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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완성도란 무엇인가?거시적이고 미시적인 본문 이해가 현실을 흔들고 있는가?

들어가면서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장, 미포 사무총장)

지난 주일(12월 9일) 설교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필자는 이사야서를 강독하고 있다. 사 40장을 읽으면서 피곤하지 않음에 관한 생각이 깊이 들어왔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기에, 오직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는 새 힘을 얻어 피곤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사야 40:28~30절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다. 개척교회를 하면서 지치고, 삶의 현실에 지치고, 여러 가지 교계의 일들에 지치는 시간을 지나면서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참 위로가 되었다. 이 본문으로 주일 설교를 하고 싶었다. 본문을 다양하게 접근하면서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본문을 들고 나름대로 씨름을 했지만, 설교 초록을 성도들에게 보내야 하는 금요일이 지나가고 토요일 오후가 되도록 별 진전이 없었다. 뜨거운 가슴만 있고, 본문에서 질문하고 답을 하는 과정이나 그 결과로 인한 뚜렷한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이사야에 대한 나의 이해의 결여와 연결되어 있다. 40장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출발, 즉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왜 낙심의 상황이 언급되는가? 그리고 낙심된 상황의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가? 특별히 창조와 포로 귀환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더욱이 이런 방황의 밑바닥에는 이사야에 대한 나의 입장과 관계된다. 이사야가 통일성을 가졌다는 사실과 저작권은 다른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이사야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저작권을 말해야 하는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복음주의권의 태도이다. 개혁파 신학이 가진 이사야에 대한 태도 역시 스펙트럼이 넓다. 우리 장로교 신조는 성경의 66권이 충족된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으로 고백하지만, 개별 권에 대한 저작권에 대한 고백은 없다. 따라서 본문이 가진 균열과 시대 상황 그리고 오늘의 독자의 상황이 만들어내는 읽기는 다양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이사야 40장의 정황을 규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문제들에 휩싸여서 본문이 가진 역동성과 적실성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설교 본문으로 한 선택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수요기도회에서 나누었던 눅5:12-26절 말씀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수요기도회에서 누가복음을 강해하기에 이미 정리된 누가복음 전체의 안목과 함께 구체적인 단위 본문의 특별함을 위상 시킬수 있었다. 이런 결정을 하면서 성도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요약문을 실었다.

"사40장 후반부에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는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를 고민하다가 완성도가 부족하여서 결국 수요기도회 본문으로 회귀하였다."

완성도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고 나서 설교의 완성도를 필자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정리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게 된다.

2018 미래교회포럼을 진행하는 이세령 목사

1. 선택된 본문은 책의 흐름 속에 놓여있다.

대부분의 설교는 성경 본문을 선택하고 낭독하고 그러고 나서 강론을 하는 순서이다. 여기서 본문을 선택했다는 면에서 낭독은 선택한 본문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강론은 선택한 본문에 충실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선택한 본문에 충실한 것인가? 본문을 완성도 있게 설교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완성도를 말할 때 어떤 측면에서는 다 된 설교 원고를 앞에 놓고, 혹은 설교 정리를 다 해 놓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완성도는 준비 과정에서의 완성도, 설교 원고, 혹은 정리된 설교, 전달 직전까지의 설교에서 완성도를 말한다.

선택된 본문은 무엇보다 큰 문맥인 권에 속한다. 사40:28-30절은 이사야라는 책에 속하고, 대신 선택한 본문 눅5:12-26절은 누가복음 나아가 누가-행전의 책 속에서 읽힌다. 이사야는 강독 중에 있고, 깊이 있게 전체와 부분 본문들을 살펴본 것이 그리 많지 않아서 무엇이 주된 흐름인지를 규정하지 못하는 것이 필자의 현실이다.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이를 고려해서 필자가 소화하면서 정리한 생각이  중요하다.

선택한 눅5:12-26절의 본문은 두 병 고침 사건으로 구성된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는 사건과 중풍 병자를 치료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 본문은 누가-행전의 전체 목적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누가복음은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이 누가-행전의 중심이다. 은혜의 해가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는 선언이다(눅4:19, 21). 모든 복음서가 복음을 말한다. 누가는 은혜의 해라는 관점에서 복음을 서술한다. 은혜의 해가 이미 너희 귀에 응하였다. 예수님은 은혜의 해를 현실로 만드신 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은혜의 해가 임한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를 보여주시는 사역을 하신 것이다. 은혜의 해를 언급하는 본문은 사61장을 인용한다. 은혜의 해가 임하는 현장은 성령이 임하심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와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일로 구체화된다. 이것들이 일어남으로 은혜의 해가 도래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은혜의 해가 이미 도래했다는 사실을 병 고침을 통해서 증거하는 것이 누가의 의도이다. 은혜의 해는 이사야 본문에서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포로에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은 희년이나 안식년과 같은 차원의 해이다. 희년이나 안식년은 부채를 탕감 받음으로 자기 가정과 기업으로 돌아가는 때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은혜의 해, 혹은 희년과 안식년이 주는 핵심 가치이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이다. 창조의 원래 선한 모습으로 회복하는 날이다.

이런 은혜의 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일을 복음이 이루어내는 것이 누가-행전의 흐름이다. 누가는 은혜의 해를 도래하게 한 예루살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로마에까지 이르러서,  온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소개한다.

거시적 누가-행전의 흐름에 대한 이해는 구체적 단위 본문들의 독특성을 살펴야 한다. 이제 누가-행전의 거시적 흐름을 염두에 두면서 선택된 단위 본문의 독특한 측면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2. 단위 본문은 유사한 본문들 가운데 독특성을 가진다.

필자가 선택한 본문은 병 고침의 본문이다. 나병 환자와 중풍병자이다. 워낙 유명한 본문이다. 그런데 이런 병 고침의 본문은 여러 용도가 가능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시는 분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한다면 두 본문의 정당한 독특성이 사라진다. 이 본문에 이르기 전에 누가는 벌써 여러 종류의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님께서 고쳤음을 알렸다. 그리고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치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고쳤다(눅4:40).

이런 상황에서 다시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고치신다. 그렇다면 앞에서 이미 다양한 종류의 병을 고치신 사건과 이 사건들이 차별화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본문을 선택하여도 똑같이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을 가볍게 읽는 것이다. 수많은 사건 속에서 결국 취사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요한이 진술하고 누가도 나름의 순서로 기록을 했다고 진술한다. 본문을 선택하고 기록하는 것에는 의도가 함께 한다는 말이다. 본문만이 가진 독특한 면이 전달되도록 선택하고 기록한 것이다. 이것을 점진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발전이란 말이 가지는 거부감이 있어서 그냥 독특성이라고 해 두자. 발전과 성장이란 병에 걸린 시대이기에 그러하다.

나병 환자의 본문은 정부정의 원리를 극복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이 본문이 가지는 독특성이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경우는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신다. 병 고침은 차후의 문제로 미루어진다. 병고침과 죄 사함이 다투는 양상을 보이지만 결국 병 고침의 본질에는 죄 사함이 있음을 말한다. 이런 본문이 가진 독특함을 찾아서 누가-행전에서의 예수님의 복음인 은혜의 해라는 거시적 안목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나병 환자의  경우, 부정의 정도가 죽음과 비슷하다. 가장 심한 정도의 부정이다. 이런 부정을 예수님이 만지셨는데도 전염되지 않고 오히려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셨다. 이는 구약의 정부정의 원리가 깨어진 현실이다. 부정한 사람이 앉은 자리에 모르고 앉아도 부정은 전염되고, 그렇게 부정한 사람과 모르고 악수를 해도 부정하게 전염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회는 이방이 지배하는 사회를 거치면서 상시적으로 부정을 피하기 위해서 손을 씻는 제도를 만들었다.

예수님께서 가장 극심한 정도의 부정을 만지셨는데 부정에 감염되지 않고 오히려 부정한 자를 깨끗하게 하심으로 그가 제사장에게로 나아가고 율법의 혜택을 입도록 하셨다.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자로 만드신 것이다. 거룩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정결함만이 출입이 가능했다. 부정한 자로 하여금 깨끗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세계로 인도하는 일을 예수님이 하신 것이다.

중풍병자의 경우를 보자. 중풍병자가 누워서 지낸다.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기 위해서 침상채로 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에게 나갈 수 없어서 지붕을 뚫고 달아내렷다. 이런 장면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리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셨다. 여기서 믿음과 죄 사함이 연결되었다. 예수님은 그들(복수)의 믿음을 보셨다. 그들이 병 고침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병자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이 가진 실제의 힘이 병 고침을 너머서 죄 사함에 이르는 바른 지향이 있어야 함을 지시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지평이 올바르게 서야 함을 말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병 고침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죽어야 하는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고, 참된 은혜의 해가 임하는 자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죄 사함의 은혜가 필요하다. 죄 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이기에 이 선언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신성모독의 죄를 입고, 십자가의 길로 재촉한 사건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당시에 다양한 믿음 가운데 참된 믿음은 죄 사함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우리의 믿음이 죄 사함의 복음에 굳게 서 있는가를 질문한다.

3. 분문에 대한 거시적이며 미시적인 이해가 일치하는가?

본문의 거시적인 이해는 은혜의 해가 임했다는 예수님의 선포이다. 희년이 선포되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돌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병 고침이 눈 먼 자를 낫게 하고,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따라서 크게 보아서 본문의 양 관점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본문이 가진 독특한 면은 정부정의 원리를 깨뜨리고 부정을 극복하신 예수님의 역사는 은혜의 해가 주는 혜택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변방에 머물러야 하는 부정한 자들인 나병환자를 성전이 있는 사회 중심부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부르는 것이 은혜의 해의 역사이다.

또한, 중풍병자를 고치는 사건을 통해서, 믿음이 죄 사함을 얻게 한다. 병 고침만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진짜 은혜가 무엇임을 알게 한다. 은혜의 해는 희년도 된다. 희년은 레위기에서 대속죄일에 선포된다(레25:9). 왜 그런가? 죄 사함의 은혜가 사회적 자유와 회복을 가져다주는 구조를 가진다. 따라서 은혜의 해가 도래한 현실은 죄 사함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서 양 관점은 교차점을 가진다.

4. 본문의 해석이 현실적인 적실성을 가지고 있는가?

본문을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다루었다. 은혜의 해가 정부정의 원리를 극복하도록 한다. 먼저 이것이 가진 누가-행전의 함의를 좀 더 보자. 누가는 사마리아와 이방인의 문제를 극복한 복음의 보편성을 은혜의 해가 임한 시대의 특징으로 간주한다. 예루살렘의 십자가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하나로 묶고, 나아가 땅끝이라는 이방인을 덮는 구도를 누가-행전이 품고 있다. 로마에 있는 이방인까지도 하나님 나라 은혜의 해가 임하는 영역이 된다고 선포한다.

그렇다면 정부정의 원리가 극복된 현실을 제시하면서 누가의 마음에는 이방인들의 부정이 극복되는 복음의 능력을 보고 있다. 그리고 모든 생래적이고 후래적인 인간의 모든 조건들이 극복하는 복음의 능력이 바로 은혜의 해가 도래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세리, 창기, 그리고 이방인, 모든 인간적 조건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거룩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복음의 힘을 본다. 이것이 은혜의 해에 정부정의 원리를 극복하시는 주님의 복음의 능력이다.

정부정의 원리가 파괴되는 현장 속에서 우리 모두가 가진 연약과 부족 결핍 등을 극복하는 구원적 경험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거룩에 참여하는 감격을 누린다. 배운 자만이 아니라, 가진 자만이 아니라, 힘이 있고 지위가 있는 자만이 아니라 모든 자들에게 복음은 경계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자리로 초대받는다. 이것이 누가의 마음에 그려진 적실성이며 나아가 우리의 적실성으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두 번째로는 믿음으로 인한 죄 사함의 문제이다. 병고침은 죄 사함과 동일한 일이다. 그런데 죄 사함을 강조하신 것은 믿음의 지향이 오용되는 현실을 지적하신 것이다. 믿음은 다양한 종류의 것이 있다. 이방 종교의 믿음이 있고, 개인적 신념의 믿음이 있고, 이데올로기적인 신념의 믿음이 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믿음들의 목표지점이 무엇인가?

누가-행전적인 포괄적 적실성을 살펴보자.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서 믿음은 새로운 독립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돈에 대한 욕심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사탄의 시험을 통해서 드러난 다양한 종류의 유혹이 믿음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을 근거로 자기의 필요를 채우는 일, 세상의 권세를 지향하는 일, 나아가 섬김을 받는 일로 유혹을 받는다.

이런 현실은 오늘 성도들이 믿습니다를 외치면서 추구하는 것과 연결된다. 믿음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죄 사함인가? 아니면 부자되는 것이고, 성공하는 것이고, 합격하는 것이고, 능력을 가지는 것이고, 특별한 체험을 하는 것인가? 이런 요소들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예수님이 가르치고 싶은 것은 믿음의 지향점은 바로 죄 사함이어야 한다. 죄를 사함 받음으로 우리는 필요에 따라서 선한 일을 위해서 다양한 경험과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험과 능력 혹은 소유 그 자체가 우리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아니다. 믿음은 철저하게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기초해야 한다. 은혜의 해는 죄 사함이 있는 대속죄일에 선포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도 죄 사함의 새언약에 기초한다. 죄 사함의 믿음에서 모든 신령한 것을 누리고 얻고 주의 나라를 봉사한다.

예수님은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면서 죄 사함을 위한 십자가의 길을 가진다. 이런 십자가의 길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여러 모습을 누린다. 그 기초적 지향점은 죄 사함에 있다. 이제 우리는 잘못된 믿음들을 보아야 한다. 이념에 의해서 경도된 믿음들이 너무 많다. 좌파적이거나 우파적이거나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멸시하는 믿음이 있다. 교회에 와서 이런 종류의 신념을 확인받고 전파하려는 이들이 있다.

또한, 성공지향적인 기복적 신앙을 설교하는 어리석은 목사들이 엄청나게 많다. 특정한 체험이 전부인 것처럼 주장하는 체험론자들도 있다. 우리의 복음은 분명하다. 죄 사함의 믿음이다. 이것이 역사를 이루게 된다. 죄 사함의 믿음에서 우리는 말씀의 현실화를 위해서 자신과 교회와 시대가 굴복되도록 기도한다. 여기서 엄청난 역사들이 생겨난다.

믿음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욕망을 성취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과도하게 설득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조용히 참된 복음의 은혜를 보여주어라. 죄 사함의 은혜가 어떻게 은혜의 시대를 만들어 가는지를 기도해라. 드러나는 현상들에 집착해서 은혜를 판단하지 말도록 요청한다. 이것이 믿음이 죄 사함을 지향하는 누가-행전의 시대적 요청이며 오늘 우리 시대의 요청과의 적실성을 공유한다.

5. 정리해 본다.
설교의 완성도라는 것은 본문에 대한 거시적 흐름과 본문이 가진 독특한 미시적인 관점이 교차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교차점이 주는 긴장감을 통해 누가-행전 당시에 어떻게 적실성을 주었을까를 고민하고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고민은 보편성을 가지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에도 쉽게 적실성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를 때까지 본문과 씨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본문이 오늘의 현실에까지 적실성을 주면서 우리의 자리를 긴장으로 인도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본문을 읽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본문을 설교하는 완성도가 형성된다.

여기에 수사적인 구성과 그리고 적절한 예가 설교를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의 완성도와 연결시키고 싶지 않다. 본문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전달함으로 읽은 본문에서 우리의 현실까지도 흔드는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 완성도 있는 설교이다. 샬롬

▷아래는 지난 주일 설교를 링크합니다. 혹 관심 있으면 살펴보세요. 

http://gospelplace.org/tong/media_board/read.asp?board_idx=1&sub_idx=1&seq=42&page=1&search=&word=&lef=02&sublef=undefined

 

 

 

 

 

 

이세령  leesr6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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