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기독교 민족대표 16인의 역할을 중심으로-

이 글은 2019년 3월 1일 삼일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삼일운동 백 주년과 한국기독교”라는 주제로 지난 12월 3일과 4일 공주제일교회당에서 개최한 2018 미래교회포럼에서 이덕주 교수가 발표한 논문이다. 이 교수의 발제는 참석자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 편집장 주

 

이덕주 교수(감신대)

 

머리 글

2. 3·1운동 준비단계에서 기독교 역할

2.1 독립만세운동 준비과정

2.2 기독교 민족대표 16인

2.3 민족대표들의 종교연대

3. 민족대표들의 투옥과 그 이후

3.1 재판정에서 드러난 독립의지

3.2 옥중 체험과 신앙연단

3.3 출옥 후 목회 및 사회 활동

4. 맺음 글: 기독교 지도자의 영적 권위와 지도력

 

머리 글

1919년 3·1운동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지배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운동이자 자주권 확보를 위한 민족적 항일투쟁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3·1운동의 정치적, 사회적 대중 저항운동의 성격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이 운동의 이념적 근거와 운동조직 형성, 운동의 전개와 확산 과정에서 종교인들의 역할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 3·1운동 준비(모의) 과정에서 종교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2) 3·1운동의 핵심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계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3) 독립선언 이후 서울과 지방에서 전개된 대중 투쟁 단계에서 종교인과 종교 조직이 운동의 전개와 확산과정에서 촉매와 연락망이 되었고, 4) 그 결과 만세시위에 참여한 종교인과 종교 조직이 일본 경찰 및 사법 당국의 집중적인 견제와 탄압을 받음으로 종교 박해의 양상을 띠었다. 여기서 3·1운동의 ‘종교저항운동’ 내지 ‘종교적 민족운동’ 성격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3·1운동 당시 기독교인(개신교인) 통계는 전국 인구의 1.0∽1.5% 정도에 불과했지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민족대표 가운데 기독교인이 45%(16인)를 차지하였고, 대중 만세시위 과정에서 서울과 지방의 교회와 기독교 학교들이 주모자로 활동하다가 투옥된 수감자 가운데 25∽30%가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그 가운데 여성 수감자의 75∽80%가 기독교 여성이었다. 또한 1919년 3월 1일 이후 서울과 지방에서 전개된 대중 투쟁단계에서도 지역교회와 기독교 학교, 선교회 병원, 기독교 기관단체들은 독립만세운동의 연락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때문에 강제진압에 나선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폭력에 의해 많은 기독교인이 희생되었고 교회와 학교들이 소실(燒失)되었다. 그 결과 3·1운동을 거치면서 기독교의 민족주의 성격과 기능을 한층 강화되었고 1945년 해방되기까지 기독교는 항일 민족운동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3·1운동 당시 ‘소수 종파’에 불과했던 기독교가 독립만세운동 준비 및 투쟁단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역사·신학적 배경과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을 규명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기독교계 민족대표 16인을 중심으로, 1) 준비단계에서 기독교 민족대표 구성과정과 역할, 2) 민족대표들의 종교연대, 3)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기독교 대표들의 민족의식, 4) 기독교 대표들의 투옥과 종교체험, 5) 기독교 대표들의 출옥 후 목회 및 사회 활동을 살펴볼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활약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이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지도력의 실체와 신학적 의미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2. 3·1운동 준비단계에서 기독교 역할

2.1 독립만세운동 준비과정

잘 알려진 대로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14개조 ‘민족자결 원칙’(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소식을 접한 해외 민족주의 진영의 독립운동 논의로 시작되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다른 서구 연합국보다 늦게(1917년 4월) 참전한 미국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될 승전 연합국의 평화강화회의를 앞두고 과거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 방향에 대하여 “피지배 민족(식민지나 점령지역)에게 자유롭고 공평하고 동등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自決權)을 인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다분히 독일 식민지가 많았던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많은 지분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제안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5대 승전 연합국’ 범주에 포함되었던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한국은 처음부터 평화회의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약소민족 국가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런 파리 강화회의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대한 소식은 1918년 11월부터 미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물론이고 일본에서 발행되던 <大阪每日新聞>, <The Japan Advertiser>, 그리고 서울에서 발행되던 <每日申報>와 <京城日報>, 인천에서 발행되던 <朝鮮新報> 등을 통해 국내외 민족주의진영에 알려졌다. 이에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송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국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담은 독립선언서 발표와 일본 정부에 독립을 청원하는 운동을 전개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미국 교민들은 이승만과 정한경을, 러시아 교인들은 이동휘를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고 중국 상하이에서도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칭따오에 머물러 있던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송하기 위한 경비 모금을 위해 선우혁을 국내에 파송하였다. 비록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들 미국과 러시아 교민들이 파리에 파견할 특사로 선발된 인물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일본 도쿄의 유학생들도 2월 8일 ‘독립청년단’ 명의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 직전 선언서 인쇄용 활자를 구하러 1월 28일 경 송계백을 서울에 파송하여 정노식과 최남선 등 국내 민족운동 세력과 접촉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국내외 민족운동 진영의 기대감을 고조시켰던 파리 평화회의는 1919년 1월 12일 영국과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4대 강국’이 참여한 예비회담을 거쳐 1월 18일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위 4대 강국과 일본을 포함한 45개국 대표들이 참여한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의장석에 앉아 평화회의를 주재하였다. 그렇게 파리 평화회의 본회담이 시작된 직후, 1월 22일 새벽에 고종황제가 향년 68세로 덕수궁에서 승하하였다. 총독부가 주관한 장례식 절차에 따라 고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이 1919년 3월 3일(월요일)로 정해졌다. 40일간의 ‘국장’(國葬) 기간이 시작되었고 덕수궁 대한문 앞은 서울과 지방에서 올라온 문상객들로 붐볐다. 고종황제의 죽음을 두고 세간에 “간세배에게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일본에 대한 민족적 저항감도 고조되었다. 그렇게 해서 파리 평화회의에 한민족 대표를 파송하는 동시에 고종황제 국장을 전후로 한 시기에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표명하는 군중시위를 전개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전개되었다.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를 파송하는 일은 이미 상하이 신한청년당에서 추진하고 있었기에 그 쪽에 맡기기로 하고 국내 민족운동 진영은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담은 선언서 및 탄원서를 작성하여 파리에 파견될 특사에게 전달하고 특사 파견에 드는 비용을 보조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 배경에서 국내 민족운동 진영에서는 독립의지를 담은 선언서 및 탄원서에 서명할 민족대표를 구성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기독교계 민족대표 선정 및 협의 과정은 3단계로 진행되었다(부록 참조).

1단계(1918년 11월 – 1919년 2월 10일)는 민족 대표자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거나 고종황제의 승하소식 및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추진한 2·8 독립선언에 관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품고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서울과 선천, 두 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장로교의 이승훈과 감리교의 박희도는 1918년 11월말부터 1919년 1월 초순 사이에 국내외에서 간행되는 신문에 실린 파리 강화회의 및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대한 기사를 읽고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품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훈은 중국 상하이에서 들어온 선우혁을 만나 신한청년당이 준비하는 파리 평화회의 대표자 파견운동에 대한 정보를 들었고 박희도는 기독교청년회 학생 지도부와 일본 도쿄의 유학생들이 추진하는 독립선언운동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주변의 동지를 포섭하기 시작했다. 즉 이승훈은 2월 4-5일 평북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 사경회와 노회, 전도회 모임을 통해 이명룡과 양전백과 만나 협의하였고 박희도는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 기구인 서울의 기독교청년회와 협성학교(영신학교) 등을 통해 동지를 포섭하였다. 이처럼 기독교계 인사들이 독립운동 준비를 하는 동안 천도교측에서도 1월 하순부터 손병희와 권동진, 오세창, 최남선, 최린 등을 중심으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른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천도교측에서는 독립운동을 준비하면서 ‘대중화’(大衆化)와 ‘일원화’(一元化), ‘비폭력’(非暴力)의 3대 원칙을 정하고 ‘민족대표’를 구성을 위해 “기독교측과 연락을 취해 보자.”는 최남선의 의견에 따라 이승훈과 접촉함으로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으로 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

2단계(1919년 2월 11일 – 1919년 2월 21일)는 보다 적극적으로 동지를 규합하며 독립운동 내용과 방법론을 확정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승훈은 2월 11일 천도교측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송진우와 최남선, 최린 등을 만나 천도교와 기독교 연합운동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2월 13일 선천으로 돌아와 이명룡과 양전백 외에 유여대, 김병조 등 평북노회 소속 목사들을 포섭하였고 다시 상경하는 중에 평양에 들러 신홍식과 길선주, 안세환을 포섭하였으며 서울에서 함태영과 이갑성을 포섭하였다. 신홍식 목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장로교 인사들이었다. 이후 이승훈은 서울에 머물면서 감리교 인사들과 천도교 인사들을 접촉하며 ‘연합전선’을 확대시켜 나갔다. 감리교측은 미감리회와 남감리회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미감리회의 박희도는 이승훈과 천도교측 최린을 만나 연합운동 정보를 듣고 같은 교회(미감리회) 소속인 김창준과 조선예수교서회의 박동완, 그리고 해주에서 올라온 최성모를 포섭했고 최성모는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를 포섭했다. 박희도는 남감리회의 정춘수와 오화영과도 접촉하며 정보를 공유하였고 YMCA 조직을 통해 김원벽과 강기덕 등 학생 운동권과도 협의하였다. 이렇게 세 갈래로 시작된 기독교측 논의는 2월 17일 서울 수창동 박희도 사무실에서 이승훈과 박희도, 정춘수, 오화영, 신홍식 등이 회합함으로 기독교 연합전선이 구축되었다. 이후 기독교측 대표자들은 박희도와 이갑성, 함태영 등의 사무실 혹은 집에 모여 1) 천도교와의 합작 문제, 2) 운동 방법론(독립선언이냐 독립청원이냐) 문제, 3) 지방 대표자 포섭, 4) 파리 평화회의 대표자 파견, 5) 일본 정부와 의회에 청원할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기독교측을 대표하여 이승훈은 천도교측(최남선과 최린)과 합작을 협의하였고 천도교측으로부터 운동자금 5천원을 빌려 와 박희도로 하여금 집행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로써 천도교와 기독교 합작은 되돌릴 수 없는 원칙이 되었고 그에 따라 운동방법론도 ‘독립선언론’으로 방향을 잡았다.

3단계(1919년 2월 22일 – 1919년 3월 1일)는 서울과 지방, 종교대표와 학생대표, 국내외 운동 세력의 연대를 모색하며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단계였다. 천도교측(불교 포함)과의 합작 문제를 매듭지은 기독교측 인사들은 서울 및 지방에서 선언서 및 청원서에 서명할 기독교측 민족대표 구성에 박차를 가했다. 이를 위해 안세환과 신홍식은 평안남도 평양, 유여대는 평안북도 의주, 이갑성은 경상도 부산과 마산과 대구, 정춘수는 함경도 원산, 오화영은 개성, 김세환은 충청도와 경기도를 맡아 지방 교회 대표들을 접촉하였고 이를 통해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독립운동 연락망을 구축하였다. 또한 박희도와 이갑성은 기독교청년회와 협성학교, 세브란스병원을 매개로 해서 김원벽과 강기덕 등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과 접촉하며 학생 운동권과 연대를 모색했다. 처음 학생들은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려고 했으나 종교계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계획을 바꾸어 독립선언서 배포와 2차 독립운동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기독교측에서는 천도교측에서 준비,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지방으로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고 이 부분에서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해외로 대표자를 파송하는 일도 기독교측이 맡았다. 즉 현순을 중국 상하이로 파송하여 신한청년당이 추진하는 파리 평화회의 대표자 파견을 돕도록 하였고 안세환을 일본 도쿄로 파송하여 일본 정부와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런 준비 작업을 거쳐 ‘국장 2일 전인’ 3월 1일에 서울과 평양, 원산, 개성, 선천, 의주 등 전국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2.2 기독교 민족대표 16인

3·1운동 준비단계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독립선언서> 작성과 이 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 선정이었다. 이 작업은 천도교측에서 주도하고 기독교측이 참여, 협력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천도교측 논의를 시작한 손병희와 권동진, 오세창, 최린, 최남선 등은 이 운동을 기획하면서 대중화와 일원화, 비폭력 등 3대 원칙을 세웠다. 그리하여 천도교측 지도부 인사들은 대중화와 일원화 원칙에 의거하여 이 운동을 천도교만의 운동으로 전개하지 않고 당시 ‘조선 민족’을 포괄하고 대표할 수 있는 인사들로 민족대표를 구성하려고 시도하였다. 1910년 강제합병으로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기구나 조직, 단체는 전무하였다. 결국 개인이 민족을 대표하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그렇게 해서 천도교측 인사들이 ‘민족대표’로 추대하기 위해 접촉을 시도한 첫 번째 인물들이 구한말 정치 관료와 사회단체에서 지도자로 활약했던 ‘원로급’ 인사들이었다. 즉 “구한국 대신으로서 국변(國變) 후에 일본작위를 고사하고 그 성품이 고결한 사람으로” 알려진 윤용구(尹用求), “을사보호조약시 참정대신 즉 총리대신으로 그 조약을 한사(限死) 반대한 사람으로” 알려진 한규설(韓圭卨), “소위 개화당 영수로서 갑신정변 후에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귀국하여 일인(日人)의 침략을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귀양사리까지 한 저명한 귀족 혁명가”로 알려진 박영효(朴泳孝), 그리고 “과거 광무연간(光武年間)에 독립협회장으로서 특히 미국인간(美國人間)에 신망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진 윤치호(尹致昊)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 원로들과의 접촉은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에 천도교측 지도부 인사들은 종교계로 눈을 돌렸다. 최린의 증언이다.

“국변 이후로 각종의 정치적 색채를 가진 사회단체는 물론이요 심지어 학술단체까지도 모조리 해산을 당하였고 다만 불교,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단체만이 간신히 잔명(殘命)을 보존하였을 뿐이었다....민족을 대표함에는 오늘날 우리나라에 무슨 정당이 있는 것도 아니요 무슨 결사도 없고 오직 종교단체뿐이니 천도교만이 아니라 예수교회, 불교회 등의 대표를 망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작정하였다.”

이처럼 천도교측은 처음부터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가 연대하는 ‘3대 교단 동맹’으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연대 대상으로 기독교를 지목했다. 즉 천도교측 운동 논의가 시작되었던 1919년 1월 말 최린과 오세창, 권동진 등은 “예수교 측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려고 1천 6백 명 가랑이나 되는 목사 장로 중에 4, 5백 명은 동지가 된다고 하며 그 주동자는 이승훈이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승훈과 친분이 있던 최남선과 송진우를 통해 정주 오산학교 졸업생 김도태를 이승훈에게 보내 연락을 취하였던 것이다. 마침 그 무렵 같은 평북노회 소속 목사와 장로들과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하며 마침 중국 상하이에서 들어온 선우혁을 통해 해외 독립운동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던 이승훈도 최남선의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천도교측 인사들과 만나 연대에 동의함으로 천도교-기독교 연합운동이 성사되었다. 이후 천도교측은 불교측 인사들과도 접촉을 시도하여 한용운과 백용성 등 불교 승려 2명이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런 천도교측의 불교 접촉과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3·1운동에서 기독교-천도교-불교 연대가 이루질 수 있었다.

다음으로 ‘민족대표’를 몇 명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없이 논의가 시작되었다. 선천의 양전백 목사는 재판과정에서 2월 12일 서울에 올라가 천도교측과 처음 접촉을 시도하고 내려온 이승훈으로부터 “예수교와 천도교와 각 학교 일반사회가 합동하여 총독부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독립을 허락하여 달라고 청원할 것이라, 1회는 50인 중 천도교 28인, 야소교 20인, 기타 2인으로, 2회는 100인으로, 계속 10회까지 하기로” 했다고 진술하였고 2월 23일에는 평양에서 함태영으로부터 “금번 50인이 총독부에 청원할 것이라.” 진술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이갑성은 2월 19일 자기 집에서 모인 기독교측 회합에 대해 “독립청원을 우리들만으로 하는가 또는 우리 이외에도 다른 사람들을 가입시키자고 하니 일동은 자기들만은 할 수 없으니 각 도에서 대표자로 할 유력한 사람 2, 3명씩을 선택하여 그런 사람들로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였다.”고 증언하여 기독교측만으로도 전국적으로 30-40명 대표단을 구성할 것을 예상하고 지방 대표자 포섭에 나섰음을 밝혔다.

이처럼 논의 초반에는 (천도교와 기독교 합하여) 적게는 50명, 많게는 1백 명까지 예상하고 논의를 시작했지만 그 수를 반으로 줄여 천도교와 기독교 대표를 합쳐 30명 수준으로 확정한 것은 2월 20일 이승훈과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 천도교측 대표와 만나 협의한 결과였다. 이승훈은 이 회합의 결과를 2월 21일 기독교측 대표자 모임에서 “최초에는 많은 사람으로 선언서를 발표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시일이 절박하므로 예수교에서 15-16명, 천도교에서 15-16명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발표하고 일본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낼 일”을 결정했음을 밝혔다. 천도교측의 권동진 역시 “2월 20일 오전 10시 최린 오세창 이승훈이 나의 집으로 왔었는데 동지는 천도교 예수교 각 15인씩 하자고 최린이가 말하였고 불교측에서도 2인을 가입시켜 도합 32인으로 한다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이렇듯 2월 20일 이승훈과 천도교측 대표자들과 회합에서 비로소 기독교와 천도교 각 15명, 여기에 최린이 개인적으로 접촉해 왔던 불교 대표 2명을 포함하여 민족대표자를 32명으로 구성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교주 손병희를 정점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천도교에서는 15명 대표자를 선정하는 작업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손병희의 위임을 받은 최린과 권동진, 오세창 등이 대표자 인선 및 포섭에 나서 5일 만에 15명의 명단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측 입장은 달랐다. 단일 교파, 단일 교단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훈이 속한 장로교는 ‘조선예수교장로회’라는 단일 교단에 총회와 노회 조직이 구성되어 있었지만 감리교는 박희도가 속한 미감리회와 정춘수와 오화영이 속한 남감리회가 별도 연회와 지방회로 조직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측에 할당된 15명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도 문제였다. 기독교측 인사들은 이 부분에 대해 확실한 원칙이나 기준을 세우지 못한 채 대표자 포섭작업에 나섰다. 박희도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이승훈은 다시 이갑성 집에 와서 전날 밤 집합한 자 전부가 모인 가운데서 천도교측은 합동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일과 그 선언서에 동교인 중 대표자로써 15인을 열기키로 한다 하니 우리 측으로서도 동수의 대표자를 정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일동은 그러면 우리도 15인의 대표자를 선정하기로 하자하고 그 자리에는 그만한 사람이 없으니 다시 다른 목사를 권유하여 15인이 되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 무렵(2월 21일) 회합에 참석하고 있던 기독교 인사들은 이승훈과 이갑성, 오기선, 박희도, 안세환, 함태영, 현순, 오화영, 정춘수, 신홍식 등 10명 미만이었다. 이들 중 현순은 상하이로 파송될 예정이었고 함태영과 안세환은 대표로 서명은 하지 않고 ‘2선’에서 운동을 지원하기로 했기 때문에 더 많은 대표자를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이갑성이 경상도, 오화영이 개성, 신홍식이 평양, 정춘수가 원산, 김세환이 경기도와 충청도로 대표자 포섭을 위해 지방 여행을 시도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장로교의 경우 이미 이승훈에게 동참 의사를 밝힌 이명룡과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길선주 등이 있어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감리교 경우엔 숫자를 채울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미감리회의 박희도는 김창준과 박동완, 최성모를 포섭했고 최성모는 이필주를 포섭했으며 남감리회의 오화영은 신석구를 포섭했다. 그 결과 장로교 7명, 감리교 9명(미감리회 6명, 남감리회 3명)으로 기독교측 대표자가 확정되었고 그 때가 2월 27일이었다. 여기에 천도교측 15명과 불교측 2명을 합하여 총 33명의 ‘민족대표’ 구성이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3·1운동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기독교 대표 16명은 다음과 같다.

이름

출생연도

(나이)

출생지

입교연도

소속교단

3·1운동 당시 직장 및 직책

길선주

1869(50)

평남 안주

1897

예수교장로회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

이필주

1869(50)

서울

1903

미감리회

서울 정동교회 목사

김병조

1877(42)

평북 정주

1911

예수교장로회

의주 관리교회 목사

김창준

1890(29)

평남 강서

1907

미감리회

서울 중앙교회 전도사

양전백

1869(50)

평북 의주

1892

예수교장로회

평북 선천북교회 목사

유여대

1878(41)

평북 의주

1898

예수교장로회

의주 동교회 목사

이갑성

1889(30)

경북 대구

1900

예수교장로회

서울 세브란스병원 제약부 주임, 남대문교회 집사

이명룡

1873(46)

평북 철산

1902

예수교장로회

정주 덕흥교회 장로

이승훈

1864(55)

평북 정주

1908

예수교장로회

정주 오산학교 설립, 오산교회 장로

박희도

1889(30)

서울

1904

미감리회

중앙YMCA간사, 영신학교 교감, 창의문밖교회 전도사

박동완

1885(34)

경기 포천

1908

미감리회

<기독신보> 주필, 정동교회 전도사

신홍식

1872(47)

충북 청주

1904

미감리회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

신석구

1874(45)

충북 청주

1908

남감리회

서울 수표교교회 목사

오화영

1879(40)

황해 평산

1906

남감리회

서울 종교교회 목사

정춘수

1874(45)

충북 청주

1904

남감리회

원산 상리교회 목사

최성모

1874(45)

서울

1908

미감리회

해주 남본정교회 목사

 

기독교 대표로 참여한 16명을 연령별로 보면 40대가 8명(신홍식 이명룡 신석구 정춘수 최성모 김병조 유여대 오화영)으로 제일 많았고 50대가 4명(이승훈 길선주 이필주 양전백), 30대가 3명(박동완 이갑성 박희도) 20대가 1명(김창준)이었고 출신 지방으로 보면 평북이 5명(이승훈 양전백 유여대 이명룡 김병조)으로 제일 많았고 서울 3명(이필주 박희도 최성모), 충북 청주 3명(신홍식 신석구 정춘수), 평남 2명(길선주 김창준) 황해도 평산 1명(오화영), 경기 포천 1명(오화영), 경북 대구 1명(이갑성)이었다. 소속 교파나 교단으로 보면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이 7명(길선주 김병조 양전백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으로 모두 미국 북장로회 선교구역인 서울과 평안도 지역교회 소속이었다. 남장로회 선교구역인 전라도와 호주장로회 선교구역인 경상남도, 캐나다장로회 선교구역인 함경도에서는 민족대표 참여자가 없었다. 감리교의 경우에는 미감리회 6명(이필주 김창준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최성모), 남감리회 3명(정춘수 신석구 오화영)으로 서울과 평양, 해주, 원산 등지에서 목회하던 목사와 전도사들이었다.

그런데 ‘민족대표’로 참여한 기독교측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3·1운동 당시 교회 공적인 조직의 고위직 인사는 한 명도 없었다. 장로교의 경우 과거에 총회장을 역임했던 인물로 길선주 목사와 양전백 목사가 있었지만 나머지 인사들은 지역교회 목사(유여대 김병조)이거나 평신도(이승훈과 이명룡, 이갑성)였다. 현직 노회장이나 총회장으로 민족대표로 참여한 인물은 없었다. 그리고 감리교의 경우도 최고 수장인 미국인 감독 아래서 지방교회들을 관리하던 감리사 중에도 민족대표 참여자가 없었다. 미감리회의 경우 1919년 3월 당시 한국인 감리사가 2명 있었는데 경성지방 감리사 최병헌은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았고 인천지방 감리사 오기선은 모의 초반에 참여했다가 운동방법론에서 이견을 보여 중도 이탈하였다. 결국 미감리회 대표는 지역교회 담임목사(이필주 신홍식 최성모)와 전도사(박희도 김창준 박동완)로 구성되었다. 남감리회의 경우도 3명(정춘수 오화영 신석구) 모두 지역교회 담임자였고 감리사는 한 명도 없었다. 이로써 보면 기독교측 대표자들은 당시 교회 조직의 대표성을 지닌 인사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개인적인’ 차원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갖고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렇게 민족대표로 참여한 기독교 대표 가운데는 3·1운동 이전부터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우선 1907년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민족계몽운동에 참여하다가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이승훈과 양전백, 이명룡을 들 수 있으며 길선주 목사도 그 맏아들(길진형)이 105인사건 때 옥중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도산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던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상동파’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이필주와 최성모,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동학운동에 참여했던 신홍식 목사도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이들은 3·1운동 이전부터 ‘민족주의 목회자’로서 기독교계와 일반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었다. 또한 초교파 연합 선교기관인 기독교청년회(YMCA) 간사이자 장·감 연합학교인 영신학교 교감으로 봉직하고 있던 박희도, 장·감 연합 기독교계 언론인 <기독신보> 주필 박동완, 역시 장·감 연합 의료선교기관인 세브란스병원 약제사였던 이갑성 등을 통해 장로교와 감리교, 기독교계와 학생운동권 및 다른 종파 지도자들과의 연대와 협력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만큼 당시 기독교회는 다른 교파와 다른 교단, 다른 종파와 일반사회에 ‘열려’ 있었다.

 

2.3 민족대표들의 종교연대

이렇듯 기독교 대표들이 천도교 및 불교 인사들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심리적 갈등과 번민이 없지 않았다. 2월 20일 이승훈이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과 회합하여 기독교-천도교 연합방침을 확정한 후 기독교측 내부에 반발이 없지 않았다. 남감리회측 논의를 처음 시작했던 정춘수는 이승훈으로부터 “천도교와 함께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천도교와 합동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것은 우리는 기독교 목사의 신분이므로 감정으로써 일을 하면 그것은 인도 정의에 의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천도교에서는 어떠한 생각으로 하려는지 알 수 없으므로 합동하는 것은 불가하다.”면서 기독교만으로 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을 한 후 정춘수는 원산으로 내려갔고 2월 28일에야 자신의 이름이 (자신의 주장과 달리) 천도교 및 불교 대표들과 함께 ‘민족대표’ 명단에 포함된 것을 발견했다. 그가 3월 1일 저녁 서울에 도착한 후 5일 만에 경찰에 자수한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으로 추정된다.

2월 20일 이승훈과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의 회합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연합으로 운동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이후 기독교측 내부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을 벌인 대목이 운동방법론에 대한 것이었다. 논의 초기부터 ‘독립선언론’으로 방향을 잡은 천도교측과 달리 기독교측 인사들은 개인에 따라 입장을 달리했다. 재판과정에서 진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기독교측 민족대표들의 입장을 분석하면, 독립선언론 입장을 취한 인사는 이승훈과 이명룡, 오화영, 신석구 등 4며이었고 독립청원론 입장을 취한 인사는 길선주와 양전백, 김창준, 이갑성, 박희도, 신홍식, 정춘수 등 7명이었으며 이필주와 박동완, 최성모 등은 입장이 불분명했다. 숫자로 보면 청원론이 우세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기독교측 독립운동 논의는 윌슨 대통령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 원칙과 이 문제를 논의할 파리 평화회의에 대한 소식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독립운동은 파리 평화회의에 민족 대표를 파견하여 월슨 대통령과 평화회의에 참석하는 열강국 대표들에게 “조선도 이번 기회에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 호소하는 동시에 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일본 정부와 총독부, 의회에도 “조선의 독립을 허락해 달라.” 청원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2월 초 상하이에서 파견된 선우혁을 만남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이승훈도 초기에는 ‘청원론’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2월 16일 평양 기홀병원에서 이승훈을 만난 길선주의 재판증언에서 확인된다.

“이승훈이가 나에게 대하여 정부와 총독부에 대하여 독립청원을 하고 또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킨다고 말하였다. 나는 청원서에 명의를 내는데 승낙하고 인장을 보냈지 선언서에 대하여서는 찬성한다거나 찬성하지 않는다거나 말한 일이 없고 그 독립운동에 찬성할 뜻에 답하여 모든 것을 이승훈에게 맡기겠다고 말하였다.”

이승훈은 일본 정부와 총독부에 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고 일반 시민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선언서를 인쇄, 배포하는 식으로 운동을 시작하였다. 길선주는 이승훈을 만나기 전에 이미 상하이에서 온 선우혁으로부터 “인민 대표가 정부와 총독부에 독립청원을 하면 독립을 허락할 것이며 타국에서도 이렇게 하여 독립을 하고 있으니 조선서도 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같은 내용으로 참여를 권하는 이승훈에게 동참할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길선주는 후에 재판정에서 “나의 생각에도 총독부와 기타 당국에 제출할 청원서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원하는 일을 말하는 것과 같으므로 그런 줄로 생각하고 대표자로 명의를 기재할 것을 승낙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길선주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나온 이후에도 여전히 ‘청원론’ 입장을 고수하였다.

양전백도 ‘청원론’ 입장을 취하였다. 그도 재판정에서 “함태영이가 [2월 27일] 이 선언서를 보일 때 비로소 피고는 그 취지에 찬성하였는가?”라는 판사 질문에 “찬성한 것이 아니다. 총독부에 청원하는 것은 큰일이므로 찬성하고 있었으나 선언서와 같이 적은 일에 대하여서는 오늘까지도 불찬성이다.”고 대답하였다. 이갑성도 2월 16일 자기 집에서 모인 기독교 대표자 회합에서 “선언서의 발표는 좋다고 생각하나 그 발표를 우리들 무자격자로써만이 하게 되면 일반이 자격을 인정하여 주지 않을지도 모르므로 그럴 바에야 조선에 대하여 모든 권력을 가진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제안하여 참석자들의 동의를 얻었다. 천도교와의 합작을 반대했던 정춘수도 강력한 ‘청원론’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2월 20일 오전 박희도의 협성학교 사무실에서 모인 기독교측 회합에서 “독립은 아직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독립을 하려면 다른데 간섭 없이 조선 사람만으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결이란 것을 이해하며 민족자치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조선민족 자치의 청원서를 제출하고 기타 조선 내의 각 사회단체 또는 각국 영사관에게도 그 일을 통지하자.”고 제안하여 참석자들의 동의를 얻었다. 이렇듯 논의 초기 단계에서 기독교 진영은 ‘청원론’ 입장을 취하였다.

이런 기독교측 입장은 천도교측과의 협의 과정에서 바뀌었다. 특히 2월 21일 최린의 집에서 이루어진 이승훈과 함태영, 최린 등 3인 회동에서 운동방법론에 대한 집중토론이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서 최린은 천도교측 방법론에 대하여 “일본정부에 대하여 조선의 독립을 허하여 줄 청원서를 제출하고 또 동일한 문서를 조선총독부와 의회, 정당 수령에게 보내며 한편 파리 강화회의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여 주시를 희망하는 뜻의 탄원서를 송부하고 조선인민에게는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는 것”이란 설명을 들었다. 최린은 천도교측이 일본에 보낼 청원서와 국제사회에 보낼 탄원서도 준비하지만 가장 큰 의미는 민족사회를 향한 <독립선언서> 배포에 두고 있음을 밝혔다. 이에 대하여 함태영은 기독교측은 청원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최린과 토론을 전개했다.함태영: [기독교측에서는]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려고 하면서 독립선언서를 인민에게 배부할 생각은 없다.

최린: 정부에 청원하는 것은 당사자에 대하여 의견을 진술할 따름이므로 그런 것은 민족자결의 의사표시가 될 수 없으니 그대들이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의 방법과 상위되니 그대들과 합동할 수 없다.

함태영: 그러면 독립선언서를 먼저 배부하는가 또는 정부에 대한 청원서를 먼저 제출하는가.

최린: 독립선언서 발표 당일 총독부와 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한다.

함태영: 독립선언서를 배부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의견과 다르니 다시 한 번 협의한 뒤 통지하겠다.

 

선언서와 함께 청원서와 탄원서를 발표한다는 것은 천도교도 기독교도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문제는 선언과 청원 사이에 어떤 것에 보다 중요한 의미를 두고 집중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천도교측은 ‘선언’에, 기독교측은 ‘청원’에 무게를 두었다. 최린은 개인적으로 강력한 ‘선언론’ 주창자였다. 그는 이승훈과 함태영에게 “지금 독립운동은 윌손씨가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독립운동이므로 독립선언이어야지 독립청원은 의의가 없다. 독립운동은 현하 조선 안의 사회상으로서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동으로 하지 않으면 전 민중을 총동원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독립운동의 일원화가 조선민족의 혼을 발휘할 수가 없다.”고 역설하면서 기독교측도 ‘선언론’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런 최린의 호소에 이승훈과 함태영이 호응하고 기독교측 인사들을 설득하기로 하였다.

최린과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이승훈과 함태영을 곧바로 안세환과 박희도를 불러 회담 결과를 알려주며 “우리는 원래 독립선언서를 배부할 의사가 없었으므로 천도교와 분리하여 별도로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던 것이지만 이 주장을 포기하고 천도교파의 주장대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는 동시에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자.”며 설득하였다. 특히 이승훈은 “천도교에서는 절대로 청원을 하지 않기로 한다 하므로 천도교와 합동한 이상 어쨌든지 독립선언을 아니할 수 없어 그 일을 결정하였다.”며 <독립선언서> 발표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천도교와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 운동방법론 부분에서 기독교 쪽이 양보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면서 선언서 발표와 함께 기독교측에서 추진했던 청원서와 탄원서도 함께 발표하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런 방향 전환(청원론→선언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이탈한 기독교 인사도 없지 않았다. 오기선은 대표적이다. 그는 2월 20일 함태영 집 회합부터 논의에 참가했는데 “먼저 정부에 독립의 청원을 하여 그 희망을 얻은 후 독립선언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청원론 입장을 표명하였지만 2월 23일 “천도교와 합동하여 독립선언서를 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그 일에 대하여 반대하고 결국 독립선언을 하는데 참석하지 않았다.”

기독교측이 주장했던 독립청원론은 정치적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비폭력 운동노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독립선언론 입장에서 보면 청원론이 소극적이고 비굴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일본의 식민통치라는 정치적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 틀 안에서 독립을 추구하려는 비폭력 방법론이었다. 특히 성경을 ‘절대 권위’로 인식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성경 구절을 근거로 (바람직하지 않은) 세속 권력에도 복종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라 가르쳤다. 그런 배경에서 한반도의 정치적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일본정부에 우선 “독립을 시켜 달라.”고 청원하고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에 참가하는 열강국 대표들에게 “조선이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 호소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라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일본정부가 허락하든 말든) “우리는 독립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일본의 무력 탄압을 불러올 뿐 아니라 두 민족 간의 무력충돌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방안이었다. 천도교측에서는 처음부터 운동 원칙에서 ‘비폭력’을 표명하였지만 25년 전(1894년)의 ‘동학농민항쟁’을 기억하고 있는 기독교인들로서는 천도교측의 폭력시위에 대한 우려를 완전히 털어낼 수 없었다. 기독교 시각에서 볼 때 천도교의 독립선언론은 ‘무장 투쟁론’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위험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승훈이 2월 21일 회담에서 최린에게 “천도교측에서는 만주방면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한다는 풍설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라고 질문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무력 충돌’에 대한 우려와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측이 ‘선언론’으로 전환함으로 천도교와 기독교 연대는 지속되었다. 이에 대하여 훗날 최린은 “우리 3인의 회합에서 의견이 일치된 것은 삼일운동의 근본방침을 결정한 중요한 사항이었다.”고 증언하였다. 이처럼 기독교측을 대표하여 천도교측과 협상하였던 이승훈과 함태영의 판단력과 지도력이 있었기에 종교간 연대는 유지될 수 있었다.

거사 일을 3월 1일로 정하는 과정에서도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협의가 이루어졌다. 3·1운동은 1919년 월 18일 파리에서 개회된 만국평화회의와 1월 22일의 고종황제 승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추진되었다. 3월까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파리 평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송하여 독립의지를 표명하는 것과 3월 3일로 예정된 고종황제 발인예식을 전후로 하여 서울에 몰려들 군중을 대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준비되었다. 우선 최린은 해방 후 증언록에서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게 된 철학적, 종교적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예로부터 천시(天時), 지리(地理), 인화(人和)는 사업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3대 요건이라고 하는 말도 있거니와 이러한 시기야말로 가위(可謂) 천여(天與)의 시기라 한 것이다. 둘째로 이 날은 조선민족에 영원한 기원이 될 날이다. 이 운동은 조선민족의 성스러운 과업으로서 타일에 이 시일과 이 운동을 합쳐서 부르게 된다면 그것이 곧 이 운동의 명사가 되는 것이라 이름이란 단체를 대표하는 말이므로 이름과 실체가 부합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제 3월 1일을 요약해서 부르게 되면 ‘삼일’이 되고 여기에다 운동을 더해 붙이면 ‘삼일운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삼일’이란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철학적 용어로서 다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말하자면 삼(三) 교단에 일체가 되어서 일으킨 운동이라는 의미도 되고 영토(嶺土) 인민(人民) 주권(主權)의 삼(三) 요건으로서 일(一) 국가가 성립된다는 의미로서 삼위일체가 부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최린의 진술은 해방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다분히 ‘자의적’ 해석과 적용이 개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19년 당시 급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대표자들이 이렇듯 종교·철학적 의미를 고려하며 ‘차분하게’ 거사일정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거사일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2월 20일 이승훈과 함태영이 최린과 권동진, 오세창, 최남선 등 천도교측 인사들과 만나 기독교-천도교 연합으로 운동을 전개하되 ‘독립선언’으로 운동방법론을 확정하면서부터 이루어졌다. 즉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 대표자들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배포하는 시점을 잡기 위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대표자들은 자연스럽게 ‘배례(拜禮) 군중’이 많이 모이는 ‘국장’을 전후로 한 시기에 거사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3월 1일로 구체적인 날짜가 결정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천도교와 기독교측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선 박희도는 2월 20일 오전 자신을 찾아온 강기덕에게 “천도교와 예수교 연합으로 하되 국장 2일 전이나 2일 후가 될 것이다.”는 언질을 주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2월 20일 저녁 박희도 집에서 이승훈과 정춘수, 오화영, 박희도, 오기선, 신홍식, 이갑성, 안세환, 현순 등이 회합하여 논의하면서 “국장시(國葬市, 3월 3일)를 이용하여 선언서를 인쇄, 배포할 것”을 의논하였다. 그리고 하루 뒤인 2월 21일 저녁 이갑성 집에서 모인 기독교측 대표자 회합에서는 천도교와의 합작을 재검토하며 ‘청원론’으로 방향을 잡은 후 “청원서는 빨리 제출하여 국장 후 3월 4일에 그 일을 일반 인민에게 알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렇듯 기독교측 대표자들이 모일 때마다 거사 예정일이 바뀌었다. 그것은 운동의 성격과 방법론에서 ‘일치된’ 의견를 도출해내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월 21일 이후 이승훈과 함태영이 기독교측 실무대표로 최린과 자주 만나 운동방법과 절차에 대해 협의하면서 거사일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즉 최린과 이승훈, 함태영 등은 거사일정에 대하여 의논하다가 2월 25일 회합에서 “목하 강화회의 진행 중임으로 끝나기 전에 하는 것이 좋고, 국장 중이어서 많은 사람이 지방에서 모이게 되니 그 무렵에 발표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3월 1일 발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승훈은 이 같은 결정을 그날 이갑성 집에서 모인 기독교 대표자 회합에서 밝혔다. 그 무렵 최남선이 작성하여 최린에게 전달되었던 <독립선언서> 원고본도 나와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대표자들에게 회람되어 읽히기 시작했다. 민족대표자들의 선언서 날인은 2월 27일 이루어졌다. 최린은 재판정에서 독립선언식을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거행하기로 결정한 과정과 배경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문: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발표하기로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는가.

답: 일시 및 장소에 대해서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시에 대해서는 가급적으로 빨리 발표하지 않으면 발각될 우려가 있었고 또 이태왕의 국장 전에 발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해서 3월 1일을 택했고, 장소는 파고다공원이 중앙에 있고 국장 때문에 시골 사람들도 다수가 들어가므로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데 형편이 좋을 것으로 그곳을 골랐던 것이다.

문: 최초에는 3월 5일에 발표하자는 말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답: 그런 말은 없었지만 최초에 3월 2일이라는 설이 나왔으나 2일은 일요일로 예수교파의 형편이 나쁘다는 것으로 3월 1일로 했던 것이다.”

위 진술에서 천도교측과 기독교측 논의 과정에서 한 때 3월 2일로 거사일로 정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3월 3일(월요일) 국장일에 최대 인파가 몰릴 것은 당연하고 그래서 기독교측에서는 3월 3일 거사를 고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종황제 발인예식이 거행되는 날 군중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는 사회적 통념을 고려하여 국장 직후나 직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국장 후는 ‘파장’(罷場) 분위기라 군종 동원이 쉽지 않았고 그렇다면 국장 하루 전에 가장 많은 인파가 서울에 몰려들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국장 하루 전인 3월 2일이 일요일(주일)이어서 기독교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교회 예배에 전념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하루 더 당겨 3월 1일, 토요일을 거사일로 정한 것이다. 여기서 ‘종교적’ 요소, 특히 일요일을 ‘안식일’로 규정하여 세속적인 행사를 금하는 기독교 관습이 고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도교나 불교측으로서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3월 2일이 거사에 가장 적합한 날이겠으나 목회자들이 대부분인 기독교측 대표자들의 입장을 존중한 결과였다. 이렇듯 3월 1일 거사일 결정도 종교간 타협과 양보의 산물이었다. 이런 식으로 3·1운동 모의과정에서 ‘종교간 연대’는 빛을 발하였다.

 

3. 민족대표들의 투옥과 그 이후

3.1 재판정에서 드러난 독립의지

계획했던 대로 3월 1일 오후 2시, 이승훈과 이필주, 오화영, 양전백, 이명룡, 이갑성, 신홍식, 오화영, 신석구, 박희도, 김창준, 박동완 등 기독교측 대표자 12명은 종로 인사동 태화관(명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천도교와 불교 대표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경무청에 연행되었다.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 장소를 처음 예정했던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옮긴 것이나 독립선언식 후 만세시위를 벌이지 않고 곧바로 ‘자수 형태로’ 경무청에 연행된 것은 ‘종교인’으로서 폭력시위로 인한 희생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을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전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렇게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지 못한 기독교 대표는 길선주와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등 4명이었다. 기독교 대표로 제일 먼저 이름을 올린 길선주 목사는 2월 23일부터 황해도 장연에서 사경회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2월 27일 평양에서 내려온 안세환으로부터 3월 1일 거사 소식을 들은 후 2월 28일 장연을 출발하여 기차 편으로 3월 1일 저녁 서울에 도착, 곧바로 경무청에 자수하였다. 원산에 있던 정춘수 목사도 2월 28일 서울을 다녀온 곽명리를 통해 3월 1일 거사소식을 듣고 3월 1일 아침 원산을 출발, 기차 편으로 그 날 저녁 서울에 도착해서 몸이 불편하여 종교교회 오화영 목사 집에 머물러 요양하다가 3월 7일 경무청에 자수하였다. 유여대 목사는 2월 23일부터 2월 28일까지 의주 용운동교회 사경회를 인도한 후 3월 1일 오후 2시에 의주 서부교회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을 주도한 후 곧바로 의주 헌병대에 검거되었다가 신의주청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거사 준비단계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중국 및 만주 방면 연락책임을 맡은 김병조 목사는 3월 1일 유여대 목사와 함께 의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경찰의 체포를 피해 평북 일대를 돌며 만세운동을 지도하고 3월 7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그래서 김병조 목사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체포되지 않은 유일한 인물로 상해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렇게 해서 중국으로 탈출한 김병조를 제외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2명과 선언서에 서명하지는 않았지만 독립만세운동 초기 논의과정에 참여했던 기독교계의 함태영과 안세환, 김세환, 김지환, 천도교계의 현상윤, 최남선, 송진우, 임규, 박인호, 노헌용, 이경섭, 한병익, 김홍규, 청년 학생계의 강기덕과 김원벽, 정노식, 김도태 등 17명도 함께 체포되어 함께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들 49명 가운데 예심이 끝나기 전에 옥중 순국한 천도교 대표 양한묵을 제외한 48인이 병합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들에게 ‘민족대표 48인’이란 칭호가 붙여졌다. 이들은 서울 남산의 경무총감부 유치장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은 후 3월 14일 검찰에 송치되면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심문을 받은 후 1919년 5월 5일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예심재판에 회부되었다.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나가시마(永島雄藏)는 3개월 심리 끝에 1919년 8월 1일, “피고들의 선동으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야기함에 이르게 한 사실로서, 형법 제77조에 해당하는 범죄로서, 조선총독부 재판소령에 의거, 고등법원 특별권한에 속하는 것”이라 판결하였다.

이런 예심 판결을 접수한 고등법원 특별형사부는 8개월간의 심리 끝에 1920년 3월 22일, “내란의 교사(敎唆) 죄가 성립함에는 폭동을 수단으로 하야 정부를 전복하며 또는 방토(邦土)를 빼앗으며 그 조헌(朝憲)을 문란하는 바의 목적을 달하는 것을 교사한 행위가 있다.”는 혐의로 ‘내란죄’로 바꾸어 경성지방법원을 관할 재판소로 지정하였다. 고등법원 형사부가 징역형으로 끝나는 보안법이나 출판법 위반이 아니라 사형이 가능한 ‘내란죄’로 죄목을 바꾼 것은 민족대표들이 예심 재판 과정에서 반성하는 ‘개전(改悛)의 정’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강한 독립의지를 밝힌 것과 함께 3월 이후 전국으로 확산된 만세시위가 폭력시위로 바뀐 때문이었다. 일종의 ‘괘씸죄’였다. 그렇게 해서 1920년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 형사부 1심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심 재판은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허헌을 비롯한 변호사들은 고등법원 특별형사부 판결문에서 “본건을 경성지방법원에 송치한다.” 하지 않고 “본건의 관할을 경성지방법원으로 지정한다.”고 한 것을 두고, “경성지방법원이 사건을 다룰 법적 근거가 없다.”며 ‘공소불수리’(公訴不受理, 재판 자체가 불법이라는 뜻)를 주장했다. 변호사들은 피의자들과 함께 ‘불법적인 재판’을 거부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경성지방법원은 변호인측의 ‘공소불수리’ 주장을 받아들여 재판을 곧바로 고등법원 항소심으로 올려 보냈다. 그리하여 민족대표 48인은 지방법원 1심 판결을 받지 않고 바로 고등법원 항소심 재판정에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20년 9월 20일, 옥중에서 투병 중인 손병희를 제외한 47명 민족대표들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일반인들이 방청하는 가운데 경성복심법원 법정에 섰다. 김병조를 제외한 기독교 서명대표 15인도 공개법정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와 배경, 감회와 심정을 숨김없이 밝혔다. 그 내용을 교계 신문 <기독신보>가 간략하게 취재 보도하였다.

우선, 교파를 초월하여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천도교측과 협상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총괄 지휘했던 이승훈에 대한 심문 내용이다.

“‘일한합병에 대한 반대이지?’ 하는 재판장의 심문에 대하야 피고는 도도한 열변으로 ‘자기는 누구나 마찬가지로 당연히 조선 독립을 희망할 것이니 어느 누가 조국을 생각지 아니하며 어느 누가 병합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아니하겟는가.’ 하얏고 자기가 각 교파의 연락을 주장하고 스스로 예수교측의 운동을 맛허 가지고 피고 이명룡, 양전백, 김병조, 길선주 등 각 유력자를 가입케 하얏슴을 진술하고.”

 

다음으로 양전백 목사의 진술이다.

“십삼년 전부터 예수교회 목사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결코 민족자결을 주창한 미국 대통령의 말에 의하야 행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첵코’ 민족에게 대한 태도를 보아 조선은 당연히 독립이 될 줄로 알았노라 하엿스며.”

 

이승훈, 양전백과 같은 평북노회 소속의 이명룡 장로에 대한 심문 내용이다.

“조선독립운동의 동기와 및 그의 감상에 대한 심문이 잇섯고 다시 독립운동과 및 선언서의 배포방법에 대한 심문이 잇섯으며.”

다음은 길선주 목사에 대한 심문 내용이다.

“평양 기홀병원에서 이승훈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듯고 자기는 눈이 잘 보이지 아니하니 몸으로는 못하나 일홈으로는 참가하겠다 하얏슴을 진술하고”

다음은 기독교청년회 간사로서 서울에서 미감리회와 남감리회, 장로교 대표와 청년 학생 대표들을 연결하며 독립운동 실무를 맡아 했던 박희도 전도사에 대한 심문 내용이다.

“감리교의 목사로 ‘일한합방에 대한 불평이 잇고 조선독립을 희망한다.’ 하고 피고의 집에서 신홍식, 오기선, 이승환 등이 모혀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협의를 할 새 10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은 관계로 일본과 우방의 의를 돈독케 하고 또한 동지자 모집 등에 대한 두 가지 작정이 잇섯고 천도교 예수교 양교 합동에 대하야는 먼저 방법과 내용을 알리기로 하얏다 하고 다시 천도교에서 밧은 돈 5천 원의 용처를 주문하매 상해 가는 노비로 현순에게 2천원, 일본 가는 노비로 안세환에게 7백원, 그 외 1백원, 2백원 등 동지자의 각지 출장비로 지출하얏슴을 말하고 학생 강기덕 김원벽 등과의 연락에 대하야는 상당한 전문학교의 학생임으로 자기의 계획한 운동을 그대로 만류할 수 없음으로 내용을 말하얏다 하고.”

다음은 세브란스병원 약제사로서 이승훈과 함께 서울에서 기독교계 실무 대표로 활약했던 이갑성의 심문 내용이다.

“‘합병을 반대하고 독립을 희망하며 무삼 필요로 일본에 청원서를 제출하엿는가.’ 심문하매 ‘조선은 물론 독립이 되겟스니가 먼저 우방인 일본의 도움을 얻어야 하겟슴이라.’ 하얏고 예수교편의 선언서 배포는 자기가 맛헛슴을 자인하고 동지를 모집하랴고 경상남도에 갓든 사실을 진술한 후.”

배재학당을 졸업하는 아들 졸업식에 참가하기 위해 해주에서 올라왔다가 독립운동에 참가한 최성모 목사의 심문 내용이다.

“야소교의 목사로서 ‘역시 조선 독립을 그윽히 바라든 터이라. 박희도에게서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자진하야 참가하얏다.’ 하고 그 외에 선언식 당시의 광경에 대한 자세한 심문이 잇스매 이를 일일이 진술하얏스며.”

 

다음은 3개월 전에 공주읍교회에서 평양 남산현교회로 임지를 옮겼다가 평양 기홀병원에 위장 입원한 이승훈으로부터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참여한 신홍식 목사의 진술이다.

“감리교회의 목사로 ‘일한합병에 대하야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엇더니 점점 압박이 심함을 좃차 독립 사상은 날로 더하야졌다.’ 하고 평양 기홀병원에서 이승훈을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찬성 참가하얏슴을 진술하고.”

 

다음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던 김창준 전도사의 심문 내용이다.

“감리교 전도사로 ‘조선은 사천년 역사국이라. 이를 빼앗긴 것은 절통한 일이나 스스로 위로하고 잇는 한 편으로 그윽히 두 가지 기회, 조선민족의 독립심이 분발할 때와 조선민족의 실력이 충실할 때를 기다리고 잇든 중 박희도를 맛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곧 찬성하엿다.’ 하고 다시 말을 이어 열렬한 웅변으로 조선의 독립할 이유를 도도히 진술하엿스며.”

 

다음은 기독교 대표자들에게 회합 장소를 내주었던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의 심문 내용이다.

“감리교 목사로 ‘일한합병에 대하야는 이것이 우리의 죄 값으로만 알고 이 죄가 다 없어질 때에는 조선이 다시 독립 될 줄을 생각하엿더니 월손 대통령의 교서 가운데 민족자결주의에 의하야 엇더한 소약국이던지 독립을 엇을 수 잇다는 말을 보고 이때가 조선의 두 번 독립될 때로 깨다랏다. 그리하야 이 운동에 참가하엿다.’ 하고.”

 

다음은 1년 전 개성에서 서울로 올라와 종교교회를 담임하며 정춘수 목사와 함께 남감리회측 모의를 처음 시작했던 오화영 목사의 진술 내용이다.

“감리교의 목사로 ‘합병을 반대하고 독립을 희망하는가.’ 하는 심문에 피고는 열렬한 태도로 ‘4천년 력사를 가진 조선을 일조에 일본에게 빼앗기엇거던 반대하는 회포와 독립코저 하는 희망이야 엇지 다 말하리오. 그러나 다만 시간문제이나 어느 때던지 조선은 반드시 우리의 조선이 될 줄 알고 오늘날 이 자리에서 이러한 수치를 당하면서도 생명을 보존하야 익어가는 조선 독립을 기다리고 잇든 차에 정춘수에게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참가한 것이라.’ 진술하고.”

 

오화영 목사로부터 권유를 받고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늦게 서명에 참여한 신석구 목사의 진술 내용이다.

“‘합병에 대한 불평과 독립에 대한 희망은 누구나 일방이니 나는 이것을 기다리고 이때까지 살어왓노라.’ 진술하고 다시 오화영의 말을 듣고 운동에 참가하얏스며 그 외에 선언서 배포에 대하야 몇 마디의 문답이 잇섯고.”

 

원산에서 올라온 정춘수 목사의 진술이다.

“감리교의 목사로서 ‘사천년 역사를 가진 조선을 일코 엇지 분하지 안으리오. 어느 때이든지 다시 독립을 희망함은 정정당당한 일이라 다시 무를 필요도 없다.’ 하고 ‘박희도에게서 말을 듣고 스스로 자진하야 운동에 참가한 것이오 남의 권고를 드른 바는 아니라.’ 하얏스며.”

 

다음은 장·감 연합 신문 <기독신보> 주핑이었던 박동완 전도사의 진술이다.

“기독신보사의 서기로 ‘조선 민족은 자존 자립의 정신이 잇고 독립할 기회만 기다리고 잇던 터이라 물론 절대로 합병을 반대하고 절대로 독립을 희망하오.’ 라고 진술하고 그 외에 운동 참가의 경로와 선언 당시의 광경에 대한 몇 마디 문답이 잇섯스며.”

 

마지막으로 평북 의주에서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고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유여대 목사의 진술이다.

“장로교의 목사로 ‘독립에 대한 감상은 다만 하나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잇섯노라.’ 하얏스며 그 외에 독립운동에 참가한 경로와 운동방법과 선언 당시의 광경에 대한 자세한 심문이 잇섯고.”

 

이상에서 <기독신보>가 보도한 기독교 대표들의 심문 및 진술 내용을 종합하면 “1) 4천년 내려오던 역사와 문화, 강토를 일본에 빼앗긴 것을 억울하게 여기며, 2) 강제 합병 이후 한민족을 탄압하는 식민통치에 반대하면서도, 3) 나라를 빼앗긴 것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민족의 죄 값이라 여겨 회개하며 기도하던 중, 4)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으로 약소민족 국가들이 독립할 기회를 얻게 된 시대 상황에서, 5) ‘합병 이후’ 조선의 우방을 자처했던 일본도 우리 민족의 독립을 허락할 것으로 믿고, 6) 민족의 독립이 하나님의 명령, 하늘의 뜻인 줄 알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기독교 대표들 사이에 운동 방법론을 두고 ‘선언론’과 ‘청원론’ 사이에 이견과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조선의 독립’이라는 운동 목적에 대해서만큼은 일치된 입장을 취하였다.

이처럼 재판 석상에서 ‘확고한’ 독립의지를 밝힌 민족대표들에게 경성복심법원 형사부 검찰은 1920년 10월 12일 공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에 소요죄(騷擾罪)를 추가하여 이승훈과 최성모, 박동완, 신석구, 박희도, 이갑성, 김창준, 오화영에게 징역 3년, 신홍식과 양전백, 이명룡, 이필주, 정춘수, 유여대에게 징역 2년을 각각 구형하고 길선주에게는 무죄를 구형했다. 유독 길선주 목사에게만 무죄를 구형한 것은 검찰 조사와 재판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소극적 참여 자세 때문이었다. 그리고 1920년 10월 30일 열린 경성복심법원 결심 공판에서 이승훈은 징역 3년, 이갑성과 김창준, 오화영은 징역 2년 6월, 신홍식과 양전백, 이명룡, 박희도, 최성모, 이필주, 박동완, 신석구, 유여대는 징역 2년, 정춘수는 징역 1년 6월을 각각 선고받았고 길선주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된 길선주 목사를 제외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기독교 대표 14인은 선고 형량 외에 ‘미결 구류일수 360일’을 가산하여 실제로 받은 형량보다 1년 더 복역을 해야만 했다. 긴 투옥생활이 시작되었다.

 

3.2 옥중 체험과 신앙연단

그러나 기독교 대표들에게 감옥은 또 다른 ‘하늘의 은혜’를 체험하는 장소였다. 민족대표들은 예심 종결이 이루어진 1920년 3월까지 1년 동안 경무총감부나 서대문형무소 독방에서, 때로는 고문과 악형을 수반한 조사와 재판을 받았다. 목회자가 대부분이었던 기독교 대표들에게 그런 독방 수감생활은 낯설고 두렵고 불안한 경험이었다. 그런 독방에 갇힌 기독교 대표들은 기도와 성경 읽기로 불안과 두려움을 물리치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신비 ‘환상이나 소리’를 동반한 신비체험을 하였다. 이필주 목사의 증언이다.

“감옥에서 나는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을 배우고 기도와 명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감옥에 갇힌 지 얼마 지나지 않던 어느 날, 눈을 감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누군가내 귀를 두드리는 것 같았고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님을 구하라.’ 나는 깜짝 놀랐다, 머리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감방 구석에 있는 변기통 외에는 마루 바닥이나, 벽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감방은 3평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다시 아까와 똑같은 음성이 들렸다. 나는 성경을 들고 폈다.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요한복음 7장 28절에 이르러 눈이 멈추었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된 영이시니.’ 깜깜한 방안에 갑자기 환한 전깃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내 영혼을 사로잡았던 두려움이 사라졌다.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 그들을 위한 것이라면 열 번, 아니 백 번이라도 그들을 위해 기꺼이 죽고 싶었다.”

 

이필주 목사는 독방 안에서 ‘빛과 음성’ 체험을 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신앙 의지가 더욱 굳어졌다. 그런 식으로 길선주 목사도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기까지 1년 7개월 미결수로 독방에서 “요한계시록만 8백독”을 해서 출옥 후 그의 부흥운동 주제가 되는 ‘말세론’의 기본 틀을 잡고 나갔다. 김창준 전도사도 예심종결 때까지 1년 간 독방에서 “몸은 괴로웠으나 영만은 삼층천(三層天)에 거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면서 “요한계시록을 7백 번 읽고 산상보훈을 3백번 읽고 신구약 전체를 5차 통독하고 성경 주석을 7백 페이지 기록하며” 지냈다. 그는 후에(1946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경험한 신비체험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나의 조국, 하늘이 주신 나의 조국을 열심으로 생각하던 중에 하루 밤은 비몽사몽간에 한 묵시를 받았으니 이는 나에게 한 나라를 줌이었다. ‘나라를 네게 주노니 너는 두려워 말라.’는 음성이 하늘에서 들리어졌다. 깨어보니 묵시이었다. 그 때에 붓을 내어 하늘이 주신 나라의 국경을 그려보니 북으로 만주 흑룡강, 남으로 조선 부산, 서로 요하, 동으로 동해이었다. ‘이것은 네 조국의 땅이니 네게 주노니 받으라.’하였다.”

출옥 후 김창준 목사가 미국 유학을 다녀와 중국 북만주지방으로 가서 선교와 목회 활동을 펼친 것도 감옥 안에서 받은 ‘묵시’의 영향이었다. 기독교 대표 가운데 가장 많은 3년 형을 선고받은 이승훈의 ‘옥중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8년 전 105인사건 때 혹독한 고문과 2년 옥고를 치르면서 ‘신앙의 연단’을 받았던 이승훈은 이번에도 “참을 수 없을 지경으로 혹독했던 조선인 옥졸의 학대“를 당하면서도 옥중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시련을 견뎌냈다. 그는 기독교인 수감자 가운데 가장 늦은 1922년 7월 21일, 만기를 1년 앞두고 가석방되었는데 취재차 나온 <동아일보> 기자에게 옥중 생활과 장래 계획을 담담하게 밝혔다.

“내가 감옥에 드러간 후에 한 일은 이천 칠백 페지나 되는 구약을 열 번이나 읽었고 신약전서를 사십 독 하엿스며 그 외 야소교에 관한 서적 읽은 것이 칠만 페지는 될 터이니 내가 평생에 처음 공부를 하얏소. 장래 나의 할 일은 나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에게 밧치어 교회를 위하야 일할 터이니 나의 일할 교회는 일반 세상 목사나 장로들의 교회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이 이제로부터 조선 민족에게 복을 내리시려는 그 뜻을 받아 동포의 교육과 산업을 발달식히고자 하오.”

이승훈 장로는 옥중에서 성경 통독에 집중하였고 그 결과 ‘출옥 후’ 사역에 대한 비전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니 그가 말한 ‘교회’는 목사와 장로들이 사역하는 일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복 주시려는 조선 민족의 교육과 산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구원 받아야 할 세상과 동포사회가 곧 교회요, 사역 현장이었다. 그가 생애 말년에 제도권교회의 무기력한 신앙풍습을 떠나 무교회주의 신앙에 심취하게 된 배경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다. 그렇게 기독교 대표들에게 형무소 감옥은 신앙 훈련과 연단의 현장이었다.

기장 늦게 민족대표 서명에 참여했지만 검찰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 ‘굴하지 않은 독립의지’를 보여줌으로 ‘중형’에 해당하는 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신석구 목사도 옥중에서 종종 ‘환상과 음성’을 듣고 보는 신비체험을 하였다. 특히 독립선언식 직후 경무총감부 독방에 수감된 지 2개월 만에(5월 26일) 옆방에 수감되어 있던 천도교 대표 양한묵이 갑자기 별세하였는데 그의 사망 원인을 두고 독살 혹은 고문치사라는 소문이 감옥 안에 돌았다. 그 소식을 듣고 신석구 목사도 처음에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에 대한 그의 해방 후 증언(1949년)이다.

“나는 그 말을 드를 때 인생이 이렇게 허무함을 경탄(驚歎)하는 동시에 스사로 도라보아 나도 어느 때에 그 같이 될지 아지 못함을 생각하매 스사로 맹성(猛省)치 아니할 수 없어 세간(世間)의 모든 복잡한 사념(思念)을 다 포기하고 다만 묵도(默禱)하는 중 영혼을 예비하고 안저 있으니까 감방이 나에게는 천당 같이 아름다우며 자나 깨나 주님께서 늘 내 우편에 계심을 든든히 믿으매 말할 수 없는 환희중(歡喜中)에 잠겨 지냇다. 나는 40여 년간 신앙생활 중 그 시(時) 5개월간 독방생활(獨房生活)할 때 같이 깃붐의 생활을 한 때가 없다.”

이후 신석구 목사는 그동안 목회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히 했던 기도와 묵상, 성경 읽기에 집중하면서 신앙과 영성의 깊이는 더했다. 또한 종종 ‘환상과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와 견책을 받았고 출옥 후 미래 목회에 대한 비전과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 일반 감방으로 옮겨진 후에는 같은 감방에 수감된 청년학생 독립운동가와 일반 수감자들에게 전도도 하고 신앙지도를 하는 ‘옥중 목회’도 경험하였다. 그는 그렇게 옥중에서 경험하고 생각한 바를 종종 한시로 표현했다. 그렇게 지은 20여 편 한시 가운데 하나다.

 

煌煌上帝鑑吾心 하나님 내 맘 환하게 살피시고

百度千回鍊若金 금처럼 수십만 번 연단 하시네

夢裏無憂能穩枕 꿈속에서 걱정 덜어주시니 잠자리 편하고

胸中不愧可開襟 마음속엔 두려움 없어 옷고름 푸네

丹衷一片惟知義 일편단심 원하는 것은 바르게 사는 것

白髮餘生最惜陰 백발의 남은여생 그늘짐이 애석하나

晝夜盡誠祈禱意 주야로 정성 다해 기도하나니

蒼生塗炭正如兮 도탄에 빠진 백성 바르게살기를

 

이런 식으로 기독교 대표들은 형무소 감옥 안에서 신앙 체험과 연단을 통해 오히려 독립의지가 더욱 견고해졌다. 마치 초대교회 시절 사도들이 감옥 안에서 ‘은총과 기적’을 체험하며 믿음과 사역 의지가 더욱 견고해진 것 같이(행 5:17-23, 12:1-10, 16:19-32, 24:24-27)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고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기독교 대표들도 혹독한 옥중 생활을 거치면서 더욱 굳은 신앙과 독립 의지를 갖추고 출옥 후 미래 목회와 민족운동의 방향과 내용을 설정하였다.

 

3.3 출옥 후 목회 및 사회 활동

그렇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후 재판을 받고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혹은 마포의 경성형무소에서 2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던 기독교 대표들은 1921년 봄부터 풀려나기 시작했다. 우선 1년 6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정춘수가 1921년 5월에 출옥하였고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던 이들 가운데 최성모가 제일 먼저 1921년 9월에 출옥하였고 두 달 후 11월 4일에는 박희도와 신석구, 이필주, 신홍식, 이명룡, 양전백, 박동완 등이 풀려났으며 이틀 후 11월 6일에는 의주에서 체포된 유여대도 석방되었다. 그리고 2년 6개월 선고를 받았던 이들 가운데 김창준이 가장 먼저 1921년 12월 22일 병으로 가석방되었고 오화영과 이갑성은 1922년 5월 5일 만기 출옥하였다. 그리고 제일 늦게 3년형을 선고받았던 이승훈이 만기 6개월을 앞두고 1922년 7월 21일 가석방 출옥함으로 모든 기독교 민족대표들이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들은 3·1운동 이전에 사역했던 교회나 학교, 기관 단체로 돌아가 ‘중단 되었던’ 사역을 재개하였다. 다음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기독교 민족대표 16인의 이후 목회와 사회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이름

3·1운동 이후 경력과 행적

별세연도(나이)

공훈포상

(포상연도)

종교계

일반사회

길선주

장대현교회 목회, 이향리교회 설립, 부흥운동 인도, 『만사성취』, 『말세론』 출간

 

1935(66)

건국훈장 독립장(2009)

이필주

서강교회, 염창교회, 창천교회, 왕십리교회, 남양교회에서 목회

 

1942(73)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김병조

상해 한인교회, 만주 패왕조, 화전자, 팔면통교회, 남만노회장, 용천 동상교회, 용천노회장 역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외교위원장, 사료편찬위원, 『독립운동사략』 편찬, 해방 후 조선민주당 창당 참여, 반공단체 결성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

1950(73)

건국훈장 대통령장(1983)

김창준

서울 중앙교회에서 목회, 미국 게렛신학교와 노스웨스턴대학 졸업, 미국 시카고한인교회 목회, 귀국(1926) 후 중앙교회 목사 및 감리교신학교 교수

신간회 참여, 해방 후 좌파단체 민족주의민족전선 참여, 남북협상차 평양을 방문했다가(1948) 북에 남아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기독교도연맹 의장, 북한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역임

1959(69)

 

양전백

선천북교회에서 목회

선천유치원 설립, 신간회 선천지회 총무

1933(64)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유여대

의주 동교회, 신의주 백마교회 목회, 의산노회장

계몽서적 『면무식』 출간

1937(59)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이갑성

 

민립대학기성회 중앙이사, 신간회 중앙이사, 흥업구락부 참여, 중국 상해 망명(1933) 후 수 차례 체포되어 해주, 평양, 함흥 경찰서에 투옥, 해방 후 독립촉성회 회장, 2대 민의원 선거에서 국회의원 당선, 자유당 최고위원, 광복회 회장

1981(92)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이명룡

덕흥교회 장로, 해방 후 서울 인왕교회 설립

물산장려운동, 정주 미곡통제조합 설립, 해방 후 조선민주당 고문, 삼일혁명동지회 창설, 이준기념사업회 회장

1956(83)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이승훈

무교회주의 관계로 평북노회 장로 면직(1930)

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 동아일보 사장, 조선기근구제회 위원장

1930(66)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박희도

서울 용두리교회 목회

<신생활> 창간 발행, 조선민립대학 기성위원, <신생활> 필화사건으로 2년 6개월 옥고(1922), 수요구락부 창립, 중앙보육학교 설립, 협성실업학교 부교장, 신간회 중앙간사, 친일단체 시중회(時中會) 간사, 친일 잡지 <東洋之光> 창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 및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으로 친일 활동, 해방 후 반민특위에 피체, 육군정훈학교 교수

1952(63)

 

박동완

1928년 하와이 이주 후 와히아와한인기독교회, 카우아이교회에서 목회, <한인기독교보> 편집 겸 발행인,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선교부 이사장

<신생명> 주간, YMCA 중앙위원, 신간회 총무간사, 재만동포옹호동맹 조사위원, 조선교육협회 정치총회 평의원, 흥업구락부 창립발기위원, 하와이 한인협회 창립발기인, 동지회 와히아와지방 대표

1941(56)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신홍식

인천 내리교회 목회, 원주지방 감리사

흥업구락부 가입, 계몽서적 『장수옹』 출간

1939(67)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신석구

원산, 고성, 가평, 철원, 이천, 천안, 진남포 등지에서 목회, 해방 후 서부연회장 역임

신사참배 문제로 천안경찰서 구금(1938), 전승기원예배 및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용강경찰서에 구금(1945), 해방 후 반공비밀결사 결성 혐의로 체포되어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순교

1950(76)

건국훈장 대통령장(1963)

오화영

서울 수표교교회, 종교교회, 상동교회, 연화봉교회에서 목회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위원, 조선민흥회 창립준비위원, 중앙YMCA 회원부 간사, 광주학생사건(1929)과 흥업구락부사건(1938)으로 투옥, 해방 후 정계 투신, 조선정치대학 설립, 2대 민의원 종로구 국회의원 당선, 한국전쟁 중 납북, 재북평화통일촉진위원회 상무위원

1960(81)

건국훈장 대통령장(1989)

정춘수

원산과 개성, 춘천, 서울에서 목회, 적극신앙단 가입, 기독교조선감리교회 3대 감독과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통리자, 해방 후 천주교로 개종

신간회 간사, 흥업구락부 사건(1938)으로 투옥되었다가 사상전향 후 일제말기 대표적인 친일파 교계 지도자로 활약, 해방 후 반민특위에 피체

1951(77)

 

최성모

서강교회와 상동교회 목회, 만주와 동몽고 선교, 만주 대련교회, 천안교회, 예산교회에서 목회

 

1937(63)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회자들은 대부분 교회 목회로 복귀하였다. 석방 후 민족운동이나 사회활동과 거리를 둔 채 목회에만 전념한 목회자들로는 길선주와 이필주, 최성모 등을 들 수 있고 목회에 주력하면서도 민족주의 사회활동에 일정 부분 참여했던 목회자들로는 신홍식과 오화영, 신석구, 유여대, 양전백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해외에서 목회와 독립운동에 전념한 목회자로 김병조와 박동완, 김창준 등이 있으며 평신도 출신인 이승훈과 이명룡, 이갑성 등은 민족주의 사회활동을 꾸준하게 전개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했던 박희도와 정춘수가 1930년대 후반 이후 노골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행각’을 보인 점이다. 이 두 사람은 일제말기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친일파’ 지도자로 활약하였고 그로 인해 해방 후 기독교계 뿐 아니라 일반사회로부터도 ‘실패한 민족운동가’, ‘민족 반역자’로 비난과 비판을 받으며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수모를 겪었다.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기독교 대표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 유공자 포창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애국지사에게 공훈 표창을 시작한 1962-63년에 이승훈과 이필주, 최성모, 이갑성, 신홍식, 유여대, 양전백, 박동완, 이명룡, 신석구 등이 건국훈장을 받았고 해방 후 시베리아 강제노동교화소에 수용된 후 생사불명이 되었던 김병조가 뒤늦게 1983년 포상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가 전쟁 후 ‘피동적으로’ 북한 정권 요구에 응했던 오화영도 1989년 포상을 받았으며 민족대표 가운데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던 길선주도 오랜 논란 끝에 2009년 포상을 받았다. 결국 아직까지 포상을 받지 못한 기독교대표는 일제말기 ‘친일파’ 인사로 전락한 박희도와 정춘수, 그리고 해방 직후 자진 월북하여 북한정권 수립에 협조했던 김창준 등 3명이다. 이런 민족대표들의 사후(事後) 행적의 ‘명암’은 “신앙 양심이든 민족 의지든, 그것을 갖는 것도 힘들지만 그것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는 역사적 교훈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4. 맺음 글: 기독교 지도자의 영적 권위와 지도력

지금까지 3·1운동 독립선언서 서명한 기독교 대표 16인의 활동과 행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3·1운동 당시 절대소수 종교였던 기독교가 독립만세운동의 주역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과 종교적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기독교가 비록 소수 종교였지만 독립만세운동 준비 및 투쟁단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을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째, 기독교 지도자들의 종교적 경건과 실천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6인 기독교 대표의 절대 다수(13명)는 목사 및 전도사였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다수는 1903년 원산 부흥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1907년 평양 부흥운동에 이르는 초기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운동’(Religious Awakening Movement) 기간 중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신학 훈련을 받았다.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과 의미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회개로 시작해서 중생(거듭남)과 성화(성결)로 이어지는 기독교 구원의 본질을 체험하였다는 점이었다. 부흥 집회 때마다 나타났던 공개적인 통회 자복과 회개는 이웃에게 입힌 죄와 피해에 대한 보상 및 배상운동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개종 전에 남의 것을 횡령했거나 절도한 것을 기억하고 금전적으로 주인에게 보상하려는 기독교인들의 ‘양심전(良心錢) 운동’은 교계는 물론이고 일반사회에 적지 않은 감동과 반향을 일으켰다.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을 갖고 교회에 출석하던 한국 교인들을 종교적으로 ‘정화’(淨化, Purification)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초기 부흥운동 기간 중에 통회 자복과 회개를 경험한 기독교인들은 ‘회개의 열매’(눅 3:9)로서 윤리적이고 도적적인 삶을 실천했다. 부흥 사경회에 참석한 교인들은 자발적으로 토론을 거쳐 기독교인으로서 ‘도덕적인 기준’(Moral Stand)을 제정하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교인들이 기독교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죄’로 규정한 행위에는 간음과 절도, 횡령, 거짓말과 같은 인류 보편적인 죄들이 포함되었지만 이 외에 축첩과 노비제도, 인신매매, 조혼, 술과 담배, 아편 같이 기독교 선교 이전 조선사회에서 죄의식 없이 행해지던 폐습과 악행들도 새로운 죄목으로 선정되어 기독교인들의 금기(禁忌) 행위로 규정되었다. 이런 교인들의 ‘청교도적’(Puritanic) 윤리 실천은 불신자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우월감과 존경심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기독교 지도자들의 권위와 영향력은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교회 밖’ 일반 사회로 파급되어 나갔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 때 회개하고 부흥사로 활약한 정춘수 목사와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길선주 목사를 비롯하여 그 어간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목회자가 된 신석구와 신홍식, 오화영, 이필주, 유여대 등 ‘도덕적 완전’을 추구하였던 목회자들이 독립운동에서 민족대표로 활약하게 된 배경이다.

둘째, 복음주의 신앙에 바탕을 둔 민족구원 의식과 실천이다. 한국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초기 선교기간(1885-1910년)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 지배하려고 침략했던 시기와 일치하였다. 특히 1894년 청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한반도 침략을 노골화한 일본에게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빼앗기는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노선과 방법으로 항일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인들은 1896년 서재필과 윤치호가 조직한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충군애국’(忠君愛國), ‘민족자강’(民族自强)으로 대변되는 민족의식을 표출하였고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조직을 통해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기독교인들은 구국기도회(救國祈禱會)로 시작해서 ‘을사5적’을 비롯한 친일파 척결 모의, 순국자결 등 보다 적극적인 형태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1907년 헤이그밀사건과 정미조약 체결, 구한국 부대 해산에 따른 항일의병운동 기간 중 강화와 이천, 천안 등지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민족저항운동 혐의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희생되었다. 그리고 도산 안창호를 중심한 서북지역의 기독교 민족운동 진영과 서울의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상동파’ 민족운동 진영이 1907년 조직한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는 기독교를 바탕으로 형성된 항일 민족저항운동의 구심점으로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의 연대를 이끌어냈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와 희생을 목격한 일반 시민사회는 기독교를 ‘나라를 위한 종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1911년 일제가 신민회를 비롯한 항일 민족운동 진영을 척결하기 위한 정치적 음모로 105인사건을 꾸몄을 때 수 백 명의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악형을 받고, 1백여 명이 수감되거나 옥사하는 모습을 보며 기독교는 ‘민족의 수난 현장에서 민족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종교’로 각인되었다. 그 결과 “잃은 주권을 회복하고 나라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민족운동 진영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긍정적으로 바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런 배경에서 105인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승훈과 이명룡, 양전백, ‘상동파’ 민족운동에 가담했던 최성모와 이필주 등이 3·1운동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렸을 때 기독교계 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지지와 참여를 표하였다. 이는 곧 기독교 복음주의가 추구하는 영혼 구원이 개인 구원으로 끝나지 않고 민족과 사회의 정치·사회적 개혁과 구원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성화’(Social Sanctification)의 실천이었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와 투쟁을 통해 초기 한국 기독교회는 강력한 항일 ‘민족주의’ 성격과 기능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3·1운동 때 기독교는 ‘교회 경계를 넘어’ 일반사회까지 아우르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셋째, 대화와 타협, 양보와 희생을 기반으로 한 종교연대이다. 앞서 살펴 본 감리교 인천지방 감리사 오기선 목사의 경우처럼, 3·1운동의 모의 단계에 참여했다가 운동방법론에서 청원론과 선언론 사이의 이견과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또는 기독교 외에 천도교와 불교 등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연대하는 문제로 운동대열에서 이탈한 이들도 없지 않았다.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지닌 목사들은 목회자의 정치참여와 신조가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의 연대에 대한 교리적, 신학적 고민이 없지 않았다. 신석구 목사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오화영 목사로부터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유받은 후 “첫째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둘째 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상용(相容)키 난(難)한대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하는 문제로 “새벽마다 기도하던 중” 2월 27일 새벽에 “사천년(四千年) 전하여 나려오던 강토를 네 대(代)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대 차질 기회에 차저보랴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직각(直刻)에 뜻을 결정한 후” 서명에 참여하였다. 신석구에게 3·1운동 참여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종교적 신념과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석구 외에도 이승훈과 유여대, 신홍식, 김창준, 박희도 등 다른 기독교 대표들도 재판과정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유를 “하늘의 뜻”, “하나님의 명령” 등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3·1운동 당시 기독교인의 정치참여가 ‘종교적 신념’에 바탕을 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종교적 신념과 결단에 근거하여 기독교 대표들은 종파와 교파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대화와 타협을 바탕으로 ‘종교간 연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 대화와 타협은 종교적 희생과 양보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신석구 목사가 ‘종교적 신념’으로 독립운동 참가 의사를 밝히자 주변에서 “시기상조다. 일본이 쉽게 독립을 시켜주지 않을 것이다.”며 만류하였을 때 그는 “나도 이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당장 독립을 거두려는 것이 아니라, 독립을 심으러 간다.” 하면서 “예수 말씀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것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해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혹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 독립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3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 하여도 만족하다.”고 진술하였다. 결국 신석구는 ‘밀알의 정신’(요 12:24)으로 “죽기 위해”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런 ‘희생적’ 자세가 민족대표로서 신석구의 권위와 지도력을 높여 주었음은 물론이다.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천도교측 인사들과 접촉하며 타협과 협력을 이끌어냈던 이승훈의 권위와 지도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승훈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여러 차례 결렬될 위기를 극복하고 종교간 연대로 3·1운동을 추진하기로 방향을 잡은 후 준비단계의 막바지에 이른 2월 26일, 한강 인도교 근방에서 기독교 대표자들의 회합이 이루어졌다. 박희도와 안세환, 오화영, 이필주, 최성모, 함태영 등 참석자들은 마지막 점검을 하던 중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 33인 명단과 그 순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질서와 순서를 중시하는 ‘봉건적’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던 상황에서 천도교와 불교, 기독교 대표자들을 어떤 순서로 배열하고 인쇄할 것인지는 예민한 문제였다. 더욱이 기독교 대표자들은 장로교와 감리교로 나뉘고 다시 감리교 대표자들은 다시 미감리회와 남감리회로 나뉘어 종파와 교파, 교단 간에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회합 참석자들이 민족대표 33인 순서 문제를 두고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여 ‘어색해 진’ 상황에서 뒤늦게 회합에 참석했던 이승훈은 회장 분위기를 이내 파악한 후,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 하고 일갈하였다. 이승훈의 말 한 마디에 꼬였던 문제는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이런 기독교측의 서명 원칙에 천도교와 불교측도 동의하였다. 그렇게 해서 <독립선언서> 마지막 부분의 ‘조선민족 대표’ 명단은 천도교 대표 손병희를 제일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장로교 대표 길선주, 감리교 대표 이필주, 불교 대표 백용성을 쓴 후 나머지 29명은 가나다순으로 배열하였다. 나이로 보나, 독립운동 전력으로 보나, 3·1운동 준비단계에서 보여준 역할로 보나 이승훈은 다른 어떤 대표들보다 앞머리에 이름을 올려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훈은 기독교가 먼저, 자신이 먼저 양보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자칫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던 종교연합운동으로서 3·1운동의 마지막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3·1운동 기간 중 기독교 지도자들이 보여준 ‘영적 권위’(Spiritual Authority)와 그것에 근거한 ‘사회적 지도력’(Social Leadership)이었다. 종교적 경건과 실천에 기초한 영적 권위가 복음주의 신앙에 근거한 민족구원으로 연결될 때, 기독교는 교회 영역을 넘어 종교연대와 사회연대를 이룰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의 솔선하는 양보와 희생이 교회의 대(對) 사회적 영향력과 지도력은 향상된다. 목회자와 교회의 권위와 지도력이 밑바닥까지 추락한 오늘의 기독교와 사회 현실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권위와 지도력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부록> 기독교 민족대표자들의 행적으로 중심으로 정리한 3·1운동 일지

단계

진행사항

1단계

1918년 11-12월 이승훈, <매일신보>에 실린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관한 기사를 읽고 독립운동 구상

1919년 1월 10일경 박동완과 박희도, <大阪每日新聞>에 실린 윌슨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관한 기사를 읽고 독립운동 구상

1월 20일경 박희도와 동석기, 이천지방 사경회에서 만나 윌슨 민족자결주의 원칙과 독립운동 필요성에 대해 논의

1월 22일 고종황제 승하

1월 28일 이승훈과 양전백, 선천 남교회에서 개최된 평북노회 사경회에 참석 중 <每日申報>에 실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관련 기사를 읽고 독립운동 논의

1월 28일경 박희도, 일본에서 귀국한 여자 유학생 송복순을 통해 도쿄 유학생 독립선언 운동 준비소식을 접함

2월 4-5일경 이명룡과 이승훈, 선천 남교회에서 개최된 평북노회 사경회에 참석 중 민족 자결주의 원칙과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

2월 6일(목) 이승훈과 양전백과 이명룡, 상하이 신한청년당에서 파견된 선우혁을 통해 파리 평화회의 대표자(김규식) 파견운동 소식을 청취

2월 6일 박희도, 저녁 서울 관수동 중국인 식당 대관원(大觀園)에서 모인 서울시내 전문학교 중학교 대표자 모임에 박희도 참석,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움직임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독립운동에 관하여 논의. 이후 박희도는 연희전문학교 김원벽과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 등과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 논의

2월 8일(토) 일본 도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식 거행

2월 9일(일) 선우혁, 평양에서 길선주 목사와 강규찬 목사, 이덕환 장로, 윤원삼 장로 등을 만나 파리 강화회의 대표자 파견운동 소식을 전하며 자금 지원을 요청

2월 10일(월) 박희도, 김원벽을 만나 도쿄 유학생 독립선언 소식을 듣고 서울 학생 중심의 독립운동에 관하여 토론

2월 10일 이승훈, 선천 백시찬 장로 집에서 평양을 다녀온 선우혁을 만나 자금 모금이 여의치 않다는 소식을 들음

2단계

2월 11일(화) 서울에서 천도교측 대표로 활동하고 있던 최남선이 기독교측과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김도태(오산학교 졸업생)를 정주로 보내 이승훈에게 “오산학교 일로 의논할 일이 있으니 상경하여 송진우를 만나라.”는 전갈을 보냈는데, 김도태가 정주로 가던 중 오산학교 교사 박현환으로부터 이승훈이 선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박현환에게 최남선의 서한을 이승훈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 박현환이 선천으로 가서 최남선의 서신을 이승훈에게 전달하였고 이승훈은 그날 저녁 기차로 상경

2월 12일(수) 아침 이승훈, 서울에 도착하여 송진우를 만나 그동안의 천도교측 독립운동 준비사항을 듣고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작하여 운동을 전개하자.”며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평안도 지역 대표를 모집해 달라.”는 요청에 받음. 이승훈은 그날 저녁 선천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전 세브란스병원의 이갑성을 만나 천도교측과 협의한 사실을 전달

2월 13일(목) 이승훈, 선천에 도착하여 양전백 집에서 양전백과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등을 만나 천도교측과 협의 내용을 전달, 김병조와 유여대는 이명룡에게 도장을 맡김

2월 14일(금) 저녁 이승훈, 저녁 기차로 평양으로 출발

2월 15일(토) 아침 이승훈, 평양에 도착하여 기홀병원에 입원, 병원 전도사 서기풍을 통해 손정도 목사를 만나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손정도는 “다른 일로 중국에 갈 계획이라.”며 남산현교회 신홍식 목사를 소개

2월 15일 박희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강기덕을 만나 천도교측 독립운동 소식을 들음

2월 15일 정춘수, 원산으로부터 상경하여 남대문 신행여관에 유숙하며 피어선성경학원에서 개최된 감리교 선교백주년 기념식에 참석, 박희도를 만나 독립운동에 논의(미감리회와 남감리회 연합)

2월 15일 저녁 이명룡 상경

2월 15일에서 20일 사이 박희도, 기독신보사 박동완을 만나 민족자결주의 운동이 일어나면 참가하겠다는 의사 표명

2월 16일(일) 이승훈, 평양 기홀병원에서 신홍식과 길선주를 만나 독립운동 소개하고 동참을 권유, 승낙을 얻은 후 밤기차로 상경

2월 16일 저녁 정춘수, 종교교회 오화영 목사의 초청을 받아 주일저녁예배 설교를 한 후 독립운동 논의

2월 17일(월) 이승훈, 서울에 도착하여 소격동 김승희 집에 유숙, 송진우를 만나 한규설과 윤용구, 김윤식 등 원로대신들을 포섭하려던 일이 실패한 것과 천도교측 운동 소식을 듣고 천도교측과 기독교측 연합 운동방침을 재확인

2월 17일 신홍식, 상경하여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으로 박희도를 방문, 이승훈과 이명룡 상경 소식을 전달

2월 17일 이명룡, 소격동에서 이승훈을 만나 독립운동 진행사항을 청취

2월 17일 이명룡, 협성학교로 박희도를 방문하여 이승훈의 소격동 숙소를 알려줌, 이승훈 숙소에서 박희도와 정춘수, 오화영을 만나 독립운동 논의

2월 17일 저녁 수창동 박희도 협성학교 사무실에서 박희도 정춘수 오화영 이승훈 신홍식 회합, 독립운동방법론과 천도교와의 합작 문제 토론

2월 17일 길선주 장연교회 사경회 집회 인도하러 떠나면서 도장을 안세환에게 맡김

2월 17일 안세환, 저녁 기차로 상경

2월 18일(화) 정춘수, 개성으로 출발

2월 18일 오후 천도교측 송진우, 이승훈을 찾아와 곧 최남선을 만날 것이라 기별

2월 18일 오후 남대문 함태영 집에서 이갑성 안세환 현순 오상근 함태영 등 회합, 주변이 조용하지 못해 이갑성 집으로 옮겨 논의, 이갑성은 학생운동 동향을 말하고 안세환은 “평양의 길선주, 선천의 양전백도 찬성하고 있다.”고 전함. “선언이냐, 청원이냐”를 놓고 논의하다가 청원론으로 의견을 모음

2월 19일(수) 저녁 남대문 이갑성 집에서 이승훈 함태영 안세환 이갑성 현순 오화영 신홍식 박희도 회합, 1) 기독교측 운동방법론으로 청원론을 택하기로 하고 2) 천도교측과의 교섭을 이승훈과 함태영에게 맡기고 3) 청원서에 서명할 대표자를 포섭하기 위해 이갑성을 경상남북도, 신홍식은 평안남도, 이승훈은 평안북도, 오화영은 개성, 박희도는 원산으로 가서 정춘수에게 의뢰하기로 결정

2월 19일 저녁 박희도, 이갑성 집 회합이 끝난 후 근처에서 김원벽을 만나 기독교측 대표자들의 논의 결과를 알려 줌

2월 19일 이승훈, 소격동 숙소로 찾아온 천도교측 최남선을 만나 “한규설 등 원로대신을 포섭하기는 실패하였지만 천도교와 기독교 연합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말을 들음

2월 19일 신석구,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서 오화영으로부터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기도하기 시작

2월 19일 정춘수, 저녁기차로 개성을 출발 상경

2월 20일(목) 오전 박희도, 청년회관으로 찾아온 강기덕으로부터 “천도교, 기독교에서 한다는데 우리도 할 것이다, 종교측에서 먼저 하면 우리도 뒤이어 하겠다. 일자를 알려 달라.”는 말을 듣고 “천도교와 예수교 연합으로 하되 국장 2일 전이나 2일 후에 할 것이며 확실한 시간과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다.” 고 알림

2월 20일 낮 이승훈, 최남선 소개로 최린을 처음 만나 천도교와 기독교 합작 문제를 논의, 기독교측 인사들의 활동 자금 3-5천원 지원 요청, 최린이 이 사실을 손병희에 알렸고 손병희는 천도교 중앙총부 금융관장 노헌용에게 5천원 지급하도록 지시, 이승훈은 최린을 통해 이 자금을 인수하여 박희도에게 맡겨 집행하도록 조치

2월 20일 함태영 집에서 이승훈 안세환 오화영 함태영 오기선 박희도 회합, 이승훈은 천도교측과 회담 내용에 대하여 “1)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2)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 15인 대표를 선정하고, 3) 선언서는 최린이 준비하고, 4) 선언서 외에 일본정부와 총독부에 건의서를 보내고 상하이에도 서한을 보내 열강국에 독립 지원을 호소하고, 4) 상하이에 현순, 일본에 안세환을 문서 전달자로 보내기로” 협의한 사실을 알림. 참석자들은 “독립 선언이냐, 독립 청원이냐”를 놓고 토론

2월 20일 낮 신홍식, 기독교청년회관으로 박희도 방문

2월 20일 저녁 수창동 협성학교 박희도 사무실에서 이승훈 오화영 정춘수 오기선 신홍식 등 회합(감리교 모임에 이승훈 참석), 천도교와 합작 문제를 갖고 또 다시 열띤 토론. 정춘수가 ‘청원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천도교와 합작에도 반대 의사 표명. 정춘수의 의견대로 기독교측은 청원운동으로 진행하기로 하되 이승훈과 함태영은 천도교측과 계속 교섭하고 동지 포섭을 위해 이승훈과 신홍식이 평안남북도, 정춘수가 함경도, 오화영이 개성을 맡기로 하고 거사일을 3월 3일(국장일)로 결정. 정춘수는 원산으로 출발

2월 20일 밤 11시경 박희도, 수창동 숙소로 찾아온 김원벽에게 기독교측 회합 결과를 알리며 “거사일은 국장 전후 2일이 될 것이다.” 알려 줌

2월 20일 이갑성, 세브란스의학생 이용설로부터 세브란스의학교 학생들의 운동 준비 소식을 들음

2월 20일 저녁 이승훈, 권동진 집에서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 천도교측 인사들과 회합, 천도교와 기독교 합작으로 진행하기로 재확인

2월 21일(금) 오화영, 개성으로 가려고 남대문 역에 나가 차표 끊다가 신홍식으로부터 오후 함태영 집 회합 사실을 알고 여행 중지

2월 21일 오후 2시 함태영 집에서 신홍식 함태영 오화영 이승훈 오기선 박희도 등 회합, 천도교와 합작 문제를 논의하다가 저녁에 이갑성 집에서 다시 회합하기로 결정

2월 21일 오후 7시 남대문 이갑성 집에서 함태영 이승훈 박희도 신홍식 오기선 안세환 김세환 현순 이갑성 오화영 등 회합. 천도교와의 합작과 운동 방법론(청원론/선언론) 문제를 갖고 토론하였지만 결론을 얻지 못내리지 못함. 이후 천도교와 합작 문제 등 중요한 사항은 이승훈과 함태영에게 일임하기로 한 후 동지 포섭을 위해 오화영은 개성, 이갑성은 경상도, 김세환은 경기도와 충청도, 신홍식은 평안도를 담당하고 함태영은 이상재를 포섭하는 일과 청원서 작성을 책임지고 청원서 제출을 가능하면 이른 시일에 하되 국장 후 3월 4일 청원 사실을 일반 인민에게 알리기로 하고, 안세환은 일본으로, 현순은 상하이로 가서 평화회의에 통지하기로 결정

2월 21일 저녁 신홍식과 안세환은 평양으로, 정춘수는 원산으로 출발

2월 21일 저녁 이숭훈과 함태영, 최린 집으로 가서 운동방법론과 합작 문제를 갖고 논의, ‘독립선언론’으로 방향을 잡기로 합의

2월 21일 저녁 이승훈과 함태영, 안세환, 박희도 등과 회합. 최린과의 협의내용을 통보

2월 21일 승동교회에서 서울 시내 전문학교 대표자(한위건 김원벽 강기덕 김문진 등) 회합, 손병희가 주도하는 독립운동에 학생도 협조하기로 결의

2월 21일 정춘수, 원산에 도착해서 곽명리 이가순 등에게 독립 청원운동 소식을 전하고 동지로 참여할 것을 권유

3단계

2월 22일(토) 이승훈, 이명룡을 만나 “기독교만으로 실행하지 못할 것이니 천도교와 함께 할 것을” 천명

2월 22일 오화영, 아침 기차로 개성으로 출발, 오후에 개성 도착, 이경중과 김지환을 만나 동지 규합을 부탁한 후 남성병원으로 가서 동생 오은영에게 집안 일을 부탁

2월 22일 이갑성, 경상도 지역(부산, 마산, 대구) 동지 모집을 위해 저녁 기차로 서울을 출발

2월 22일 김세환, 충청도 지역(해미, 공주, 천안, 오산) 동지 모집을 위해 서울 출발

2월 23일(일) 이갑성, 부산에 도착하였으나 동지를 얻지 못하고 마산으로 가서 이상유(이상소), 임학찬 등에게 권유했으나 실패

2월 23일 이명룡, 이승훈을 만나 운동 잔행사항 청취

2월 23일 오전 이승훈, 함태영 집에서 오기선을 만나 <독립선언서>에 명의를 낼 것을 권하였지만 오기선은 운동방법론이 청원론에서 선언론으로 바뀐 것에 동의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

2월 23일 오전 오화영, 개성 남부교회 주일 예배 설교 후 김지환과 만월대로 가서 운동 논의

2월 23일 저녁 오화영, 개성 북부교회에서 예배 후 김지환 오진세 이경중 최중순 이강래등과 만나 협의, 개성 교인들은 정춘수가 와서 전한 내용과 다르다며 의문을 표시, 김지환이 직접 상경하여 이승훈을 만나 사실을 확인하기로 결정

2월 23일 정춘수, 서울 오화영으로부터 “천도교와 합작하기로 했다.”는 서신 연락을 받고 곽명리를 상경시켜 사실을 확인하기로

2월 23일 길선주, 장연교회 사경회를 인도하러 가면서 도장을 안세환에게 맡김

2월 23일 저녁 이승훈, 최남선 안내로 최린을 만나 천도교와 기독교 합작 운동을 최종 확인

2월 24일(월) 이갑성, 대구로 가서 이만집 목사와 이상백, 백남주 장로에게 동지로 참여할 것을 권유, 대구 선교부 브루엔 선교사 만나 독립운동 소식 알렸으나 냉소

2월 24일 오화영,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예배 설교 후 서울 다녀 온 이만규를 만난 후 저녁 기차로 상경

2월 24일 박희도, 중앙교회 김창준 전도사를 찾아가 포섭, 승낙을 얻음

2월 24일 저녁 이승훈과 함태영과 박희도, 최린 집으로 가서 천도교측 인사와 회동, 거기서 처음으로 독립선언서 원고를 처음 보고 거사일을 3월 1일로 확정. 함태영을 기독교측 연락책임자로 선정

2월 24일 박희도, 청년회관으로 찾아온 강기덕에게 운동 진행 사항 알려줌

2월 24일 최성모, 상경하여 배재학당을 졸업한 장남(崔景煥)의 진학 문제로 수청동 박희도를 방문했다가 독립운동 참여 권유를 받고 승락 상담하다가 배재학교 재학 중 본월에 졸업 후 진학 상담차 상경하던 날 밤 수창동 영신학교 박희도(해주 출신) 방문 독립운동 함께 하기로 결정

2월 25일(화) 이갑성, 대구에서 상경하여 함태영으로부터 함태영 만나 현순이 상해로 간 것과 이승훈으로부터 독립선언으로 운동방법론이 변경된 것과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거사하기로 된 것 알게 됨

2월 25일 이명룡, 이승훈으로부터 3월 1일 거사 소식을 들음

2월 25일 오화영, 새벽 서울로 돌아온 후 박희도 집에 가서 “3월 4일 발표하기로 한 것을 3월 1일로 변경하였다.”는 말을 들었음

2월 25일 남대문 이갑성 집에서 함태영 이갑성 박희도 오화영 등 회집, 함태영으로부터 천도교측과 협의 결과에 대해 “최초에는 많은 사람으로 선언서를 발표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시일이 절박하므로 예수교에서 15,6명 천도교에서 15,6명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발표하고 일본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기로 한 것”을 알리고 선언서에 기재할 사항 등을 협의. 기독교측 동지 규합(연명부 작성)은 박희도와 함태영, 선언서 배분은 김창준과 이갑성이 맡기로 결정

2월 25일 최성모, 상경해서 유숙 중인 정동교회 이필주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권유하여 승낙을 받음

2월 26일(수) 박희도, 남대문 이갑성 집에서 연희전문학교 일본인 교수(소기)와 선교사를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

2월 26일 오후 2시 한강 인도교 부근 일본인 식당에서 최성모 박희도 이승훈 함태영 안세환 이필주 이갑성 등 회합. 거사일(3월 1일)과 거사 장소(파고도공원)을 다시 확인, 기독교측 대표자 명단 논의,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전달할 특사로 기독교측 안세환을 선정하여 천도교측 임규와 함께 보내기로 결정. 거사 후 서울에 거주하는 대표자 가족 1인 당 매월 10원씩 두 달 간 보조하기로 결정

2월 26일 곽명리, 원산으로부터 상경하여 운동 준비사항 파악

2월 26일 현순, 미국 윌슨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 대표자들에게 보낼 탄원서와 호소문을 책임을 띠고 중국 상하이로 출발, 문건은 후에 개성의 김지환을 통해 만주 안동의 김병농 목사를 통해 전달하기로 함

2월 26일 신홍식, 평양으로 내려온 안세환을 통해 “3월 1일 선언식을 할 것이니 상경하라.”는 이승훈의 메시지를 받고 상경

2월 26일 양전백, 서울 이승훈으로부터 “3월 1일 거사에 참여하라.”는 서신을 받고 상경하기로 결심

2월 26일 박희도, 찾아온 김원벽에게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식을 할 것이다. 학생들은 소요를 일으키지 말라 달라.”며 학생들이 별도 선언문 발표할 것을 만류. 이에 김원벽은 “어른들이 하면 나중에 학생들이 하겠다.”고 약속

2월 27일(목) 신석구, 새벽기도회 중에 “4천년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빼앗긴 것도 큰 죄인데 이제 그것을 찾을 기회가 되어 나서지 않으면 더욱 큰 죄가 아니냐?” 하는 ‘하늘 음성’을 듣고 참여하기로 결심

2월 27일 이명룡, 이승훈으로부터 “오늘 전동교회에서 기독교측 대표자 모임 있을 예정이지만 그대는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도장을 맡김

2월 27일 오전 박희도, 박동완과 최성모와 김창준에게 정오에 정동교회 이필주 사무실에서 열릴 기독교측 대표자 회합에 참석 통보

2월 27일 오후 1시 정동교회 이필주 사무실에서 이승훈 이필주 최성모 오화영 김창준 박희도 박동완 신석구 이갑성 함태영 등 회합,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초안 확인,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할 기독교측 대표자로 이승훈 길선주 이필주 이갑성 오화영 정춘수 유여대 김병조 이명룡 양전백 박동완 김창준 최성모 신홍식 김병조 신석구 등 16명 확정. 대표자들의 인장을 함태영에게 주어 천도교측 대표와 함께 날인하도록 조치, 이상재를 포섭하는데 실패했다는 함태영이 보고를 듣고 이갑성을 다시 보내 설득하기로 함. 거사 이후 가족 구호 문제를 논의, 박희도가 가족 구호금 분급

2월 27일 길선주, 장연교회 사경회 인도 중 안세환으로부터 “3월 1일 총독부에 독립을 청원하고 일반에 독립 선언을 밝히기로 했으니 상경하라.”는 연락을 받음

2월 27일 저녁 이갑성, 재동 이상재 집을 방문하여 독립선언서에 기명할 것을 부탁했으나 거절

2월 27일 의주 용운동교회에서 사경회를 하던 중 선천교회 영수 도형균으로부터 “독립선언은 3월 1일에 경성과 각 지방에서 발표한다.”는 이승훈의 기별을 전달 받고 의주지역 독립운동을 준비

2월 27일 김세환, 그동안 경기도와 충남지역을 돌면서 확보한 대표자(해미의 김병제, 남양의 동석기, 이천의 이강백, 오산의 김광식, 수원의 임응순) 명부를 갖고 상경하여 박희도를 만났으나 이미 민족대표자들의 서명날인이 끝났으므로 명부를 숙소(여관)에서 소각

2월 27일 저녁 안세환, 일본정부에 청원서 제출할 청원서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출발

2월 27일 저녁 천도교측 이종일,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여 매 인쇄

2월 28일(금) 양전백, 상경하여 봉래동 신행여관 투숙

2월 28일 이갑성, 세브란스병원 김석현으로부터 강기덕을 소개받고 학생운동권과 접촉, 별도로 운동을 하기보다는 3월 1일 독립 선언식 이후 선언문 배포 일을 학생들이 맡아 줄 것을 부탁

2월 28일 이갑성, 오전 11시경 김창준이 가져온 독립선언서 6백매를 세브란스의전 학생 이용상을 통해 대구와 마산에 각 2백매, 김영수를 통해 군산에 2백매 배포하도록 지시

2월 28일 오후 이갑성, 남대문밖 정류소에서 김성국을 만나 이종일 사무실에 데리고 가서 독립선언서 1천매를 수령, 강기덕에게 가져다주도록 지시

2월 28일 오후 박희도, 연희전문학교 교수 베커 선교사를 정동 사택으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말하며 협성학교 일을 부탁, 같은 선교부 내에 살고 있던 중앙교회 담임목사 빌링스 선교사를 찾아가 같은 내용을 통보

2월 28일 신홍식, 아침에 사울 도착, 정동교회로 가서 박희도와 이필주, 최성모 등을 만나 운동 진행사항 청취

2월 28일 정춘수, 서울 다녀온 곽명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본 후 자신의 의도와 달리 독립선언문이 되었지만 대표자 명부에 자기 이름이 있음을 보고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로 저녁 기차로 상경

2월 28일 길선주, 상경하기 위해 장연을 출발

2월 28일 저녁 이승훈 이필주 최성모 신홍식 박희도 김창준 박동완 오화영 신석구 함태영 등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모인 민족 대표자 모임에 참석, 천도교 및 불교측 대표자들과 회합, 이갑성이 독립선언식 장소 변경을 건의, 손병희 제안으로 명월관 지점(태화관)으로 변경

2월 28일 이명룡, 손병희 집 회합에 참석치 남대문교회 예배당 안 의자에서 잠 2월 28일 유여대,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가 의주에 도착하지 않아 정명채 김두칠 등과 독자적인 선언문 등사하여 3월 1일 시위 준비

2월 28일 저녁 승동교회에서 강기덕 김원벽 등 시내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 회집, 독립선언서 배포 계획 수립

2월 28일 밤 정동교회 예배당에서 김문진 한위건 김옥주 장기조 등 중등학교(경신, 중앙, 보성, 양정, 선린상업, 배재, 휘문, 약학교) 대표자 회동, 독립선언서 배포 계획 수립

2월 28일 김지환, 개성으로부터 상경

3월 1일(토) 아침 이갑성, 세브란스의전 학생 이용설에게 독립선언서 3, 4매 전달, 이용설은 선언서 1매를 세브란스의전 교수 스코필드에게 전달

3월 1일 아침 김지환, 이승훈을 방문했다가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탄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상하이로 보내야 하니 함태영에게 가서 문건을 받아 만주 안동현 김병농에게 전달하라.”는 부탁을 받고 함태영으로부터 탄원서 1통과 독립선언서 10매를 받아 기차 편으로 서울을 출발

3월 1일 오전 양전백, 세브란스병원에서 함태영을 만나 거사 장소가 명월관으로 변경된 사실을 확인

3월 1일 오후 2시 이승훈 이필주 오화영 양전백 이명룡 이갑성 신홍식 오화영 신석구 박희도 김창준 박동완 등 기독교측 대표자들 인사동 명월관 ‘별유천지 6호실’에 회집, 천도교와 불교측 대표자들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경무청에 연행됨. 파고다공원에서는 한위건과 정재용, 이병주 등 학생 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 시위를 시작

3월 1일 오후 2시 유여대, 의주 서부교회에서 독립선언식 거행, 선천으로부터 전달된 독립선언서 배포하며 만세시위

3월 1일 저녁 길선주, 기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 경무청에 자수

3월 1일 저녁 정춘수, 원산으로부터 기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 오화영 집에 머물다가 3월 7일 경찰에 자수

3월 1일 오후 안세환, 일본 도쿄에 도착 간다(神田)경찰서에 출두하여 일본 정부 각료 면담 요청

3월 2일(일) 안세환, 일본 도쿄 경시청장을 면담

3월 3일(월) 고종황제 발인예식 거행

 

미주

1) 이덕주, “3·1만세운동에 대한 신앙운동사적 이해”, 『초기 한국기독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이덕주, “3.1운동과 기독교-준비단계에서 이루어진 종교연대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47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7.9,; 이덕주, “3·1만세운동 대중투쟁단계에서 기독교의 역할”, 『토착화와 민족운동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8.

2) “이승훈 선생 취조서“, 『三一運動 秘史』(李炳憲 編), 시사시보사 편집국, 1959, pp. 357-358; “정노식 선생 취조서”, 『三一運動 秘史』, pp. 708-709; “송계백 선생 취조서”, 『三一運動 秘史』, pp. 710-712.

3) “李太王 殿下 昇遐”, <기독신보> 1919.1.29.

4) “이갑성 선생 취조서”, 『三一運動 秘史』, p. 295; 최린, “자서전(약력)”, <한국사상> 4호, 일신사, 1962.8, p. 173.

5) 이덕주, “3.1운동과 기독교-준비단계에서 이루어진 종교연대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47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7.9, pp. 136이하.

6) “최린 자서전”, <한국사상> 4집, 일신사, 1962, 166-167; 김도태, 『남강 이승훈전』, 문교사, 1959, pp. 275-276.

7) “노헌용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674; “손병희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93; “이승훈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p. 342-343.

8) “최린 자서전”, p. 166.

9) “최린 자서전”, pp. 164-165.

10) “권동진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188.

11) 최린은 2월 24일 설악산 신흥사 승려로서 서울에 올라 와 <唯心>이란 불교잡지를 간행하고 있던 한용운을 만나 민족대표 참여를 권하였고 한용운은 2월 27일 해인사 승려로서 서울에 올라와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백용성에게 권하여 민족대표로 참여하도록 하였다. “최린 자서전”, pp. 171-172.

12) “양전백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260.

13) “양전백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261.

14) “이갑성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291.

15) “이승훈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351.

16) “권동진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188.

17) “박희도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434.

18) 『삼일운동비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편, 『삼일운동과 기독교 관련 자료집』 인물편(1-3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7.

19) <미감리회 조선연회록> 1918, p. 49.

20) “정춘수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p. 550-551.

21) 이덕주, “3·1운동에 대한 신앙운동사적 이해”, pp. 237-238.

22) “길선주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p. 121-122.

23) “길선주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116.

24) “길선주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p. 112-113.

25) “양전백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262.

26) “이갑성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291.

27) 이후 원산으로 내려간 정춘수는 2월 28일 서울을 다녀 온 곽명리로부터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본 후 “나는 원래 민족자치의 청원에는 찬성했으나 이 독립선언서에 명의를 낼 것은 승낙한 일이 없는데 무슨 일로 이 선언서에 기재하였느냐?” 질문하면서 “선언서를 읽어보니 그 문장에는 일본에 대하여 반대하는 문구는 없고 온당하다고 하였으나 민족대표자 중에 나의 명의가 있으므로 그것이 마음에 맞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빨리 33인 뿐으로 되었으며 또 어째서 독립선언서라고 하였을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선언서는 이미 배포한 것이고 나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으니 내가 책임을 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상경하였다. “정춘수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p. 550-551; “정춘수 신문조서(제2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삼일운동 Ⅰ), 국사편찬위원회 1990, pp. 155-156.

28) “함태영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647.

29) “최린 자서전”, p. 170.

30) “함태영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647.

31) “박희도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p. 457-458; “이승훈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372.

32) “최린 자서전”, p. 170.

33) “최린 자서전”, p. 170.

34) “최린 자서전”, pp. 173-174.

35) “박희도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p. 437-438.

36) “신홍식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485.

37) “오화영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535.

38) “최린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581.

39) “최린 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삼일운동 Ⅰ), p. 23.

40) “길선주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 119.

41) “정춘수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p. 551-552.

42) “유여대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pp. 276-277.

43) “손병희 외 예심종결(1919년 8월 1일)”, 『삼일운동사 자료집: 삼일운동 재판기록』, 고려서림, 1973, pp. 11-13.

44) “손병희외 예심”, <기독신보> 1920.3.31.-6.2; “손병희 외 고등법원 특별형사부 판결(1920년 3월 22일)”, 『삼일운동사 자료집: 삼일운동 재판기록』, pp. 13-28.

45) “최린 외 47인 공판”, <기독신보> 1920.7.14.-8.24.; “손병희 외 경성지방법원 형사부 판결문(1920년 8월 9일)”, 『삼일운동사 자료집: 삼일운동 재판기록』, pp. 28-38; 정광현, 『판례를 통해서 본 삼일운동사』, 법문사, 1978, pp. 8-9.

46)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9.29.-10.27.

47)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0.

48)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0.

49)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0.

50)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0.

51)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7.

52)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7.

53)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7.

54)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7.

55)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7.

56)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7.

57)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7.

58)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7.

59)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7.

60)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7.

61) “손병희 외 48인 항소공판기”, <기독신보> 1920.10.27.

62) “조선독립선언사건의 공판 변론 갸시”, <기독신보> 1920.10.20.

63) 길선주 목사는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피고는 금번 손병희 외 31인과 같이 조선독립선언을 한 일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독립선언을 한 것은 알지 못하고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조선 독립을 허락하여 달라는 것을 청원한다 하므로 나도 이름을 낸 일은 있다.”고 대답하였고, “피고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을 발표한다면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가?”는 질문에 “나는 국민에 대한 영향에 대하여 생각한 일이 없다. 청원할 것만을 원하여 청원을 하는 것은 어린 아해가 아버지에게 분가하는 문권(文券)을 내 달라고 의뢰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므로 허락하여 줄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답하여 시종일관 ‘청원론’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피고는 금후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극도의 근안(近眼)으로 또 몸이 불편하여 금후에는 하지 않고 나는 정치상의 일에는 일체 관계하지 않기로 하였다.”고 답하였다. 또한 복심법원 재판에서도 “독립선언을 한다는데 나가서 명의는 내지 않기로 하였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고 “피고는 독립선언을 하는 일은 독립청원에 부수된 것으로 알고 청원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닌가?”는 질문에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이승훈이가 나에게 대하여 정부와 총독부에 대하여 독립청원을 하고 또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킨다고 말하였다. 나는 청원서에 명의를 내는데 승낙하고 인장을 보냈지 선언서에 대하여서는 찬성한다거나 찬성하지 않는다거나 말한 일이 없고 그 독립운동에 찬성할 뜻에 답하여 모든 것을 이승훈에게 알리겠다고 말하였다.” 결국 길선주는 재판과정에서 <독립선언서>에 (안세환에게 맡긴) 도장을 찍은 것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일로서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독립 청원론’과 다른 <독립선언서>의 취지와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길선주 선생 취조서”, 『삼일운동비사』, 111-122.

64) “Autobiography by Pilchu Yi", Victorious Lives of Early Christians in Korea, Tokyo: 敎文館, 1933, pp. 156-157; 이덕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개종 이야기』(개정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p. 396.

65) <김창준 자필 회고록>(1946).

66) “독립선언사건의 一人 최종으로 이인환씨 가출옥”, <동아일보> 1922.7.22.

67) <신석구 자필 자서전>, pp. 93-94; 한국감리교사학회 편, 『신석구목사 자서전』, 감리회본부교육국, 1990, p. 86.

68) <신석구 자필 자서전>, p. 101; 이덕주, 『신석구 연구』,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2000, 141.

69) 『삼일운동비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편, 『삼일운동과 기독교 관련 자료집』 인물편(1-3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7.

70) 하리영, “조선의 처음 남감리교인 중 1인이 되는 윤성근”, <신학세계> 1918.11; 양주삼 편, 『조선남감리교회 삼십년기념보』, 조선남감교회 전도국, 1929, pp. 53-54; 임동순, “충청남도 공주 하리동교회 부흥한 결실”, <신학월보> 1907.5, p. 125.

71) J.Z. Moore, “The Great Revival Year”, The Korea Mission Field, Aug. 1907, p. 116.

72) 이덕주, “초기 한국교회의 민족교회적 성격”, 『초기 한국기독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pp. 141-145.

73) 선우훈, 『民族의 受難』, 애국동지회, 1949; 윤경로, 『105인사건과 신민회 연구』(개정증보판), 한성대학교출판부, 2012, 11-57.

74) <신석구 자필 자서전>(1949); 이덕주, 『신석구 연구』,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pp. 107-108.

75) 이덕주, “3·1운동에 대한 신앙운동사적 이해”, 『초기 한국기독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pp. 246-247.

76) <신석구 자필 자서전>(1949), p. 88; 이덕주, 『신석구 연구』, pp. 109-110.

77) 김기석 ,『위대한 한국인, 남강 이승훈』, 한국학술정보, 2005; 남강문화재단 편, 󰡔남강 이승훈과 민족운동󰡕, 남강문화재단, 1988; 한규무, 󰡔기독교 민족운동의 영원한 지도자 이승훈󰡕, 역사공간, 2008.

78) <독립선언서>에 인쇄된 조선민족 대표 명단은 한문으로 표기되었지만 이들의 한글 발음을 기준으로 삼아 장로교의 길선주, 감리교의 리필주를 넣은 후 기독교 대표자들은 김병조, 김창준, 량전백, 류여대, 리갑성, 리명룡, 리승훈,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순으로 배열하였다.

79) 『三一運動 秘史』, pp. 45-755; “손병희 외 47인 예심 종결서”, 『독립운동사 자료집: 삼일운동 재판기록』, 고려서림, 1973, pp. 11-54;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 11권(삼일운동 Ⅰ), 국사편찬위원회, 1990;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 12권(삼일운동 Ⅱ), 국사편찬위원회 1990; 김양선, “三一運動과 基督敎界”, pp. 240-261; 이덕주, “3.1운동과 기독교-준비단계에서 이루어진 종교연대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47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7.9, pp. 136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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