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저유소 화재 사고를 보며

강영안 (고신대학교 전 이사장, 서강대 명예교수, Calvin Theological Seminary 교수) 본지에 기고되는 나의주장,은 순수한 기고자의 주장임으로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10월 16일) 느지막하게 잠에서 깨 마루로 나갔습니다. “스리랑카 젊은이가 풀려났어요!” 아내가 던지는 말이었습니다. 혹여 가짜뉴스인가 해서 인터넷으로 뉴스들을 검색했습니다. 곧장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검찰이 구속영장 신청을 포기하고 스리랑카 젊은이를 풀어주었다는 소식을 여러 매체가 보도하였습니다. 청와대 국민청원도 있었다는 얘기도 읽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경찰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스물일곱 살의 외국인 젊은이에게 동정을 표시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아, 우리 시민들이 약자의 억울함을 돌아보는구나. 이 젊은이가 구속되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자연스럽게 몸에 생긴 현상이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 학교를 향해 잠시 걷는 동안 세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시민들이 그래도 약자의 억울함을 보고 마음을 쓴다는 사실이 기쁘고 고마웠습니다. 태어난 고향, 자란 땅을 떠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먼 이국에 와서 일하던 젊은이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상하지도 못한 큰 화재와 연루되었고 그로 인해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연민과 동정을 표현한 것은, 그래도 우리 사회에 정의감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정의는 억울함에 대한 공감과 함께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억울함의 감정은 한 개인이나 집단의 존재와 행위와 그에 대한 대접과 보응의 불균형에서 비롯됩니다. 마땅히 한 인격으로 대접받아야 하지만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할 경우, 어떤 처벌이나 보상이 내가 저지른 행위보다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을 경우, 억울함의 감정이 형성되고 그로 인해 고통이 따르고 그 고통이 호소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 가난한 사람과 외국인들이 억울함을 당할 때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고 그들이 당하는 부당함을 바로잡아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요 정의라 누누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 외국인이 당할 수 있는 부당함을 시민들이 염려하고 동정하고 그와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은 제게는 우리 사회가 희망이 있다는 징조로 여겨집니다.

지난 10월 7일 오전 10시 56분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 옥외탱크 14기 중 하나인 휘발유 탱크(440만ℓ)에 폭발이 일면서 발생한 화재의 피해 금액은 휘발유 46억원(약 282만ℓ), 탱크 2기 총 69억원, 기타 보수비용 2억원 등을 합쳐 총 117억원으로 집계됐다. (사진 YTN 뉴스 갈무리)

이어 두 번째로, ‘그러면 이번 고양시의 저유고 화재사건은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물음으로 생각이 옮겨갔습니다. 저유고 화재는 탱크 덮개의 환기구로 들어간 불꽃 때문이고, 불꽃은 스리랑카 노동자가 그가 일하던 공사장에 근처 초등학교에서 날아온 풍등에 불을 붙여 날린 것이 잔디밭에 내려앉아 불을 옮겨 생겼다고 알려졌습니다. 초등학교에서 풍등을 날리지 않았더라면, 바람이 공사장으로 불지 않아 풍등을 스리랑카 노동자가 줍지 않았다면, 스리랑카 노동자가 풍등에 다시 불을 붙이지 않았다면, 바람이 저유고 쪽으로 불지 않았다면, 날아간 풍등이 저유고 근처 잔디밭에 앉지 않았다면, 잔디밭에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면, 잔디에 붙은 불이 저유고 환기구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불은 나지 않았을 것이고 저유고 화재와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유고에 무엇이 날아들지 못하도록 펜스가 있었더라면, 날아온 풍등이 잔디밭에 떨어져 불을 붙였다 하더라도 직원들이 불을 빨리 발견하고 소화 작업을 했더라면, 불은 나지 않았고 폭발 사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재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요? 풍등 놀이를 한 초등학교에 있습니까? 풍등에 다시 불을 붙여 날린 스리랑카 청년에게 있습니까? 바람에 있습니까? 화재 방지를 소홀하게 한 저유소 담당자들에게 있습니까? 초등학교와 바람은 아마 책임을 면할 수 있겠지요. 풍등은 이미 사고 전날 날아가 공사장에 떨어져 있었기에 학교에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고, 바람은 인격이 없으니 바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스리랑카 청년과 저유소 담당자들에게 화재의 책임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정도, 어떻게 책임이 있는가 하는 것은 따져 볼 일입니다. 스리랑카 젊은이가 억울함을 당하지 않도록 변호하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돕는 일에도 시민들의 참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세 번째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왜 이번 화재 사고와 같은 사고가 계속 일어나게 될까?’ 아마 불과 바람과 공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은 분들도 없잖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람이 없고 불이 없으면, 그리고 공기와 물질이 없다면 화재 사고는 없었을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물에 빠져 죽는 일이 없을 것이고, 배가 없다면 바다를 다닐 생각을 못 할 테고, 그렇다면 해상 교통사고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 없이, 불 없이 우리는 살 수 없고, 공기 없이, 도로 없이는 숨을 쉬거나 걸어 다닐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조건과 상황 가운데서 안전하게 삶을 살도록 조치를 다 하고 관심을 쏟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규칙이 존재하고 훈련과 연습을 하게 되고 필요한 조치를 모두 취합니다. 고양의 저유소의 경우, 폐쇄회로 카메라만 45대가 있었고 잔디에서 통풍구로 불이 옮겨붙기까지는 18분이 걸렸다고 합니다. 적어도 한 사람이라도 상황을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더라면 적절한 조처를 할 수 있었을 테고 거대한 화재와 폭발 사고는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3년 반 전에 있었던 세월호 사고 이후 우리는 안전 불감증 이야기를 그토록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책임지고 안전을 도모해야 할 사람들은 책임을 방기하는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겪는 고통을 통해서 배우지 못한다면 그런 조직, 그런 사회는 개선과 변화의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지 말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라고 줄곧 가르치십니다. 예레미야 22장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라고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예언자 말라기는 외국인을 압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말3: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외국인들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도록, 그들이 이 땅에서 차별받지 않고 사람으로 존중받으면서 살 수 있도록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보살필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로운 삶, 공의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성경은 한편으로 외국인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무조건 옹호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재판할 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부자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자국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행위에 대해서 공정하게 판단하라고 가르칩니다(신 1:16-17; 16:19; 레 19:15; 렘 5:2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위에 대해서는 공정하고 정의롭게 판단을 받도록 하되, 의도하지 않게 큰 사고를 낸 스리랑카 청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와서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들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배제되거나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고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낙엽이 발에 밟히고 찬바람이 볼을 스치기 시작하는 계절, 고국에서 들려온 소식을 받고 해 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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