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학에서 죄고백과 관련된 건강한 신앙공동체운동의 의의

한국대학기독총장포럼(회장 정상운 교수), 큐티선교회(QTM: Quiet Time Movement), 우리들교회가 주최한 김양재 목사의 큐티목회 철학(THINK)에 대한 신학적 고찰, 제1회 THINK Forum ‘공동체와 고백’이 10월 17일 오후 2시 우리들교회 판교채플에서 개최됐다.

THINK란, 우리들교회 김양재 목사의 큐티목회 철학으로 Telling(고백), Holifying(거룩), Interpreting(큐티), Nursing(돌봄), Keeping(적용)을 가리킨다. ▲고백=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말씀으로 살아난 이야기 간증, ▲거룩=행복이 아니라 거룩을 목적으로 둔 성도의 삶의 방식, ▲큐티=구속사적 말씀묵상으로 삶을 해석하는 과정, ▲돌봄=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지체를 돌봄, ▲적용=말씀에 따라 십자가 지는 적용으로 가정과 이웃을 살림을 의미한다.

제1회 THINK Forum ‘공동체와 고백’이 열린 우리들교회 판교채플

포럼은 정상운 교수(전 성결대 총장)의 사회로 정일웅 교수(전 총신대 총장), 이규민 교수(장신대 석좌)가 발제를 맡고, 김대진 박사(코닷 편집장)가 목회적 적용을 제언했다.

정일웅 교수는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학에서 죄고백과 관련된 건강한 신앙공동체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진젠도도르프(N.L. Zinzendorf)가 이끈 모라비안교도였던 코메니우스(J.A. Comenius, 1592-1670)는 루터보다 약 100년 먼저 종교개혁을 부르짖던 얀후스(J. Hus, 1369-1415)의 후예로 형제연합교회(Unitas frartum)의 목사이자, 그 공동체를 이끌었던 3번째 감독이자 마지막 감독이었다.”고 소개했다.

정 교수는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가 가진 ‘죄고백’의 신학과 신앙고백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경건운동과 삶의 개혁운동의 필요성을 깨우쳐 준다, ▲경쟁과 소유욕에 사로잡힌 잠자는 한국교회의 영성을 일깨우는 새로운 영적도전이 분명하다, ▲기독교영성의 근본토대는 믿음, 사랑, 소망의 신학이며, 그것은 경건의 참된 목표이면서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죄고백운동’의 신학적 표준이고, 근본토대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면서, “▲형제연합교회의 신앙특정 4가지(①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는 신앙, ②그 말씀대로 행동하는 믿음의 순종, ③사랑의 훈육, ④교회의 자유)는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신앙공동체의 모범”이라고 강조했다.

정일웅 교수(전 총신대 총장)

또한 “▲교회연합정신은 한국교회에 만연된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를 극복하고,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할 중요한 방편이 되리라 확신한다, ▲코메니우스와 형제교회연합교회가 우리들교회의 ‘죄고백’을 더욱 성숙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기를 기대한다.”고 피력했다.

다음은 정일웅 교수 논문 전문이다.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학에서 죄 고백과 관련된

건강한 신앙공동체운동의 의의

정일웅교수(전 총신대총장,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

 

[시작]

형제연합교회는 루터보다 약 100년 먼저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보헤미아(체코공화국)의 교회개혁자, 얀 후스(J.Hus,1369-1415)의 후예들이며, 코메니우스(J.A.Comenius, 1592- 1670, 모라비아)는 후스의 개혁정신을 가장 잘 이어받았던 형제연합교회(Unitas fratrum)의 목사요, 또한 그 공동체를 이끌었던 3번째 감독이자 마지막 감독이었다. 그는 가톨릭의 종교박해로 고국에서 살지 못하고, 형제연합교회를 이끌고 일생을 망명생활로 외국에서 보냈으며, 30년 종교전쟁을 종결한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1548)에서도 기대했던 종교자유가 보장되지 않아, 교회를 해산하고, 감독직을 내려놓아야 했던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그 당대에 교육학자로 이름나 있었으나, 정작 그가 신학자였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최근, 코메니우스에 관한 유럽학자들의 연구는 그가 신학자란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또한 17세기에 일어난 유럽경건주의운동의 주역이었다는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그가 남긴 미완성 유작인 “인간사 개선에 대한 포괄적 제언” (De rerum humanarum emendatione consultatio catholica)이란 라틴어원고가 1935년 독일 경건주의운동의 본산지인 할례(Halle)에서 발견되면서, 코메니우스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신학자요, 철학자요, 교육자로서, 그리고 경건주의운동가로서 삶의 개혁자로서, 희망의 신학자로서 그의 학문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92년이 체코가 공산권에서 해방되어 자유화되는 해였고, 또한 코메니우스 탄생 400주년의 해로, 체코정부는 코메니우스를 제2의 국부로, 내 세워 존경하고, 그의 학문과 명예를 회복시켰다.

이러한 역사적인 인물, 코메니우스와 제1종교개혁의 후예들인 형제연합교회(Unitas fra- trum)에 관하여 그들의 역사와 신학과 신앙전통을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기회를 만들어준 우리들교회 목회자이신, 김양재목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간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를 설립하고, 코메니우스의 교육신학사상 알리기에 주력해 온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큰 보람을 느끼게 된다.

논문 전체의 내용은 첫째, 코메니우스가 누구인지? 그의 생애와 활동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며, 아울러 현대 신학자들의 평가에 근거한 코메니우스의 신학적인 위치를 밝혀보았다. 둘째, 이상적인 신앙공동체를 지향했던 코메니우스의 신학과 형제연합교회의 역사와 신앙의 특성을 소개하며, 셋째,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가 이해한 죄고백의 신학적인 이해와 그 실제를 유추해석하며, 넷째,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가 유럽의 경건주의운동에 미친 영향을 상세히 다루었다. 그리고 논문의 결론에서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의 신학이 죄고백과 관련하여 건강한 신앙공동체로서 보여주는 의의(교훈)가 무엇인지를 밝혀보았다.

1. 코메니우스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그의 신학적인 위치

1) 코메니우스는 누구인가?

코메니우스는 1592년, 보헤미아(Bohemia, 체코공화국)의 남쪽, 모라비아(Moravia)의 우헤르스키브로드(Uhersky-Brod)근처 니브니체(Nivnice)라는 작은 마을에서 탄생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잃었고(10-11세), 고아가 된 코메니우스를 그의 고모가 슬로바키아(slovakia)국경 근처에 있는 스트라츠니체(Straznice)로 데려다가 돌보았다. 그 때문에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농사일과 수공업을 배우면서 자랐다. 16세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가 남긴 얼마의 유산이 발견되어, 그 덕택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프레로브(Prerov)에 있는 형제연합교회가 운영하는 라틴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뒤늦게 학교에 들어갔지만, 그의 총명한 머리는 숨길 수가 없었고, 그의 아버지가 속해 있던 형제연합교회가 그를 주목하고, 장차 그 교회의 지도자가 되도록 독일에 있는 헤어보른(Herborn)과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이름은 원래 체코어로 코멘스키(Komensky’)였으며, 그것은 모라비아의 작은 마을 ‘콤나(Komna)에서 온 자’란 뜻을 가진다. 청년기의 대학 생활에서 선지자 아모스(Amos)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얀(Jan)뒤에다 붙였으며, 코멘스키를 라틴어로 표기하여 코메니우스(Comenius)로 불렀다.

코메니우스는 그곳 대학들에서 훌륭한 선생들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데, 먼저 헤어보른 대학에서는 요한 하인리히 알스테드(J.H.Alsted)교수로, 그에게서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특히 백과사전의 작업, 그리고 철학적인 사고인 범지혜(Pansophia)에 관하여 큰 도움을 입었다. 그리고 요하네스 피셔(J.Fischer)교수에게서는 성경과 성경해석의 중요성에 관한 것으로, 특히 하나님의 나라와 천년왕국 사상과 기독교의 종말 사상에 관하여 배웠다.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는 다빗 파레우스(David Pareus)교수이며, 그는 그 당시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에 분쟁을 극복하고 서로 화해와 연합을 힘쓰는 교회연합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었고, 코메니우스는 그에게서 평화사상과 교회연합사상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그 외에도 독일에서 교수학(Didactic)의 전문가인 볼프강 라트케(W.Ratke)교수의 교수학적인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게 되었고, 후에 그의 ‘대교수학’ (Didactica magna)에서 교수학사상을 새롭게 발전시킨다.

코메니우스는 대학시절의 학업결과는 놀라운 정도였는데, 무엇보다도 성경에 정통하였으며, 그 당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에 관하여도 정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역시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에 정통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세네카에 대해서도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그 당시 유럽에서 이름나 있던 인문주의자 요하네스 비베스(J.L.Vives)와 신학, 철학, 자연과학 등도 수용하였으며,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과 토마소 캄파넬라(T.Campanella)의 사상에도 영향을 받았다. 후에 근세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Descartes)를 만나 교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코메니우스사상의 중요한 근거들로 확인되고 있다.

 

2)코메니우스의 작품과 그의 활동

코메니우스는 그의 생애 동안에 많은 저술과 활동을 하게 되는데, 문서로는 약 150여 종 이상을 작성하여 책으로 출판하였고, 많이 분실되었지만, 상당수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는 1614년 대학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인, 프레로브(Prerov)에 라틴어 교사로 활동한다. 그리고 후에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교육에 관한 이론과 실제를 경험하게 된다. 1616년에 플렉(Fulnek)에 있는 형제연합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게 되었고, 1618년 결혼을 하였으며, 또한 그곳 학교의 교장으로 일한다. 풀넥의 교회를 맡게 된 것은, 그곳 대부분의 교회구성원들이 독일 브란덴부르그 출신인 왈도파 신도들의 후손들로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코메니우스가 그 교회의 목회사역에 적임자로 추천되었기 때문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풀넥의 목회사역이 불과 3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1618-1621), 그곳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였다. 특히 억압받는 가난한 자들의 삶을 경험하면서, 정의에 관한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된다. 그의 주요작품인 “하늘로 보내는 편지”가 유명한데, 사회적인 인간의 문제를 하나님께 호소하는 글이었다. 가난한 자와 부자들의 편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내고 받는 편지 등, 4개의 편지로 구성된 작품이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곧 은둔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 이유는 보헤미아의 정치적인 상황이 형제연합교회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였고, 형제연합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벌써 1618-1620년에 사이에 프라하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정치세력과 가톨릭 편에 서 있는 황제를 중심한 반종교개혁세력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때, 정권찬탈을 시도했던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은 반종교개혁세력의 대항으로 결국 1620년 11월 프라하 근교, 백산 전투에서 대패하여, 보헤미아는 다시 가톨릭교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싸움은 유럽사회 전체를 파괴했던 30년 종교전쟁의 시작이 되었다.

은둔생활에서, 코메니우스는 가장 슬픈 비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흑사병으로 그의 아내와 두 아이를 잃게 된 일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인간적인 슬픔을 억누르고, 그때 쓰게 된, 유명한 책이,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낙원”(Die Labyrinth der Welt und das Pradies des Herzens)이다. 이 책은 코메니우스가 경험했던 인간의 모습과 사회적인 삶의 형태를 비유적이며 풍자적인 형태로 그린 것이다. 역시 이 책은 서사시적인 형태로 작성되어 체코인들이 많이 읽는 고전작품 중 하나로 유명한 책이 되었다.

코메니우스는 1522-1525년에도 ‘슬픔에 슬픔을’, ‘위로에 위로를’ 등의 작품들을 발표하였고, 형제연합교회의 성도를 위로하는 위로서가 되었다. 그리고 3번째 위로의 책은 “안전의 중심”(Centrum securitatis)이란 책이다. 여기서 분명히 하나님, 인간, 그리고 자연을 삼각 구도로 하는 코메니우스의 사상이 드러나게 된다. 이 글은 세상이란 바퀴 한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 세상의 사물들은 방사선 모양으로 혹은 바퀴의 살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중심부 주변을 각기 다른 속도로 회전하게 된다. 이 그림에서 코메니우스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즉 각각의 피조물은 두 개의 중심부를 가지게 되는데, 하나는 모든 사물의 창조주이시며, 보존자이신 하나님이시며, 다른 하나는 자시 자신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자신의 독특성과 본성이다. 이러한 중심개념은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확고부동한 위치이자, 동시에 역동적인 관계성을 뜻한다. 그리고 인간은 내적인 하나님과 외적으로는 회전하는 피조물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중적 사명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동시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러한 이중적인 사명을 놓치는 것이 인간의 실수로서,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미로에 등장하는 호기심처럼, 피조물에 몰두하는 일이다. 피조물에 몰두함으로써 인간은 그에게 주어진 본래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되며, 동시에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인간이 세상의 중심부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으로, 이것이 모든 악의 시초가 되는 것으로 코메니우스는 보았다.

코메니우스의 글들은 대부분 성경의 내용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확인되는 것은 코메니우스에게서 성경은 끊임없는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제공하는 위로의 샘이었고, 지치지 않게 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하나님 안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자신의 고난을 보며, 그 자체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염려하며, 전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자요, 부활하신 자일 뿐 아니라, 역시 형제연합교회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실제로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유일한 왕으로 ‘도래하고 있는 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신앙의 확신이 코메니우스가 인생의 어려운 시간에도 절망하지 않도록 그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된다. 또한 현세에서 풍성한 결실을 이루게 된 것들을 빼앗기고 잃어버리게 될 때에도,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팔에 붙들린 자신을 확신하고 있는 한, 아무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코메니우스는 그의 이 모든 글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프로테스탄트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에 처하게 된다. 그 이유는 1627년 보헤미아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의 갱신된 국가법’이란 것을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들의 모든 신분 계층들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가톨릭의 합스부르그 가문이 모든 권세를 쥐게 되었고, 보헤미아는 완전히 가톨릭의 세상이었다. 결국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는 더 이상 고국 보헤미아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폴란드 리싸(Lissa)에 형제연합교회가 있는 곳으로 망명길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의 젊은 목회자인 코메니우스가 사전에 그 망명길을 준비하게 되었다.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와 함께 리사(Lissa)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먼저 코메니우스는 리사에서 1628-1641년까지 13년을 보내면서 많은 책들을 쓰게 되었고, 또한 그가 여기서 보헤미아를 넘어서 유럽 사회에 알려진 인물이 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1648-1650년, 1654-1656년에도 이 도시로 다시 돌아와서 거주하였다.

그는 이곳 리사의 인문 고등학교 교사로, 후에 교장이 된다. 그리고 1632년에 형제연합교회의 총회서기가 되었다. 분주한 일과에서도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쓰게 되는데, 먼저 교육의 목적, 목표, 아이들에 대한 이해, 그들의 무엇을 어떻게 배우도록 해야 할 것인지, 교수 방법을 제시한 교사지침서인 ‘보헤미아의 교수학’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후에 암스테르담에서 ‘대교수학’이란 이름으로 다시 수정 보완하여, 그의 교육학 총서 첫 번 내용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부모들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기 전까지 가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 것인지? ‘어머니 학교의 소식’이란 부모교육지침서도 출판하였다. 그리고 ‘열려진 언어의 문’, ‘자연과학개론’등의 책들을 출판하였다. 이 책들은 모두 학생들이 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메니우스는 1637년에 ‘범지혜의 선구자’(Prodromus pansophiae)란 책을 만들게 되는데, 이 책은 코메니우스가 생각해 온 교육철학의 핵심주제인 ‘모든 지혜’(Pansophia)로 모든 사람을 철저하게 교육하려는 범지혜의 교육계획서였다. 라틴어로 작성된 이 책이 1638년 영국에서 출판되면서 코메니우스는 일약 범지혜의 철학자로, 그리고 교육학자로 그의 이름이 유럽의 지성인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640년대의 코메니우스는 이 책으로 인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초청을 받게 된다. 먼저 파리에 있는 가톨릭의 추기경 리헤리우(Richelieu)가, 코메니우스를 데려다가 파리에 ‘범지혜의 대학’을 세우려 하였고, 영국에서도 코메니우스를 데려다가 ‘범지혜의 대학’과 영국의 국가교육계획을 개혁하도록 맡기려 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도 코메니우스는 학교 교육에 필요한 교재 집필로 초청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 미국 마세추세츠 주에서 하바드 대학이 설립되면서, 코메니우스를 초대총장으로 초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이 모든 초청들에 다 응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책임지고 있는 형제연합교회를 돌보아야 하는 일 때문이었다. 다만 영국의회의 초청에 응하였으나, 곧 영국 내의 종교대립으로 인한 시민혁명이 일어나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약 9개월 동안 런던에서 체류하다가 다시 스웨덴의 초청을 받고, 스톡홀름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영국의 체류 동안에 코메니우스는 ‘빛의 길’(Via Lucis)이란 그의 범지혜의 교육철학에 근거한 학교교육개혁에 연관된 문화정치적인 책을 집필하였고, 후에 암스테르담에서 1668년에 출판하였다.

코메니우스는 1642년 6월 영국을 떠나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도중에 암스테르담에 들리게 된다. 여기서 그는 스웨덴의 초청을 받도록 힘썼던 데 기어(Louis de Geer)를 만났으며, 또한 라이덴 근처, 엔데게스트성(endegeest)에 머물고 있던 데카르트(R.Descartes)도 만나게 된다. 물론 두 인물의 만남은 각각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준비했던 일이며, 오래 살았던 코메니우스는 그의 회고록에서 데까르트와의 역사적인 만남을 상세히 기록하여 전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은 서로의 학문적인 경의를 표하였고, 데까르트는 코메니우스의 범지혜의 철학과 세계 공용어의 필요성에 대하여 공감하였고,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의 수학적인 사고방식과 엄격한 검증에 감탄하였으며,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전에 생각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서의 차이점은 이성 중심의 인식에 관한 것인데, 데까르트가 그의 모든 사상체계를 오직 이성에 근거하여 구성하는 반면, 코메니우스는 지식습득에는 이성과 더불어 인간의 감각과 하나님 계시의 증거가 필요함을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의 사고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정확히 지적하면서, 후에 여러 글들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잘 분석해 내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란 명제를 비판하게 되는데, 생각할 때만 존재하고 잠잘 때는 존재하지 않는지를 반문하면서, 인간은 생각하면서도, 행동해야 하는 존재임을 강조하면서, 데까르트 철학에 나타나는 생각과 행동의 이원적인 분리문제를 지적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를 추종하는 자들(Cartesianer)의 데까르트에 관한 왜곡을 비판하였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말년에 암스테르담에 산재해 있는 데까르트주의(Caetesianismus)적인 사고를 “철학의 암적훼손‘(Der Krebsschaden der Philosophie)이라고 비판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이때 1642년 8월 50세의 나이에 역시 스웨덴의 초청을 받고, 스톡홀름으로 간다. 거기서 스웨덴의 수상 옥센스티에르나(A.Oxenstierna)를 만나고, 루이스 데 기어(R. de Geer)의 재정후원으로 스웨덴의 학교개혁을 위한 새로운 교재 집필을 위임받게 된다. 코메니우스는 이 작업을 스웨덴의 영토였던 독일의 동북해안에 있는 도시 엘빙(Elbing)에 거하면서 수행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곳이 형제연합교회가 있는 리사와 거리상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제연합교회를 돌보는 일을 병행할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스웨덴의 학교교재 집필 외에도, 그가 후에 미완성 작품으로 남긴 세계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제언서를 준비하였다.

1648년 56세가 된 코메니우스는 리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도착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내, 도로테아(Dorothea)가 병으로 죽게 된다. 1618년에 시작된 30년 종교전쟁은 마지막 국면에 이르게 된다. 가톨릭 편인 프랑스와 프로테스탄트 편인 스웨덴 사이의 전쟁은 뮌스터 오스나부릭에서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Westfallia Friede)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렸던 형제연합교회의 종교자유는 보장받지 못했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고향이며 조국인 보헤미아는 적그리스도인 가톨릭의 통치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역시 형제연합교회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1650년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에 드리는 위로의 글 “죽어가는 어머니, 형제연합교회의 유언”을 남기게 되었다. 그 내용은 형제연합교회의 죽음을 탄식하며, 어떻게 유럽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해야 할지를 되묻고, 교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형제연합교회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상기시키면서, 형제들이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교회들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할 때,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유산인 6가지를 보존하게 되기를 희망하였다(진리의 사랑, 성경 말씀에 충성, 교회의 훈육, 모국어 보존, 교회연합 정신 등). 그리고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기를 소망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직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형제연합교회의 마지막 감독직이었다. 1649년 57세 나이에 요한나 가요소바(J.Gajusova)와 함께 세 번째 가정을 꾸리게 된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그의 작품들이 출판하도록 코메니우스는 초청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항가리의 사로스파탁에 있는 라틴어 학교를 코메니우스의 범지혜로 개혁하는 일을 해달라는 초청으로 그곳으로 먼저 가게 된다(1650년). 역시 코메니우스는 그곳에서 학교 교육의 책임자가 되었고, 그 유명한 두 권의 교재인 “그림으로 배우는 세계”(Orbis sensualium pictus)란 책과 놀이학교(Schola Ludus)를 출판하게 된다. 전자는 어린아이들이 그림으로 언어와 세계의 자연 피조물과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배우게 한 모든 지혜학습의 모범적인 책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학교를 아이들의 놀이의 장, 즐거움의 장이 되게 하는 것이었고, 연극 상연 등을 하도록 대본을 제시한 책이었다. 그림으로 배우는 세계의 책은 1658년에 준비하여 라틴어-독일어판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역시 항가리의 사로스파탁(Sarospatak)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를 지지하던 영주 라콕지(Racockzy)가 전쟁에서 전사하였고, 사로스파탁의 사람들에게서 코메니우스가 원했던 범지혜의 교육에 관한 관심이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리사에서 형제연합교회는 코메니우스가 다시 리사로 돌아오기를 재촉하였다. 그래서 코메니우스는 3번째 다시 리사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상황 역시 코메니우스에게 우호적이지 못했다. 30년 종교전쟁은 끝났지만, 부분적으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의 대립 관계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특히 스웨덴이 폴란드에서의 전쟁으로 코메니우스가 제2의 고향처럼 머물렀던 리싸가 가톨릭 군대의 침입으로 정령 당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의 집과 모든 서재가 불타게 되었고, 그가 그동안 작성하고 준비했던 원고들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황급히 코메니우스는 리사에서 피난처를 또 찾아야만 했었다.

원래 코메니우스는 영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코메니우스 인생의 마지막 기간이 암스테르담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그는 이전에 큰 도움을 받았던 화란의 거부, 루이스 더 기어(Louis de Geer)의 아들인 라우렌티우스의 초청을 받게 되었다. 그의 도움으로 암스테르담에서 코메니우스는 14년을 살게 되었다. 코메니우스 옆에는 그의 사위 피터스 피굴루스 야불론스키(P.P.Jablonsky)가 동행하였다.

여기서 코메니우스는 두 가지 큰 작업에 열중하였는데, 하나는 교육학 총서(Opera didactica omnia)를 출판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시도했던 “인간사 개선에 대한 보편적인 제언”의 글을 완성 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끝내 미완성 유작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모든 교육과 관련된 문서들을 총 집결시킨 교육학 총서는 암스테르담의 시 정부의 재정후원으로 출판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코메니우스의 곁에는 30년 종교전쟁과 관련하여 예언가들이 항상 동행하였는데, 크리스토퍼 코터, 크리스티나 포니아톱스카, 니콜라우스 드라빅 등의 인물들이었다. 코메니우스는 때때로 그들의 예언들에 귀를 기울이는 일로 일찍이 형제연합교회에 고소당하여 비판을 받았으며, “계시의 역사”란 글과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이란 글을 발표하여,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도 하였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드라빅의 예언인데, 그는 30년 종교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가 승리하고,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했으나, 그 예언은 적중되지 않았으며,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심지어 코메니우스의 옛 제자였던 폴란드의 형제연합교회에 속한 니콜라우스 아르놀드(N.Arnold,1618-1681)의 코메니우스에 대한 비판은 코메니우스에게 큰 충격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예언과 관련하여 당하는 여러 비판을 그냥 묵과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1665년에 “어두움에서 나아온 빛”(Lux a tenebris)이란 책을 출판하여, 긴급한 전쟁의 위기상황에서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이 형제연합교회의 미래를 밝히는 뜻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려고 드라빅(Drabik)의 소리에 경청했던 사실을 고백하였으며, 그러나 하나님의 성경 말씀의 계시 외에 인간구원의 어떠한 계시는 없음을 분명히 밝히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의 노년기에도 왕성한 저술 활동을 지속하였는데, 형제연합교회의 찬송가와 신앙교육을 위한 요리문답서, 형제연합교회의 역사에 관한 글, 교회법의 개정과 형제연합교회의 옛 신앙고백서의 개정판 등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정치와 직접 연관된 3편의 글, 삼단논법(Syllogismus),독일을 향한 마지막 나팔(Die letzte Posaun ueber Deutschland), 그리고 평화의 천사(Angelus pacis)등을 저술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평화의 천사는 직접 그 당시 정치가들을 겨냥했던 것으로, 그 대상은 1664-1667년 사이에 있었던 계속된 영국과 네델란드 사이에 두 번째 해전을 종식 시키려고, 브레다(Breda)에 모였던 양국의 사절단들이었다. 바다의 항해권으로 다투고 주도권을 주장하는 그들에게 바닷길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 그 주인이 하나님이며, 그 바닷길은 평화롭게 함께 사용해야 하는 공동의 것이지, 어느 개인 한나라의 것이 아님을 밝히고, 해상권 다툼은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코메니우스가 직접 그 회담에 사절단으로 참석하여 연설하였는데, 그의 연설에 감화를 받고,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는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거의 인생의 마지막에까지 삼위일체 존재 방식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단일신론을 강하게 주장하여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하던 소시니안주의에 대항하여 많은 비판의 글을 남겼다. 그리고 코메니우스가 죽기 전해에, 흐로닝겐 대학의 교수였던 칼빈주의자 마레시우스(S.Maresius,1599-1673)에게서 비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천년왕국론에 대표적인 인물로 코메니우스와 라바디를 지적하면서 비판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코메니우스는 잦은 질병으로 더 이상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충분히 변호할 만한 상태에 있지 못했다.

코메니우스는 마지막 작품으로 “꼭 필요한 한 가지”(1667-1668)를 출판하게 되었는데, 이 책은 코메니우스의 유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희망을 다시 한 번 감동적으로, 친밀하게 요약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코메니우스는 먼저 행복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인간의 행복은 첫째, 이성의 밝은 빛 가운데서, 둘째, 일 더미 속에서 일할 때, 그 일들이 적절한 순서에 따라 진행될 때이며, 셋째, 이생의 소유를 확실히 누리는 것에서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이 왜 그렇게 잘 실현되지 않는지에 대하여 ‘미로’란 말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인간은 세상의 미로에서 나올 수 있는 탈출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혼란들은 오직 한 가지, 즉 사람들이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음을 전제하고, 필요한 것을 간과하고, 불필요한 것에 끊임없이 몰두하며, 그것에 뒤엉켜 휩쓸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꼭 필요한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규칙(말씀)만이 오직 세상의 미로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출구를 가르쳐 준다는 것을 증언하였다.

그러면 인간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 대답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인간은 자신을 알며, 자신을 다스리며, 자신을 사용하고,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이것을 해낼 수 있기 위해서 3가지 영역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그가 말한 교육을 포함한 학문, 정치, 종교의 개혁이었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그의 형제연합교회의 사역은 교회연합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세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절대적인 조건임을 강조하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사역은 이러한 일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분명히 열매를 거두게 되리라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이끌던 작은 형제연합교회가 전 세계의 모든 민족 가운데, 곳곳에서 세워지기를 소망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관계하던 작은 형제연합교회는 문을 닫고, 두 가지 책 출판과 함께 전 세계를 향하여 큰 형제연합교회의 문을 열어젖히기를 희망하였다. 하나는 그의 조국을 위하여 모국어로 쓴 책이며, 다른 하나는 다른 민족들을 빨리 계몽하기 위하여 라틴어로...쓴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사의 관계개선에 관한 보편적인 제언”이란 세계개혁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총 7권으로 구성된 그의 책을 부분적으로 다 완성하지 못한 채, 남기고, 1670년 11월 15일 78세의 나이로 암스테르담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 그는 암스데르담의 근교 나르덴에 있는 화란 개혁교회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3) 코메니우스에 관한 현대 신학자들의 평가와 그의 신학적인 위치

유럽교회와 신학의 역사는 약 3세기 동안 신학자로서의 코메니우스를 잊고 있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17세기 프랑스에 출판된 ‘역사적이며 비판적인 권위를 가진 삐레 베일(Pierre Bayle)의 사전’ 때문이었다. 그 사전은 신학자로서의 코메니우스에 관해서는 침묵한 채, 그의 생존 기간에 부분적인 활동이었던, 학교의 교사요, 언어의 교수학자요, 백과사전적인 교재집필자에 한정된 교육자로만 소개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35년, 독일 경건주의운동의 본산지였던 할례(Halle)에서 발견된 코메니우스의 미완성유작(“인간사 개선에 관한 포괄적인 제언”)의 라틴어 원본은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학문적인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놓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 문서들은 제목이 뜻하는 그대로 인간이 관계된 모든 일들이 올바른 관계의 질서 속에 세워지도록 유럽 사회를 개혁하려는 그의 제언들이 담겨 있었고, 그의 모든 생각들은 성경에 근거한 것으로, 신학적이며, 철학적이며 교육적인 것들로 엮어진 종합적인 통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들은 기독교적인 삶을 대변할 뿐 아니라, 철학적이며, 우주적이며, 인간학적인 그 시대의 사상들을 대변하였고, 특히 종교개혁이 완성하지 못한, 삶(세상)의 개혁방법을 포괄적으로 담아 놓은 그의 신학 작품이었다. 그 안에서 코메니우스는 모든 유럽의 지성(철학)인들과 정치인들과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요청하였고, 특히 교육과 정치와 교회의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제언들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 코메니우스가 “인간사 개선에 대한 보편적인 제언”(consultatio catholica)을 통해서 성취하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코메니우스의 핵심교육철학인 판조피아(Pan- sophia)와 관계되어 있다. 우리말로 범지혜(汎知慧), 또는 ‘모든 지혜’로 번역된다. 인간은 우주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무엇인지? 그 내용과 존재 방식과 존재 목적을 알아야 하며, 그래야 원래 목적대로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양심적인 자유의지의 사용(usus)이 왜곡될 때, 무질서와 혼돈이 거기서 야기되는 것으로 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의 근원과 방편과 목적에 대한 앎은 창조주의 뜻을 헤아리는 것과 연관되었다. 결국 코메니우스에게서 판조피아(Pansophia)는 하나님에게서 나아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삶의 전체 과정에 대한 올바른 지적인 이해를 뜻하며(롬11:36), 인간은 그 과정에서 모든 지혜(내용, 방법, 목적)를 헤아리고, 본래 목적한 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자유의지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판조피아(Pansophia)사상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는데, 골1:27-28절은 결정적인 근거이다. 바로 자유의지의 선용 때문에 코메니우스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지혜를 배워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행동할 것을 목표하였다. 물론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윤리 도덕적인 완전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뜻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7권 각각의 책 앞에다 이와 같은 전체를 가리키는 판(Pan)의 개념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첫 번째 책인, 범각성론(Panegersia)의 서문에서 코메니우스는 범개혁의 의도한 바를 상세히 밝힌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다스려야 할 세상 사물들(자연/피조물)과의 관계이며, 진지하게 서로 대화해야 할 동등한 다른 사람(이웃)들과의 관계이며, 또한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된 지식(경건)들을 알게 해 주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영원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의지는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과의 교제를 위한 준비에 힘써야 하는데,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학문(eruditio)과 정치(politia)와 종교(religio)의 3가지 영역에 관계된 지식들로서, 그것이 바로 인간사(人間事)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은 이 3가지 영역의 일들이 무질서와 혼돈가운데 놓여 있는데, 그것들이 인간이 겪고 있는 불행임을 느끼고, 그것의 개선(改善)에 대한 소망을 사람들로 하여금 갖도록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원상태, 즉 낙원의 상태는 인간의 타락으로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였고,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학문과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 관계된 것들로서, 그간 여러 개혁(루터,쯔빙글리,멜란히톤,부쳐,칼빈,부게하겐 등)들이 시도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잘못된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먼저 종파 간에 서로를 파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지는 한, 종파들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더욱 늘어났으며, 적대감을 가지고 없애려 했으나, 더 날카로워지기만 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학문적인 작업은 많으면 많을수록 학문은 더욱 엉클어져 갔기 때문에, 이제는 먼저 병폐를 찾고, 치유책을 찾으며, 이 두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지금까지의 개혁의 시도들이 종교, 정치, 학문의 어느 한 특정한 부분에만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며, 온전한 개혁은 이제 이 3가지 영역에서 포괄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전체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삶의 개혁이며, 그것을 세계개혁으로 부르게 된다.

그러면 코메니우스가 그토록 세계개혁을 희망했던 7권으로 구성된 문서들의 내용과 관련하여, 오늘날 유럽의 신학자들은 코메니우스의 학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특히 이러한 평가들에서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신학의 학문적인 위치를 학인하게 된다.

먼저 독일 본(Bonn)대학의 헤닝 슈뢰어(H.Schroeer)교수는 코메니우스를 그간 잊어버렸던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대가(大家)로 평가하였다. 바젤의 조직신학 교수인 밀릭 로흐만(Milic Lochman)은 코메니우스를 세계개혁을 희망했던 신학자로 불렀고, 교회연합적인 종교개혁의 대표자로, 세계를 개혁하려는 희망의 열정가로 평가하였다. 튀빙겐 대학의 종교교육학 교수인 닢코(K.E.Nipkow)는 코메니우스의 신학을 종말론적인 행렬로부터 전진하는 미래를 향한 희망의 신학의 전주자(前奏者)로 여겼다. 또한 화란 우트레히트 대학의 교회사와 선교학교수, 판데어 린데(Van der Linde)는 코메니우스의 신학을 ‘귀환의 신학’으로 명명하면서, 코메니우스는 교회연합운동을 위한 현대적인 의미를 지닌 신학자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슬로바키아의 ‘코메니우스대학’(브라티스라바)의 조직신학교수인 이고를 키씨스(Igor Kissis)는 코메니우스야 말로 샤르뎅이나, 몰트만과 같은 현대 신학자에 버금가는 인물로 보았으며, 현대신학의 선구자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복음대학의 교육학교수인 클라우스 샬러(K.Schaller)는 코메니우스의 교육학은 인간의 인간성 형성교육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을 이해한, 그야말로 교육하는 신학자이며, 또한 실천신학자임을 밝혀주었다.

이러한 유럽 신학자들의 평가를 전제할 때, 코메니우스는 신학자가 분명하며, 그러나 17세기의 전통적인 교리체계를 따라 그의 신학을 제시한 조직신학자이기보다는 신앙적인 삶을 전제한 행동하는 신학, 또는 실천지향의 신학을 제시한 실천신학자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종교개혁의 전통적인 신학체계를 따르면서도, 종교개혁신학이 교리논쟁과 더불어 지나치게 사변적이며, 스콜라주의적인 상태에 머물러 서로 다름만을 고집하고 대립하던 전통교리신학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행동실천적인 신학을 강조한 실천지향의 신학자였다. 그리고 인간교육문제를 앞세워 “인간사 개선에 대한 포괄적인 제언”(Consultatio catholica)을 직접 만든 것은 전적으로 그의 신학적인 사고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증적인 것이며, 17세기의 전환기에, 새롭게 일어나는 이성 중심적인 사고와 자연과학의 급격한 발전에, 기독교 하나님의 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교리대립(루터파와 칼빈파)의 변증 일변도의 방법만으로는 전혀 그 시대의 인본주의적인 도전을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종교 개혁적인 구원신학(칭의론)을 뛰어넘어 창조신학을 중심으로, 창조세계 전체를 직시하고, 인류구원의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는 새로운 신학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실천지향적인 신학의 특징은 역시 종교개혁이 고집한 종말론적인 신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천년왕국(주기도문)의 종말론을 지향한 것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2.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가 지향한 이상적인 신앙공동체의 역사

원래 형제연합교회(Unitas fratrum)는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약 100년 먼저 보헤미아-모라비아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자, 요한 후스(J.Hus,1369-1415)를 추종하던 그룹 중 하나였다. 후스는 1405년경부터 프라하 대학의 설교자로, 교수로, 그리고 마지막에 그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위클리프(J.Wycliffe,1324-1384)로부터 받은 성경에 근거한 종교개혁적인 사상은 더욱 성장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인 가르침과 사제들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복음의 설교를 통하여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되었다. 그는 프라하 대학의 총장자리에서 파면을 당하면서도, 그의 종교개혁의 외침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를 콘스탄츠 종교회의 중, 종교재판에 넘겼고, 그를 화형 시키고 말았다.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잔악한 행동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지역의 귀족들과 백성들은 크게 분노하게 되었고, 여러 그룹의 후스 추종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첫째 ‘타보르’(tabor)란 도시에서 시작한 타보리텐파(Taboriten)들은 하나님 나라실현에 복음과 칼을 함께 사용하는 정치적으로 매우 급진주의자들이었다. 둘째 양영성체파(Utraquisten)로 불리는 자들은 성찬의 떡과 잔을 함께 분배하기를 요구했는데, 가톨릭의 성찬의 떡과 잔을 동시에 베푸는 술책에 휘말려 대부분 다시 가톨릭교회로 되돌아가도 말았다. 셋째, 형제연합교회(Unitas fratrum)인데, 타보리텐파에서 이탈된 사람들, 소수가 중심이 되어 1440년경에 새로이 시작되었다. 하나님나라의 실현에 복음과 칼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그들의 생각에 반대하고, 새로운 개혁적인 복음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취첼츠키(P.von Tchichelcky,1380-1452)라는 한 평신도였다. 그는 원래 타보리텐파에 속했던 인물이었지만, 그들의 비복음적인 태도에 실망하고, 성경 말씀을 따라 순수한 복음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여, 그 주변 사람들이 모이면서 시작된다. 이 그룹은 사도 시대의 신앙을 따라 성경의 진리와 복음에 합당한 순종의 삶을 추구했던 매우 경건한 자들이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매우 비타협적인 성격을 보이며, 경건한 신앙과 엄격한 신앙훈련방식 때문에 다른 그룹으로부터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이들은 성경대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형제연합교회는 다른 후스파 추종자들과는 달리 진정한 후스 정신의 계승자들로 평가되었다.

생각하면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의 역사가 약 162년이 지난 후(1592)에 태어난 인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코메니우스가 먼저 형제연합교회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으며, 후에 다시 그는 형제연합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가장 어려운 시기(30년 종교전쟁)에 지도자가 되어 마지막 감독으로 형제연합교회를 이끌었던 인물이었으며, 많은 영향을 미친 신학자요, 목회자였다.

 

1)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의 역사

그러면 형제연합교회의 역사는 어떠한가? 순수한 사도 시대의 신앙공동체를 염원하면서, 형제연합교회를 출발시킨 인물은 역시 한 평신도 취첼츠키(P.Tschichelcky)였지만, 실제로 형제연합교회가 형성되도록 신학적인 토대를 세워준 인물은 루카스 폰 프라그(Lukas von Prag)라는 신학자였다. 그는 취첼츠키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성경을 신앙생활의 유일한 범칙으로 삼았으며, 특히 예수의 산상수훈을 매우 중히 여기고, 실천하도록 힘썼으며, 주님의 만찬에 함께 하시는 분은 “영으로 임하신 그리스도”라는 성경의 이해를 분명히 하여 루터와는 구분하였다.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는 1464년에 교회법을 준비하기 위하여 총회를 개최하였고, 교회의 신학적인 토대를 놓았다. 이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진리(칭의)와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과 교회의 훈육 등을 공동체 생활의 근본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이 교회가 믿는 칭의(稱義)는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더 깊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었다. 믿음과 사랑에 근거한 칭의가 확실한 소망을 가져다주는 참 복임을 믿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에 기초한 형제연합교회의 칭의론은 선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톨릭교회의 입장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그리고 사랑은 오히려 기독인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하는 성령의 열매로 인식되었고,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는 증거로 이해하였다. 그 때문에 형제연합교회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올바른 믿음의 외적인 증거로 삼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행위 없이 말로만 고백하는 신앙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였고,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지고자 하는 결단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형제연합교회는 훈육을 신앙의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하였는데, 그 이유는 훈육이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지게 하는 일에 큰 도움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훈육은 폭력이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애정에 근거한 사랑의 훈육이었기 때문이다.

폰 프라그(Von Prag)는 총회를 통하여 형제연합교회(Unitas fratrum)라는 교회공동체의 명칭을 공식화한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조직도 성경대로 장로제도를 선택하였다. 이것은 칼빈에게서 배워 스코트랜드에서 실천한 존 낙스(J.Knox)의 장로제도보다 훨씬 앞선 역사였다. 또한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제비뽑는 방식으로 3명의 성직자를 선출하였고, 이를 장로로 부르며, 그중에 한 명이 수석 장로가 되어,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감독(Bishop)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1499년 이래로 10명으로 구성된 협의회로 확대하여, 기존 3명의 장로들과 함께 최고의 의결기관이 되었다. 형제연합교회의 총회는 교회의 봉사자로서 10인의 장로협의회와 목사들, 그리고 집사들로 구성하였다.

형제연합교회는 1494-1528년 사이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 기간에 교회를 정착시키고, 가톨릭의 종교박해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복음의 사도적인 신앙을 견지하고, 당당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성장시키는 일에 3명의 지도자들이 차례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루카스 폰 프라그(Lukas von Prag)와, 얀 아우구스타(Jan Augusta), 얀 불라흐스라브(Jan Blahslav)였다. 1517년에 루카스 폰 프라그(1640-1520)는 형제연합교회의 첫 번째 감독이 되었다. 그는 신학자로서 형제연합교회의 조직을 확대하며, 지금까지 형제연합교회가 진리 수호를 위하여 그간 폐쇄적이며, 분파적이었던 모습에서 개방적인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즉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더욱 성취하기 위하여 복음에 대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강조하게 된다. 그는 특별히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을 본질적인 것과 목회 수단적인 것, 비본질적인 것 등으로 구분하고,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직접 연관된 것으로 믿음, 소망, 사랑을 사역의 중심에다 놓았다. 형제연합교회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였으며, 이러한 믿음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공로)이 개입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사랑 또한 하나님의 활동으로 이해하였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믿음, 사랑 가운데 참된 소망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소망은 기독인의 삶의 방향과 인생의 목표를 밝혀준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때문에 이러한 소망은 하나님과 기독인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사역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목회의 수단적인 것은 교회를 통하여 반복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와 성례와 열쇠의 직무 수행이었다. 그리고 목회수단의 사용목표는 역시 모든 사람을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루카스는 교회의 사역에서 이러한 본질적인 것과 목회 수단적인 것을 구분함으로써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의 신학을 특징짓는 일에 기여하고, 형제연합교회가 성경과 교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 형제연합교회와 종교개혁자들과의 관계

1517년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Luther)는 1519년에 비로소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의 가르침이 매우 복음적인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루터는 후스파 사람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 때문에 보헤미아 지역에서도 루터의 종교개혁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역시 반대로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인 루카스(Lukas)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입장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고, 종교개혁의 정신을 확인하기 위하여 마침내 형제연합교회와 루터가 만나게 된다. 특히 루카스와 루터와의 만남은 루터교회와 형제연합교회가 긴밀하게 교제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로서 연합하였다.

루카스가 죽은 후, 얀 아우구스타(1572년 사망)가 형제연합교회의 장로가 된다. 그는 신학자로서, 설교가로서 형제연합교회를 이끌었다. 1542년에 비텐베르그를 방문하여 루터와 교제하였으며, 그가 1532/33년에 형제연합교회의 신앙고백문을 만들 때, 루터가 만들었던 아욱스부르그 신앙고백서의 도움을 받았고, 루터는 신앙고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고, 그 고백서의 서문에 추천 글을 직접 써 주기도 하였다.

형제연합교회와 루터의 관계는 루터와 멜란히톤(Melanchton)이 죽은 후, 유감스럽게도 악화상태에 빠져갔다. 그 이유는 강한 종파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루터파의 추종자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것은 루터파 교회는 유럽 전체의 프로테스탄트들과 연합을 외면하고, 그들 자체의 안전만을 생각하여, 형제연합교회의 불신을 초래한다. 결국 1555년에 체결한 아욱스부르그 평화화의(Augsburgfriede)가 문제였는데, 특히 “통치자의 영토에 통치자의 종교를”(Cuius regio, eius religio)이란 문구로 인하여, 루터파만 살아남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루터파 교회에 크게 실망한 형제연합교회는 이때부터 다시 프로테스탄트 연합을 강조해 온,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쳐(M.Bucer)와 제네바의 칼빈(J.Calvin)에게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특히 칼빈의 가르침에서 형제연합교회가 지향하고 있던 신앙의 교리와 신학적인 이해가 일치하는 점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성만찬, 교회훈육,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 그리스도 왕권의 삶에서의 주권인정 등),형제연합교회는 칼빈에게로 항하였다. 그 이후부터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의 젊은 세대들은 비텐베르그가 아닌, 제네바, 하이델베르그, 바젤 스트라스부르그, 헤센 지역의 헤어보른 대학 등으로 유학을 보내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1548년 보헤미아의 왕 페르디난트 I세는 보헤미아의 형제연합교회를 박해하게 되었고, 모든 설교자를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지도자 아구스타는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16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후로부터 형제연합교회는 극심한 종교박해를 받게 된다.

1557년 얀 블라호스라브(1571년 사망)가 형제연합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다. 그는 형제연합교회의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는데, 교단 내에서 인재를 발굴하여 외국에 유학하도록 개방정책을 펼쳤다. 그 이전까지 목사양성에 별다른 학력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훌륭한 목회자 밑에서 자체적으로 경건 훈련을 받게 하고, 소명과 사명을 따라 목자로 세워 교회의 예배와 목회사역을 감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목사에게 특별히 급여가 따로 지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가난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고, 목사들은 생활비를 자비량으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목회자가 외국대학에서 고전어를 공부하고, 성경원어에 충실한 설교자가 되도록 훈련받게 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는 체코어로 된 크랄리체 번역 성경(1579-1595)을 소유하면서, 교회지도자들의 학문적인 신학 수학에 대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3)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 신학의 근본토대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계시하신 성경에 근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후스의 정신을 그대로 수용하고 따랐다. 이러한 성경에 나타난 신학적인 근본토대는 형제연합교회의 첫 신학자였던 루카스 폰 프라그가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형제연합교회가 지향하는 근본적인 신학을 코메니우스는 그대로 수용할 뿐 아니라, 오히려 전 인류를 구원하는 선교 교육적인, 또는 교육선교적인 신학의 관점으로 새롭게 발전시키게 된다.

(1) 형제연합교회의 성경이해와 구원신학

루카스가 제시한 신학대로,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는 하나님의 성경계시에 근거한 복음의 핵심적인 과제를 본질적인 것(Essentialia), 수단적인 것(Ministerialia), 부수적인 것(Accidentialia)으로 구분한 것을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본질적인 것’ 3가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믿음, 사랑, 소망의 목표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을 형성하도록 돕는 은혜의 수단을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교회(천국열쇠의 직무)와 성례 3가지를 잘 사용하였다. 특히 구원신학의 본질은 믿음, 사랑, 소망(고전13:13절,살전1:3절,골1:4-5,히10:22-26)에 확고히 두었다. 그리고 ‘부수적인 일’(Accidentialia)은 교회의 규범들, 교회의 경건과 관련하여 만들어낸 여러 관습들을 생각하였다.

여기서 루카스는 구원에 필수적인 것을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한다. 먼저 하나님 편에서의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성령의 선물’이다. 그리고 인간 편에서의 본질적인 것은 바로 ‘믿음’, ‘사랑’, ‘소망’이다. 이러한 신적인 은혜 없이, 믿음은 죽은 것이며, 사랑은 결핍된 것이며, 소망은 텅 빈 것이다. 믿음, 사랑, 소망은 살아 있으며, 다만 하나님의 사역에의 참여 안에서, 그들의 종교적인 존재와 효력을 가지게 된다. 결국 믿음, 사랑, 소망은 은혜로 살며,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은혜와 하나님의 진리가 능력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공로이며, 성령 안에서 주어진 선물이며, 인간의 영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의 참여인 것이다. 하나님 편과 인간 편에서의 근본적인 일들은 신적인 실체(實體)의 양면과 같은 것이며, 또한 인간구원의 목표를 가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을 인간들이 원하거나 줄 수 있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반대로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 밖에서, 인간을 통하여 인간 안에 작용하는 것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며, 인간 편의 필수적인 일들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진 은혜의 선물임이 분명한 것이다.

형제연합교회는 이러한 구원신학의 대 전제하에서 목회자들을 깨우쳤으며, 교회공동체의 일원들을 깨우치고, 그들의 신앙을 믿음, 사랑, 소망으로서의 삶을 철저하게 살도록 훈련을 시켰다.

(2) 코메니우스의 성경이해와 구원신학

코메니우스는 역시 형제연합교회의 목회자답게, 성경계시에 근거한 구원신학의 근본토대를 그대로 수용하고 따랐다. 특히 본질적인 것 3가지 믿음, 사랑, 소망은 ‘정경 중의 정경’(Canon im Canon)임을 강조한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성경 전체의 내용을 3가지 계시로 구분하여, 믿음을 요구하는 구원의 계시들(Offenbarungen), 사랑의 요구요,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들(Gesetze), 소망의 근거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한 언약들(Verheissungen)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만든 마누알릭(Manualik,성경핸드북)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그를 창조 전체의 주인(관리인)으로 세우신 후, 자신이 모든 것들의 창조주임을 계시하였다. 즉 그는 먼저 하나님과 창조주와 보존자에 대하여 생각하고 믿어야 할 것과 둘째, 하나님이 기뻐하도록 행동할 것을, 셋째, 다시금 하나님의 자비에 관하여 현재와 영원히 인간의 순종을 기대한다. 이러한 3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사랑(표면적으로는 순종의 모습),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소망으로, 하나님형상의 존재근거와 신분 상태가 왕관이며, 장식이며, 역시 모든 종교의 전체였다”. 그는 계속해서 코메니우스는 시편119:18절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란 기도문의 사용과 “너희가 여기서 배워야 하는 모든 것에 관한 총체적인 것은 믿음, 사랑, 소망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후에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그의 교육신학사상의 핵심적인 주제가 된다. 그의 유명한 책, ‘대교수학’(Didactica magna)에서 모든 학교에서 사용해야 할 성경교육의 목표로 제시되었다. “성경에서 배운 모든 것은 믿음, 소망, 사랑에 관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3가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말씀 가운데서 계시하신 것이 참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향하여 노력해야 하는 주된 목표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떤 것들은 우리가 알게 되도록 그가 밝혀주며, 다른 것들은 우리가 행하도록 책임을 일깨우며, 그는 다시 다른 것들을 현세와 미래의 삶에서 그의 자비 가운데서 기다리도록 하신다. 그리고 성경 전체는 이 세 가지 중, 그 하나와 관계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와 같이 그것을 잘 이해하는 것, 즉 그들이 신적인 요구들을 이성으로 명심하게 되도록 가르쳐야 잘 가르쳐야 한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이러한 믿음. 소망, 사랑을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해석학적인 기준으로 제시한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에게 일러준 하나님의 말씀(창17:1,15:1)에서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믿음), ‘내 앞에서 변화하고 경건하라(행하여 완전하라)’(사랑), ‘나는 너의 방패가 되며,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소망)고 한 말씀에서이다. 첫째, 전적으로 믿음에 근거하여 나(하나님)를 믿으라는 것이며, 둘째, 나(하나님)를 사랑하고 나(하나님)에게 순종하라는 말로, 전적인 사랑을 요구한 것이며, 셋째, 현세와 영원에서 모든 자비를 나(하나님)에게 기대하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역시 코메니우스는 믿음, 소망, 사랑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구원계시의 핵심임을 밝힌다. 그것은 새 언약의 창초 자이며,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구원신앙의 모습으로 이해하였다. 즉 요한복음 14장에 근거하여, 1절에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믿음),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사랑), 3절에서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소망)고 한 말씀이다. 그리고 마28:19절 이하의 말씀을 근거로 코메니우스는 예수님의 부탁대로 제자(사도)들이 그것을 잘 수행하였고, 또한 사도바울 역시, 주님이 분부한 말씀을 열심히 수행한 것으로 이해하였다(고전13:13,엡1:15.8,골1:4-5,벧전1:3–9,행24:14-16).

코메니우스는 또한 사도 이후 시대에 어거스틴이 그의 소책자 엔키리디온(enchiridion)에서 밝혀 놓은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을 역사적인 근거로 확인하였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구별하는 일에도 아주 보편적이며, 본질적인 근거로 이해하였다. 어거스틴은 믿음, 소망, 사랑을 다만 종교적인 삶에서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기독교적인 가르침의 중심점으로 삼았다. 영혼이 사랑을 통하여 영향을 받아 거기서 생겨나는 믿음으로 충만해질 때, 거룩하고 완전한 영혼이 분명해질 그곳으로, 그 영혼은 선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며, 그것은 말하자면, 무한한 아름다움으로 최고의 행복(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이며, 그 일을 이제 사람들은 믿음으로 시작하며, 그 완성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하나님을 보게 되는 일로 이해하였다(고전13:12). 그것이 총체적인 구원신앙의 핵심으로, 믿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에 관계된 것이며, 소망은 다만 선한 것과 미래의 것에 관계된 것이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믿음은 소망과 구분되어야 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소망이 믿음 없이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역시 사랑은 소망 없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또한 이 양자(사랑과 소망)는 믿음 없이 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어거스틴 이래로 교회역사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신앙문답교육의 핵심 주제로 삼았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새 신자들의 세례 준비교육에서, 기존신자들의 신앙을 재정립하는 일에서, 믿음은 사도신경으로, 소망은 주기도문으로, 사랑은 십계명으로 연결하여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깨우치는 내용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 사랑 소망은 다시 믿는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개인의 실존적인 삶의 관계에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회심과 죄 고백의 기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이상적인 신앙공동체로서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적인 특징

여기서 우리는 이상적인 신앙공동체로서의 형제연합교회가 보여준 신앙적인 특성을 4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구원의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으로 믿었던 신앙공동체였다. 형제연합교회는 먼저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모든 믿는 자들과 전체로서의 교회를 위하여 계시하신, 신앙적인 삶의 유일한 규범임을 믿었다. 이러한 성경관은 무엇보다도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요한 후스의 신앙정신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복음 진리의 순수한 전파와 신앙실천에 대한 불타는 열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상태와 그들, 사제들의 변화되지 않은 거짓된 삶에 강한 실망과 자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이 훨씬 더 강하게 부각 되었고, 그들 신앙생활의 전부였다고 할 것이다. 형제연합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권위를 최상의 것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 이해는 1457년경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며, 다시 약 60년 후에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확인되었던 것이다. 형제연합교회의 신학적인 근본토대를 제공했던 신학자 루카스는 역시 예배의 모임에서 더 큰 가치를 성경의 해석에 두었으며, 그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설교가 이들 공동체에 가장 중요 행위였다. 거기서 신자들은 신실한 삶의 방향과 행동에 대한 표준을 얻을 수 있었으며, 또한 여러 잘못된 교리(이단적인 것)로부터 교회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는 1579-1594년, 특별히 성경 번역위원회를 구성하여, 외경을 포함한 구약성경 전체를 번역하게 된다. 그리고 체코어로 번역된 ‘클라리체 성경’을 사용하게 되었다.

둘째, 성경말씀의 실천으로서, 믿음대로 순종하는 신앙공동체였다. 믿음의 순종은 항상 형제연합교회가 전제하고 있는 성경 이해로 되돌아간다. 즉 성경은 유일한 삶의 표준으로서 말씀을 가진 성경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주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만족하였다. 형제연합교회는 교회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관계에서만 보존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계명을 성취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적인 신앙 행위를 통하여 증명하는 신앙공동체였다. 그리고 이들 형제연합의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그 때문에 형제연합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모범을 보일 수 있었다.

체코의 신학자 흐로마트케(Hromdke)는 형제연합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순종이 얼마나 독특한지를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여 순종하는 것과 비교하여 설명한 거에서 그 특징을 읽어볼 수가 있다. 즉 루터가 ‘하나님’이란 말을 들을 때, 그에게는 그 말씀은 ‘기쁨의 소식’인 ‘은혜, 은혜’로 들린다. ‘거기서 나를 너에게 주노라’, ‘나를 영접하라, 너에게 선물하리라, 너의 마음을 열라, 너를 안아주리라’, 또한 루터가 ’그리스도‘란 말씀을 들을 때,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거기서 그를 부르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자를 본다.’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 ‘나의 의로 옷을 갈아입어라!’ 너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죄지은 걸인‘이다. 그러나 ’너는 내 아들의 죽음으로 왕이 된 아들의 표지(標識)로서 황금의 왕관을 너의 머리 위에 씌우리라.’ 그러나 형제연합교회는 루터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즉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란 말을 동시에 듣는다면, ’나는 너를 부르며, 너에게 명령하며, 너에게 나의 뜻을 선포한다. 선하고, 선한 것을 너에게서 요구하며, 내 기쁨인 그것을 너에게 알린다.” 그리고 흐로마트케는 비교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루터에 의한 믿음은 텅 빈 두 손의 벌림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의 영접이며, 죄 용서로부터 온 기쁨의 확신이지만, 형제연합교회의 믿음은 아주 간단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겸손의 청취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서 기대하는 것으로, 구세주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와 맺은 언약 안에서 인내하며,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기꺼이 짊어지도록 준비하는 행동의 결단이었다.”

우리는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은 이러한 성경 말씀의 이해와 함께 그들의 믿음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실천하려는 행동지향의 신앙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이 순수한 예수의 제자의 삶이요, 후스 신앙의 참된 추종자의 모습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셋째, 성경말씀대로 순종하기를 배우고 훈련받게 하는 교회의 훈육(사랑으로의 지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신앙공동체였다. 교회는 코메니우스가 고전14:40을 자주 인용했던 “모든 것은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말씀처럼, 교회공동체의 참된 모습은 질서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순종하는 삶이어야 함을 전제한다. 이것은 개별신자가 세상의 삶에서 어떻게 순종상태를 유지해야 하는가? 란 질문의 대답은 서로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을 깨닫고,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연합과 통일에 두었다. 그것이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의 특징이며, 교회(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진실로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으며, 다만 거기서 각각 받은 은사의 충만을 수용할 수 있게 되며, 그야말로 가족공동체로 형성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게 된다(비교,행2:42,4:32 등). 그리고 이러한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적용된 신앙훈련의 방법이 교회훈육(Kirchenzucht)이었다. 훈육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르치고 깨우치는 신앙훈련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실제적인 왕으로 다스리며 역사하도록 참된 순종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는 일었다. 즉, 결코 강요하거나 억압으로 따르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제 사랑으로 권고하며 권면하는 영혼의 돌봄을 위한 상담과 같은 대화의 역할이 동반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시행에서뿐 아니라, 역시 확고한 질서와 그가 부자든 가난한 자이든 신하이든, 통치자이든 모두가 동등하게 결속된 훈육(사랑의 권고)과 함께 있는 참된 신앙공동체였다. 또한 코메니우스는 특별히 그가 남긴 “죽어가는 어머니, 형제연합교회의 유언”이란 글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는 형제연합교회의 죽음을 탄식하며, 어떻게 유럽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해야 할지를 되묻고, 이제는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교회들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계속하도록 권고하면서, 형제연합교회의 6가지 신앙의 유산이 보존되기를 희망한 내용 가운데 3번째가 ‘교회훈육’이었다(진리 사랑, 성경 말씀에 충성, 교회의 훈육, 모국어 보존, 교회연합 정신 등).

넷째, 형제연합교회는 참된 ‘교회의 자유’, 즉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신앙공동체였다. 형제연합교회는 한 번도 권세를 가진 지역 성주(왕)의 보호 아래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공동생활의 저변에서 국가 권력의 의지에 대항하여, 언제나 신앙의 박해를 받았고, 그들 신앙적인 삶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방해를 받았던 것이다. 생각하면, 모든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하나님말씀의 순종과 주님에 대한 신실성과 그들 형제들의 단순한 신앙고백의 용기를 가진 증거에 의존되어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내적인 자유는 국가(권력)편에서 간섭하는 모든 공격에 대항하여(로마가톨릭의 세력) 그들의 표면적인 자유를 보증하는 힘으로 작용 되었다. 이와 같은 내적인 자유 안에서 형제연합교회는 형제자매로부터 확고한 질서를 가진 살아 있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자신들에게만 임할 뿐 아니라, 전 삶에서 실제로 효력을 갖게 되도록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삶의 주인으로 인정된 그곳에서 인간은 각자 현세적인 권세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있었다. 거기서 사람들은 그의 구세주의 멍에를 짊어지기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예수 때문에 굶주리고, 고난과 박해와 고문당함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 미래적인 영광을 높이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주님이 유일한 만물의 주(主)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는 이러한 자유의 보존에 종교개혁의 교회들보다 다른 더 위에 높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분명하였다. 물론 형제연합교회의 1세대들은 세상에 대하여 매우 폐쇄적인 삶을 살았던 것은 당연했다. 수도자적인 이상론의 모습으로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러한 생각들에서 허물어지게 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방적인 통찰은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형제연합교회가 분명한 입장을 견지하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사회적인 책임에 관한 인식). 이러한 형제연합교회는 이제 사회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전적으로 기독인의 순수한 자유를 보존하기 위하여 힘썼다. 이러한 자유 안에서 이 형제연합교회는 마침내 하나님과 말씀에 순종함으로, 세상에 대한 책임(정의와 평회)을 짊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이중적인 삶을 만들지 않도록 힘썼다. 이러한 결단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인 자와 부활한 자와 장차 다시 오실 자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강화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결과적으로 이상적인 신앙공동체로서의 형제연합교회가 보여준 신앙의 특징은 위의 4가지로 평가되지만, 근본적으로 초대교회의 사도적인 신앙공동체를 염원하였고, 복음이 말하는 형제사랑과 형제평등과 신앙의 자유를 실천하고 경험하는 참된 복음적인 교회(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결속을 위하여 교회의 훈육(사랑의 지도)을 철저하게 실천한 것은 코메니우스 시대에 이르러 가장 강하고 번영한 교회로 발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죄 고백에 관한 신학적인 이해와 실천

1) 죄 고백과 회심에 관한 신학적인 이해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는 개인의 구원은 먼저 하나님의 선택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아오는 참회와 믿음을 필요로 하였다. 여기서 참회와 믿음은 원래 죄 용서와 칭의(의롭다함)를 약속한 복음에 근거한일이다. 즉 하나님 말씀의 설교는 언제나 인간의 죄를 목표하며, 말씀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고, 중생의 확신과 함께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의 인간의 죄와 타락에 관한 이해는 하나님의 창조사상과 깊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그의 인간론에 관한 신학적인 이해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은 창조 시에 인간을 최고의 피조물인 하나님형상으로 만드셨다. 코메니우스는 하나님형상의 본질적인 요소를 3가지(이성적인 능력, 대리자로서의 역할자질, 자유의지의 능력)능력으로 이해하였는데, 불순종에 의한 인간의 타락은 부여된 하나님형상의 본질적인 능력의 상실을 뜻하며,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에 근거하며, 결국 창조세계의 한 복판에서 창조주가 세워준 본래의 자리(위치)를 벗어 난데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죄는 창조주가 세워둔 그 본래자리를 떠나, 다른 곳에 머무는 것에서 생겨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역시 인간을 거울에다 비교하여, 역할의 중요성을 밝힌다. 대우주(Macrocosmos)와 소우주(Microcosmos)의 모사(摹寫)관계로 보았다. 인간은 대우주(하나님)의 것을 반사하는 거울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올바른 빛 가운데 머물 때만 거울의 역할은 가능하며, 그 반대는 텅 빈 모습이 된다. 그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과제를 성취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를 뜻하며, 인간은 미로에 갇혀 있는 눈먼 자(맹인)이며,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였다. 인간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가운데서만 자신의 근거를 찾으려는 이러한 뒤틀림(죄)이 그의 고유한 목적과 사물의 목적을 알려는 행위를 방해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락을 통하여 그의 존재목적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창조세계는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그 세계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은 다시 올바른 자리(위치)에로 데려와야 했다. 이러한 회복(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옴)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구원자이며, 구원은 그리스도에게로 자신을 되돌림에 달렸다. 그것이 그의 원래 목적에로 되돌아감의 가능성(기회부여)인 것이다. 그리고 천지 만물의 주인인, 창조주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인간은 그의 본성의 타락을 통하여 벗어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와야 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자신의 의지는 전적으로 타락되었으며, 스스로는 멸망을 향해 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참된 죄 고백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코메니우스는 ‘신앙(경건, 종교)’이라 불렀다. 인간은 복음을 통하여, 즉 그 복음은 인간이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구원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로서,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칭의(稱義)이며, 그 복음을 들음(설교)으로 성령의 깨닫게 하는 역사로 회개와 믿음이 생겨나며, 또한 새롭게 됨인 중생의 확신과 함께 다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그리스도의 동역자로 서게 된다.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에게서 죄 고백이 중요하지만, 죄 고백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일에 일꾼 됨을 더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것은 땅에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통치실현에 쓰임 받는 역할에 있었다. 죄 고백과 중생의 체험은 개인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경건이 중심이라면, 그 목적, 또는 그 목표는 창조세계의 동역자로서의 활동인 이웃과 사회에 선한 복음의 영향력을 미쳐, 정의와 평화에 기여 하는 삶에 있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에, 과거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희망의 신학자였다.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 재림의 준비와 그의 종말사상(천년왕국)이해와 깊이 연관된다. 그 때문에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는 처음부터, 성경은 기독교 경건(신앙)의 본질을 세워주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전제하여, 구원신앙의 본질은 믿음, 사랑, 소망에 두고, 그것들이 항상 반응되게 하는 삶(개인적이며 사회적인)을 돕기 위하여 3가지 은혜의 수단(성경, 열쇠의 직무, 성례)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가 제시한 죄 고백과 회심의 신학적인 근거를 또한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성경 계시의 핵심이요,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이해된 믿음, 사랑, 소망이다. 믿음은 칭의(죄용서)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며, 사랑은 그 은혜에 대한 삶에서의 실천이며, 소망은 여전히 그의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는 미래를 향한 희망이다. 그리고 믿음, 사랑, 소망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경건상태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할 목표이면서, 동시에 참된 목표에 이르지 못한 자신의 되돌아봄의 실제적인 죄 고백의 기준이었다. 그 때문에 성경 말씀의 설교(가르침)는 언제나 믿음(구원의 은혜), 사랑(하나님의 요구/순종), 소망(약속/기대)이라는 3가지 관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며, 그것들에 상응하지 못한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로 마음을 향하는 죄 고백의 회개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믿음, 사랑, 소망은 인간의 실존적인 삶의 궁극적인 질문의 대답과 연관된 것임을 생각하면, 그것이 죄 고백의 실제적이며, 신학적인 근거와 기준이라는 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 자신이 만든 안전망들로 만족하려 하지만, 사실은 더 불안해하며, 불만족하며, 영적 기근의 갈증을 느끼며, 실제로 완전하고 영원한 것을 향하여 더욱 그리워하고, 방황하며 찾게 되기 때문이다.

 

2) 죄 고백의 실천에 관한 이해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가 죄 고백을 중히 여기고, 죄 고백의 방법을 어떻게 실천했을까? 이러한 질문의 답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교회가 적용해 온, 죄 고백의 실천방법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이래로 기독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임을 믿음으로, 죄가 용서되며, 거룩한 기독인이 되는 절차를 세례의식을 통하여 실천하였다(예수의 명령). 중세기에 가톨릭의 신학자 토마 아퀴나스는 일상에서 저지르는 인간의 실수와 관련하여 죄 고백과 그 죄가 용서되었음을 확인해 주는 교회의 행위를 성례로 설정하였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신부에게 개인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의 적절한 처방을 구함)를 통하여 죄 문제를 해결하게 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하여 성례로서 죄 고백의 행위는 거절된다. 물론 루터는 종교개혁의 초기에 고해성사를 성례로 붙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죄로 인하여 고민하는 신자의 영적 돌봄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참회(죄 고백)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회개’가 중요하였다. 그리고 마18:15-20의 말씀과 관련하여 죄를 땅에서 묶고, 풀어주는 역할에 대한 질문에서, 루터파 교회는 당연히 참회자의 죄 고백을 듣고, 그 고백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풀며, 반대로 죄를 묶는 역할(열쇠의 직무, 권징)이 말씀의 사역자에게 부여된 과제로 시행하였다. 그리고 루터파 교회는 교회훈육의 관점에서 개인의 참회(죄 고백)는 성찬 참여의 허용과 관련하여 개인의 삶의 변화와 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믿음과 신앙지식에 관한 것들의 확인을 위해, 목사가 개인의 죄고백(Privatsbeichte)을 청취하고 죄용서의 확신을 심어주게 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개혁교회는 루터파 교회의 모습에 대립하여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것은 칼빈의 신학적인 영향 때문인데. 참회(죄 고백)에 관한 질문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3가지 참회 방식을 선택하였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 둘째, 사람 앞에서 행하는 것, 셋째, 사적인 죄 고백이었다. 여기서 ‘사적인 죄고백’(Privatbeichte)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특히 “서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약5:16)란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는 개인적인 것으로 자기의 약점들을 알린 후에 서로 충고하며, 위로함으로 그리스도 안에 다시 일어서도록 돕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웃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죄지은 당사자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미친 해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하고, 노여움을 풀어 화해하는 행위였다(마5:23-24). 여기서 칼빈은 죄를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그 고백을 들어주어야 할 대상은 목사임을 밝힌다. 목사는 고백하는 자에게 죄가 용서됨의 확신을 고백자에게 심어주어야 하는 위로자의 직책을 맡은 것으로 이해하였다(마16:19,18:18,요20:23). 중요한 것은 목자와 고백자 사이에 상호충고와 상호견제역할이다. 즉 목사는 죄용서의 증인이며, 보증자의 책임을 부여받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죄 고백’(시32:5,시51:단9:5,요1서1:9)은 칼빈에 따르면, 참된 회개의 불가피한 구성요소로서, 그리고 참된 회심의 결정적인 요소로서 마음의 고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람 앞에서의 죄 고백은 각자가 공개적으로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온 세상이 듣는 가운데서 자기의 수치와 하나님의 큰 자비와 영예를 성실하게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삼하12:23,레16:21).그렇지만 칼빈은 역시 레16:21과 느9:1-3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죄 고백은 단순한 개인의 사적인 죄 고백이 아니라, 공개적인 죄책 고백(Offene Schuld)관계하여 이해할 것을 강조한다. 즉 개인의 죄(불의)의 사회성과 관련하여 국가 공동체나, 민족 공동체의 재앙이나. 하나님 심판의 위기에서 죄의 책임에 관한 고백을 하게 했다. 그래서 개인의 죄책 고백을 공중 앞에서 행하도록 제네바교회의 예배가운데로 가져온다. 예배 시작에서, 먼저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의 이름에 달려있다’는 말을 선언한 후, 바로 죄책 고백의 순서가 진행되게 하였다. 그리고 ‘죄책 고백’(Offene Schuld)은 문서로 작성한 고백문을 회중과 함께 낭독하는 방식으로 목사가 진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죄책고백문’을 낭독한 후에는 그 죄의 책임이 용서되었음을 성경 말씀을 들려주어 회중을 위로하고, 죄가 용서되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의미를 첨부하였다. 물론 공중예배에서의 죄책 고백은 개인의 사적인 죄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과 관련하여 신앙공동체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회적 책임을 포함한 진지한 태도의 죄의 책임(죄책)을 고백하게 한 것이다. 현재 한국 장로교회는 이러한 방식을 대부분 평신도 대표인 장로가 예배에서 기도순서로 담당하고 있다.

그러면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가 실천한 죄 고백의 형태와 적용의 실제는 어떠했을까?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질문이다. 필자는 먼저 이점을 밝히기 위하여 몇 가지 가정을 전제하여 유추적인 해석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역사적 자료의 불충분으로).

첫째는 형제연합교회는 1517년에 시작한 종교개혁의 지도자, 루터와 교제하였다. 그리고 성경 이해와 몇 가지 교리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형제연합교회 지도자(루카스 폰 프라그)는 루터파 교회와도 교제하였다. 거기서 루터의 예배개혁 정신을 본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둘째는 유감스럽게도 형제연합교회는 루터와 멜란히톤이 죽고 난 후, 루터파 교회와의 교제를 단절하게 된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는 그 당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연합을 매우 강조했던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쳐와 제네바의 칼빈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 결과 형제연합교회의 후계자 양성은 비텐테르그에서 스트라스부르그, 바젤, 제네바, 하이델베르그, 헤어보른 등의 칼빈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대학들에로 옮기게 되었다. 여기서 코메니우스는 그곳 대학들에서 칼빈의 개혁신학 사상의 영향을 크게 입게 되었다.

필자는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가 이때부터 칼빈의 종교개혁사상과 유럽의 개혁교회의 신학적인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으로 판단하며, 역시 죄 고백에 관한 신학적인 이해와 그 실천에서도 동일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형제연합교회와 칼빈의 개혁신학과는 신앙교리와 신앙실천의 방법에 서로 일치하는 것이 실제로 많았다(성경관, 성찬의 성령임재, 교회훈육. 장로제도, 교회 연합정신, 국가관 등). 거기서 예배와 예전 방법을 비롯하여 죄 고백은 당연한 교회의 행위로 여겨지며, 오히려 복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해도 서로 일치했던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현재 유럽의 개혁교회(칼빈의 제안)가 예배에서 시행하고 있는 죄책 고백의 형식처럼, 형제연합교회는 그러한 예배형태의 전철을 따랐을 것으로 유추한다. 즉 그것은 개인의 사적인 죄 고백에 한정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 고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배에서 고백문으로 실천했을 했을 판단한다. 그러므로 필자의 이해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고,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십자가의 고난을 스스로 짊어지고, 기꺼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에 더 충실했지, 사적인 죄에 관한 지나친 고민으로 죄고백과 중생(경건)의 도(道), 쌓기만을 힘쓰는 일에 인생의 시간을 다 보내게 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한다.

 

4.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가 유럽의 경건주의운동에 미친 영향

17세기, 유럽 사회는 근세 시대로 발전하는 새로운 시대 전환기였다. 인간의 이성적인 가치를 앞세운 계몽주의가 싹트는 시기였고, 자연과학의 발전과 함께, 합리주의적인 이성적인 사고가 전통적인 기독교의 권위에 새로운 도전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30년 종교전쟁(1618-1648)은 기독교의 전통과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역시 개혁을 부르짖고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역시 루터파와 칼빈파로 분열되어 신앙 교리의 대립과 다툼은 신앙의 통일성을 상실한 채, 유럽 사회와 프로테스탄트를 더욱 혼란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앙과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경건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내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을 교회역사는 경건주의(Pietismus), 또는 경건운동(Froemmigkeitsbe- wegung)으로 정의한다. 독일의 교회역사가 알란트(K.Aland)는 ‘경건주의’라는 사상체계는 결코 제시된 일이 없으며, 다만 항상 각인된 여러 신앙의 형태들이 존재한다고 해명하였다. 대체로 경건주의운동의 패러다임은 3가지 형태를 가지는데, ‘죄 고백’과 ‘중생의 체험’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 제자의 삶’이었다. 그리고 경건주의운동은 역시 개인의 회심과 함께 중생한 자들에 의한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교회개혁에 목표를 두었다.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는 이러한 유럽의 경건주의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과연 그들의 영향은 어떤 것이었던 지를 밝혀보기로 한다.

 

1) 유럽경건주의 운동의 주역으로서 코메니우스의 영향

코메니우스가 유럽의 경건주의운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먼저,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들(Puriten)과의 접촉에서였다. 코메니우스는 1641년 9월, 영국의회의 초청을 받고 런던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약 9개월 체류 동안에 영국의 퓨리턴들과 교제하게 된다. 그들이 새롭게 추구하는 교회개혁과 함께 새롭게 일어나는 영국의 퓨리턴의 경건 운동을 코메니우스는 적극 지지하며, 독려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코메니우스를 런던으로 초청한 배후의 인물이 코메니우스의 친구인, 사무엘 하르트립(S.Hartlib)이었는데, 그는 이미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청교도들(Puriten)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1637년 코메니우스가 작성하여 보냈던 “범지혜의 선구자”(Prodromus Pansophiae)란 책에 매료되어 코메니우스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1638년 런던에서 그 원고를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 목적은 유럽의 지성인들과 정치인들에게 코메니우스의 범지혜사상(Pansophia)을 알리고 싶어서였고, 이제는 그를 데려다가 영국의 퓨리턴들이 희망했던 영국의 교회개혁과 국가교육개혁 작업을 그에게 맡겨서, 영국의 실제적인 종교개혁이 관철되기를 염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영국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전으로 인하여, 코메니우스는 아무런 작업도 추진하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영국의 퓨리턴의 지도자, 레위스 베일리(Lewis Baily)가 쓴 고전적인 “경건의 실제”(Praxis Pietatis)라는 책을 체코어로 번역하여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에 알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형제연합교회 형제들의 경건한 삶의 변화에도 영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코메니우스가 영국의 퓨리턴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인 셈이다.

이뿐만 아니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독일에서 일어나는 경건주의운동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독일의 신비주의 신학자인 야콥 뵈메(Jakob Boehme, 1575-1624)와의 관계에서이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뵈메가 제시했던 “그리스도와 회개와 제자로서의 삶으로 인도하는 방법”과 천년왕국에 관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뵈메의 생각과는 궁극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었는데, 그것은 뵈메가 ‘신지혜’(Theosophia)를 강조하는 반면, 코메니우스는 ‘범지혜’(Pansophia)를 내세웠고, 뵈메의 거대한 세계의 신비에 관한 해석보다는 코메니우스는 성경에 충실한 새롭고 실천적인 학문체계와 그 학문의 극복을 병행시키는 일들에서 뵈메와의 현저한 차이와 그를 뛰어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독일루터파의 경건주의운동의 주도자였던 스페너(Philip Jacob Spe- ner,1635-1705)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스페너는 코메니우스의 마지막 작품(unum necessarium, 꼭 필요한 한 가지, 1668)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친구에게 그 책을 구해서 읽었다. 코메니우스는 그 책에서 인간이 세상의 미로를 헤쳐 나가기 위한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제시하였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규칙(말씀)이었다. 그것이 불필요한 것과 악한 것, 거짓이 가득한 미로와 같은 세상에서 꼭 필요한 것, 선한 것을 잘 선택하며 미로를 탈출 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눅10:38-42절의 말씀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가리키면서, 자신의 삶이 마르다 처럼 세상의 일들에 분주했음을 고백하며, 이제는 꼭 필요한 한 가지, 주님의 무릎 앞에 앉아서 말씀에 경청하는 마리아의 삶의 태도를 따를 것을 결단한다. 스페너는 코메니우스의 ‘꼭 필요한 한 가지’의 도움으로 그의 작품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이란 책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너는 코메니우스가 루터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깊이 경계하였으며, 또한 코메니우스의 전 우주적인 창조세계의 관점과 교파를 뛰어넘는 교회 연합적인 정신과 정치와 교육을 포함한 삶(사회)의 개혁은 그에게서 전적으로 외면되었다. 그리고 할례(Halle)에서 루터파 경건주의운동을 주도했던 헤르만 프랑케(H.Franke,1663-1727)역시 코메니우스의 경건과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 이유는 특히 1935년 취체브스키(D. Tschizewskij)에 의하여 독일 할례에, 프랑케가 설립하여 운영하던 고아들을 위한 도서관에서, 코메니우스의 “인간사 개선에 대한 포괄적인 제언”이란 미완성 유작의 원고더미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코메니우스의 작품이 프랑케에게 전해졌고, 프랑케는 역시 코메니우스의 작품을 읽고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그 대신 경건주의운동의 사상과 방법에서 코메니우스의 것을 그대로 모방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프랑케는 부분적으로 코메니우스의 교육사상을 수용하면서도, 다만 그의 교회연합 정신은 역시 거절했는데, 그 이유는 프랑케는 루터파 안에서의 경건주의운동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페너보다 프랑케는 코메니우스의 교육적인 의도대로 세계의 개혁과 삶의 개혁에 더 접근하고 있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코메니우스와 경건주의운동과의 관계에 대하여, 독일 뮌스터대학의 역사신학교수, 마틴 브레히트(M.Brecht)는 그의 논문에서 코메니우스가 유럽의 경건주의운동의 전 단계의 중심에 서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경건주의운동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을 비롯한 여러 독일의 역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임을 밝혀주었다.

 

2) 형제연합교회가 유럽 경건주의운동에 미친 영향

형제연합교회가 유럽의 경건주의운동에 영향을 미친 영향은 특히 루터파 경건주의운동의 3번째 지도자인 진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1700-1760)와의 만남에서였다. 코메니우스가 이끌었던 보헤미아의 형제연합교회는 30년 종교전쟁이 끝난 후,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해, 흩어지는 교회(디아스포라)가 되고 말았지만, 이들은 ‘복음의 숨겨진 씨앗’으로, 신앙의 명맥을 잇고 있었다. 우연찮게 이들은 크리스천 다비드(Christian David)라는 인물에 의하여 1722년 진젠도르프에게 소개되었고, 이들을 ‘헤른후트’(Herrnhut)로 이주하여 살도록 다비드의 요청을 진젠도르프가 기꺼이 받아들여, 그다음 해에 모라비아의 형제들이 대거 헤른후트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 대부분은 이전에 코메니우스가 풀넥(Fulneck)에서 목회할 때, 함께 했던 그 형제연합교회의 후손들이었다. 그 때문에 옛 형제연합교회의 전통은 그들 가운데 여전히 살아 있었고, 헤른후트(Hernnhut)는 새로운 형제교회로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거룩한 땅이 되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그들은 특히 모라비아 동편 지역의 라이토미슐(Leitomischl)이란 곳에서 계속 이주해 왔으며, 헤른후트의 신앙공동체는 점점 더 큰 연합의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숨겨진 복음의 씨앗들은 헤른 후트의 경건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것은 이들 형제연합교회의 이전의 신앙방식 때문이었다. 이들은 주일예배 외에도 주간에 빈번한 작은 성경공부 모임이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가정기도회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신앙 교리에 대한 사색은 멀리하고,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신앙실천운동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거기서 세상에 대한 금욕적인 형태의 폐쇄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헤른 후트에서 오늘날도 매일 성경읽기 책자(Losungen)가 발간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형제연합교회(모라비아인)의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성경읽기에서 기인되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적인 책임의식이 자라게 되었는데,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복음 선교에 대한 의무감이 실천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역시 진젠도르프는 선교적이며 교회연합의 목표를 가지고, 형제교회(모라비아인)가 그 지역 루터파교회(Landeskirche)의 지체로 동화되기를 권유하였지만, 다른 이주자들과 합세하여 그들 이전의 모라비아 형제연합교회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기를 원했고, 그들 자체의 교회법과 감독을 가진 자립적인 교회조직체로 남게 되었다. 거기서 옛 형제연합교회의 모범에 따라 교회와 지체들의 삶을 보호하는 평신도장로의 직무가 세워지며, 교회훈육도 도입되고, 형제연합교회가 수년 동안 지켜온 간단한 형식의 예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헤른후트 신앙공동체에 새로운 경건의 형태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1735년에는 차우크텔러(Zauchteler)에서 이주해 온, 뉘츠만(David Nitschmann)은 헤른후트의 형제연합교회 감독이 되었으며, 그 후에 진젠도르프도 2년간 형제교회(모라비아인)의 감독직을 이어받기도 하였다. 이제 새로워진 형제교회는 이웃사랑과 어린이교육을 어려운 조건에서도 잘 감당하였으며, 용감한 신앙증언자로서의 봉사활동을 지속하였다.

그 이래로 헤른후트의 형제교회는 수십 년간 전 세계를 향한 해외 선교에 열중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코메니우스가 그 시대에 이미 그의 글들에서, 해외 선교에 대한 길을 잘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복음 선교의 정신은 진젠도르프에게도 영향을 미쳐, 가난한 이방인들을 돕는 복음적인 선교가 헤른후트에서 시작되었고,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트교회가 해외선교사 파송의 역사를 만들게 되었다. 벌써 1733년에 크리스천 다비드는 그뢴란드(Groen -land)선교사로 파송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감독이 되었던 다비드 니취만도 덴마크의 서인도에 있는 성 토마스 섬으로 선교사로 파송되어 갔다. 그 후에 진젠도르프의 신앙공동체인 형제교회는 선교지역을 점점 더 확대하여, 아프리카 지역의 자마이카, 수리남 등, 여러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734년에는 북아메리카 지역인 조지아주와 펜실바니아 등에 선교과제실현과 결부된 식민정책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다비드 니취만(D.Nitschmann)은 풀넥의 차크텔에서 이주해 형제로써 선교 열정을 그 자녀들이 이어받아, 북미지역의 인디안 선교에 크게 헌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 역사에서 칼 파칼트(Karl Pa’calt)는 체코인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오늘날까지도 그가 선교사로 활동했던 지역에다 ‘파칼도르프’ (Pacal- dorp)란 마을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735년 다비드 니취만이 그의 형제와 가족으로 구성된 선교단체를 이끌고 북미지역으로 항해할 때, 감리교회의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이(John Wesley)가 그 배에 함께 타고 있었으며 그들 모라비아 형제들의 신앙의 영향을 받게 된다. 웨슬레이는 모라비안 형제들이 항해 동안에 바다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믿음의 용기와 겸손함을 견지하는 그들 신앙 태도에 큰 감동을 받게 되었고, 그 일로 웨슬레이는 이들 모리비안 형제들과 교제하였으며,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형제교회와 연결하여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역시 독일의 헤른후트에 있는 형제교회를 방문하였으며 진젠도르프와도 교제하였다. 1738년 그의 회심은 이러한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웨슬레이가 영국에서 일으켰던 신앙부흥 운동은 처음부터 모리비아 인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크게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웨슬레이는 이러한 모리비아 형제들에게 받은 영향을 잊지 않았고, 감리교도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헤른 후터(Herrnhutter)의 경건방식에 영향을 받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결론]

지금까지 필자는 죄고백과 관련하여 건강한 신앙공동체로서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가 가진 신학과 신앙, 특히 유럽의 경건주의운동에 미친 영향 등의 역사적인 것들을 상세히 밝혀 보았다. 이제 죄 고백과 관련하여 코메니우스와 그의 신앙공동체의 신학과 신앙이 보여주는 한국교회와 우리들교회를 향한 의의(교훈)가 무엇인지를 6가지로 제시해 본다.

 

1. 한국교회에 새로운 경건운동과 삶의 개혁운동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유럽의 교회역사는 기존교회(가톨릭)가 성경의 본질을 떠나, 지나치게 제도화되고, 정치화되어 교권남용들이 만연할 때, 그리고 경건의 참된 본질을 상실할 때, 필연적으로 교회개혁운동이 일어났던 것을 보여준다. 형제연합교회는 15세기에 보헤미아에서 얀 후스가 낳은 교회개혁운동의 열매였다. 16세기에 루터의 종교개혁도 같은 맥락에 있었다. 17세기 후반 18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경건주의운동은 역시 프로테스탄트교회 자체가 경건(신앙)의 본질을 외면하고, 교리를 구원진리의 객관성으로만 고집할 때, 스페너와 프랑케와 진젠도르프의 경건주의운동이 일어나, 신앙의 체험적인 주관성(죄고백과 중생)에 근거한 신앙실천으로 교회의 개혁과 삶의 개혁에 기여하였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17세기 중엽에 일어난 영국의 청교도적인 경건운동의 배후에서 주된 역할을 하였고, 18세기에 형제연합교회(모라비아형제)는 헤른 후트의 신앙공동체에서 경건운동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교회개혁뿐 아니라, 교육의 개혁, 정치의 개혁으로 완전한 삶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여기서 필자는 지금 21세기, 한국교회는 새로운 경건운동과 사회적인 삶의 개혁운동이 일어나야 할 필요성을 직시하게 된다. 지나친 개 교회주의와 교파주의, 교회의 세속화와 사유화에 빠져, 교회의 공동체성과 공공성을 상실하고 있는 지금의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새로운 경건운동과 신앙실천의 개혁운동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경건운동의 몸부림들이 우리들교회를 비롯하여, 한국교회 저변에서 지금 죄고백운동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중생(구원)의 확신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예수 따름의 운동이 확산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경건운동들이 기존교회로부터 이단시비의 대상으로 오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경건운동과 삶의 개혁운동이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처럼, 오직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는 운동이며, 이웃과 사회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려는 신앙실천에 목표를 분명히 한 운동이라면, 이러한 죄고백운동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성령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하다 할 것이다.

 

2.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영성은 이 시대에 경쟁과 소유욕에 사로잡힌 잠자는 한국교회의 영성을 일깨우는 새로운 영적도전이 분명하다.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정치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조국에서 쫓겨나, 30년 종교전쟁은 끝났지만, 종교자유가 보장되지 않아 망명생활(폴란드 리사, 사로스파탁, 암스테르담)에 처하였다. 그리고 그들 후손들은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복음의 숨겨진 씨앗들”로 전 세계에 흩어져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비극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18세기에 헤른후트(Herrnhut)의 진젠도르프를 통하여 다시 그들을 역사 가운데로 불러내어, 유럽경건주의운동의 주된 역할 자들이 되게 하였고, 마침내 세계복음전도를 위한 선교사파송에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였다. 무엇을 말하는가? 진리에 근거한 올바른 영성을 준비한 자들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그의 나라의 일꾼으로 사용하신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하나님을 향한 건강한 기독교영성을 소유한 자들이었고 어떠한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그 영성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리지 않았던 고난의 승리자 들이었다. 코메니우스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시대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잃어버린 인물이었다. 11세에 고아가 되어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형제연합교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내와 자녀를 두 번이나 잃어버린 비극적인 운명자이기도 하였다. 30년 종교전쟁은 자신과 형제연합교회를 더욱 파멸로 내 몰았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했는데, 형제연합교회의 해산과 감독직분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었다. 그가 가진 모든 책들의 원고도 불타버렸다. 그 시대에 코메니우스는 그야말로 그가 가진 모든 것(기득권)을 다 잃어버렸다. 역사에서 그의 존재도 사라졌다. 생각하면, 코메니우스의 생애는 참으로 비참하고 저주받은 욥과 같은 인생이었음을 생각해 본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그의 확고한 영성은 그 시대의 모든 고난을 이기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코메니우스는 그 시대에 모든 것을 잃었으나, 하나님은 350년이 지난 오늘날 유럽에서, 잃어버린 그의 모든 것을 회복시켰다. 거기서 우리는 욥과 같은 영성을 경험한다. 오늘날 세속화의 물결에 빠져, 영원하지 않는 수단에만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향한 경건에서 흔들리고 있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우리자신들에게 욥의 영성을 소유한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는 연약한 한국교회의 영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도전이 분명하다.

 

3. 기독교영성의 근본토대는 믿음, 사랑, 소망의 신학이며, 그것은 경건의 참된 목표이면서,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죄고백운동의 신학적인 표준이며, 근본토대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한국교회는 그간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 루터의 칭의복음을 전하는 일(믿음으로 구원 받음)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말씀(믿음)대로 순종하는 신앙실천이 따르지 않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즉 믿음대로 행하지 않음이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답으로 최근의 한 신학은 율법을 행해야만 구원받는 다는 ‘바울의 새 관점’이란 혼란스런 구원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역시 율법의 행위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믿음에 회의가 일어나며, 선행의 보상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에 소망이 필요하다. 벌써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의 구원신학은 루터의 칭의 구원론이 안고 있는 믿음과 행함의 이원적 갈등과 지나친 행위구원의 강조가 초래할 선행보상의 문제를 간파하고, 그 문제들의 극복에 합당한 구원신학의 대답으로 성경적인 구원론인 믿음, 사랑, 소망의 신학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신학은 개인의 경건(하나님과의 관계)의 확고부동한 근거이며, 동시에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는 죄고백의 근거와 토대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실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지향의 신학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성경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으로 믿음, 사랑, 소망의 구원신학을 주목하기 바라며, 이러한 시각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설교하는, 그리고 성경공부의 목표도 믿음,사랑,소망에 두고,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에 눈뜨게 하며, 참된 경건의 목표일 뿐 아니라, 죄고백운동의 신학적인 토대임을 인식하고, 목회방법으로 적용한다면, 큰 유익이 되리라 확신한다.

 

4. 형제연합교회의 신앙특성 4가지는 이상적인 신앙공동체의 모범이 분명하다.

형제연합교회가 보여준 신앙의 특성 4가지는 이상적인 신앙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었다. 그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는 신앙과 그 말씀대로 행동하는 믿음의 순종과 사랑의 훈육과 교회의 자유에 관한 것들이다. 그 가운데서 특히 ‘교회의 훈육(訓育)’은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성경말씀대로 살도록 사랑으로 돌보고 삶의 책임을 일깨우는 신앙훈련법이었다. 그것은 성령의 은혜아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를 돌보며, 교제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자의 삶이 가능하도록 돕는 목회방법이었다. 이것은 죄고백과 중생의 확신과 그리스도의 따름인 경건의 실천구도에 따라, 반응하며 사는 성도들 만들어가는 방법이며, 경건한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경건훈련방법이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는 교회구성자체가 로마가톨릭교회의 엄격한 상하수직관계(성직자와 평신도)를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수평관계의 형제공동체로서, 만인사제적인 원리가 실현된 공동체였다. 그러나 공동체의 운영과 지도를 위하여 감독직, 목사직과 장로직, 집사직분들은 그대로 수용하였다. 다만 그 직분은 형제들 위에서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인격적인 신앙리더십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며 섬기는 직분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특성들을 한국교회는 깊이 주목하고, 따라야 할 이상적인 신앙공동체의 모델이 분명하다고.

 

5.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가 보여준 ‘교회연합정신’은 한국교회에 만연된 개 교회주의와 교파주의를 극복하고,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나라실현에 크게 기여하리라 기대한다.

형제연합교회(Unitas fratrum)란 이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모임으로서, 언제든지 신앙의 동질성이 확인되면 하나가 될 수 있는 개방성을 전제한 지(支)교회를 뜻하였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신학에서 역시 중요한 주제는 ‘교회연합정신’에 있었다. 지금 한국교회는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교회연합이야말로 지금 한국교회가 처한 대 내.외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가? ‘우리들교회’는 예외일지 모르지만, ... 복음전도가 이전처럼 쉽지 않고, 교인이 줄어가며, 가나안성도가 늘어나고, 서로 경쟁하며, 교회의 세속화와 사유화로 비난받으며,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성(공공성)은 땅에 떨어진 모습이다. 그야말로 한국교회는 공동체성의 위기와 공공성의 위기에 처한 모습이다. 그 이유는 경쟁하는 세속적인 환경에서, 그간 한국교회가 자기 몸집 불리는 경쟁에 몰두하여 개교회주의적이며 교파주의로 흘러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기억하고, 서로 연합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그 연합은 한 교파에로 통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성을 인정하고 이 시대에 감당해야 할 중요한 더 큰 주님의 일들에 연대하여 힘을 합해서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한국교회 전체를 바라보고, 서로 협력하며 돕는 교회연합정신이 필요한 시대이다. 한국교회는 연합하여 현재 20%의 자립교회가 80%의 미자립교회를 책임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를 개척하는 일도, 기존대형교회들은 똑똑한 부교역자들을 내 세워, 분리 개척하는 모범도 보여야 한다. 왜 개교회가 이렇게 대형(大型)이어야 하며 성령의 인격적인 은혜가 아니라, 막강한 조직력으로 대기업체처럼 교회를 운영해야 하는지? 되묻고, 되돌아보아야 한다. 교회 내적으로는 한국교회의 공동체성이 회복되며(복음의 동역자 의식회복), 밖으로는 사회와의 관계에서 그간 상실된 한국교회의 공공(신뢰)성이 회복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교회에 모여진 막강한 능력은 이제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일(의와 평화)에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사회에 미쳤던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그것이 교회의 복음전도와 함께 감당해야 할 복음의 사회적 역할(빛과 소금)이다. 또한 지금 국가(정부)가 요구하는 종교인 과세문제나, 성 소수자의 인권 보호란 미명 하에 동성애를 합법화하는 일들에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대응해야 한다. 북한 인권문제는 침묵하면서, 동성애를 옹호하는 대한민국 정부나, 동성애를 지지하고 있는 진보적인 교회연합체인 KNCC의 자유주의신학사상에 대응하고 분노해야 한다. 물론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의 문제를 하나님 나라와 복음 선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국가(정부)정책에도 무조건 반대하는 시각은 고쳐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대응해야 사회도, 정부도, 지방의 공공기관도 교회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는 그 시대에 그 일에 가장 모범을 보여준 역사적인 증인들이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지금 교회연합정신을 본받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를 바란다.

6.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는 ‘우리들교회’의 죄고백운동이 더욱 성숙해 지기를 교훈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현재 ‘우리들교회’가 실천하고 있는 죄고백운동은 오늘날 대부분 기존교회들이 죄에 대하여 침묵하고, 죄로 고민하는 많은 성도들을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는 한, 그리고 목회사역이 값싼 구원의 은혜전달에만 목을 매고, 여전히 목회자들이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며, 오히려 세속에 물들어 교회본래의 사명과 과제를 망각하고 있는 한, ‘우리들교회’의 죄고백운동은 많은 평신도와 목회자들에게 경건의 새로운 도전이 분명하다. 특히 한국교회가 가정파탄의 문제, 성적 타락의 문제, 마약 중독문제, 동성애 문제, 경제적 파탄 등, 실존적인 인간의 죄들에 대한 양심적인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한, 우리들교회의 죄고백운동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경건운동에 크게 기여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가 보여준 죄고백의 신학적인 이해를 깊이 성찰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성찰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 사랑, 소망의 구원신학이 경건의 참된 목표요, 죄고백의 근본토대라는 점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특히 개인의 사적인 죄고백의 성경적 근거로 삼아왔던 성경본문들을 다시 한 번 성찰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느혜미아9:1-4, 레16:21이하, 삼상7:3-12, 약5:16절 등의 본문들은 새롭게 주목하기를 바란다(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1-6장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사적인 죄가 이웃에 미치는 사회적인 영향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죄고백은 ‘죄책고백’으로 이해되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그래서 사적인 죄고백과 공적인 죄책고백을 잘 구별하여 사용할 때, 우리들교회의 죄고백운동은 더욱 성숙한 방향으로 발전하리라 확신한다.

여기서 또 하나 숙고해야 할 점은 우리들교회가 행하는 공중예배에서 회심자의 간증행위이다. 이것은 아마도 아직 믿음(구원의 확신)에 확고히 서 있지 않는 새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복음전도에 목표를 둔, 일명 구도자의 예배모습으로 여겨지며, 목회자의 소신에 의하여 시도되는 독창적인 예배모습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은 간증 인이 갖게 될 심적 부담이다(기우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분명히 죄용서(회심과 중생)의 은혜를 체험한 자도, 언제든지 다시 죄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루터는 기독인의 실재를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하루에 3번 이상, 하나님께 드려야 할 회개기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그럼으로 중생 후에도 인간은 죄의 유혹을 받으며, 넘어질 수 있는 연약성과 가능성 때문에, 유혹을 피하도록 진지하게 죄와 투쟁해야 하며, 죄를 하나님께 항상 고백할 뿐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며, 경건한 삶을 힘쓰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생각하면 바로 그것 때문에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는 구원신학의 근본토대를 믿음. 사랑, 소망에다 두고, 그것들로 반응하며 순종의 삶을 살도록 성경말씀의 설교를 힘쓰며, 성례(세례와 성찬)를 통한 성령의 인침의 확신을 심어주며, 그리스도형상 닮기를 훈련시켰으며, 역시 사랑으로 돌보는 교회훈육의 목표도 거기에 두었던 것이다.

바라기로는 현재 ‘우리들교회’가 추구하는 죄고백의 경건운동은 개인의 사적인 죄 고백의 간증차원을 뛰어넘어, 여전히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사랑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고백을 적용하여, 빛과 소금의 사회적인 책임과 역할을 일깨우는 회개운동을 적용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생한 신자들은 진리의 통찰에 근거하여 사회적으로 유혹받는 불의를 거절하며(정의), 불화와 다툼과 대립과 분열을 극복(평화)하는 사회적인 영역(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에서 더 큰 선한 복음(진리)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코람데오의 삶을 구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방향에서 평신도들에게 기독교신앙의 진리를 성실하게 일깨운다면, 우리들교회의 죄고백운동은 성숙한 회개운동과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운동으로 연결되어, 마침내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 받는 등불이 되리라 확신한다.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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