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주 듣는 것이 교회의 공공성에 관한 것이다. 아마 그것은 치열한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한 고민 끝에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더 이상 이렇게 개교회의 현실에만 매몰되어 있다가는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이다.

원래 기독교는 공공의 종교였다. 대표적인 예가 중세에서의 교회의 모습이다. 당시는 교회의 공공성이 너무 거세서 사회를 지배했기에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이후 종교개혁을 겪으며 교회와 국가는 공공성의 균형을 맞추어나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균형은 근대 계몽주의 이래 사회가 세속화되면서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타난 것이 ‘종교의 사사화(私事化)’이다. 이제 종교가 개인의 사사로운 영역에서만 그 의미를 가지게 되고 공적인 부분에서는 그 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종교에서 사회의 원칙들을 발견하기보다는 개인의 잘됨과 주변의 평안을 추구하고 있다.

근데 한국교회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개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개교회주의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중심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공동체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그 안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서구교회에서의 문제는 개인주의인데 한국교회의 문제는 개교회주의인 것이다. 이 둘은 ‘종교의 사사화’라는 뿌리는 같으나 그 나타나는 형태에서는 다름이 있다.

이제 교회는 다시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서구에서도 이러한 생각들이 있어왔고 최근에 더 많은 관심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도 독특한 현 상황에서 이런 것들을 나누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문제는 서구와 달리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각 개교회들이 공공성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한국의 교회는 살아있고 수고하고 노력하고자 하는 인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은 한국교회가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의 변화는 결국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왔다. 종교의 변화는 사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이러한 사상의 변화는 결국 사회의 변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종교개혁은 500여년 이어지던 중세 시대를 끝내 버렸고 영국에서의 청교도 개혁은 결국 미국이라는 새로운 이상국가를 탄생하게 만들었다. 조선시대 말기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개화파는 개신교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개화라고 하는 것은 개물화인(開物化人)의 약자인데 그 말은 물건은 열고 사람은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즉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유교에 찌들어 있던 사람들은 변화를 시키겠다는 것인데 이 가능성을 그들은 개신교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기대는 그리 빗나가지 않았고 개신교는 그 절망의 시기에 한 조각 희망의 빛으로 그 역할을 감당했던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이제 우리가 공공성을 이야기하며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할들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을 박영신은 잃어버린 초월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존의 잘못된 관습이나 관행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며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그 힘을 그는 종교의 초월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주는 초월에 근거된 도덕이고 윤리인 것이다.

요즘 한국사회가 비정상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사가 그렇다고 자괴만 하고 있다. 그냥 이 안에서 나만이라도 잘 되고 잘 살아 보겠다는 욕심 이상을 가져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악의 구속을 깰 수 있는 것이 종교이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것이 교회와 같은 도덕 공동체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변화를 통해 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겠다는 원대한 꿈이다. 그리고 벌써 그것은 공공성의 논의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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