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꼴통 보수라는 별명을 듣고 싶습니다

 

천헌옥 목사 본지에 기고되는 나의주장,은 순수한 기고자의 주장임으로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군가가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도대체 세상은 변해 가는데 왜 기독교는 변하지 않는가? 세상과 보조를 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왜 사회는 진보하고 있는데 교회는 보수를 고집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변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시류를 따라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근본으로 하는 진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진보하지 않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논쟁은 그 역사가 오래 되었습니다. 1770년 경 독일에서 관념론의 대가 헤겔이라는 학자가 탄생합니다. 그 헤겔의 제자 중에 슈트라우스가 있었는데, 그가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펴냅니다. 그 책에서 그는 복음서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초자연적 해석이나 자연주의적, 합리주의적 해석 등을 배척하고 신화적으로 정리하여 복음서에는 거의 사실성이 없고 신화로 꾸며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범신론적 철학은 헤겔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슈트라우스를 동조하여 바우어, 포이어바흐, 슈트리너 등이 복음서를 비판하다가 기독교 그 자체를 비판하며 나오게 되고 심지어 무신론까지 들먹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마르크스(1818년 출생)에 와서는 유물론의 막시즘이 등장하게 되지요.

이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는 헤겔학파를 두 쪽 내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하나는 슈트라우스를 지지하는 진보파이고 다른 한 쪽은 기존의 신학을 지지하며 기존의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였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처음의 진보는 분명 기독교의 진리를 부인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보수는 기독교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794년 프랑스 시민혁명 당시로 오면서는 정치적으로도 진보와 보수가 나뉘게 되는데,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추구했던 자코뱅 파는 의회의 왼쪽 부분에 앉았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던 지롱드 파는 의회 오른쪽에 앉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좌석의 위치를 가지고 좌파, 우파로 부르다가 이후 진보적인 성향을 '좌파'라고 하고, 보수적인 성향을 '우파'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는 변함없이 오늘의 시대에도 계속하여 이어 흐르고 있습니다. 헤겔의 제자였던 칼 마르크스는 유물론을 주창하면서 사람을 물질로 보고 심지어 영혼이나 하나님마저도 물질로 보려하였기에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의 막시즘이 실패했을 때 추종자들은 네오막시즘을 들고 나왔습니다. 기존 막시즘에 휴머니즘을 덧입혀 나온 것입니다. 소위 인권을 더욱 강조한 것입니다. 15세기 이전까지는 신권이 강조되었다면 이후부터는 인권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그 인권 강조에 끼어든 것이 동성애입니다. 여성 동성애자들은 페미니즘에 합류하여 성매매를 여성의 인권으로 주장하고 나서기도 합니다.

실제로 지난해 말에 한동대학의 들꽃학생모임이라는 단체에서 <주디스 버틀러 읽기>·<페미니즘과 정신분석>·<채식주의자 뱀파이어> 등을 쓴 임옥희 교수 강연과 함께 페미니즘 강연을 열어 문제가 되었는데, 그 강연에서 한 발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창녀라는 불리는 그런 일을 저는 했었는데 지금도 하고 있고 모든 몸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성을 파는 것에 대해서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떨까? 이것이 되게 궁금하고 이것이 되게 이상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임옥희 교수는 이런 답을 합니다. ”이 창녀라는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굉장히 이분적이고 양가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상품으로 팔리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또한 그래야 하고 공정하면서 뭐하는요. 판매하는 자이기도 하다라는 거죠. 그래서 단지 수동적으로 뭐하는 존재가 아니라 팔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주도적으로 자기의, 상품으로써 자기를 뭐 할 수도 있는 사람, 팔수도 있다라는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면 큰 소리를 낼 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똑같이 뭘 판다고 하면, 노동을 판다고 하면 거기에 뭐도 다른 노동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상품화 돼 있는 이 구조에서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성과 관련되어 있는 우리 대부분 여성이 성적으로 대상화 되어 있다는 말에는 너무나 쉽게 수긍하잖아요. 그럴 경우에 대상화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의 성을 자율적으로 뭐 할 수도 있어, 충분히 사고 팔 수 있고 협상할 수 있고 그 관계에서 계약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성노동 개념이라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여자의 생물학적 성별을 부인하고 동성애, 난교를 할 수 있는 날마다 자기 자신이 트랜스 할 수 있는 성적 존재라는 것을 발언합니다. 진보 좌파는 정치적인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여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도덕적 파괴를 진보라고 우기면서 교회를 겁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보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운 기존의 질서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질서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사람의 양심 속에 법을 주셨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법인데 그것이 십계명으로 대변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에 하나님을 지우자 1-4계명까지가 매우 희미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5-10계명까지는 뚜렷하게 살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을 다스립니다. 그 5-10계명이 모든 나라와 사회의 법의 근간이 됩니다. 그것이 기존의 질서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는 율법을 주셔서 희미해진 부분을 되살리셨습니다. 그 율법의 중심에 십계명이 있으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십계명 안에서 자신의 양심을 보호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오막시즘이 휴머니즘을 강조하면서 페미니즘이 합류하여 기회를 얻어 사람을 물질화 하면서 제 7계명을 깨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인 보수가 아닙니다. 물론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겠지만 지금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는 날까지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보수입니다. 보수라도 원조 꼴통 보수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게 불러도 됩니다. 옛날 예수 믿는 사람을 예수쟁이로 불렀습니다. 불신자들이 비하하여 불렀겠지만 좋은 별명입니다. 요즘은 정말 예수쟁이를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쟁이에 더하여 꼴통보수라는 별명을 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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