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문제, 정확한 정보에 근거하여 온정주의와 혐오주의 모두 극복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나서야

1.시작하는 글

이병수 (고신대 국제문화선교학과 재직 & 국제다문화 사회연구소장)

‘난민 인정 0명, 인도적 체류 허가 339명.’ 제주에서 집단 난민 신청을 한 예멘인 458명에 대한 법무부 심사 결과가 지난 10월 17일 발표됐다. 인도적 체류자는 취업 활동과 제주도 밖에서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지만, 난민처럼 가족을 한국에 데려올 수는 없다. 정부의 결정은 양쪽 모두에서 공격받았다. ‘여론의 눈치를 보며 난민 지위 인정을 망설였다’는 비판과 ‘여론을 무시하고 사실상 전원 인정 결정을 내렸다’는 반발이 동시에 나왔다. 우리는 이 결정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최근 한국을 방문한 전 세계 난민 보호를 총괄하는 유엔난민기구(UNHCR) 필리포 그란디 최고대표의 생각을 들어보자. 지난 10월 23일 이틀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그는 24일 서울 중구 유엔난민기구(UNHCR) 한국대표부 사무실에서 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난민 신청자의 지위를 두고 격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에게 보호가 제공됐다는 사실”이라며 정부의 결정을 긍정 평가했다.

난민이 한국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무엇보다도 이슬람 난민이 문제다. 본 글에서는 난민 문제의 발생원인과 해결책을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 해결책은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년-2017년)의 지적처럼 사회문제에 대한‘구조적’대안책(국가 및 국제정치)과‘개인적’대안책(개인적 구호활동)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전자와 관련하여 보다 더 나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와 세상을 만드는 노력의 관점에서 난민문제가 발생하게 된 정치 구조적 문제의 접근도 필요하다. 후자의 난민에 대한 개인적 자선의 구호적 활동도 매우 중요하지만 난민 발생의 원인인 관련 당사국의 국가와 정부의 실패 및 국제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다루는 접근도 중요하다. 정치구조의 문제는 정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어떤 학자는 개인적 자선과 구조적 접근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자선은 우연히 이루어지지만 정의는 계속 진행된다. 자선은 위로하지만 정의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 자선은 증세를 다루지만 정의는 그 원인을 문제 삼는다. 자선은 개인을 변화시키지만 정의는 사회를 변혁시킨다”. 따라서 본 논문 발표는 난민에 대한 구조적 해결책과 개인적 해결책으로 국가 및 법과 국제정치의 구조적 접근과 난민에 대한 개인적 해결책은 종교의 역할로 교회 및 기독교인의 역할로 접근한다.

 

2. 난민 발생의 원인

이 장에서는 중동, 아프리카 및 유럽의 난민 발생의 원인을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본다. 이 원인들은 한국사회가 유럽 난민사태를 보면서 한국의 난민사태를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좋은 역사적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는데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첫째, 오늘날 난민 발생 원인이 소위 실패한 국가ㅡ즉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권력이 무너진 국가(시리아, 예멘, 레바논, 이라크, 리비아, 소말리아, 콩고, 에리트레아...)에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대부분은 내전으로 치닫게 되고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다. 1990년대 코소보 내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및 크로아티아 내전도 이와 같은 상황가운데 많은 난민을 발생시켰다. 국가와 정부의 실패로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생긴 난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조금 더 이해하는 인도주의적 관점이 필요하다. 한 언론사는 현재 예멘 인구 2800만의 3분의 2는 구호물자에 의존해 살아간다고 보도했다. 사우디는 손쉽게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3년간 이어지고 있고 그러나 이후로도 교착 상태는 3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피해는 그곳에 살고 있는 예멘인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극심한 기근에 역사상 최악의 콜레라까지 겹쳤다. 국제사회의 평화 중재 노력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예멘 정부군과 후티 반군 사이 평화회담은 2016년 이후 공식 중단됐다. 지난달 유엔 중재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약 2년 만에 정부군과 반군의 평화회담이 추진됐지만, 회담 당일 반군 측의 일방적인 불참으로 무산됐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예멘 내전이 이대로 지속될 경우 약 1200만 명이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릴 수 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인도주의 위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 방송사는 예멘 내전으로 40만 명에 이르는 어린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 어린이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예멘에서는 3년 반째 계속되는 내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 받고 있다. 생지옥이다. 예멘 북부의 한 병원에는 뼈가 앙상한 아이가 극심한 배고픔의 고통에 이내 울음을 터뜨린다. 또 다른 아이들은 울 힘도 없는 듯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심한 영양실조인 아이의 부모들도 굶주리긴 마찬가지이다. 주민들은 모두 나뭇잎을 뜯어 만든 먹거리로 끼니를 때우며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있다. "7개월 된 딸은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우유나 음식을 먹지 못했어요. 먹을 게 나뭇잎밖에 없어요." 영양실조 어린이 어머니의 고백이다. 전쟁 이후로 매일 다섯 명꼴로 어린이가 죽거나 다쳤는데, 앞으로 더 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림에 희생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예멘 난민이 처한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제주도 예멘 난민에 대한 국내 반응은 인도주의적 차원이냐 국가 안전의 차원이냐로 여론이 팽팽하다. 하지만 예멘 난민들이 처한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냐는 고통의 차원 즉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시각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서구의 국가 중 특히 미국은 시리아 난민의 경우는 그 나라의 상황이 비상시국이기에 그 곳에서 미국으로 유입된 시리아 난민들은 거의 다 난민으로 바로 인정하는 경우이다. 둘째, 유럽의 난민문제는 역사적으로 거슬러 가서 볼 때 유럽이 저질렀던 식민지 정책과 양차대전의 결과 가운데 생긴 부산물의 결과다. 오늘날 중동 및 아프리카에서 발생하는 난민은 유럽의 원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특히 이 입장은 동유럽 슬로베니아 출신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책 「새로운 계급투쟁」에서 잘 언급되고 있다. 그는 유럽의 최대위기로 평가되는 난민문제에 얽힌 모든 층위의 논의를 구체적이고 과감하게 시도하면서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을 연구한다. 이 모든 유럽의 난민문제는 유럽의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셋째, 이런 유럽의 난민문제를 해결하는 접근에서 유럽 및 국제정치의 부재도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의 대표적 학자는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랭 바디우이다. 그에 의하면 오늘 유럽에서 발생한 난민의 문제는 각국의 “정치의 부재”와 유럽을 포함한 “세계적 차원의 정치의 부재”이다. 난민에 대처하는 국제정치의 부재는 유럽이 정치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뉘어져 있고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럽은 사실 각자도생의 국수주의 및 민족주의적 흐름 가운데 진행되기 때문에 난민 문제에 대한 조직적 연합적 접근이 되지 못하는 것도 난민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넷째, 난민문제에서 유럽이 지나치게 경제적 및 자국의 안전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것은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Die Austreibung Des Andern)」에서 잘 나타나 있다.“오늘날의 난민의 위기는 유럽연합이 이기적 목적을 좇는 경제적 상업 연합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한다.”마지막으로 난민문제의 접근에서 실패의 이유 중의 하나는 서구 철학의 다문화주의의 피상성에서도 기인한다. 톨레랑스 및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유럽의 다문화주의 철학이 경제적 이해관계와 자국의 안전문제에 직면할 때 그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수사’에 불과한 것인가를 쉽게 드러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표자가 최근 만난 유럽의 학자 중의 한 사람은 유럽 사람이 관용과 톨레랑스를 가장 많이 언급하고 외치지만 그들이 가장 관용적이지 않다는 고백을 한 것을 들었던 적이 있다. 무엇보다도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혁명의 정신에서 태동한 유럽이 유럽에 일하러 온 중동 및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노동자들에 대한 인종차별 및 혐오로 상처받은 난민 및 이주민들이 2015년 파리 테러의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난민문제를 유럽의 정치 구조적 관점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여러 유럽의 학자들 가운데서 나타난다. 그 중의 한사람이 지젝인데 그는 유럽사회가 “난민문제를 범유럽적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일관된 계획을 찾아볼 수 없다”(p.8)고 지적하면서 현재의 난민상황에 비추어볼 때 그 목표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곤경에 처한 난민이 더는 고향 땅을 버리지 않도록 전세계적으로 사회의 기초를 재건하는 일이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한다(p.16). 하지만 유럽적 차원에서 연대를 통해 유럽의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데 연대가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문제는 유럽이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이런 난민문제를 한국사회와 우리교회와 기독교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3. 한국의 예멘 난민 문제

지난 9월 14일 제주 예멘 난민 신청자 23명이‘인도적 체류’허가를 법무부로부터 받았다. 이번 법무부의 결정에 대해 난민 찬ㆍ반 단체의 입장은 상당히 달랐다. 난민네트워크ㆍ예멘인 난민 인권을 위한 제주도 범도민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통해 “인도적 체류 허가는 강제송환 되어서 안 되는 예멘 난민들에게 부여해야 하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이지 최선의 결과는 아니다”라며“앞으로 정부는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예멘 난민들이 정착이 가능하도록 정착지원에 대한 제도를 개선하라”고 촉구했다. 반면 제주도 난민대책 국민행동은 “법무부의 난민 불인정은 예멘인들이 가짜 난민으로 밝혀진 것으로, 정부는 예멘 가짜 난민들을 즉시 송환해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며“가짜 난민들이 한국으로 오게 하는 주범인 난민법과 무사증 제도를 즉각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예멘 난민 문제가 한국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난민문제를 여러 방송 및 언론사도 심도 있게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예멘 난민수용문제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응은 찬반 양쪽 팽팽하다고 할 수 있다. 국가가 난민에 대해 국민안전을 염려하는 가운데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입장과 난민문제에 대해 힘들고 어렵지만 인도주의적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필자가 최근 유럽을 방문한 가운데 유럽 내 난민수용에 대해 찬반입장이 동일하게 비등한 것을 보았다.

발표자가 제주도 예멘 난민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살펴볼 때 일반 언론 및 방송은 온정주의적·비현실적·무분별한 난민수용이 가지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난민수용이 국제인권과 그들이 처해져 있는 상황을 고려해서 수용적 및 긍정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 대체적 분위기이다. 예멘 난민들에 대한 가짜 정보로 난민들을 오도하게 하는 사실들을 잘 분별하게 하고 난민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노력들을 여러 언론사에서 감지할 수 있다. 특히 한겨례, 경향신문, 한국일보 및 세계일보는 난민 수용에 대해 적극적이고 난민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매우 옹호하고 변호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멘난민 문제를 가장 먼저 심도 있게 다룬 방송사는 8월 14일자 SBS이고 그 방송사는‘마부작침 시리즈’로 탁월하게 다루었다. 이것에 이어 연합신문 및 방송도 대체로 그런 호의적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있다. 조선일보는 난민문제 수용이 가져 올 문제점을 현실적으로 잘 지적하지만 한국의 난민 수용율이 국제적 수준에서 많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최근 난민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룬 언론사는 중앙일보인데 기획시리즈로 난민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고 난민문제를 다룬 후에 난민문제가 혐오와 어떻게 관련되는 것인가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 기획시리즈에서 난민문제의 부정적 반응이 난민이 우리사회에 안전을 해치고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단순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혐오 그 중 여성혐오, 인종차별의 혐오, 난민 혐오, 무슬림 포비아 등의 혐오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 인터넷 댓글 두 개가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난민을 싫어 한다기 보다, 무슬림을 싫어하는거지. 그들의 뻔뻔함과 잔인함에 세계가 질려 버린거지”.“예멘난민 받는 순간 대한민국 헬 되는 건 순식간이다. 지금 예멘 새X들 쫓아냈으면 소원이 없겠다.”

따라서 이제 유럽이 직면했던 난민문제가 한국사회에도 매우 민감하게 진행되고 있어 한국사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있지만 핵심은 ‘난민, 인도적 수용이냐, 자국민 보호냐’에 있다. 상기 두 가지 입장에 대해 양자택일이냐 아니면 양쪽을 다 고려하면서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이다. 이와 관련된 기사 중의 하나가 한국일보 6월 14일 사설이다. 사설 제목은 “제주 예멘인 난민 문제, 법 준수하되 인도적 관점 견지해야”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제주에 비자 없이 입국해 30일 동안 머물 수 있는 무사증 제도를 이용, 예멘인들이 제주로 급격히 몰려들어 논란이다. 올해 들어 지난 6월 15일까지 입국한 예멘인은 지난해 전체보다 13배나 늘어난 561명이고, 이 중 549명이 난민 신청을 했다고 한다. 대부분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말레이시아에 머물다 체류 연장이 안 되자 지난해 말 저가항공 직항 노선이 생긴 제주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의 예멘은 2015년부터 내전으로 대량 난민이 발생해 유엔도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는 나라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예멘인들의 입국을 막거나 추방하라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돈 벌러 온 ‘가짜 난민’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테러리스트’들이라는 혐오 발언도 한둘이 아니다. 난민 신청을 받아주면 주민 안전을 해칠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한 청원이 엄청나다.

난민의 해외 이주는 당사자들에게는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문제다. 지중해 아프리카 난민 난파 사례에서 보듯 불법이라는 이유로 발조차 디디지 못하게 하는 최근의 이탈리아 조치는 그들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할 수 있다. 유엔난민기구가 6월 20일을 ‘세계 난민의 날’로 정한 것도 이런 현실을 직시해 난민에게 적극적으로 온정의 손길을 내밀자는 취지에서다.

법무부가 난민법에 의거한 심사를 서두르고 그 기간에 일자리 소개 등의 인도적 대책을 강구ㆍ추진한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세계 난민인정비율이 37%(2016년)일 때 한국은 고작 2%에 불과할 정도로 그 동안 국내 난민 정책은 방어적이었다. 예멘인 사태를 난민 정책 전반을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위의 사설에 기초해서 발표자는 법을 준수하되 인도주의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대한민국의 난민인정율의 통계에 기초한 것이다. 최근 법무부에 따르면 1992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 가입한 후 올해 6월까지 총 4만2009명이 난민 신청을 했고, 이중 4%인 849명만 난민 인정을 받았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한국의 난민 인정률(2000~2017년)을 그보다 낮은 3.5%로 추산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4.8%)을 크게 밑도는 수치로 37개 회원국 중 35위다.

 

4. 난민의 정의 및 난민법

UN은 인종, 종교, 민족, 신분, 정치적 의견 등 다섯 가지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사람을 난민으로 규정한다. 난민법에서 정의한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는 외국인"이다.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이란 주로 사회적 소수자를 가리킨다. 물론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라는 조건이 달려있다. 한국은 1992년 난민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보장하는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에 가입했고 독자적으로 2013년 난민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난민을 보는 여론은 차갑다. 심지어 난민법 폐지와 난민협약 탈퇴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에는 청원 마감일(7월) 기준 역대 최다인 71만 명이 서명했다. 법무부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답변을 내놨다. 특히 난민법 폐지와 난민협약 탈퇴 요구는 지극히 정상적이지 않다.

 

5. 난민 숫자와 발생원인

유엔난민기구(UNHCR)는 지난해 말 기준 전 세계 난민 누적 인원이 6850만 명이라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세계 난민의 날인 6월 20일을 하루 앞둔 19일 발표했다. 2차 세계대전 때의 난민 수 5,000만 명을 크게 웃돈다. 이 가운데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남수단과 소말리아 등 중동·아프리카 나라들에서 전체 난민의 3분의 2가 발생한다.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아랍의 봄' 혁명 이래 난민 수는 6년 연속 증가해 왔다. 현재 시리아 난민의 숫자가 국내난민과 해외난민을 합쳐 1100만 명, 미얀마에서 탈출한 로힝야 족 난민 100만 명, 남수단 난민이 약 100만 명, 최근에는 베네수엘라가 경제 파탄으로 난민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난민의 시한폭탄으로 드러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의 자료에 의하면 “올해 들어 54만 7천명의 베네수엘라 인들이 콜롬비아 국경을 지나 에콰도르에 들어왔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도 수많은 난민이 나타나고 있다. 남수단과 북수단의 내전으로 발생한 100만명의 난민 과 “짐바브웨에서 남아공으로 넘어온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이유로 현지빈민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슬라보예 지젝, 새로운 계급투쟁, 108).

난민은 동유럽의 1990년대 유고연방 해체이후 인종적·종교적 분쟁으로 코소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1998년의 코소보 내전에서 약 4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크림반도를 중심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으로 말미암아 2014년 이후 난민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실천적 사회학자로 아프리카 연구자인 장 지글러는 그의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는가?」에서 아프리카가 사막화로 인해 “수백만의 ‘환경난민’이” 발생할 것을 예상했고 한 언론자료는 그 숫자를 ‘천만’으로 보기도 했다. 세계일보는 “기후변화로 20년 내 아프리카 거주민 1000만 여 명이 유럽 향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향후 수십 년 안에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시리아 내전을 뛰어넘는 수준의 대규모 난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나왔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환경정의연대(EJF)는 미국 국방부 고위관료, 안보 전문가들의 분석을 인용해 기후변화로 생겨난 난민이 시리아 사태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유럽을 곤경에 빠뜨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시리아 사태는 2011년 아랍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현재까지 지속돼 온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와 반군 간의 내전을 말하며, 7년여 동안의 내전으로 시리아 국민 530만 여명이 난민이 됐다. 스티픈 체니 전직 미국 장성은 “유럽이 지금 이주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20년만 기다려봐라”며 “기후변화에 직격탄을 맞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 거주민 1000만~2000만여 명이 지중해를 건널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아울러 기후변화가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으며 시리아 내전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지적했다. 시리아 사태가 촉발되기 전인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시리아 역사상 유례없는 가뭄이 들이닥쳐 150만 여명이 도시로 이동하는 등 내전이 촉발할 만한 여건이 갖춰졌다는 것이다. 시티브 트렌트 EJF 대표는 “기후변화는 사회, 정치적 긴장 관계가 수면 아래 숨어 있는 어떤 사회에 폭력과 내전이라는 재앙적인 결과를 촉발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며 “기후변화가 빠른 속도로 영향을 미치는 만큼 정책을 세우는 국가 지도자나 경영자 등이 심각하게 이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이와 함께 중동, 아프리카 뿐 아니라 미 루이지애나 등에 천문한적인 피해를 가져온 허리케인과 같은 사례처럼 선진국 역시 기후변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 난민 발생국에선 독재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정파 간·종파 간 내전이 지속되거나, IS(이슬람국가)와 같은 극단주의·폭력 조직이 득세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난민은 이런 일시적 정치 요인보다는 각국 국가 기능의 실패로 인한 만성적 사회 혼란과 구조적 경제난으로 발생하는 양상이다.” 특히 중동·아프리카·남미 정부의 실패가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난민으로 위장해 잠입하거나, 남미의 마약 조직이 가족으로 위장해 도피하는 경우를 우려한다. 일부 난민이 테러나 폭력 사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중동 등에선 내전 초기에 민주화 지도자나 서방 선진국에 연고가 있는 엘리트 계층이 망명을 나왔다. 현재는 서민들이 가족 단위로 도망쳐 나오는 형국이다. 시리아에선 주로 가장들이 먼저 유럽에서 일자리를 구해 정착한 뒤, 처자식을 데려오는 연쇄이민이 많이 시도되고 있다.

 

6. 난민에 대한 유럽의 최근 경향

유럽도 얼마 전에 난민과 이주민에 대해 매우 수용적이었지만 최근 유럽의 경제상황과 안전의 문제로 난민에 대해 부정적 반응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런 부정적 반응에 편승해서 “유럽에서 전성기를 맞고 있는 대부분의 극우 정당들은 반이민, 반난민 정책에 기반을 두고 있다. 헝가리는 난민유입을 막기 위해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고 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반이민 정책을 표방하는 자유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필자가 금년에 8월에 방문한 헝가리 현 대통령이 난민유입을 반대하고 국내 문제에 집중함으로 국민들로부터 좋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 “미국 연방대법원은 6개 이슬람 국가와의 왕래를 금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적법하다는 평결을 내렸다. 전 세계가 자국 내 통합을 해칠 수 있는 타인을 봉쇄하는데 혈안이 된 듯하다.” 최근 조선일보 자료에 의하면 “이탈리아령 최남단 시칠리아 해협에 위치한 람페두사섬. 인구 6000명 작은 섬이 5~6년 전부터 글로벌 구호단체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110㎞ 떨어져, 쪽배에 의지한 중동·아프리카 출신 난민들이 몰려드는 '유럽의 첫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섬엔 난민 40여 만 명이 밀려왔다. 도중에 익사한 시신이 수 십 구씩 떠밀려오곤 한다. 이곳 주민들은 난민 임산부와 어린이들을 보살피고 있다.

'인도적 풍경'은 여기까지다. 올해 이탈리아 연립정권을 구성한 극우 포퓰리즘 정당 '동맹'은 강력한 반(反)이민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간 60만 명 넘는 난민이 들어온 이탈리아는 최근 600여 명이 탄 난민 구조선 아쿠아리우스호가 몰타 및 이탈리라 시칠리아 섬 입항을 막아섰다. 이탈리아의 20%대 실업률과 경제난의 주원인으로 난민이 지목되면서다.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유럽국들이 '난민 수용의 1차 책임은 난민이 도착하는 나라에 있다'는 유럽연합(EU) '더블린 조약'만 내세우자, 분노한 이탈리아는 EU 탈퇴까지 거론하고 있다.

이것이 전 세계의 난민에 대한 현재적 분위기이다. 무엇보다도 난민에 대한 전 세계적 대응이 이처럼 변화한 데에는 난민유입에 따른 일자리 부족, 잠재적 테러 가능성, 히잡이나 부르카 혹은 메카를 향하여 남성들이 집단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으로 상징되는 문화적 이질성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난민의 문제가 유럽의 지형을 새롭게 만드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스티븐 카슬이 그의 책 「이주의 시대」에서 강조한 “이주의 정치화”가 그대로 드러난 사건인 것이다.

이주의 시대에서 유럽 국가들은 당초 중동 혁명으로 인한 '정치 난민'에 온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옛 식민지의 주민인 중동,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정서적 책임감도 있었다. 난민은 요양사, 건설노동자 등 유럽 사람들이 기피하는 업종의 인력 부족 해결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2015년 시리아 난민이 폭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내전 초기 시리아 인들은 어떻게든 국내에 머물렀지만 이때부터 필사적으로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생계형 난민의 쓰나미'가 시작된 것이다. 2016년 쾰른에서 일어난 난민들의 독일 여성 집단 성폭행, 2017년 18세 소녀 토막 살해 같은 사건이 반 난민 여론에 불을 질렀다. 게다가 이슬람 문화는 여전히 유럽 사회에서 이질적이고 위협적이었다. 유럽은 국가 안보와 정체성 위기라는 현실에 맞닥뜨렸다.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결정엔 독일의 '난민 분산 수용안'에 대한 반발감이 크게 작용했다.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체코 등 유럽 전역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에 대한 지지율은 2000년 평균 8.5%에서 지난해 24.1%로 늘었다. 미국에서도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불법이민자 추방'을 공약하며 당선됐다. 이런 최근의 전 세계적 난민에 대한 부정적 상황이 한국의 예멘난민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도 영향을 많이 미쳤던 것이다.

 

7. 대한민국의 난민 인정율

어느 자료에 의하면 대한민국이 난민협정에 가입하여 시작된 1994년-2017년 23년간 32,700명이 난민 신청하여 792명 인정을 받았고 약 4.1% 인정 율이다. 반면 세계평균난민 인정율은 29.9%로 국제적 수준과 비교할 때 대한민국의 난민 인정 율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특히 기독교인 난민 전문가 이일 변호사에 의하면 전 세계 난민 수용 국 190개 국가 중에 대한민국이 130위라고 한다. 여타 나라들을 상황을 보면 터키 난민 인정 율 88% 미국 44% 독일 31% 호주 29%에 해당 한다. 이는 한국의 난민 인정 율은 국제적 수준에 비교한다면 민망할 수준이다. 혹자는 일본의 난민 인정 율을 0.1%의 예를 들면서 그들과 비교하면 한국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이 국제수준의 선진국과 인권국가가 되려고 한다면 그런 비교자체가 정상적이지 않다.

최근 모 국회의원은 “유럽에서 안고 있는 골칫거리를 우리가 왜 떠맡아야 하는가?”라고 한국의 난민정책에 대해 매우 비판적 발언을 했다. 혹자는 유럽의 난민정책의 실패를 지적하면서 그것을‘자살골’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와 맞물려 최근 연합뉴스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난민을 반대하는 이유들은 첫 번째로, 범죄 피해에 대한 두려움 44%, 둘째, 종교와 문화적 갈등 21.9%, 셋째, 일자리 감소 15.6%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요인들과 함께 난민을 반대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가짜난민들이 많다는 것이다. 한겨례는 8월 6일 한 전문가와 인터뷰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외국인이 국내로 유입되면 사회갈등이 유발되고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공포는 현실적인 공포라기보다는 ‘상상의 공포’에 기반한 것”이라며 “정부는 난민 반대 여론에 편승할 게 아니라 불안감을 잠재울 ‘시스템’ 조성에 앞장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견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 감소에 대해 우려하는 부분은 사실이지 않다. 이유는 제주도 예멘 난민이 일하러 가는 곳은 한국 젊은이들이 가기 쉽지 않은 배와 관련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았다. 필자가 이주민 근로자와 관련된 노동현장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농어촌과 건설현장에 외국인 근로자가 없으면 거의 마비가 되는 상황이다. 국내 건설 현장에서 “외국인 없이는 공사 진행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고 최근 조선일보는 보도한다. 그 언론은 건설현장에 얼마나 외국인 근로자가 많이 일하는 상황인지 서울 강북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리석과 벽돌을 나르는 근로자들의 안전모에는 중국·베트남·러시아 국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 현장의 근로자 250명 중 약 200명이 외국인인데,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스티커로 표시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김해지역과 주변의 진영과 함안 등지는 외국인 근로자가 없으면 중소기업 공장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3D 직종에는 외국인 근로자가 없으면 거의 폐업직전인데 그들이 무슨 한국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것인지 필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마찬 가지로 제주도 예멘 난민들이 한국어도 잘 모르고 문화도 모르는 상황에서 고숙련의 일도 할 수 없다. 그들 대부분이 거의 3D 직종의 일을 하는데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것은 정직하지도 않고 사실 ‘상상의 공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난민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혹은 ‘테러리스트’로 보는데 그것도 사실이지 않다. 이유는 난민들은 국내에 머물면서 합법적인 난민으로 인정받지 않은 가운데 만약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바로 강제 추방된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난민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무모하게 범죄를 쉽게 저지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한국의 난민심사 엄격하기 때문에 IS와 같은 테러리스트가 쉽게 들어오기 힘들다. 이 내용은 한국일보가 법무법인)어필에서 일하는 이일변호사와의 인터뷰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일보 기자는 앞에서 제기된 몇 가지 우려들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러면 이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는 것일까. 우려와는 반대로 이들은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서 저숙련 노동력 부족 문제를 메워주고 있다. 그러면 이들이 안보에 위협 요인이 될까.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외국인 유입이 테러 경로가 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들의 범죄율은 또 어떨까.‘외국인은 범죄자’라는 편견이 여전하지만 국내에서 외국인 범죄율은 내국인 범죄율에 휠씬 못 미친다.

전 세계적으로 난민문제를 ‘안보 위기’로 보는 여론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우려가 사실인가 혹 과장인가. 난민 전문가의 대답에 의하면 “그렇다. 과장돼있다. 난민이 사회에 불안정을 가져온다는 예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만약 100만 명, 200만 명의 난민신청자가 대규모로 유입됐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선진국은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런 우려는 특정 정치인과 단체들에 의해 과장된 경향이 있다. 난민은 위협이 아니다. 위협으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이고,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모든 난민들이 선량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위협을 가할 수도, 절도를 할 수도 있다. 이건 법규에 의해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예외적이다. 난민이 다른 사람보다 범죄자일 확률이 높다는 증거는 없다. 모두 다 같은 사람이다” 

 

8. 난민정책

따라서 바람직한 난민 정책의 방향으로는 “엄격한 심사를 통해 최소한의 난민만을 수용해야 한다”(70.8%)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이어 ‘난민을 모두 강제 출국시켜야 한다’가 17.8%였고 ‘인도주의 차원에서 가능한 한 많은 난민 수용’은 9.9%에 머물렀다. 난민인식의 긍정적 반응에 남성은 56.1 여성은 45.5, 부정적 반응은 남성은 38.9 여성은 50.4였다. 무슬림계 여부에 따른 난민 인식은 우호적은 28.7% 적대적은 66.6% 비무슬림계는 우호적은 53.2% 적대적은 42.0%로 나타났다. 이 통계들은 난민에 대한 선호도와 함께 무슬림계에 대한 부분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난민에 대해 여성들의 적대감이 남성보다 높은 이유에 대해 김대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예멘 난민이 대부분 건장한 남성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 김 연구위원은 20~30대가 반 난민 적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자신들도 취업하기 어려운데 난민이 국가의 혜택을 받게 된다는 막연한 반감이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난민 수용 여부에 대한 여론은 응답자의 70.2% 엄격한 심사과정을 통한 적극적 난민 수용, 16.9% 수용불가와 10.7% 인도적 차원에서 적극적 난민 수용을 지지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런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난민심사 과정의 보완을 제시했고 그중의 문제점은 난민신청숫자에 비해서 심사위원의 절대적 부족, 난민 당사자의 언어와 관련된 통역의 문제점과 때로는 불리한 진실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무엇보다도 정확성과 함께 신속성을 강조했다. 이런 여론의 반응과 결과에 대해서 한국사회와 교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9. 한국사회와 교회의 역할

많은 난민 전문가들은 한국은 지금 사회 전체적으로 난민 이슈를 고민할 초기 단계에 진입해 있다고 본다. 일단 법무부의 발 빠른 대응으로 제주 난민에 대한 사회적 불안은 진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조치와는 별개로 정당과 정치인들 무엇보다도 시민사회 및 종교단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필자는 난민문제에 대한 접근은 이중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국가적 차원과 시민 사회적 및 종교적 차원이다. 국가가 할 수 있는 영역과 시민사회 및 종교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상호보완적 접근으로 한국에 거주하는 난민 및 제주도 예멘 난민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번 제주도 예멘 난민 경우도 예멘 난민들을 법적 차원에서 정부와 해당부서가 대응하지만 난민들에 대해 시민단체와 종교계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예를 들면 제주 이주민 연대와 제주지역의 천주교에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시민사회와 종교계가 법적 부분은 해당 부서와 정부에게 맡기고 그 외 제한된 범위 내에서 시민사회와 종교단체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9.1. 교회의 난민 돕기: 봉사-디아코니아 사역

교회의 네 가지 핵심 역할은 예배, 교제, 봉사 및 증거이다. 그 가운데 난민문제와 관련하여 봉사 및 긍휼사역이 매우 중요하다. 신명기 10장 18-19절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옷과 떡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14장 28-29절에 매 삼년 마다 거두는 십일조를 레위인, 고아,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저축하고 그들에게 먹고 배부르게 하라는 말씀은 어떤 점에서 교회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의 및 봉사사역이다. 오늘날 양극화와 가난의 문제에서 생기는 복지문제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이 교회의 봉사사역이고 그것이 매우 필요한 계층이 나그네와 난민에 해당한다. 이 봉사사역이 교회의 본질적 모습이다. 교회의 봉사사역의 관점에서 제주도에 있는 천주교회와 개신교회가 예멘 난민을 돕는데 앞장서야 한다. 제주도 예멘 난민들의 언론 인터뷰에 의하면 특히 카톨릭의 신부와 수녀들이 앞장서서 도와주고 있다. 개신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지만 현재보다 예멘 난민들에 대한 관심이 더 필요하다. 이유는 국내에 개신교 숫자가 천주교 숫자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난민들을 도와주는 이유는 그들이 법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그것은 법적의 순서와 절차를 존중히 여기는 범위 내에서 시민사회와 종교단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특히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구약성경 특히 신명기에서 끊임없이 언급하고 있다.

지난 달 필자는 미국한인교회를 목회한 황은선 목사를 그의 교회 창원세광교회에서 만났다. 필자는 황은선 목사와 대화중 오래전 미국의 시애틀의 워스통의 트리시티에 있는 교회들이 베트남 난민들을 그 지역의 교회가 책임지고 맡아서 돌보고 섬기고자 할 때 정부에서 그 난민들을 그 교회들에게 맡겼다는 사례를 듣게 되었다. 그 지역의 교회들이 그 베트남 난민들을 섬겼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미네아폴리스, 콜럼버스(오하이오주), 시애틀 같은 몇몇 도시들이 소말리아 난민을 위한 허브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2012년 펜실베니아 메노나이트 교회가 소말리아 난민을 영접해서 섬겼다고 한다. 소말리아는 오랜 기간 내전으로 많은 난민이 발생했고 그곳에서 1967년 의료선교사로 봉사했던 메노나이트 의사가 그 당시 그곳에 사역하면서 출생을 도와주었던 남성이 세월이 지나서 2012년 난민으로 위험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난민 가족을 돕기 위해서 그 의사가 출석하던 스프링 필드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케냐에 피해있는 그 난민을 주도적으로 돕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교회에서 그 난민 가족을 돕기 위해 집을 구해주고 자녀들을 위해 학교문제를 처리해 주고, 정착비용을 마련해주고 1년간 가족의 월세를 부담해주고, 살림살이가 필요할 때마다 교인들이 신속하게 처리해주고 심지어 소형차를 기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환영 팀의 한 멤버는 그 “가족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봐 우리는 24시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좋은 사례가 있게 되자 그 지역 근처에 있는 오크 크리크 메노나이트 교회가 시리아 사태로 교회는 2015년 시리아 난민 가족을 돕는데 참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소말리아 난민 가족이 연결되었다. 그러자 그 교회는 “하나님이 이 가정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라고 받아들였고 교회는 의료, 재정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경험을 갖춘 8-10명의 교인으로 이뤄진 환영 팀을 구성했다. 환영 팀의 한 회원은 심지어 “우리 가운데 해외 사역으로 부름을 받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것이야 말로 고국에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리는 길입니다”. 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 소말리아 난민들을 돕는데 교회가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9.2.개인의 난민 사역

이런 상황 가운데 모범적으로 제주도 예멘 난민들을 돕고 있는 인터서브 한국 대표로 일했고 예멘에서 오랫동안 의료인으로 일했던 박준범 의사, 오랫동안 난민들을 도왔던 사단법인) 피난처의 이호택 대표, 난민들을 위한 법무법인 어필의 변호사이며 난민들을 돕기 위한 단체인 난민지원네트워크 의장 이일 변호사 등이다. 2017년 KOICA로부터 해외 봉사 상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던 이대영 글로벌 케어 레바논지부장은 NGO소속이지만 의료인이다. 그는 4년 넘게 레바논에서 시리아 난민들을 대상으로 이동 진료 등 긴급 구호 활동에 헌신해서 올해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최고 영예인 대통령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정부 무상원조 전담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ㆍ코이카)은 제12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수상자로 이씨를 선정했다. 코이카에 따르면 현재 국제 의료구호 단체인 글로벌케어 레바논지부장이자 외과 전문의인 이씨는 2013년부터 레바논의 시리아 난민 거주 지역에서 이동 진료소를 운영하며 1만5,000여명의 난민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또 주 1회 응급 처치, 위생ㆍ전염병 교육, 산전 후 관리 등 보건 교육도 실시했다. 1988년 몽골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시작한 그는 2005~2011년 예멘에서 외교부 산하 비정부기구(NGO) 국제의료협력단(PMC) 요원으로 활동하며 간호사인 아내와 함께 현지 의료 환경 개선과 의료 인력 양성에 기여하기도 했다.

 

(사)지구촌 구호 개발연대

지금 방글라데시 꾸투풀랑에서 100만 명 로힝야 족 난민을 돕고 있는 대표적인 단체로서 사단법인)지구촌 구호 개발연대이다. 최근 이일을 돕기 위해서 필자를 포함한 32명의 의료팀이 로힝야 족 난민촌을 방문했고 그곳에 세브란스 병원과 길병원에서 후원했던 10억 원 상당의 의약품 중 6억 원 상당의 의약품을 전달했다. 9월 추석 기간 동안에 서울대 치과 의사들이 방문했고 최근 부산중앙교회는 그들의 정기적 후원금을 모아서 로힝야족 난민들 돕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제 앞으로 예멘 난민들의 ‘인도적 체류’의 숫자가 증가하게 된다면 정부가 혼자 다 할 수 없는 영역을 한국사회와 종교단체가 책임지는 모범적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와 종교단체가 앞장서서 난민들을 돕고자 한다면 법무부에서 난민수용에 대해서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 난민 수용율이 조금 높아지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여론이 난민수용에 대해서 우호적이거나 또한 난민들을 돕는 가시적 노력들이 시민사회 및 종교계에서 일어날 때 담당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난민 수용을 탄력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필자가 지난해 부산에서 국제다문화 사회연구소가 처음으로 개최한 난민포럼진행 과정에서 부산출입국관리 사무소장을 통해서 듣게 된 내용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협치다. 정부와 시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노력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 상주하고 있는 난민들을 종교단체가 앞장서서 한다면 한국사회에 미치는 신선한 영향은 엄청나리라 확신한다. 종교단체의 봉사 사역이 오늘날 소득의 양극화 가운데 생겨나는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교회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봉사 및 구호사역이다. 인도적 체류자들이 수도권에 가기를 원한다면 수도권에 가도록 하되 그들이 부울경 지역에 정착하려고 한다면 부울경 지역의 종교단체, 시민단체 및 대학 및 병원이 그들을 책임지고 앞장서는 모습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발표자는 지난 7-8월 여름 동유럽의 분쟁지역을 포함한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다. 특히 세르비아에서 약 500명이 넘는 중동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타 및 소말리아와 파키스탄의 난민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미국의 기독교 단체들이 난민 사역에 매우 적극적으로 신속하게 사역하는 모습을 보았다. 동유럽 방문 중 체코의 프라하의 지역교회가 중동의 난민을 각 교회별로 난민 할당제를 맡아서 그들을 보살피기도 했다는 소식을 체코 현지교회를 통해서 들었다. 알바니아를 방문해서 들은 보고에 의하면 1998년 코소보 난민 발생 때 알바니아에 있는 알바니아 현지교회 그리고 알바니아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국제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그들을 도왔다는 소식도 알바니아 선교사로 일하는 합동교단 이용범선교사로부터 들었다. 특히 코소보 난민은 알바니아계가 많았고 그래서 알바니아로 피난 온 사람들이 대부분 알바니아계 코소보 사람이라서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필자가 방문한 몬테네그로 경우도 코소보 난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10. 예멘 난민 사례

 

난민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민감하고 대응하는 국내 언론사는 한겨레, 경향신문, 한국일보 및 세계일보 이다. 필자는 최근 한겨례 기자가 취재한 기사를 언급한다.

 

한겨례 기자는 6월 26일 제주의 한 성당 근처에서 <한겨레>와 만난 예멘인 이브라힘(가명·34)이 자신의 탈출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10.1. 예멘의 난민일기

아직도 생생하다. 2018년 5월15일 아침.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제주를 향하던 에어아시아 비행기에는 30명의 예멘인이 타고 있었다. 예멘인 승객 중에는 나와 아내 라일라(가명·34) 그리고 한살배기 내 아들 하산(가명)도 있었다. 비행기가 제주도에 닿는 순간, 안전하고 자유로운 땅에 왔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얼굴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같은 비행기를 탄 예멘인들의 얼굴에 모두 나처럼 미소가 가득했다.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비행기 안 예멘인 30명이 느낀 안도감이 딱 그랬다. 우리에게 제주는 낯선 희망의 땅이었다.

 

나는 예멘에서의 삶을 사랑했다. 적어도 전쟁 전까지는 그랬다. 예멘의 수도 사나에 있는 대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한 나는 ‘예멘 에어라인’에 취직해 터키, 방글라데시 등 26개국을 다녔다. 하지만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2014년 9월 후티 반군이 수도 사나를 점령한 뒤부터는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갔다. 2015년 3월이 되자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국가들이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사나의 하늘 위에서 전투기가 폭탄을 쏟아낸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아내 라일라와 결혼한지 2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이후 예멘에서의 삶은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을 다녔던 기억뿐이다. 수도 사나에서 타이즈로, 타이즈에서 호데이다로, 호데이다에서 아덴으로, 그리고 또다시 사나로. 우리 가족의 삶은 쏟아지는 폭탄을 피하기 위한 피난의 연속이었다. 아이와 노인들은 집 안에 있다 폭격으로, 이웃들은 콜레라 등 질병으로 죽어나갔다. 사나 공항에서 일할 때 아랍 연합군의 공습을 눈앞에서 목격한 나는 지금까지도 비행기 소리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낀다. 내가 사랑하던 예멘에서의 삶은 그렇게 파괴되었다.

 

2015년 8월, 나는 인접국인 오만을 거쳐 말레이시아에 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먼저 말레이시아에 도착해 돈을 번 후, 적당한 때를 살펴 아내를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다행히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뤄졌다. 나는 오만을 거쳐 그해 9월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다. 말레이시아에 머문 지 1년이 되어가던 2016년 7월, 아내는 라마단(무슬림의 금식월) 기간 중 잠시 포성이 멎은 틈을 타 예멘을 탈출했다. 예멘을 떠날 때, 나는 도로변에서 폭격으로 몰살당한 사람들의 시체를 보았다. 탈출 중 생존은 순전히 확률의 문제였다. 우리 부부는 운이 좋았다.

 

말레이시아는 예멘보다 안전했다. 유엔난민기구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을 벌 수 없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자국으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의 취업을 금지했다. 하지만 나는 밥을 먹어야했고, 잘 곳이 필요했고, 예멘에 남은 가족들에게 보낼 돈이 필요했다. 결국 불법적인 경로로 식당에 취업해 접시를 닦았다. 숙소는 식당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일은 고됐다. 휴일도 없이 하루 17시간을 일해 처음 1년 반은 한 달에 300달러를, 다음 1년 반은 한 달에 400달러를 벌었다. 근근이 끼니를 이어던 2016년 말 아내가 임신을 했다.

 

2017년 가을에 사랑하는 아들 하산이 태어났다. 병원비를 지불하느라 수중에 있는 돈을 거의 털어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불법으로 일하고 있었다. 경찰은 수시로 불법 취업을 단속했고, 그때마다 임기응변이나 읍소로 빠져나왔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취업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일도 허락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의 예멘인 커뮤니티에서 한국의 제주도에는 비자 없이 입국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결정을 한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아내는 금으로 된 결혼반지를 팔았고, 나는 주변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몇 안되는 가구도 팔았다. 그렇게 모은 돈 2000달러를 전 재산으로 우리는 5월15일 제주도에 도착했다. 예멘에서의 피난생활, 말레이시아에서의 그림자 같은 삶, 고난과 두려움이 한 번에 씻기는 기분이었다.

 

갖고 온 돈이 숙소비와 식비로 바닥나기 시작해, 수중에 고작 200달러가 남았을 때였다. 가족이 ‘홈리스’가 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예멘인들을 돕는다는 한 성당의 수녀님을 만났다. 행운이었다. 수녀님은 내게 필요로 한 것이 있는지 물었고, 나는 ‘닫힌 공간(closed place)’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천장과 벽이 있어 비바람을 피하고, 우리 가족이 머물 수 있는 ‘합법적’이고 ‘안전한’ 공간이면 충분했다. 우리 가족이 예멘과 말레이시아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공간이다. 수녀님은 내게 내 부모님 또래의 부부가 사는 제주의 한 가정집을 소개시켜줬다.

 

부부는 아늑한 방과 맛있는 음식, 아이를 위한 장난감을 줬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사다주었고, 아내가 몸살을 앓을 때는 병원을 데려갔다. 우리 아이를 제주의 목장으로 데려가 말을 태워줬다. 무슬림이 먹는 음식에 대해 묻고 재료를 고심해 골랐다. 그들은 나를 ‘아들’이라고, 내 아내를 ‘딸’이라고 부르며 낯선 곳에서의 삶을 다독여 주었다. 하루는 나처럼 제주의 한 가족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압둘라(가명)가 내게 말했다. 우리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고. 그렇다. 우리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제주의 ‘부모님’께 돌려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예멘인에 대한 한국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상황을 알면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도 있다. 우리 가족은 한국의 아름다운 섬을 파괴하러 온 괴물이 아니다. 우리 가족은 그저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이곳 제주에 왔다. 내가 숙소에서, 은행에서, 슈퍼마켓에서 만난 제주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에게 미소를 지어줬다. 그들의 친절이 우리를 구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보여준 친절을 우리 가족이 갚을 기회가 있길 바랄 뿐이다

 

위의 기사에서 우리가 몇 가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 첫째, 천주교의 수녀와 신자들을 통한 난민에 대한 종교의 역할, 둘째, 이 사실을 언론을 통해서 많은 시민들과 국민들에게 알린 언론의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예멘 난민들이 괴물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예의바르고 감사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11. 난민과 환대

환대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화두이고 이주민과 난민에게 접촉점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환대가 주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환대의 철학 철학자를 살펴보자. 유대인으로 리투아니아 출신이며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임마누엘 레비나스와 유대인으로 알제리에서 출생한 자크 데리다의 두 프랑스 철학자이다. 두 철학자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차별과 죽음의 고비를 겪었던 사람으로 타자와 이방인 및 이주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혹자는 레비나스의 타자 중심의 철학 및 윤리의 철학을 데리다가 ‘환대’라는 주제로 해석하고 적용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런 관계로 두 사람은 환대의 철학연구에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지내왔다. 자크 데리다(1930-2004)는 그의 책 「환대에 대하여」에서 “어떤 나라에서는 집안에 맞이하는 이방인은 하루 동안 신이다.”또 이방인에 대한 그의 유명한 경구,“내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소속과 이름을 묻지 말라, 단지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물어라”고 했다. 데리다의 환대에 대한 신학자 브루스마의 설명에 의하면 데리다에게 “환대란 문을 두드리는 낯선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나의 모든 소유를 주려는 준비됨과 완전한 개방의 자세”를 뜻한다. 그에게 있어서“환대는 타자의 희생이 아닌 자기희생을 뜻한다. 심지어 나그네가 나의 환대를 훼손할 가능성조차도 그 환대를 규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심지어“데리다는 이 환대의 결과가 끔찍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강조한다. 이유는 “이는 새롭게 오는 자가 선한 사람일 수 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의 “환대는 절대적이며, 순수하고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순수한 환대가 궁극적으로 악마에 대해서까지 이용당한다고 하더라도 데리다는 순순한 환대를 옹호하며 그는 조건적 환대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브루스마는“환대에 관한 데리다의 이해는 다른 무엇보다도 어떠한 경계도 없는 개방성과 무조건성의 요구에 중심”을 두었다고 설명한다. 데리다의 이 환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누군가는 터무니없는 미친 소리로 치부할 수 있다. 혹자는 필자의 견해를 너무 이상적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에 대해서 미로슬로브 볼프는 제동을 건다. “불의와 기만과 폭력의 세상 속에서 환대를 향한 의지와 환대의 제공은 무조건적일지라도 환대는 조건적 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에 대해 볼프는 현실적이고 균형 잡힌 환대를 주장한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기 주변에 강도들이 와서 자기를 살해하고 소유물을 빼앗아 갈 수 있을지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 위험을 느끼면서도 치료하지 않았을까?

셋째로 소설이다. 소설이지만 무조건적 환대의 예를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에서 찾을 수 있다. 남수인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소설에 나오는 디뉴의 미리엘 주교는 문간에 나타난 이방인에게 문을 열고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고 환대를 한다. 무조건적인 환대.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환대받은 이방인은 주인을 해칠 생각까지 했고(실행은 하지 않았지만),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을 훔쳐 도망친다. 이방인을 환대했을 때 당할 수 있는 불행이 그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의 문을 틈새 없이 닫고 잠근다. 마음의 문도 꼭 잠그는 것을 미덕으로,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무조건적 환대의 감화력이 어떠한지 그 사례를 장발장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환대가 고통 가운데 놓여 있는 난민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먹여주고 재워 주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한 사회가 그 사회에 도착한 모든 낯선 존재들을 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은 가능하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대한민국의 오늘도 전쟁과 독재정권을 피해 유랑하던 난민들에게 세계 각국이 기꺼이 내어준 자리, 그 지극한 환대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는가. 이 자세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는 기독론적 선교가 아닐까? 이것이 몰트만이 그의 책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그 길은 “그리스도론적 범주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 범주”이기 때문에 기독인의 그리스도적 사랑과 희생을 따라가는 윤리적 삶이 아닐까?

넷째, 환대는 성경적이다. 환대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서 나온다.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 책에서 환대의 대표적 사례로 창세기 19장에 나타나는 소돔의 죄악으로 멸망당하게 될 상황에서 찾아왔던 천사를 대하는 롯의 예이다. 천사들과 성관계를 하고자 하는 소돔사람들에게 손님을 위해서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을 내어 놓을 정도로 손님에 대한 환대를 언급한다. 사사기 19장에 나타나는 성읍의 불량배들이 레위 남성과 성관계를 갖고자 할 때 나그네였던 레위인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주기까지 하는 나그네에 대한 환대의 문화를 보여준다. 신약성경에서 환대의 가장 대표적 사례가 탕자의 비유이다(눅 15:11-32). 환대의 가장 완벽한 모습은 성경에 있다. 그래서 부르스마는 환대를 신적인 덕(Divine Virtue)으로 간주하고 레티 M. 러셀은 「공정한 환대」의 책에서 환대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환영”으로 묘사한다. 이 환대가 고통 가운데 놓여 있는 난민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먹여주고 재워 주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한 사회가 그 사회에 도착한 모든 낯선 존재들을 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은 가능하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대한민국의 오늘도 전쟁과 독재정권을 피해 유랑하던 난민들에게 세계 각국이 기꺼이 내어준 자리, 그 지극한 환대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는가.

 

12. 난민에 대한 객관적, 신학적 및 선교학적 접근

무엇보다도 난민에 대한 그리스도인이 더 깊이 생각할 것은 어느 언론인이“난민에 대한 멸시와 혐오보다 더 심각한 건 공포다”라는 지적처럼 객관적 사실 보다는 막연한 공포에 치우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판단한 것도 사실이다. 이주민과 난민 연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세계적인 선교학자 패트릭 존스톤은 최근 발행된 그의 책 「이주민 위기(Migrant Crisis)」에서 이 점을 동일하게 강조한다. 그 책에 의하면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난민들을 도와주려는 것 보다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두 배나 높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이런 공포 때문에 잘못된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난민이 무슬림이라는 이유 때문에 ‘상상된 공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사랑의 마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예멘난민에게 다가가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이다. 선교학자 J.H. 바빙크는 조직신학과 선교학을 재미있게 비유하였다. 조직신학은 기독교를 방어하고 보호하느라 변증적이다 보니 소극적·방어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교학은 타종교와 무신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니 적극적·공격적이라고 했다. 한국교회도 이런 자세와 마음으로 예멘 무슬림 난민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들에 대한 안전도 먼저 생각해야 하지만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피하기만 한다면 난민 무슬림에게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그래서 전 세계에 기독교 선교사가 무슬림지역에 파송비율이 4%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민수기 13장에 나타나는 두 정탐꾼처럼 아말렉 족속을 향하여 “우리의 밥이다” 라는 자신감으로 무슬림 난민들에게 사랑과 복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만약 무슬림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지나치게 움츠려 든다면 아말렉 족속을 보고 두렵고 무서워서 스스로를 ‘메뚜기’로 보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절대적 능력을 무시하고 과소평가하는 불신앙의 엄청난 죄악이다. 그것은 영적 패배주의다. 패트릭 존스톤의 지적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온 예멘 난민들은 그들 자신이 스스로 택해서 이 땅에 온 것 같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들에게는 복음을 듣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교회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불러주신 선교의 기회로 여겨야 한다. 루이스(C.S.Lewis)가 그의 책 「고통의 문제」에서 인간에게 고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확성기라고 지적한 것처럼 예멘난민들이 겪는 시련과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대한민국에 오게 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회로 한국교회는 삼아야 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난민들에 대한 냉정한 위험한 현실은 직시하되 그들에 대한 접근은 적극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때 어떤 위험이 오더라도 난민들에 대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한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 그의 책 「그리스도의 길」에서 지적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기독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라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주님의 고난과 희생과 섬김의 삶을 따르는 제자도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하리라.

유럽은 최근 난민 문제로 다문화주의 정책을 포기했다. 그것은 경제적 문제와 국가 안전의 문제 때문이다. 그리고 유럽의 다문화주의 정책의 피상성은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Die Austreibung Des Andern)」에서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의 난민의 위기는 유럽연합이 이기적 목적을 좇는 경제적 상업 연합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한다.”마찬가지로 미국 예일대학교 교수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도 경제적 관점에서 이주민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따뜻한 포용과 정의로 이주민들에 대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수용국은 끌어오는 이주자들 보다 내몰린 이주자들을 받아들이는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급진적 주장까지 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민은 일차적으로 수용국에 최선의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끌어 오는 문제가 아니라(예를 들어, 최고의 엔지니어를 끌어들여 도착지 국가의 경제적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 궁핍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정의를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들을 이민과 관련한 당사자나 극우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터무니없고 비현실적이고 꿈같은 소리로 치부될지 모른다. 하지만 교회는 그들과는 다른 입장과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이유는 교회는 고통 받는 소외된 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타인을 돕는 손, 가난한자에게 달려가는 발, 불행을 보는 눈, 한숨과 슬픔을 듣는 귀를 가진 것이야 말로 사랑의 참모습이다”라고 갈파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랑의 교회는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 지치고 병들고 갇힌 자들 나그네 된 자들에게“귀의 교회(이곳에서는 복음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들려진다)나 눈의 교회(이곳에서는 신실한 자들이 보고 경험하기 위해 성례가 집행된다)일 뿐 아니라,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교회이기도 하다”.

유럽이 다문화주의를 포기하고 다문화 사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만연해져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이민자와 난민들의 유입으로 겪는 어려움 때문에 극우주의자와 극우정당들이 창궐하고 유럽의 다문화 사회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보고 한국교회는 이주민과 난민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우리의 자세가 유럽의 일부와 같이 이주민 및 난민에 대한 혐오와 이슬람포비아등 극우주의자들로 갈 것인가? 그것은 비겁하고 성경적이지도 않다. 앞에서 언급한 자크 데리다의 주장처럼 이방인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는 아니더라도 선한 사마리안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우는 중 자기도 그런 위험이 바로 등 뒤에서 칼과 총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했던 삶을 오늘날 난민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따라야 할 모범이지 않을까. 따라서 한국교회는 유럽의 난민문제를 반면교사로 삼고 한국 사회가 건강하게 정착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우리 모두가 이 일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앞장서야 한다.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같이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강도만난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인이 자비를 베푼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시리아 난민, 예멘 난민 및 로힝야 족 난민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봉사하는 가운데 따르는 위험과 수고가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감내하면서.

선교학자 존 맥케이(Johm Mackay)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방식에 따른 선교(mission in Jesus Christ)”를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선교는 기독론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프린스톤 신학교 조직신학자 다니엘 L.밀레오리(Daniel L. Migleore)는 “만약 교회의 선교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면 그 활동은 십자가의 길을 따를 것이며, 그럼으로써 주변화된 자들과 낯선 자들, 소외되고 무가치하고 우리를 동요시킬 정도로 이질적이라고 간주되는 모든 자들에게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보일 것이다”라고 했다. ‘이 주변화 된 자와 낯선 자’ 및 ‘소외되고 무가치한 자들’이 신명기 신학에서 강조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이고 누가복음이 강조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다문화 사회에서의 이주민과 난민들이다. 한국교회는 다문화 사회에서 십자가를 따르는 기독론적 선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예수님도 이 땅에 난민으로 오셨다(마2:13-18). 헤롯왕의 죽음의 위협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난 가셨다.

 

13. 결론

유럽의 난민 문제와 한국의 난민 문제를 몇 가지 차원에서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첫째, 한국의 난민 상황과 반응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한국사회와 교회 및 개인의 영역에서 다루었다. 둘째, 발표자의 난민에 대한 입장은 법은 준수하되 한국의 난민 인정율을 국제적 수준이나 OECD 수준에 볼 때 난민수용의 여지가 있고 인도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을 주장했다. 셋째, 난민문제는 국가가 다루기에 너무나 방대하고 힘든 부분이 많기 때문에 지역사회와 교회의 역할도 중요하며 이 가운데 지역 대학과 병원 및 언론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넷째, 보완해야 할 점은 국가적 차원과 국제적 차원에서 난민문제를 어떻게 연대 및 연합해서 해결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인데 이 문제는 차후에 깊이 논의되어야 할 과제이다. 오늘날 이주와 난민의 문제는 한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초연결사회로 이루어져 있고 매우 상호의존성을 지닌 문제이기에 국제적 연대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한국사회의 난민문제의 대처 방안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난민관련 책임자들이 난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다. 지금 난민과 관련해서 정확하지 못한 정보로 잘못된 오해와 편견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무분별한 난민 수용과 반대가 가져다 올 파국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 난민에 대한 정확한 정보에 근거해서 올바른 판단으로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난민에 대한 지나친 온정주의적 인도주의도 심각한 문제이고 정확하지 못한 정보에 기초해서 진짜 난민을 가짜 및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는 잘못도 피해야 한다. 가짜 난민은 난민 심사의 장기간을 악용해서 불법 체류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고 잘못된 정보로 난민을 비난하는 대표적 사례는 난민들이 한 달에 1백 만 원 넘게 기초생활지원금을 받는다는 잘못된 정보이다. 난민들이 난민심사 과정 중 1인당 6개월간 43만 원 정도 받는데 그것도 예산 부족으로 난민 중 3.2%정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느 언론인이“난민에 대한 멸시와 혐오보다 더 심각한 건 공포다”라는 지적처럼 객관적 사실 보다는 막연한 공포에 치우쳐 잘못 판단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공포 때문에 잘못된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난민이 무슬림이라는 이유 때문에 상상된 공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런 부분에 있어서 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둘째, 국가 및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난민반대 여론이 높고 심지어 난민옹호에는 수많은 반대 댓글이 있더라도 객관적 사실을 밝히는 용기 있는 태도도 필요하다. 이 사실에 대해서 앞에서 언급한 유엔난민기구 그란디 최고대표의 조언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의 난민 반대 여론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의 태도는 달라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정부 정책에서의 “자신감”을 특히 강조했는데 “정부가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에게 ‘이게 옳은 일이고, 위험한 일이 아니다’고 자신감 있게 말해야 한다. 물론 난민법 폐지 청원에 서명한 70만 명의 목소리도 중요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UN난민기구에 개인 후원을 하는 한국인 23만 명도 눈 여겨 봐야 한다. 예멘인들에게 쌀과 담요, 머물 곳을 제공한 제주도민도 있다. 이들도 실재하는 사람이고, 이들 역시 유권자다.”

유럽이 다문화주의를 포기하고 다문화 사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만연해져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이민자와 난민들의 유입으로 겪는 어려움 때문에 극우주의자와 극우정당들이 창궐하고 유럽의 다문화 사회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보고 한국사회는 이주민과 난민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우리의 자세가 유럽의 일부와 같이 이주민 및 난민에 대한 혐오와 이슬람포비아등 극우주의자들로 갈 것인가.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수 천 년 동안 가난과 식민지 치하와 전쟁과 인권이 유린된 독재의 경험을 한 나라다, 이런 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 이 두 가지 기적을 이룬 나라는 전 세계에 없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와 선진화를 이룬 나라이다.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주장처럼 이방인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는 아니더라도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안이 강도 만나 죽음 직전에 놓여 있는 사람을 치료한 것처럼 무자비한 독재정권에 강도 당한 시리아 난민, 예멘 난민 및 로힝야 난민을 도와주는 이웃이 되어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도 한 때 난민국가가 아니었던가. 특히 다문화 가족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이 모여 사는 김해 지역에서 오늘 뜻 깊은 포럼을 개최하는 부산장신대, 고신대학교와 김해 지역의 언론 및 부산일보 및 국제신문과 지역방송를 중심한 부울경 언론과 부울경 지역의 교회가 함께하여 유럽의 난민문제를 반면교사로 삼고 한국 사회가 다문화 가족과 난민이 행복하게 사는 건강한 사회를 정착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한다.

미주

1) 경향신문 2018년 10월 25일 1, 2면

2) 하비 칸, 현대도시교회의 전망, 221

3) 알랭 바디우,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91. 자음과 모음 2016

4) 알랭 바디우,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90. 자음과 모음 2016

5) 경향신문 10월 25일

6) 한국일보 2018.09.14. 18:37 제주에 체류 중인 예멘인 난민 신청자 중 미성년자 등 23명에게 난민 지위는 인정하지 않는 대신 인도적 체류를 허가했다. 이들에게는 제주 이외의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도록 ‘제주 출도제한’ 조치도 해제됐다. 법무부 제주출입국ㆍ외국인청은 제주지역 예멘인 난민심사 대상자 484명 중 면접이 완료된 440명 가운데 영유아 동반 가족, 임신부, 미성년자, 부상자 등 23명에 대해 ‘인도적 체류’ 허가를 결정했다고 9월 14일 밝혔다. 그러나 법무부는 이들이 난민협약과 난민법상 5대 박해사유(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 구성원 신분, 정치적 견해)에 해당되지 않아 난민 지위는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인도적 체류허가는 난민법상 난민 인정요건을 충족하지는 못하지만 강제 추방할 경우 생명, 신체에 위협을 받을 위험이 있어 인도적 차원에서 임시로 체류를 허용하는 제도다. 인도적 체류자는 1년 단위로 체류 연장 허가를 받아야 한다. 취업활동은 가능하지만 난민과 달리 건강보험, 기초생활보장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또한 이들이 향후 국내 법질서를 위반할 경우에는 체류자격이 취소될 수 있다. 이날 오전 제주출입국ㆍ외국인청에 모인 예멘인 23명은 한국 정부가 인도적 체류허가를 통보하자 한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예멘인 난민 신청자 A(34)씨는 “그동안 예멘인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제주도민들은 언제나 친절했다. 감사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이들 중 일부는 출도 제한 조치가 해제됨에 따라 일자리 등을 위해 타 지역으로 떠날 것으로 알려졌다.

7) 2018년 7월 17일-8월 24일 동유럽과 서유럽 12개 국가 방문 터키,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 독일, 이탈리아, 바티칸이다. 그 가운데 세르비아 난민촌 방문

8) 마부작침은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라는 뜻으로 방대한 데이터와 정보 속에서 송곳같은 팩트를 찾는 저널리즘을 지향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고 이런 목적 하에서 난민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겠다는 야심찬 계획 속에서 SBS가 시도했다.

9) 혐오에 대해서는 경향신문이 금년 초 기획기사로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장애인 및 외국인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현상을 매우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10) 한국일보 2018.06.19 19:00

11) 경향신문 2018년 10월 25일 2면

12) 연합뉴스 8월 6일자 자료 제목: 한국사회, 난민과 만나다

13) 조선일보 2018.06.20. 국제 A19 면 정시행 기자

14) 한국선교훈련원, 세계를 품은 기도,p.1 309호 2018.8.17

15) 이정록 외, 세계분쟁지역의 이해, 푸른 길 p.223

16) p. 108

17) 세계일보 2017년 11월 5일 이희경 기자

18) 조선일보 6월

19) 카슬은 이 책에서 이주의 일반적 경향을 6가지로 구분한다. 이주의 세계화, 이주의 가속화, 이주의 여성화, 이주의 정치화, 이주의 차별화, 그리고 이주변천의 확산 p. 38-39

20) 연합뉴스 8월 6일 자료

21) 연합뉴스 8월 6일 자료

22) 상동

23) 연합뉴스 8월 6일자료

24) 상동

25) 조선일보 2018년 4월 23일자

26) 한국일보 2018년 6월 28일

27) 경향신문 2018년 10월 25일

28) 연합뉴스 상동

29) 설문조사 715명에 따라서 나온 통계

30) 한겨레의 보도

31) 김진봉외, 난민, 이주민, 탈북민에 대한 선교 책무, 207-213

32) 한국일보 2017.11.19

33) 한겨레 2018년 6월 26일

34) 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51.

35) 한스 브루스마, 십자가, 폭력인가 환대인가, 64-67.

36) 볼프, 광장에 선 기독교, 79.

37) 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158-159.

38) 위르겐 몰트만, 예수 그리스도의 길, 10

39) 레티 M. 러셀외, 공정한 환대.

40) 서언에서(Forword)

41) 예수 전도단, 인카운터 이슬람, p.59

42) 존스톤 p.8

43) 다니엘 밀리오리,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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