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에 대한 구약 윤리신학적 단상...풍요의 우상이 낳은 말씀의 파괴

   
▲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한 후 캐나다 Regent College에서 기독교학석사(M.C.S)와 신학석사(Th.M.)을 마쳤다. 영국 University of Oxford에서 John Barton의 지도 하에 "Ethical Commentary on the Story of Fall of Judah"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D.Phil.)취득예정에 있다.
구약 율법 중에는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명확한 명령이 있는 반면, 왜 그 계명을 주셨는지 금방 알기 어려운 말씀도 있다.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찌니라”(출 23:19; 34:26; 신 14:21)는 그런 말씀 중 하나이다. 나는 한국의 광우병 사태를 보면서 이 말씀을 떠올렸다. 

성경 해석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말씀에 관심을 갖고 여러 해석을 내놓았다.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실제로 적용하여 고기와 우유를 같이 먹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구약성경 속에서 세 번이나 반복된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이 말씀에 대한 해석들은 크게 두 흐름으로 정리될 수 있다. 첫 째는, 인도주의적인 입장에 근거한 해석이다. 어미의 젖으로 그 새끼를 삶은 것은 너무나 비인도적인 행위라 하나님께서 금지시키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고대 근동의 문헌에서 이와 매우 유사한 풍습에 대한 기록이 발견된 이후, 이 행위는 풍요를 위한 우상 숭배적 관습이었기에 금지시키셨다는 해석이다.

고고학적 발견 이후에는 두 번째 해석이 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두 번째 해석이 더 근거가 있다는 것 때문에 첫 번째 해석을 완전히 배제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우상 숭배는 경제적 풍요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 단적으로 바알이 농경의 신이었음을 상기하자 - 그러한 우상 숭배는 사람들에게서 무엇이 정상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앗아간다. 그래서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도 있고, ‘돈에 눈이 멀었다’는 표현도 있다.

나는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처치하기 힘든 늙고 병든 소를 갈아 육골분 사료로 만들어 어린 송아지에게 먹이는 모습에서 이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말씀의 두 가지 의미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금전적인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창조 질서를 거역하면서 - 소는 풀을 먹어야 한다 -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 소에게 소를 갈아 먹이는 -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는 모습에서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는 말씀을 풍요를 위한 비인도적인 우상 숭배적 관습을 금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본문의 의도’를 벗어난 과도한 해석일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이 말씀을 포함해서 구약의 많은 율법은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런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파괴된 관계는 심판으로 다가온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단골 심판 메뉴 중 하나는 개역 성경의 표현으로는 ‘온역’, 즉 요즘 말로 하면 ‘전염병’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광우병 공포에 대한 책임이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광념(狂念)에 사로잡혀 정직을 저버리고, 감사를 잃어버린 한국 교회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광장을 메우는 수많은 촛불 속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두렵게 느껴야 한다.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또 이 율법 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신명기 28:58-62)

70년대의 ‘눈부신’ 경제 성장의 그늘에 공장의 침침한 불빛 아래 흘렸던 누이들의 ‘눈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늦게야 알았다. 이제는 내가 누리는 안락함이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싶다. 연휴만 되면 공항이 꽉 차버리는 풍요를 누리면서도, 보다 더 누리기 위해 이웃과 이웃의 자녀들이 또 다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이 아니다.

이미 어린이날에 햄버거를 먹는 다섯 살 어린이의 행복은 사라져 버렸다. 이대로 있다가 몇 년 후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눈물을 흘린다면 그 땐 너무 늦었다. 우리가 이웃의 흘릴 눈물을 보면서도 더 많은 떡을 먹는다면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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