입원을 해야 겠다.”면서 복음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한다. 그때만하더라도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좀 피곤하여서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학교 문제로 결제를 받아야 할 일들이 있어 한목사를 찾아 말씀을 드리니 홍목사, 이제는 학교나 교단의 일을 나에게 가지고 오지 말라. 이제 세상에서의 나의 일은 끝났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기도하던 중 어느 날 잠자리에서 꿈을 꿨다. 학교 뒤편에 하늘에서 내려온 듯 큰 크리스마스 추리가 섰는데 그 꼭대기에 면류관 같은 큰 별이 달렸더라는 것이다. 참 이상하다고 여기며 꿈을 깼는데 그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한 목사님이 천국으로 가셨다는 소식이었다.

▲ 홍목사와 김이진 사모님(자료집에서)

아마도 교단의 어른이며 신사참배의 모진 고난을 이기고 마지막 까지 사명을 감당하신 분에게 주어지는 상급이라는 것을 안 당신도 역시 그렇게 그 길을 달려 온 듯싶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라 이름으로는 기억하지 못했던 홍목사도 막상 만나니 아 아는 사람이구먼그러면서 마음을 트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호주의 가을밤은 꽤나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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