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싸울 일과 이혼 할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송병주 목사(부산 출신인 송 목사는 고신대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Fuller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LA에 위치한 선한청지기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도 갈등이 존재하고, 교회와 교단에도 갈등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수긍되지 않는 점 때문에 질문을 던지고, 논쟁하며 비판을 할 수 있습니다. 부부나 형제 사이에도 갈등은 존재하고 그로 인해 심한 싸움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혼할 일과 형제의 관계를 의절할 일과 그냥 싸우고 말 일은 다릅니다.

이단 논쟁은 “아니면 말고” 할 일이 아닙니다. “총회에서 조사하고 ‘아니다’고 판정하면 되지 않느냐? 그러면 확실하게 굴레를 벗을 수 있다. 그게 교단 법이고 장로교 정치 원리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법과 정치는 있는지 몰라도 그 속에 형제의 인격과 삶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어나게 될 여론 재판과 그 속에서 겪어야 할 사람의 고통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이단 조사를 청구하는 것은 부부 사이에 이혼서류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이건 합의 이혼도 아니라 가정 법원에 이혼 심사를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래 이혼 안 해도 된데” 한다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 수 있을까요?

신학적으로 이단으로 판결을 받든 아니든, 이미 심사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신학적 사형과 같습니다. 신학적 사형을 선고할지 안 할지 논의한 후, “사형 안 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고, 과연 “괜찮아~” 할 수 있을까요? 이단성 판별 심의와 논의 제기는 그만큼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이단 시비가 아니라 갈등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질문하고 싶습니다. ‘갈등전환으로 가야 할 문제를 우리가 이단 시비로 가는 건 아닐까요?’ 갈등전환과 회복과 화목의 과정을 노력하지 않은 채, 관계를 끊을지 말지부터 논의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갈등전환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징벌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보다 회복적 정의를 실현해 가는 노력이 더 선행되어야 합니다.

갈등의 역동성은 단계를 거칩니다. 처음에는 의견의 차이가 나중에는 상대에 대한 인간적인 적대감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새로운 문제점과 오해가 수집되어 퍼즐이 완성되면서, 인간적인 적대감은 일반화된 이론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상호 의사소통과 접촉은 없어지고 자신들과 동조하는 사람들과 접촉 및 대화는 더욱 늘어납니다. 중립적인 사람들의 영향력은 약화되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이 리더가 됩니다. 상호 대화를 위한 참여와 교제를 말하는 중립적 리더들은 공동체의 배신자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중립적 리더들을 축출하여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양쪽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때까지 싸움으로 폭발합니다. 이렇게 갈등의 역동성이 진행되게 해야 할까요? 아니면 갈등전환의 과정을 위한 대화와 수정과 개선과 적응이 필요할까요?

물론 이런 논의가 나오기까지 내부적인 곤란한 일로 갈등이 분명히 있었겠지요. 필자도 <지렁이의 기도>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주변 분들에게 절대 권하지 않습니다. 나의 복음에서 성적인 문제와 같은 과한 고백 간증으로 피해를 본 교회도 분명히 있었겠지요. 필자도 복음학교 가시는 분들에게 공동체적 책임의식을 가진 간증을 하시도록 권합니다. 필요하면 책임 있게 침묵을 당부합니다. 만약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논의가 필요하다면 갈등전환을 위한 과정이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깊게 남습니다.

지금 우리는 파국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 갈등전환을 어떻게 해 나갈지 더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극단적 입장이 리더가 되지 않고, 중립적 입장이 화목과 회복을 위한 연구와 노력을 주도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번 기회에 우리 안에 새로운 기구 신설에 대한 고민을 나눕니다. 징벌하고 응징하는 ‘결론’을 내는 총회 산하 기구도 필요하지만, 화목과 회복과 갈등전환을 위해 ‘과정’을 돕는 기구도 필요합니다.

이단 시비로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갈등전환을 돕는 기구와 역할이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판결보다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는 기구의 신설과 징벌적 정의보다는 회복적 정의에 우선순위를 두는 교단적 분위기에 대한 고민과 논의를 기대해봅니다.

3.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길

작금 한국교회는 목회 세습과 목회 성추행 문제로 사회적 신뢰도를 잃고, 자정 능력 상실로 내부적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를 받고 있습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이라는 정체성이 도전받는 지금, 교회는 타인을 향한 혐오와 배제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법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혐오와 배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같은 형제들조차도 혐오와 배제의 대상으로 낙인찍히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세습과 성추행에 대한 자정을 추구하는 형제들이 오히려 자정 대상처럼 낙인찍히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은 이단성 논쟁으로 자정을 추구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하고, 오히려 윤리적 문제에 대한 자정을 추구하는 일에 더욱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갈등전환을 하지 못하고 분열과 정죄를 쉽게 하는 모습과 윤리적 문제를 자정하지 못하고 부패를 용인하는 모습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도 윤리적인 문제에 자정 능력을 회복하고, 차이와 갈등에 대해서는 갈등전환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분명한 길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볼 때 이번 이단성 시비는 자정보다는 갈등전환의 지혜가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열린 태도가 오히려 우리의 우리다움을 회복하리라 생각합니다.

※ 2장의 갈등의 역동성 단계와 갈등 전환 개념은 허현 목사의 갈등전환 세미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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