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발표하는 최재건 교수

이 글은 2019년 3월 1일 삼일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삼일운동 백 주년과 한국기독교”라는 주제로 지난 12월 3일과 4일 공주제일교회당에서 개최한 2018 미래교회포럼에서 최재건 교수가 발표한 논문이다. - 편집장 주

 

삼일정신과 대한민국의 건국정신

 

최재건

 

1. 서론

2. 3.1운동

1) 3.1운동의 시대적 배경과 교회의 상황

2) 3.1운동의 확산과 교회의 역할

3) 3.1운동과 교회의 역할 평가

3. 삼일운동의 정신

4. 대한민국의 건국과 3.1정신의 계승ㆍ발전

1) 건국과 건국정신

(1) 건국

(2) 건국정신

2) 삼일정신과 건국정신의 계승ㆍ발전

(1) 자유민주주의 강화와 공화국 건설

(2) 건국정신의 계승과 한국교회의 진로

5. 결론

1. 서론

 

3.1운동은 한국 역사에서 지도층과 일반 백성이 함께 일으킨 처음 혁명적 사건이었다. 수천 년 왕국으로 이어오던 한국 역사에서 처음 세워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건국도 혁명적 사건이었다. 이 처럼 비록 일각에서 혁명이라고 부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의 건국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나아가서 3.1정신은 무엇이고 대한민국건국 정신은 무엇인가? 삼일운동의 정신과 대한민국의 건국 정신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삼일정신과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이란 주어진 과제의 서술 과정이다.

3.1운동에서 다른 종교의 역할도 컸지만, “기독교신앙 없이는 3.1운동이 없다”는 함석헌의 입장을 비롯하여 기독교회가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3.1운동은 일어날 수도 없었다. 이 항일 시위의 핵심과 다이내믹스는 기독교였다. 당시에 한국기독교회는 그 역사가 3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3.1독립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16인과 비서명자 48인중에도 24인의 기독교인이었다. 이 운동의 전국적인 확산도 교회들과 교회가 세운학교들 중심이었다. 교회가 당한 피해도 컸다. 그런 점에서 3.1운동은 한국기독교 역사상의 대표적 민족독립운동이요, 신앙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1919년 3월1일에 일어난 거족적 독립운동은 자주 독립, 민주 평화를 내세우며 지속적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3.1정신으로 승화되어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나아가서 해방되어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도 3.1정신 위에 건국되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미군정과 대한민국의 건국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해방정국의 3거두들을 비롯하여 이윤영, 장덕수, 최순주. 김도연, 윤치영, 윤보선 등 많은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직접 정치 일선에 참여도 하였고 사회단체를 구성하여 활동도 하였다. 목회자들은 설교 등을 통해 노력하였다. 한국교회는 대개 3월1일에 가까운 날에 기념예배를 통해 3.1 운동 기념과 삼일정신 고양에도 앞장섰다.

본고는 먼저 3.1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피해상황 및 교회의 역할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삼일정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한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건국정신과의 관계, 그리고 기독교와의 관계 및 영향을 순차적으로 살필 것이다. 취급하는 범위는 시기적으로는 3.1운동 전후와 대한민국 건국 전후가 될 것이다.

3.1운동에 관한 연구는 많이 축적되었다. 한국교회와의 관련성 문제도 상당하게 연구되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학계와 기독교를 비롯하여 관련 기관들이 학술 심포지엄, 세미나, 출판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3.1운동에 대한 해석도 연구경향도 ‘종교’ 보다는 ‘민중’에 무게를 둔 “민중주의 역사관”으로 달라졌다. 기독교계의 3.1운동에 대한 견해도 진보와 보수의 입장으로 나누어졌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척되고 있다. 삼일정신은 대한민국 건국정신으로 이어져 민족혼이 되었다. 삼일운동과 대한민국의 건국은 한국근현대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한국교회사에서도 가장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기독교가 3.1정신과 대한민국 건국정신에 어떠한 역할과 영향을 미쳤는가를 연계하여 살펴보고 나아가서 그때의 정신과 그 정신의 계승하기 위한 한국교회의 진로를 모색하는 것이 본고의 기착지이다.

 

1. 삼일운동

 

1) 3.1 운동 발발의 시대적 상황과 교회의 상황

조선에서는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통상조규를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한 후 일본의 세력이 급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1894-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1904-05년 러일전쟁에서도 승전하였다. 일본의 기세는 욱일승천하였다. 중국은 조선에서 종전의 화이체제(華夷體制)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러시아도 이어지는 혁명으로 그 영향은 멀어졌다. 일본은 그들의 야욕대로 정한론(征韓論)에 따라 1905년 11월 소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찬탈하였다. 일제는 무단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1910년 조선을 강제로 병탄하였다.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고, 식민통치를 강화하였다. 그 과정 중 1911년 조선교육령으로 기독교계가 다수를 이룬 사립학교들을 법적으로 속박하였고, 1913년 정령(政令) 100호를 통해 선교사들의 의료 활동을 제재하였다. 1915년에는 ‘포교규칙“을 제정하여 교역자에게 자격증을 받게 하고, 예배당 설립에 총독부의 허가를 받게 하였다. 1915년에는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표하고 교육과 종교의 분리정책을 천명하였다. 총독부의 이 같은 규제로 한말에 829개였던 기독교계 학교들이 1918년 말에는 323개교로 줄었다가, 1919년 5월말에는 298개교만 남게 되었다.

국제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W. Wilson, 1856-1924) 미국 대통령이 전후 처리를 위한 평화원칙 14개조에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다. 그 원칙은 1차 대전의 패전국에 국한되는 것이었지만, 세계 약소민족들이 자주독립을 기대할 수 있게 하였다.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사상이 인근 국가들로 퍼져나가면서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꿀 수 있게 하였다. 한국인들은 근 10년간 망국의 통한 속에서 일제의 무단정치하에 우민화 정책, 경제 침탈, 토지수탈, 군경 횡포를 겪으며 독립을 갈구하다가 이러한 소식들에 희망을 걸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상황도 급격하게 변해갔다. 1905년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4년부터 주일ㆍ주한 감리교선교사들을 통괄하고 있던 주일 선교사 출신의 해리스(M. C. Harris) 감독을 개신교계 통제정책의 파트너로 삼고 정교협력을 유도하였다. 3.1운동 당시에 전국의 인구는 2,000만 정도였고, 기독교 진영은 신구교를 합하여 3,252개 교회에 20~30만명 가량의 교인으로 인구 대비 1~1.5% 정도의 교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통계에서는 2,883개 교회에 355,114명의 신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북장로교회 한국선교회의 보고는 1914년 현재 1,688명의 장감 성직자, 2,300여 개의 예배당, 20만여 명의 신도라고 하였다. 1918년에는 한국선교회와 교회들이 참가한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라는 연합기구도 발족시켰다. 교육과 의료사업도 일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전국적으로 교회와 연계된 학교가 832개나 되었다. 1918년 12월 말에는 개신교인 219,220명, 가톨릭과 정교회 교인 99,488명을 합하여 총 318,708명이었다. 천도교의 당시 교세가 200-300만이나 되었던 것에 비하면 기독교는 수적으로 매우 약세였다. 그러나 1911-1912년경에 한국교회와 선교회가 관할하던 650여 개의 학교에서 14,400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었고, 이들이 3.1운동 때 활동자원이 되었다. 개신교 교회는 당시에 35년의 일천한 역사를 지녔으나, 여러 구미의 여러 교단 선교부들의 교육, 의료 활동의 지원과 신앙지도를 받으며 급성장하였다.

한국 기독교회는 짧은 역사와 미약한 교세에도 불구하고 3.1운동 당시에 전국적인 조직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장로교회 측에서는 1907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을 목사로 장립하고 독노회를 세웠다.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구성하였다. 북감리교회는 1901년부터 한국인 목사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1908년에는 연회를 조직하였으며, 남감리교회도 1918년 조선 연회를 구성하였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정부기구를 제외한 조직공동체로서는 가장 크고 잘 연결된 조직과 기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교회 안에는 항일과 독립과 사회의 도덕증진을 지향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서재필을 중심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을사조약반대의 전통을 이어 구국기도운동, 청년회활동, 계몽운동, 무장투쟁이 교인들에 의해 연이어 일어났다. 신민회라는 비밀결사 단체에는 안창호, 윤치호, 이회영, 전덕기를 비롯한 800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황해도에서는 1908년경 김구, 최광옥, 송종호, 김홍량, 도인권, 이승길 등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고 일면일교의 학교설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당면과제는 이러한 반일적인 성향이 강한 기독교 세력을 제압하는 일이었다.

기독교세력을 조선 식민지화의 가장 큰 저항세력으로 파악 한 일제는 회유와 탄압정책을 펼쳤다. 조선교회의 세력이 커가고 서구세력과 연계되어 있는 점을 유의하였다. 그러한 때에 선교사들은 본국정부의 외교정책을 따르면서, 한국의 정치 불간섭 또는 정치적 중립의 입장을 취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삼았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본의 무단통치에 의한 식민지 정책이 사람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보았다. 안명근 사건으로 해서교육총회를 박멸시키고,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를 괴멸시켰다. 1913년의 황애덕이 주도하는 송죽회라는 비밀 독립운동 단체, 1914년경에는 숭실학교의 배민수를 중심으로 무력 항일운동을 꾀한 ‘조선국민회’, 박용만은 1914년 대 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훈련을 시켰다. 다른 한편 거 교회적으로 일제의 도덕적 파괴 정책인 공창제도, 아편, 음주에 반대하는 절제운동도 전개하였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지방행정구역을 완전히 개편하였다. 통치의 효율화를 빙자하여 민족 전통과 향토의식을 단절시켰다. 당시에 교회조직은 유일한 전국적 조직체로서 연락망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교회는 나라를 잃은 한국인들이 가장 쉽게 모일 수 있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교회를 통해 서양의 문물이 교계의 신문 잡지들에 소개되었고, 각종 사회문제와 시국문제도 논의되었다. 그러한 여건 아래 교회 주변에서 신민회, 조선국민회, 송죽 결사대, 한영서원 비밀결사 같은 항일 단체들이 조직되어 활동 할 수 있었다.

 

2) 3.1운동의 전개와 교회의 역할

 

(1) 3.1운동 발발의 배경과 준비

1918년 미국 윌슨(T. W. Wilson, 1856-1924)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발표한 평화원칙 14개조를 통해 민족자결주의를 제시하였다. 샤록스(Alfredd M. Sharrocks, 謝樂秀) 선교사에 의해 이 소식을 접한 안창호, 이승만, 정한경 등은 국권 회복의 소망을 가지고 대한인국민회 총회(1912)와 흥사단(1913)을 통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독립 건의서를 보냈다. 중국에서도 김규식, 선우혁, 여운형, 서병호 등은 민족자결주의에 공감하고 활동을 펼쳐나갔다. 또 다른 외적인 요인은 1917년에 러시아 공산혁명의 여파가 인근 국가들로 팽창해 간 것이었다. 사회주의 혁명노선에 민족독립의 희망을 걸고 이런 동기에서 전향한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도 있었다. 북한 학계는 3.1운동이 실제로 이런 것에서 연유되었다고 주장한다. 3.1운동을 발발시킨 직접적인 도화선의 하나는 고종황제의 승하였다. 황제가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의 전갈을 파리강화회의에 전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이 죽였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또 하나의 도화선은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다. 1919년 2월 8일, 재일 한국 YMCA 총무 백관수를 비롯하여 송계백, 서춘, 김도연 등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600여명의 한국유학생들이 모여 윤창석목사 주재 아래 도쿄YMCA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대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운동을 확대해 나가기로 한 것이었다.

3.1운동이 발발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 민중의 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조선인들에게 일제는 임야조사사업, 토지조사사업을 벌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많은 땅을 수탈하였고, 회사령을 통해 경제생활을 통제하였다. 사법 처우와 행정기관의 차별대우도 심하였고, 언론, 집회, 결사 자유도 박탈하였으며, 해외여행도 제한하였다. 종교행사는 가질 수 있었지만, 목사의 설교는 요시찰의 대상으로 삼았다. 마약의 유포와 공창제도를 도입하고 유곽을 설립하여 청년의 도덕적 퇴폐를 유도하였다. 종교적으로는 천황제도의 확산을 위한 신사(神社)의 설립, 일본의 조합교회가 늘어가도록 방조하였다.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은 비슷한 시기에 은밀히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기독교 진영 안에서 서북지역의 시위는 장로교 측을 중심으로 준비되었고, 서울지역의 시위는 주로 감리교를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학교 학생대표들도 독립운동에 동조하였다. 이들은 서북지역의 이승훈계와 연대하게 되었다. 이승훈은 기독교 인사들과 3차에 걸쳐 회의를 하고 천도교 측과 연합하기로 하였다. 일각에서 기독교 단독으로 하자는 안도 제기되었고, 폭력 비폭력의 문제, 교리적인 문제로 연합활동에 반대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거족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따르기로 하였다. 마지막 단계에서 불교 측의 한용운도 참석하여 복수의 종교가 3.1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기독교 측의 대표는 길선주를 비롯해서 33인 중 16인이나 되었다. 비서명자 민족대표 48인 중에서도 과반인 2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거사일은 고종황제 인산일인 3월 3일을 피하고 주일인 2일도 피하기 위해 3월 1일 토요일로 정해졌다.

 

(2) 전개와 확산

1919년 3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서명자들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원래의 예정 장소는 탑골공원이었으나, 군경이 행사를 교란시킬 것을 경계한 박희도의 건의에 따라 장소를 바꾸었다. 기독교계의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미참하였다. 천도교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이미 교회 조직망을 통해 전국에 배포되었고, 선교사들과 일본 정부의 관계 요로에도 배포되었다. 참석한 대표들은 독립선언을 한 후에 자진해서 경찰 당국에 신고하고 연행되었다. 파고다공원에서도 학생들 중심의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3.1운동은 같은 날 거의 전국으로 일어났다. 주로 경의선, 경원선을 따라 교회가 있는 곳을 중심하여 기독교 인사들이 거주하는 곳 들이었다. 특히 지방마다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기독교회와 학교들이 시위 참여가 다른 단체들보다 높았고 전국에 확산 되는 데에 제일 큰 역할을 하였다.

일제가 3.1만세운동에 대한 무차별 사격을 시작한 곳은 한국에서 기독교가 가장 성행하던 평북 선천이었다. 3월 1일 오후 2시 시위하던 군중에 대한 발포로 강신혁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12명이 부상하고 60여 명이 피검되었으며, 4일에도 6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평양에서는 3월 1일 평양의 6개 교회가 연합하여 숭덕학교에서 연합집회를 가진 후, 시가행진을 하다가 군인들과 경찰들에 의해 해산되었고, 강규찬, 김선두 목사 등 3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었던 김선두 목사는 그 해 총회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3.1독립운동의 발발을 예상하지 못했던 일제는 강제 진압 일변도로 대응하였다. 일본정부의 하라 수상은 4월에 보병 6개 대대와 보조헌병 300을 증파하여 대비하게 하였다. 비폭력 시위 군중에게 헌병과 경찰 및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잔인무도하게 진압하였다.

주한선교사들도 3.1운동에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쳤다. 샤록스 선교사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소식을 안창호, 이승만, 등에게 전하였다. 시위자를 돕던 마펫(S. A. Moffett)은 일제의 만행이 훈족처럼 잔인하다고 비난하였다. 모우리(E. M. Mowry)는 독립선언서를 영역하고 피신한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죄명으로 6개월간 투옥과 강제 노동을 당하였다. 스코필드(F. W. Scofield)는 3.1운동에 관련된 문서와 사진을 수집하여 선교부에 보고하였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1919년 6월의 총회에서 일본의 야만적 고문에 강경한 반대를 결의하였다. 원한경(H. H. Underwood)은 제암리교회 방화 살인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과 함께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여 그 사진이 미국 하원 의회록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연전의 베커(A. L. Becker) 교수도 3.1운동 상황을 네브라스카 주 상원의원 노리스(Norris)에게 알려 그 글이 상원 회의록에 게재되었다. 만주에서는 쿡(W. T. Cook)과 마틴(S. H. Martin) 캐나다 선교사들이 피해상황을 본국에 알려 보고하였다. YMCA의 질레트(Gillett, 吉禮泰)도 시위 사실을 영국에 알렸다가 조선에서 추방되었다. 선교사들의 활동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지만, 이 운동을 촬영하고 기록하여 세계에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3) 교회의 피해

3.1운동 피해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 수치는 은폐되어 밝혀지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일제의 통계는 축소되었다. 3~5월에는 1,542회의 시위에 2,051,448명이 참여하였고, 피살자가 7,509명 부상자가 15,890명이었다. 전국에 있는 218개 군 가운데 212개 군에서 궐기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주요 독립운동이 벌어진 340개 지역 중에서 기독교인이 주도한 곳은 78개 지역이었고, 천도교와 연합하여 시위한 곳은 42개 지역이었다.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따르면, 사망 7,500여 명, 부상 16,000여명, 체포 46,948명, 공소 19,054명이었고, 7,816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기독교회가 입은 피해는 파괴된 교회만도 전파 17개소(장로교 12개)를 비롯하여 59개소였다. 선교사들에 의해 서구에도 알려진 제암리교회에서는 비기독교인 포함 29명이 불에 타죽었다. 그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었던 평남 강서의 사천에서 시위대 2,000명 중에서 11명 죽었고, 원산교회에서는 43명이 즉사하였으며, 20여 명의 중상자들이 나왔다. 정주의 이승훈이 세웠고 민족주의교육으로 이름난 오산학교는 전소되었다.

1919년 10월 제8차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보고된 장로교회의 피해상황만도 체포 3,804명, 체포된 목사와 장로 134명, 체포된 조사와 지도자들 202명, 체포된 남신도 2,125명, 체포된 여신도 531명, 태형 후 석방 2,162명, 총에 의한 사살 41명, 참살 6명, 수감 중 1,642명, 파괴된 교회 12개소였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총회에 보고된 경우로 한정된 것이었고, 함북노회에만 26명의 참살 자가 있었고, 기독교인 전체로는 체포 약 4만, 투옥 2,190명, 사살 6천여 명이었다는 보고서도 있다. 다른 통계에서는 9,458명 중 기독교인이 2,087이었다. 어떤 통계에서는 1919년 말까지 주동자로 투옥된 19,054명 중에서 교인이 3,373명으로 17.7%였고, 여자 피검자 471명 중에서 교인이 308명으로 65.4%였다. 이처럼 교회가 큰 피해를 입은 것은 교회를 이 운동의 배후세력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통계의 난맥상으로 인해 실제 상황은 여러 가지로 유추해볼 수밖에 없는데, 여자의 경우에 수감자 206명 중에서 17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은 기독교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다른 어느 단체에서보다 활발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4) 3.1운동과 교회의 역할 평가

3.1운동은 한국교회의 사회참여 표본이 되었다. “양심이 나와 함께 있고, 진리가 나와 함께 행한다”는 신앙의 확신을 나타낸 것이었다. 민족운동이었지만 신앙 양심에 의해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의 거족적인 만세시위를 통해 독립을 얻지는 못했지만, 소망 속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는 결실을 얻었다. 우선적으로는 명목상이나마 총독이 사이또(齊滕實)로 경질되면서 무단정치 대신 문화정치가 표방되었다. 3.1운동 후 잠시 하락 하던 교세도 1920년대에 다시 성장하게 되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속에서 남녀 학교의 교육열도 크게 증폭되었다.

거족적인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한국의 기독교는 비 기독교인들로부터 외래종교와 서양종교라는 인식을 벗게 되는 계기를 얻었다. 토착종교로 인식되고 있던 불교나 유교 사람들보다 기독교인들이 더 열심히 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그동안의 괴리감에서 벗어나 예수 믿으면 나라와 민족도 사랑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3.1운동으로 다양한 민족 구성원이 항일 민족독립운동이란 당면문제 앞에서 통합되었다. 오늘날 배타적, 독선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당시에는 신앙의 차이를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이라는 대명제 아래 천도교, 불교와도 연대하였다. 이승훈 장로가 오히려 앞장섰다. 기독교회가 독립운동을 앞장서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이승훈의 말처럼 독립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다는 신앙이 기본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상재도 독립만세 시위를 누가 주동했느냐는 일경 심문에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였다. 그에 따라 한국교회는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절대 명제로서 추구하고, 군국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때까지 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서구의 힘, 미국의 힘, 교육의 힘, 의료의 힘, 문화의 힘을 대표하고 있었다. 3.1운동으로 이제 교회는 민족의 고난에 십자가를 지고 최대의 피해를 함께 체험한 곳이 되었다.

3.1운동 때 기독교인 여성들의 참여와 활동은 월등하게 높았다. 하란사나 이화학당의 유관순 같은 열사를 비롯하여 생명을 받친 이들도 있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교회의 전국적 조직망은 3.1운동이 기독교 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에 확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해외의 한인교회를 통해서도 유기적인 대외 연락체계가 가동되었다. 교회는 결속력, 기구, 조직, 교육을 통한 인물을 보유하고 있었고, 민주주의적인 자치능력을 양성 받고 있었다. 이런 조직이 없었다면 3.1운동의 확산은 불가하였다. 펜실베이니아대학(Uni. of Penn.)의 교수 이정식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애국심을 고취한 3.1운동은 동학혁명과도 다르고 의병운동과도 다른 적극적 민족운동이었고, 이 운동에 개신교가 공헌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선교사들의 간접적인 도움과 지원도 있었다. 선교사들은 기록으로 증인의 역할을 하였다.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렸다. 한국교회는 이를 힘입어 세계교회와 동류의식을 갖고 군국주의 퇴치, 민주주의 정착을 지향하면서 세계의 사회와 교회에 증언자의 역할을 하였다.

한국교회는 겨레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지탱하였다. 한말 이래로 국가를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닥 소생의 빛을 주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민비가 피습을 당하던 상황에서 고종이 선교사가 없느냐고 부르짖었을 때, 교회는 이미 임금과 민족에게 소망을 주는 곳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교인들이 크고 작은 규모의 항일 운동과 3.1운동에 앞장섰을 때도 교회는 민족에게 소망을 주었다.

3.1운동 때 한국교회가 사회적 비판 받는 역기능들도 있었다. 한국교회는 민족운동을 신앙운동으로 여기고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신앙의 기조가 현실부정 내세중심적인 것으로 변하여 갔다. 독립의 성취가 어려워지자 신앙이 사사로워졌다. 개 교회, 개인주의 중심의 신앙으로 변화되었고, 내세적이고 미래적인 축복을 추구하는 초월적 신비주의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이들이 수감 중에 가진 신비체험이 그런 것을 부추겼다. 부흥회가 유행하면서 말세론에 치중한 길선주, 신비적인 부흥운동의 이용도, 신유의 기적을 많이 행한 김익두 등에 의해 신비 체험적이고 내세주의적 신앙이 강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농촌계몽과 여성계몽, 문맹퇴치, 절제운동, 야학운동, 문서운동이 전개되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의 고양으로 신앙 양상의 분화가 크게 뚜렷해졌다.

3.1운동의 준비과정에서 독립선언보다 독립청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기독교계 일각에서 대두되었다. 그런 이들도 결국에는 독립을 선언하는 데에 동참했지만, 적극적이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위로 폭력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박희도가 독립선언 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꾼 것도 비판의 여지는 있으나 충돌은 막았다. 독립선언현장에 나오지 않은 4명 모두가 기독교 대표라는 것도 불참 이유야 타당했지만 비판적 평가도 있다. 재판 석상에서 민족대표들이 했던 진술도 강력한 항일자세를 나타내지 않아 아쉬운 점을 남겼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천도교로부터 생활비나 활동비 조로 재정지원을 받은 일이 있었던 것도 부정적인 요인으로 지적될만하였다.

가장 크게 아쉬움을 남기는 점은 독립 운동가들이나 민족대표들에서 3.1운동 후에 교회를 떠나 공산주의로 전향하거나 친일로 변절한 자들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념을 바꾸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기는 하지만, 회유와 위협에 넘어가서 지조를 잃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 중국, 만주로 떠나간 이들도 많아졌다.

 

3. 삼일운동의 정신

 

1) 삼일독립운동과 그 선언서를 통한 정신

 

3.1운동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지도층과 민중이 합세하여 봉기한 혁명이었다. 세계 제1차 대전 후 강대국의 패권주의에 도전한 최초의 반제국주의 운동이었고 약소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새로운 사회로 변화해가는 세계사의 흐름을 역류하는 군국주의 일본의 시대착오적인 역사의식을 질책하고 양심의 주체성, 천명의 궁극성, 시대정신의 세계 성을 지니고 있었다. 주체적인 양심에 바탕을 두고 천명과 세계역사의 큰 흐름을 따른 운동이었다. 3.1 독립운동은 민족운동의 정신으로 승화되었다. 독립의 선포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3일에 탄생되었다. 한성정부도 세워졌다. 이는 한국역사에서 최초로 근대국가와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것이었다. 삼일정신으로 일제 때는 지속해서 항일운동을 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고 1945년 해방을 맞아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에는 건국의 정신이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후 3.1절이라 하여 4대 국경일 중 하나가 되었다. 3.1운동은 세계사적으로 식민지 세력에 저항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의 물결을 되돌리려는 투쟁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3.1운동의 정신은 행동으로 보여준 것 외에 3.1 독립선언서에 더 잘 표현되어 있다. 선언서는 그 종류만 대략 33종이다. 국내에 11종, 미국에 3종, 러시아에 1종, 일본에 2종, 중국에서 16종이 나왔다. 기독교인 주도한 선언서도 12종이나 된다. 삼일운동에 대한 연구는 단재 신채호 이후 3.1정신에 대한 추구와 참여 층의 구성 및 독립선언서 분석 중심으로 진척 되었다. 그 외는 주로 민족대표와 참여 층의 공과에 대한 논의 위주였다. 1990년대 전후한 삼일운동 연구는 민중운동을 중시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3.1독립선언서는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국에 계속 일어날 수 있도록 독립선언서 자체가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우선 어려운 문장이어서 지성인 지도자급은 문제가 없었지만, 민중들이 이해키 어려웠던 데도 내용적 깊이와 대중적인 호소력이 있게 기록되어 누구나 감동할 수 있게 기록되었다. 민중들이 독립은 절실하지만 막연한 감정 상태에 머물러 있던 의식을 구체화시켜 조리 있는 상징체계로 형상화해서 민중들이 확신을 가지고 운동에 참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두 그룹 모두 공감한 것은 누구든 읽는 사람에게 박력 있게 느껴지고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3.1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정신은 타종교와 일치하는 내용도 있고 비 기독적 요소도 있다. 또한 근대 서구사상의 개념과 기독교 사상과 일치하는 기독교정신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선언서의 필자는 최남선인데 당시 그는 기독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무실력행(務實力行)을 주창한 안창호의 교육입국의 영향도 받았을 것으로 본다.

3.1독립선언서에는 독립운동의 이념이 제시되었다. 선언문에 나타난 삼일정신은 자주독립, 정의, 인도, 생존, 존영, 평등, 평화였다. 이러한 사상은 근대의 서구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일제를 향해 선언은 겨레의 미래를 향한 방향의 제시이기도 하였다. 자주 독립, 민족 자유, 인간 존엄성의 확립은 독립운동의 궁극적 목표였다. 국권회복과 아울러 민족의 자주독립, 겨레의 미래 진로에 대한 정신 선언이었던 것이다. 그 기본적인 정신은 자주 독립이었다. 한국민족의 기본권의 회복을 위한 외침이었다. 일본의 무단정치, 군국주의에 의한 탄압과 강압정치로 기본권마저 완전히 빼앗기고 말살당한 것과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를 지향 한 것이었다. 우리의 기본권을 어떻게 재발견하고 다시 찾아야 하며, 자유를 얻어야 되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프랑스혁명 때 자유, 평등, 박애를 이념으로 삼고 부르짖던 것처럼, 3.1운동도 자유정신, 도의정신, 인류박애정신, 평화정신을 세계에 선포하여 한민족의 정당한 권리임을 선포하였다. 그 중요정신은 다음과 같이 구분 할 수 있다.

첫째로 민족의 독립, 자유정신이다. 자주독립 정신이다. 선언문은 “오등은 조선인이 자주민임과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한다. 공약 1장에서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에서도 보듯 민족의 독립과 자유였다.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즉 반외세의 가치인 민족의 자주 독립의 정신이었다.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누릴 권한의 선언이었다.

3.1운동은 독립 의지의 선언뿐 아니라 독립한 후 반봉건적 공화정인 국가 건설의 새로운 체제를 제시하였다. 왕정체제에서 벗어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란 방향의 제시였다. 인도주의, 정의, 자유에 기초한 민주국가로의 새나라 건설이었다. 정치적으로 반봉건적인 백성이 주인인 나라에로의 천명이었다. 백성이 주체가 되어 자치와 협동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우선이고 특권층의 특권의식과 반민주적 제도에 대한 반기였다.

둘째로 민주정신이다. 민주운동이었고 민중운동이었다. 민주정신은 민중정신이기도하다. 3.1운동 때 온 백성이 궐기한 주동세력은 정치인이나 관료가 아닌 기독교인을 비롯한 종교인, 학생, 농민 중심이었다. 온 백성이 중심이 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전반에 걸쳐 민중이란 존재가 등장하였고 정착한 계기였다. 민중이 저항의 주체가 되어 황제와 지배층이 지키지 못한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일본의 강제 점령이 무효라는 주장을 한 것이었다. 1904년에 한성감옥에서 저술되었고 미국에서 1910년에 출판된 이승만의 『독립정신』에도 공화국건설이 표방되었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의 건설이었다. 당대의 교회 관련 학교들은 근대 시민의식을 가진 민족으로 거듭나도록 민주주의 교육을 시키고,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의식화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교회의 교육현상을 서양문화와 기독교적 민주주의에 의해 새롭게 각성되는 한국사회를 새 한국의 정신이라고도 평가하였다. 이에 따라 3.1운동 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의 인사에 김병조, 손정도, 도인권 등의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재정적인 지원도 기독교계인사들이 많이 담당하였다. 이는 서양문화와 기독교적 민주주의에 의해 새롭게 각성 되는 새 한국의 정신이라고 규정되었다. 조선 왕조와는 상관없는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자유가 있을 뿐이었다. 독립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권회복과 민족의 자주독립이었고, 더 나아가 인간 존엄성의 확보였다. 각기 자유를 누리는 삶, 주권을 행사하는 독립 국가를 형성해야 하고, 우리민족이 독자적인 창의력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근본적인 소망이었다.

셋째로 대동단결의 정신, 연합의 정신이다. 일부 친일파를 제외 하고 온 민족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거족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인은 당파심이 강해 단결을 못한다고 비하한 일본을 향해 종교, 계층, 성별, 지역 간의 장벽을 넘어 단결하여 항일하였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가 자리를 같이하고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서로 힘과 뜻을 모아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반적으로 배타적으로 알려진 기독교인들이 신앙상의 차이를 극복하고 인내천(人乃天)의 동학 전통을 이어 온 천도교, 그리고 불교와도 참여의 연대를 형성하였다. 3.1정신에는 정당한 양심의 권위, 광명정대한 떳떳한 태도, 정의로움과 생존권을 주장하는 인도주의, 지역감정, 정파 간의 대립은 찾아 볼 수 없는 대동정신이 있었다.

넷째로 평등정신이다. 모든 민중이 각자가 주체적으로 평등하게 참여하였다. 지식인 엘리트가 뒤로 물러나고 민중이 앞장 선 민주정신의 실현이었다.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군국주의에 반발하여 온 백성이 주체적으로 수평적이고 다원적이고 쌍방적인 관계와 원리를 제시하였다. 백성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받들어 섬기는 정신이다. 동학이나 기독교의 민주정신은 한사람이 주체로 일어서면 민족전체가 하나로 일어선다는 점에서 삼일정신은 한사람의 주체의 깊이에서 전체의 하나 됨에 이르는 정신과 철학이다. 조선시대의 양반, 중인 평민, 천민으로 나누인 계층의식이 남아있던 때에 이를 초월하였다.

다섯째로 저항정신이다. 삼일운동은 일제의 압제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3.1 독립 만세에 한국인들은 일제의 폭정, 차별, 수탈에 저항하였다. 위대한 역사, 개인을 만들어 가는 데는 부정, 불의에 저항해야 한다. 세계역사에서도 강대국의 세력에 저항한 나라들은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삼일 운동 후에 무력적으로도 저항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여섯째로 비폭력 정신이다. 저항의 방법은 비폭력, 무저항 정신이다. 군국주의 세력과 맞선 비폭력 평화와 정의, 도의와 진리, 우애, 협력을 나타내는 평화의 정신이다. 일본 군경의 총칼무단정치에 맞선 대안이었다. 거의 일년간 지속된 독립운동 중 무지비한 진압에 대한 마찰을 제외하고는 투옥과 사상자가 속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으로 저항하였다. 한민족의 자주민임과 독립의지를 질서를 따라 비폭력으로 세계에 알렸다. 시위 중 일어난 일부의 폭력은 일제의 무력 진압에 대응한 것이었다.

비폭력투쟁의 방식의 선언과 실천은 중국의 베이징대학생 중심의 5.4운동, 인도에서 간디(Mohandas K. Gandhi)의 사타야그라하(satyagraha) 운동으로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비협력 불복종, 무저항방법을 채택한 것과, 베트남 등의 아시아 민족국가의 독립 해방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3.1운동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투쟁방법 면에서도 세계사적으로 공헌하였다.

일곱째로 세계평화정신이었다. 일본의 식민지주의를 세계역사의 역방향으로 나아가는 일본을 향해 자주 독립된 국가와 민족사이의 우애와 협력 평화와 공존을 실현하는 새로운 세계평화 추구의 정신이다. “가해자의 관점을 넘어서고 피해자만의 관점에서도 벗어나 전체의 자리에서 서로 주체로서 정의와 평화를 열어가는 정신과 철학”이 있었다. 독립운동의 궁극적 목표인 국권회복, 민족 자주독립 나아가서 인간의 존엄성, 평화의 확보를 선포한 것이었다. 평화는 인류의 보편적 필수 요건이고 추구해야 할 정신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마 5:9)는 말씀 따라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peace maker)는 선언이었고 그 정신이었다.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기희생과 고난이 있어야 한다. 한국민족의 역사는 평화의 역사였다. 기독교의 정신도 평화이다(살롬). 조선의 독립 선언인 3.1운동과 그 정신은 동양평화, 세계의 평화로 나아가는 필연적 귀결이었다.

 

2) 한국교회의 3.1운동 참여의 의미와 정신

 

기독교인들에게 3.1정신은 신앙의 확신을 선언한 것이었다. 자유와 정의는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였고 고난 중에 있는 민족과 함께 한 교회의 공헌은 선구자적이었다. 독립운동을 앞장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독립은 하나님이 주관하고 은총으로 되고 (이승훈) 하나님의 뜻으로 된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기본 바탕이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란 절대 명제를 추구하게 되었다. 군국주의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표방하였다. 그 전까지 교회는 서구의 힘, 미국의 힘, 교육의 힘, 의료의 힘, 문화의 힘을 대표하고 있었다. 3.1운동으로 교회는 민족의 고난에 적극적 참가로 최대의 피해를 입었다. 그 정신은 무엇이 엇을까?

첫째로 한국기독교회의 3.1운동 참여 동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입장에서 나라 사랑의 정신이었다. 미약했던 기독교회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유에 대해 민경배는 내연된 신앙이 자연스럽게 이때 외연〔內燃而外延〕된 것으로 보았다. 송길섭은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을 신앙운동의 일환으로 여겼다고 설명하였다. 한국교회는 애급과 일본을 동일시하고 이스라엘과 조선을 동일시하였다. 또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처럼 기독교를 통하여 민족과 자아를 찾고 민족의 독립을 소망하였다, 3.1운동에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참여한 모습을 보고 종교를 싫어했던 민족주의적 경향의 사학자 신채호도 기독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공산주의자가 된 김산도 기독교가 조선 독립의 어머니 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다. 일본 당국도 교회를 반일 혁명의 온상(hot bed of revolutionary opportunities)으로 인식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교회의 집회, 전도, 설교, 성경연구, 기도회까지 취체 하여 종교 자유를 크게 위축시켰다. 교회는 이러한 상황을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대한 도전이자, 선교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고, 기독교 박해라고 판단하였다. 성경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깨닫고 그정신을 실현하려하였다. 민족대표인 이승훈은 “민족자결은 천제의 혜택으로 되는 것”이라 믿었고, 유여대 목사와 신흥식 목사도 조선의 운명은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고 믿고 참여하였다. 길선주 목사와 신석구 목사는 기독교를 사회적인 욕구충족의 방편으로 알았다가 성경을 통해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하고 체험적인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김선두 목사는 3.1운동을 천의(天意)라고 믿고, 자유와 정의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을 “독립시위에 참가하는 것” 곧 “애국”이라고 믿었다. 3.1독립운동 후 기독교인들이 더 열심히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그동안의 괴리감에서 벗어나 예수 믿으면 나라와 민족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준 기회였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인의 사회 참여정신이었다. 3.1 독립운동은 민족운동이었으나 신앙운동이었다. 기독교인들의 3.1 독립운동 적극 참여는 신앙운동과 독립운동을 동일시하였다. “양심이 나와 함께 있고 진리가 나와 함께 행한다”는 신앙의 확신을 선언한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비록 역사는 일천했지만 조선왕조의 망국 후 식민지 된지 9년차에 자주독립, 정의(正義) 인도(人道), 평등과 평화에 입각한 민족의 해방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신앙양심을 행동화하고 나라의 독립이 소중함을 체험한 기회였다. 신앙의 사회현장 적용이었다. 김양선 교수는 3.1의 성격을 신념, 협동정신, 전진, 진실이라 했고 민경배 교수는 한국교회의 3.1독립운동 적극참여는 성서적 신앙이 그 바탕이라고 보았다. 그동안 예수 믿고 희생하는 것을 체험한 연단된 신앙적 영향이고 신앙적인 결단이었다. 3.1운동은 죽음의 체험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해방과 독립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셋째는 에큐메니칼 정신이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지원과 피해 상황의 사진 촬영 및 기록으로써 증인 역할로 세계에 한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가 무엇보다 세계교회와의 동류의식을 갖고 독립 의지의 세계화, 세계질서운동인 군국주의 퇴치, 민주주의 정착을 내세우며 세계의 사회와 교회에 증언자적 역할을 하였다. 교회는 하나라는 결속력과 통일력, 기구, 조직, 인물이 있었고 민주주의적 자치능력이 양성되어 있었다.

 

4. 대한민국의 건국과 3.1정신의 계승ㆍ발전

 

1) 건국과 건국정신

 

(1) 건국

 

① 해방과 남북의 분단과 한국교회

3.1운동 후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했으나 갈수록 군국주의를 더욱 강화하였다. 동화 정책이란 이름 아래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민족 말살정책을 펼쳤다. 창씨개명, 징집을 강요하고 정신대까지 차출하였다. 명치헌법의 천황제에 따라 한국에 일본의 전통종교인 신도를 확대하기 위해 도처에 신사를 세우고,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이에 소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끝까지 저항하였다. 한국의 개신교는 일본교단 안으로 통합되었다. 독일과 이태리와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동남아에까지 세력을 펼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반격으로 인해 독일을 필두로 군국주의 국가들이 망하게 되어 일본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하여 마침내 1945. 8.15 무조건 항복하였다.

연합국의 승리로 해방은 되었으나 자유 독립국가의 건국은 바로 이루어지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군이 남북한을 점령하였다. 맥아더장군의 소련 팽창정책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국 루즈벨트의 친소정책의 여파로 소련은 뒤늦게 2차 대전 말미에 참전하였다. 그렇지만 미군보다도 한 달먼저 8월 9일 북한에 진주하였다. 소련군이 계속해서 남하하자 방어면에서 한국을 별로 중시하지 않던 미국은 본스틸(Charles H. Bonsteal)과 딘 러스크(Dean Rusk) 두 대령에 의해서 정해진 38선을 경계로 소련군은 남하를 멈추게 하고 남한에 미군을 주둔시켰다. 북한에서는 연해주 관구의 군사위원장인 상장 슈티코프(Terentyi Fomich Shtykov) 휘하의 소련군정이, 남한에서는 연합국 주일 점령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 휘하의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1945년 9월 7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미국 태평양 지구(U.S. Army Forces Pacific)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명의로 남한이 그의 권한 아래 있다고 하는 포고령 1호를 발표하였다. 더불어 하지(John R. Hodge) 중장을 수반으로 하는 재남조선미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이후 미군정)을 설치하였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시행되었다. 이북은 소련군정의 주도 아래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을 순차적으로 진행하였다. 미군정 아래 ‘남조선 과도입법위원’, ‘남조선 과도정부’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대거 참여한 한국민주당(1945년 9월 16일 창당, 한민당) 및 사회민주당과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을 비롯하여 수십 개의 정파와 사회단체들이 난립되어 각축전을 벌였다. 기미년(1919)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은 상해 임시정부 측의 건국 주도론에 맞서 중도를 표방한 여운형, 김창준을 중심으로 ‘조선 건국준비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미국은 2차 대전 후 자국민의 선거에 의한 정부 외에는 망명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미군정은 상해의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 조직 때문에 우파의 반발에 직면하였다. 그 후 여운형은 남로당 당수가 되었으나, 곧 박헌영 세력에 의해 밀려났다.

1945년 말 모스코바 삼상회의에서 남북한에 대한 신탁통치 안이 대두되었다. 한국은 오랜 식민지를 거치고 강대국의 이해가 교차되므로 연합국이 공동 관리하는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서울에서 미국영사로 근무했고 후에 미소공동위원회의 미국 측 대표단에 합류했던 랭던(William R. Langdon)은 한국인의 문맹률이 90%란 점에서도 자치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탁치안은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최고 5년간 공동 관리한다는 소련측 안을 채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세력이 확대되자 미국의 정책은 소련의 팽창정책에 대한 일본 중심의 방어책으로 전환되었고, 한국에 남한만의 정부라도 세운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북한은 찬탁을, 남한은 반탁을 주장하면서 극한 대립이 이루어졌다. 해방 직후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냐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공산주의 체제냐를 둘러싸고 양분된 상황에서 찬탁과 반탁 문제 까지 결부되어 테러와 폭동으로 사회는 더더욱 불안하였다. 이승만은 찬탁에 반대하며 완전 독립을 주창하였고 공산당에 대한 반대 입장도 분명히 하였다. 일각에서는 왕손인 전주 이씨를 내세워 왕정복고를 꿈꾸는 복벽주의(復辟主義)자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해방 후 국내에서는 처음 맞는 1946년 제27회 3.1독립운동 기념식도 좌우로, 대한과 조선으로 나뉘어 ‘기미’파와 ‘삼일’파로 양분되었다. 우파는 보신각에서 김구, 김규식, 이승만, 오세창 등과 함께 그때의 정신을 기렸다. 이승만은 3.1운동이 세계 최초의 비폭력 혁명이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 하에 영원히 자유 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하자”고 기념사를 하였다. 좌파는 다시 양분되어 한편은 남산 공원에서 기념식을 가졌고, 다른 한편은 파고다공원에서 허헌, 이강국 등의 참석리에 기념식을 가졌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기념식을 주도하면서 정치체제를 쟁점화하였고, 교회들은 별도의 기념식을 가졌다.

이북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굳어지며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자 피난민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는 미·소의 군정으로 전국적인 총회를 소집할 수 없어 1945년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조선기독교 남부대회’를 열어 완전한 조선독립을 촉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키로 결의하였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재건과 조직에 매진해야 하는 새 국면을 맞았다. 이때에도 교회 조직은 3.1운동 때처럼 한국사회에서는 거의 유일한 전국적인 연락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해방 정국의 3거두인 김구, 김규식, 이승만도 이 대회에 참석하여 기독교정신으로 새 나라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무렵 ‘독립촉성기독교 중앙협의회’가 조직되어 건국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소련의 팽창정책에 대해 미국은 봉쇄정책으로 맞서 한국은 동서 냉전의 최 전초 각축장이 되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남북한의 첨예한 대립을 해결하지 못하자 미국은 유엔에 한국문제를 이관 상정하였다. 유엔은 1947년 11월 14일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의 총선거 실시를 결의하였고, 3월에는 1948년 5월 10일이란 일정을 확정되었다.

 

②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 천명

유엔은 유엔 감시아래 남북한의 동시 선거를 결정하고 1948년 5월10일 국회위원 선거를 실시하게 하였다. 소련이 9개국 유엔감시단의 북한 입국을 거절하여 선거가 가능한 지역 내에서만이라도 선거토록 하였기 때문에 남한에서만 선거가 치러졌다. 다만 제주도에서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 군사부장 겸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이끄는 4.3사건이 발생하여 북제주군의 국회의원 2명이 뽑히지 못한 채 198명의 제헌위원이 선출되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원되었다. 이승만이 가장 연장자여서 초대 제헌국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의장은 “우리나라에 민주주의 국가가 탄생된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으로 성취되었다.”고 인사하고, 월남하여 종로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윤영 감리교 목사에게 개원기도를 의뢰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개원 국회는 기도로 시작되었다. 헌법은 처음 의원내각제 형태에서 대통령제로 낙착되었다. 7월 1일에는 국호를 임시정부가 택했던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태극기와 애국가도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 7월 12일에 제헌 국회에서 헌법이 제정되고 7월 17일에 의회를 통과하여 공표되었다. “이제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4281년 7월 17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고 천명하였다. 헌법의 제정과 발표로 국가가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뜻깊은 날이었다. 새 헌법은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대한민국을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했고 건국 30년이라고 기록하였다. 7월 20일에는 의원들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7월 24일에는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8월 5일 미군정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통고하고 행정권을 15일까지 이양하도록 요청하였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통령 취임식과 아울러 대한민국 정부수립식이 거행되었다. 이대통령은 “우리민족을 사랑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삼천만 동포들 앞에서 헌법을 준수하는 충실한 대통령직을 이행하겠다.”고 선서하였다. 기념사에서 그는 ①자유 민주주의 만이 인민의 장래를 보장한다고 천명하고 ②개인의 자유보호와 ③자유의 바른 뜻을 알고 존중하기를 바라고 ④민권자유를 구실로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경고하고 ⑤노동자 농민의 생활과 평등권의 보장과 ⑥대미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1948년 12월 12일 파리에서 열리는 제3차 유엔 총회에 장면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승인을 받도록 하였다. 회의 전 바티칸만이 승인 했던 한국을 회원국 총 58개국 중 48개국이 찬성하여 대한민국을 합법적인 국가로 승인하였다.

 

③ 자유민주주의ㆍ자주국가의 건국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되었다. 국가를 이룩하는 요소인 영토, 국민, 정부, 주권의 4요소를 갖춘 자주, 자유 민주주의국가로 태어났다. 그 정신적 기반은 3.1독립운동과 1919년 4월 13일에 출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그 경축식에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용하기로 30년 전부터 결정하고....”, “공화주의가 삼십년 동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지금 결실이 되는 것이므로....”라고 하여, 그 시작과 결실을 분명하게 처음부터 밝혔다. 그 정신적 토대는 3.1정신이고 그 결실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이었다.

한나라의 건국은 인간의 생명이 태어나듯이 어느 한 순간에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3.1운동에서 표출된 이념을 토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되었다. 일제하의 폭압 속에서 새나라 건설의 꿈을 잃지 않고 독립 투쟁으로 새나라 건국의 기틀을 쌓았다. 이런 것들이 대한민국 건국의 규범적 토대가 되었다. 1948년 6월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투표로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정해졌다. 7월에는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헌법초안에 대한 축조심의도 있었다. 국호와 연관된 헌법1조는 원안대로 재석 188명중 찬성 163표 반대 2표로 채택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자주독립국가로 출범하였다. 이때 임시정부가 갖추지 못한 국제법상 국가 형성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 국제법상의 4요건은 ① 영구적 주민(permanent population);국민 ② 확정된 영토(defined territory); 영토 ③ 정부(government) ④ 타국과의 외교관계 체결능력(capacity to enter into relation with other states); 주권인데, 이를 갖추게 된 건국은 1948년 대한민국의 명실상부한 건국이었다. 대한민국은 수천 년 내려온 왕조 체제를 단절하고 독립된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체제였다.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제헌헌법에서 명시했듯이 삼일운동과 임시정부의 전통을 이어 실현한 것이었다. 다만 이념에 따른 국토의 분단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제헌의원은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표였고 그들에 의해 헌법이 제정되어 민주국가의 헌법의 주권적 권위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 헌법을 김철수 교수는 제헌헌법이라고 부르고, 권영성교수는 건국헌법이라고 달리 부른다. 이 헌법에서 3.1정신의 계승을 명문화하였다.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은 “기미년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건함”이라고 하였다. 계속되는 문장에도 독립정신을 이어 받아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국가를 세울 것을 밝혔다. 삼일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정신대로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 정의, 인도(人道), 평화, 평등의 정신을 나아갈 방향으로 삼았다.

현행헌법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개정되었다. 문자적 수정은 되었으나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그때의 정신과 이념을 따르겠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3.1정신을 강조한 문장은 줄었지만 4.19 혁명의 민주정신과 이념이 강화 되었다. 현행헌법은 1948년의 민국민주국가의 건국에 관해서는 언급 없이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민주정신과 이념을 분명히 하였다. 3.1운동의 정신은 임시정부의 정신이 되어 대한민국 건국정신으로 연속성을 지녔고 마침내 성취된 것이었다.

 

(2) 건국정신

 

① 자유· 민주·공화 정신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3.1정신의 계승과 발전과 실현이었다. 3.1독립선언서에서는 “조선인의 자주민임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민족의 항구여일한 자유발전을 위해...”에 따라 민족주의와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를 원하였다. 3.1 독립운동 후에 당장 독립은 안 되었지만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탄생되었다. 대한제국의 국호를 따랐지만 제국이 아니고 민국이었다. 1907년 기독교인들을 주축으로 신민회를 통해 항일 운동을 해오던 도산 안창호를 비롯하여 김규식, 이승만은 기독교정신에 입각해서 건국하기로 하였다. 임시정부 헌장 7조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건국됨을 선포하였다. 자유, 민주, 공화, 평화를 바탕으로 하고 왕정이 아닌 민주적 공화 정부를 세우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며 나라의 근본을 세워가기로 한 것이었다. 강대국의 신탁통치를 적극 반대한 것도 자주, 독립정신의 발로였다.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된 정부는 수천 년 지속된 왕국이 아니고 대한민국이었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였다. 초대내각에는 여성도 좌파의 인사도 기용되었다.

 

② 세계 평화의 정신으로서 홍익인간의 정신

3.1독립선언서의 대외정신은 “밖으로는 항구적 세계평화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 기운에 순응하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은 3.1정신에 입각한 국제 평화주의를 따르기를 원하였다. 또한 이를 대한민국 교육 이념에도 되새겼다. “유구한 역사와...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함”이라고 고조선 때의 홍익인간의 정신을 내세웠다. 백낙준이 한국교육의 이념으로 홍익인간을 제시한 것이었다. 백낙준은 홍익인간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에서 서구에서 기독교의 인류공영의 이상인 사랑의 개념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민본 정치의 전통과 침략전쟁을 부정하는 평화 애호정신을 아우르므로 민주주의, 민족주의, 평화주의를 대외에 표방하게 되었다.

 

③ 자유 민주국가 건국을 위한 반공정신

대한민국의 건국은 자유, 민주국가의 건설로 3.1정신을 계승하고 성취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 동서냉전의 전초기지가 되었고, 좌우파의 이념의 대결장이 되었다. 남한 내에서도 어떤 정부형태로 건국할 것인가에 관해 좌ㆍ우파만 아니라 중간파도 있어 대립이 극렬하였다. 북한에는 공산 정권이 수립이 이미 가시화되었다. 남한에서도 이승만의 정읍 발언으로 남한 만의 단독 정부 수립론이 등장하였다. 남한마저 공산화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판단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는 소련의 공산정권 팽창주의를 먼저 간파하여 반공을 강조하였다. 집권 후에도 반공 방일을 외치며, 반공을 일제 청산보다 앞세웠다. 대한민국 내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 활동은 물론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해서도 반공이었다. 당시에 남한 안에서는 남로당 세력이 제주도 까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전반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반공이 민주주의와 거의 동일시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소련의 팽창정책을 일찍 간파하였고, 점령지 일본에서의 정책도 반공산주의 정책을 폈다. 그는 자기를 로마 교황과 더불어 가장 반공적인 인물이라고 스스로 자평하였고, 기독교가 민주주의 건설에 가장 큰 도움이 되고 반공에 가장 효율적이라고 보았다.

한국교회는 1920년대부터 만주에서 공산당원들로부터 한경희 목사를 비롯한 순교자가 나온 이후 반공하는 교회가 되었다. 한국의 교계는 기독교가 미제의 앞잡이, 자본주의의 경찰견, 미신과 허위의 선전자, 자본주의의 확장을 위한 악마적 침략자라는 공격에 분노하고 증오하게 되었다. 또한 북한 체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을 위한 미군정의 정책이 신생 국가를 반공정책으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북한에서도 반공이 교회에서 먼저 표면화 되었다. 슈티코프 사령관의 소련군정은 반공과 반탁을 주창하는 평양과 의주 교회들의 3.1절 기념행사를 못하게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신의주에서 반공학생의거도 있었다. 교회를 중심으로 북한 내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기류가 뚜렷해지자 당국은 기독교도연맹을 만들어 회유와 아울러 탄압하자 남하하는 교인들이 늘어났다. 조선민주당을 창설했던 조만식처럼 “나는 북한의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 하겠소” 라며 잔류하는 이도 있었지만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북한 주민들이 공산정권을 피하여 월남하였다. 그 가운데는 친일 분자도, 지주층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남하한 기독교인들이 세운 대표적 교회가 영락교회와 성도교회였다. 영락교회의 담임 한경직 목사는 윤하영 목사와 함께 조선사회민주당을 창당하여 활동하다가 북한당국의 체포령을 피하여 급히 남하하였다.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서북청년단이 조직되어 반공 투쟁에 앞장섰다.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의 1개 대대가 일으킨 폭동인 소위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계기로 보안법도 제정되었다. 대구 폭동에 이어 6.26전쟁 후에는 더더욱 철저한 반공정책이 펼쳐졌다. 후에는 연좌제 까지 등장하여 사회적 문제화도 되었다.

6.25 전쟁 때에 서울에 잔류했던 김유순 감독을 비롯하여 양주삼, 송창근, 박현명 같은 각 교단의 대표자급 목사들은 피난 가지 못하고 있다가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될 때 납북 당하였다. 그 후 1951년 1.4 후퇴 때는 서울이 거의 동공이 되었을 정도로 모든 시민들이 다 피난 갔다. 이는 공산 치하 3개월의 경험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표시였다.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를 비롯하여 남하한 교인들이 세운 교회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한국교회들이 철저한 반공교회가 되어 갔다. 한국교회와 반공에 대해서는 대 저작이 나올 정도로 연구가 진척되었다. 한국은 냉전의 희생물로 이념대결의 최전선이 되었다. 보수적인 교회와 남하한 이북 5도민들이 가장 반공적이었다. 수많은 인명 피해자도 나왔다. 공산주의가 친소주의 이듯 반공주의는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었다. 친미주의와 짝을 이루고 있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반탁=반소=반공=친미=애국이라는 도식도 성립되었다.

한국에서 반공이 극렬해진 한 이유는 건국의 정체성과 6.25와 같은 전쟁의 여파는 말할 것도 없이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운동이 유럽과는 다르게 펼쳐진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서구의 사회주의체제는 시장경제를 용인하였다. 반면에 동아시아에서는 공산주의 운동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야 한다는 폭력성을 띄고 전개되었고, 자유를 억압하였다. 무신론적이어서 신앙의 자유를 용인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분배문제보다도 정치적으로 일당 독재가 더 문제였다. 이북의 교회와 크리스천은 공산주의와 대결하려다 희생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반공방일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다. 반공이 더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친일파 청산이 남한보다 앞설 수 있는 여건이었다. 군사정권 때도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았다. 문제는 때로는 정략적으로 이용도 되어 색깔논쟁의 뿌리를 깊게 하였다. 그러나 그 동인은 건국기의 사상적 혼란과 북한 정권에 맞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희구에서 나온 것이었다.

 

④ 건국정신과 기독교정신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 한국교회는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해방 당시 한국에는 2,793개의 교회, 5,923명의 성직자, 459, 721명의 신도가 있었다. 비록 기독교인이 전인구의 2~3%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해방정국의 다양한 정치세력이나 사회단체 중에 가장 강력한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건국에 대해 교계에서는 기독교가 민족의 영원한 정신적 양심과 건국의 정신적인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 합의되었다. 실제로 미군정과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선교사들과 그들의 2세들이 정치 일선에 많이 참여하였다. 한국기독교인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우파는 물론, 여운형, 김창준 같은 중간파와 대구 폭동의 최문식, 여순 반란사건의 이재복 같이 좌파도 기독교인들이 다수 관련 되었다. 교회가 해외에서 유학한 지식인들과 독립운동에 관여한 인물들을 가장 많이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해방정국의 주요 세 인사 김구, 김규식, 이승만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김구는 새 나라의 건국과 건교의 방책을 제시하며 경찰서 10개를 세우는 것 보다 교회하나 세우는 것이 낫다고 피력하였다. 김규식도 새나라는 기독교선호의 국가를 세울 것을 희망하였다. 이승만은 만세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세우자고 하였다. 그는 이미 105인 사건을 최초로 『한국교회의 핍박』이란 제목으로 저술하며 하나님이 한국 백성으로 하여금 동양의 첫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시려는 뜻이 있다고 하였다. 그가 꿈꾼 나라는 자유 민주국가의 건설이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미국 선교사의 영향 아래 미국 민주주의에 의해 교육을 받아왔다. 기독교이념은 민주주의, 국민 주권주의, 삼균주의 정체를 갖고 있었다. 삼일정신의 요소나 자유민주주의적 개념인 자주독립, 정의, 인도, 평등, 평화의 정신을 두루 갖춘 기독교 사상은 사실상 건국정신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정체성에 따라 한국의 기독교회 인물들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신민회, 삼일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도해 온 경험이 있었다. 새 나라의 건국에도 기독교의 영향을 미치고자 ‘기독신민회’를 비롯한 여러 정당 사회단체를 조직하여 직·간접의 영향을 미쳤다. 목회자들은 교회의 설교를 통해서도 소신들을 피력하였다. 해방되자 교계에는 『해방의 종교』라는 설교집도 유포되었다.

기독교의 정신이 새 국가 건설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이념에 적합하다는 점은 몇 가지로 인식되었다. 첫째 서구 여러 나라의 오랜 역사 속에서 국가와 기독교가 성공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점, 둘째는 새 나라는 도덕성이 국가건강의 척도가 됨으로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건강한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기독교 밖에 없다는 점, 셋째는 기독교정신 자체가 민주이념을 잘 포용하고 있음으로 참 자유, 민주, 정의와 평등정신을 구현하는데 상통한다는 점이었다.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도 이점을 인식하고 민주주의를 일본에 심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강화라고 인식하였다. 일본이 군국주의가 된 것은 그들의 국교인 신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기독교 확산정책을 종교정책으로 삼았다. 그리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나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를 바랐다. 민주주의가 잘 자라고 정착되기를 바라서였다. 삼일운동 당시에도 교회가 전국화, 대중화, 기록화, 세계화하는 데에도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처럼 해방공간에서도 그 정신의 계승을 위해 적극 활동하였다. 우선 많은 교회들이 1946년부터 3.1절 기념행사를 3.1절 전 주일을 기하여 갖게 되어 거의 전통화 되었다. 별도로 3.1절 기념예배와 행사를 하는 교회들도 있다. 이북에서도 1946년 평양의 장대재 교회를 비롯해서 3.1절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후 교회와 당국은 대립되고 교회의 핍박은 가중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에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은 한국교회의 인사로서 건국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도 있었다. 그 중 첫째는 공산정권을 피해온 피난민들이 세운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였다. 그는 영락교회에서 건국에 관한 설교를 자주하였다. 대한민국 건국도상에 영락교회가 창립되었고 새 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기독교정신과 가장 그 궤를 같이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설교는 영락교회에서 한 설교였지만 이미 영락교회는 세계적 대교회로 급성장하여 그 영향력도 커 한국교회와 사회를 향하여 새나라는 기독교 정신 위에 건설되어야 마땅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민주적이고 개인 인격 존중 사상을 갖고 있고 아울러 개인의 자유사상과 하나님 앞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갖고 있기에 민주국가를 표방하는 새 나라의 정신으로 알맞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전통의 한국불교는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를 지내며 그 사명을 다했고 유교도 조선 왕조에서 정치규범, 종교, 도덕의 역할을 두루 감당하였으나 쇠잔한 상태여서 형식과 인습만 남아 있기 때문에 새 나라를 건설하려는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 기독교라는 점을 내세웠다. 그는 이를 모아 『건국과 기독교』라는 설교집을 출간하였다.

두 번째는 해방 후 민주주의에 관한 저술로서 영향을 끼친 협성신학교와 이화여전 교수였던 한치진(韓稚振, Clarence C. Hahn, 1901-?)박사였다. 기독교 신앙인으로 성장하고 기독교계학교인 중국의 금릉대학을 거쳐 미국의 남가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사회학, 철학, 심리학 등 다방면에 걸쳐 『종교개혁사요』를 비롯하여 수많은 저서를 내었다. 임시정부에서도 안창호, 손정도와 임시정부에도 관여하였다. 일제 말 수감되었던 그는 해방으로 출옥하여 『민주주의 원론』 전3권, 『미국 민주주의 이론』을 출판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때 민주주의 이론을 심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새 나라의 건국이 민주주의 국가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미군정의 관직도 사양하였고 1947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지내다가 6.25 전쟁 직후에 납북되었다.

세번째는 당시 연희대학교 총장 백낙준 박사였다. 그는 건국과정에서 한국교육의 이념을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설정하였다. 그는 한국전통 사상인 홍익인간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에서 기독교의 인류공영의 이상인 사랑의 개념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정신으로 새나라는 침략전쟁을 부정하는 평화 애호정신을 아우르고 민주주의, 민족주의, 평화주의를 표방하게 되었다. 백낙준은 자신이 관여한 연세대학교에 대해 한국역사 4,000년과 기독교역사 2,000년이 만나는 곳이고 거룩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국역사 속의 기독교를 주창하여 동서양을 아우르는 사랑으로 한국인의 사랑 받는 민족정서에 맞는 교회의 역할론을 제기하였다.

건국기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활동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일제 때 많은 인재를 양성한 데 있었다. 국내에 교육기관을 많이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고, 중국과 미국 같은 곳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주로 주한 선교사들을 통해서 해외 유학의 여건들을 마련하였다. 기독교인이 건국 같은 정치 일선에 나선 것도 3.1운동 정신의 계승이었다. 해방이 되자 하나님의 은총으로 독립되었다고 믿고 건국에도 앞장선 것이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로 끝맺는 대한민국 애국가 작사자도 기독교인이었다.

 

2) 삼일정신과 건국정신의 계승ㆍ발전

 

(1) 자유민주주의 강화와 공화국 건설

 

3.1정신은 자유, 독립, 민주, 평화의 정신이다. 이 정신을 승계하여 일제하에 독립운동을 지속시켰고 한국 역사 이래 처음으로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3.1정신을 계승하여 현실로 성취한 것이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 한다는 말처럼 역사가 아무리 위대하고 찬란해도 그것이 계승되지 않으면 그 역사는 별의미가 없다. 과거를 오늘의 역사 속에서 재현하려면 사실에 대한 올바른 기억을 통해서 할 수 있다. 3.1절 100주년을 앞두고 그 정신을 논의하는 것은 그 때의 상황을 기억하면서 그 정신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3.1운동과 그 정신에 대한 연구의 관점이 다양하게 대두된 상황이지만 대한민국의 건국 정신은 비폭력으로 자유와 자주 독립을 외친 3.1정신을 기본으로 하였다. 해방 후의 혼란과 세계대전적인 한국전쟁의 폐허위에 실질적으로 건국된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도 삼일정신에 바탕을 둔 건국정신을 이어가도록 그 정신구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국제 분쟁의 첨단에 처해있다. 작금의 한국은 또 다시 19세기 말처럼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어있다.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약진과 일본은 갈수록 우경화하여 맥아더 통치 시절의 법들을 개정하고 재무장의 단계에 이르렀다.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는 주장을 계속 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및 미국과 북한은 핵문제로 한국을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한국은 다문화사회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3.1정신의 기본인 자유, 독립, 평등 평화, 자주적 정신을 확고하게 해야 할 때이다.

3.1정신은 민(民)의 가장 보편적 가치인 애국애족의 자유 독립정신이다. 국가의 독립된 주체를 이루기 위해 한 세기 전 자유와 민주와 평화의 나라를 세우는 운동을 생명을 걸고 전개하였다. 이를 이어가기 위해 민 하나하나가 개인주의를 넘어 독립된 주체로 서로가 상생과 공존의 길로 나아가 민족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 정의, 평등, 평화를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나아가 민족 전체가 안창호, 조만식, 김구, 이승만처럼 “밥을 먹어도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잠을 자도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라고 한 것처럼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의 자주성을 가지고 세계화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길로 나가야 할 것이다. 폭력에 맛서 비폭력 평화를 넓혀가는 운동은 “이것이 하늘의 명령이고 새 시대의 요청이고 민족 발전의 자유로운 과정이고 세계문화 창조에 공헌의 길” 이라는 인식을 재 활성화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이 길로 새 문화를 창조함으로써 세계문화 발전에 이바지 하도록 하는 것이 세계사적으로 기여하는 정신이다.

민주화 과정을 겪은 한국인은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말을 기억한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3.1운동 이래 건국과정에서 좌우의 대결로, 6,25전쟁 때도 동족상잔을 거치며 한민족은 많은 피를 흘려왔다. 위력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 70년 역사에도 반 자유, 반민주의 시기가 있었다. 특히 대한민국의 제1공화국인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 정권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후반에 독재로 끝난 아픔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런 아픔은 군사정권 때도 되풀이되었다. 민주화를 위해 피를 흘리며 저항하여 발전시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장하였다. 사회적으로 아직도 ’금 수저‘, ’흙 수저‘, 갑을관계, 학연, 지연, 혈연에 의한 연고와 온갖 파벌주의, 가진 자와 못가진 자로 나뉜 사회를 대통합하는 단초가 여기 있다. 오늘날 민주, 자유사회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전근대적 사회의식과 비민주적 형태의 극복부터 해야 할 것이다.

3.1독립운동이 한 세기를 맞이하지만, 국토가 아직도 분단된 상태에서 3.1운동은 미완의 장으로 남아있다. 김구선생은 한국 민족의 미래를 이미 제시하였다. 3.1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자유, 민주 이념에 따라,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이룩하되, 국민이 주인인 주권재민의 자유민주주의 나라로 공화정치 하에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정의와 인권이 보장된 사회로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2) 건국정신의 계승과 한국교회의 진로

 

한국교회는 역사가 일천하지만 3.1운동에 이어 대한민국 건국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한국교회에서 성장한 인물들과 내한 선교사들과 그 2세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들의 민족의식은 기독교 신앙 위에 형성된 민족주의였다. 그들의 신앙이 민족독립운동에 이어 건국에도 앞장서게 한 것이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자유, 정의 평화에 일치되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잘 믿고 사회 위해 봉사하는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의 과정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에 대해 그 평가는 다르겠지만 오늘날 한국교회가 물려주어야 할 세 가지 기본 유산이 있다. .

첫째, 사회참여의 정신이다. 3.1운동의 중추세력이었던 한국교회는 한말부터 민족과 사회를 선도하였다. 한국교회는 한말 충군애국의 교회전통을 잇는 동시에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는 차원에서 3.1 독립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3.1운동 이후에도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역할을 하였다. 임시정부, 대한민국의 건국에서도 소임을 다하려 노력하였다. 그들의 민족의식은 기독교 신앙 위에 형성된 민족주의였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자유, 정의, 평화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건설의 확대적 차원이었다.

둘째, 화합과 협동과 일치의 정신이다. “종교의 평화 없이는 세계평화가 없다”라는 한스 큉의 언급은 고전이 되었다. 종교분쟁으로 테러 상태에 몰입된 오늘의 세계에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도록 서로 다른 종교 간의 기본적인 자세와 대화와 아울러 서로 배우고 알고 같은 진리의 실천을 위해 협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협동과 화합의 정신은 타 종교나 타교단과의 관계에서 3.1운동 때 처럼 화합과 일치의 정신이 이어져 활성화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에큐메니즘에 입각한 교회로 세계교회와의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하고 타종교와의 관계에도 관용하여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도록 하는 주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세계화 시대에 세계평화의 정신이다. 한국의 독립은 일본과 동양의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었고 나아가서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세계화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서 보편적 인류애를 실천하는 것이 3.1정신의 계승이다.

 

5. 결론

 

3.1운동은 한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으로서 혁명적이었다. 일본의 무력적 식민지 통치에 비폭력적 방법으로 자발적으로 저항하였다. 우리 민족의 자주민임과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3.1독립선언서는 자주의식과 독립을 천명한 문헌적 증표였다. 저항과 문서에 나타난 정신은 서구 근대 시민의식 같은 자주독립, 정의, 인도, 평등,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국가의 나아가야 할 방안도 제시하였다. 삼일 독립운동의 발원은 지식인 중심이었지만 이 운동을 지속시킨 원동력은 사회 계층적으로는 대중, 노동자, 농민이었다. 삼일정신을 이어받아 두 세력이 합하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건국되었다. 민족적 자각이 크게 고양되어 민족독립운동의 주력체가 되어 일어난 삼일혁명의 정신을 따라 왕조체제가 아닌 민주국가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자유민주주의, 평화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대한민국의 헌법전문에서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사실이 천명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은 오늘날의 헌법보다 구체적으로 3.1정신의 계승이 명문화되었다. 3.1정신에 나타난 한국근현대사의 과제는 민주국가 건설과 동서 문명을 만나게 하는 세계화였다. 미래의 한국사회는 ① 온 백성이 자유와 평등의 민주국가를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백의민족만 있던 그 시절에 벌써 인종차별을 넘어섰다. 다문화사회로 변한 오늘의 한국 사회가 실현해야 할 정신이다. ② 정의의 나라, 공의의 나라,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확고하게 이룩하고 ③ 세계적 품위를 가진 문화 국가로 ④ 불의한 나라, 폭력적 국가의 모순과 갈등을 넘어서서 세계의 평화를 이르는 길로 나가야 할 것이다. 삼일정신과 건국정신은 때를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에게는 기본적으로 자유 민주의의와 사회정의가 구현되는 평화로운 국가로 통일되고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길을 여는 기본적인 정신이다.

민족과 이웃과 하나님 앞에서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섰던 한국교회는 사회적으로 공신력을 갖고 있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 아름다운 교회의 전통을 이어오지 못한 것에 대해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그 회복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성장일변도와 외적인 번영만 추구했던 단계를 넘어, 앞으로는 기독교의 본질에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내면의 충실과 함께 밖으로 민족과 사회와 이웃을 위한 봉사를 위해 이타적 사랑의 구현에 힘써야 할 것이다. 교세가 줄어드는 현실을 직시하고 한국 인구의 다수가 되도록 교회의 외적 성장도 중요한 과제이기도하다. 그 보다도 기독교의 본질적인 면의 성장이 급선무이다. 3.1운동 전에 기독교의 연락 대리자 역을 했던 이승훈 장로는 그 전에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있는 동안에도 계속하여 경건 생활을 유지하는 본을 보였다. 3.1운동 때도 독립운동에 전념하면서도 독립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기독자도, 교회도 “통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신앙을 확고하게 하고 선교적 사명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미 여러 교회에서 동서독의 교회처럼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운동을 확산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관련 심포지엄도 조직도 기도회도 더욱 강화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

기독교인의 3.1정신은 신앙의 확신을 행동화한 것이었다. 자유와 정의는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였다. 여기에다 민족과 함께한 교회의 공헌은 선구자적 자세로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란 절대 명제를 추구하고 군국주의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표방한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민족이 당하는 고난에 많은 피해를 당하며 동참하였다. 마침내 해방된 대한민국에 많은 인재의 배출로 그들의 활동으로 교회의 본질과 부합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립되는 데에도 앞장섰다. 그 이후가 문제였다. 그 정신이 계승되지 못했다. 3.1정신과 건국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국민이 주인인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국가를 확장하고, 사회정의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사회를 이루며, 다른 한편으로 통일 한국을 이룩하는데 공헌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공신력과 공공성은 기독교인이 전인구의 1-2% 남짓했던 100년 전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공공연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3.1운동 때의 모습과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국가사회,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3.1운동과 대한민국 건국과정에 기여했던 것처럼 그 정신의 계승과 발전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3.1정신은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도 있고 건국 논쟁도 계속되지만, 기본적으로 자유, 독립, 평등, 평화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나아가서 평화통일의 이룩하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을 위한 근본적인 일에 3.1 독립운동 때와 대한민국 건국기때 처럼 교회가 앞장서야 공신력도 공공성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3.1정신도 대한민국의 건국정신도 발전적으로 이어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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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Usami’s Letter to Rev. Ishzaka, “Appendix C.” Administrative Reforms in Korea (Seoul: The Seoul Press, 1920), 66, 68;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 (서울: 延世大學校出版部, 1993), 332에서 중인.

6) 宋吉燮, 『韓國神學思想史』 (서울: 大韓基督敎出版社,1987), 255.

7) 다음의 저작 참조. 『三一運動50周年 紀念論文集』 (서울: 東亞日報사, 1969); 『3.1민족 해방운동연구: 한겨레신문후원 3.1운동 9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서울: 청년사, 1989); 동아일보사 편, 『3.1운동과 민족통일』(서울: 동아 일보사, 1989); 박헌호 · 유준필 편집, 『1919년 3월1일에 묻다』 ( 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9); 신용하,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윤병석, 『증보 3·1운동사』 (서울: 국학자료원, 2004); 李炳憲, 『三一運動秘史』 (서울: 時事時報社出判局, 1959);

8) 대표적으로 다음의 논저들을 들 수 있다. 金良善, “三.一 運動과 基督敎界”, 『三一運動50周年 紀念論文集』 (서울: 東亞日報사, 1969); 민경배, “삼일운동비사” 『基督敎思想』 1966. 1-12 외; 이만열, “3.1운동과 한국기독교”,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서울: 지식산업사, 1991); 김형석, “한국기독교와 3.1운동”,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보성, 1986); 이진구, “3.1운동에 대한 개신교의 표상과 기억의 정치”, 박헌호·유준필 편집, 『1919년 3월1일에 묻다』 (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9).

9) 몇권의 예; 宋健鎬 외, 『解放前後史의 認識』 (서울: 한길사, 1979); 외 5권;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2(서울: 책세상, 2006); 『現代史를 어떻게 볼것인가 1- 5』 (서울: 東亞日報社, 1987), 이인호·김영호· 강규형 편,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 (서울: 기파랑, 2009);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 (서울: 일조각, 2006). 박찬표, 『한국국가 형성과 민족주의』 (서울: 후마니타스,2007; 로버트 T. 올리버, 朴日泳 譯 『建國의 內幕』(上, 下)(서울:啓明社,1998); 브루스 커밍스 외, 『분단전후의 現代史』, (서울 :일월서각,1983); 金正源 , 徐大肅 외, 『韓國現代史의 재조명』 (서울: 돌베개, 1982); 천관우, 『자료로 본 대한민국건국사』 (서울: 지식산업사, 2007); 유영익 편, 『수정주의와 한국현대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8); 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서울; 한울 아카데미, 2001);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서울: 선인, 2004); 임영태, 『대한민국사』(서울: 들녘,2008); 『韓國學生建國運動史』 (서울:社團法人: 韓國反託 反共學生運動紀念事業會, 1986); 『大韓民國史』(서울: 大韓民國國史編纂委員會, 1988); 이정식, 허동현엮음, 『21세기에 다시보는 해방후사』(서울: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2012);이영훈, 『대한민국역사』 (서울: 기파랑, 2013); 이대근, 이동복, 이주영, 『한국현대사이해』 (서울: 경덕출판사, 2007);

10) 대표적 저술들; 박명수, 안교성, 김권정 외, 『대한민국 건국과 기독교』 (서울 서울신학대학교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해방공간과기독교 I & II』 (서울: 도서출판 선인, 2017); 강인철, 『한국기독교회와 시민사회』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강인철, 『한국개신교와 반공주의』(서울: 중심, 2007).

11) 朝鮮總督府, 『朝鮮의 統治와 基督敎』 (大正 11년), 6.

12) 송길섭, “3.1운동에 관한 제3의 자료 분석,” 『神學思想』, 16, 55.

13) T. Stanley Saltau, “Appendix XIV,” Korea: The Hermit Nation and Its Response to Christianity (London: World Dominion Pres, 1932), 114.

14) 表終一, 『韓國敎育의 現狀』 (京城: 朝鮮總督府學部). 49-50.

15) The Korea Situation, No. 2 (1919), 3.

16) Chong Sik Lee, The Politics of Korean Nationalism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5), 120.

17) 참고로 1910년 말 총독부의 통계로는 외국인 선교사는 미국인 158명, 영국인(캐나다, 호주 포함) 64명, 프랑스인 45명, 기타 10명으로, 총 277명이었다. 한국교인은 장로교 115,072명, 감리교 37,620명, 가톨릭 38,197명으로, 기독교인이 총 198,974명이었다. 교회당은 총 973개였다. 『朝鮮總督府統計年表 (1910), 668.

18) “The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 of 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The Korea Situation, 1919.

19) 金良善, “三.一 運動과 基督敎界”, 237.

20) 『삼일운동 그날의 기록』 (서울: 기독교 대한감리회 서울 연회 본부,2001), 22.

21) 전택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239.

22) 金良善, “三. 一運動과 基督敎界”, 242.

23) 金良善, “ 三.一運動과 基督敎界”, 253.

24) 그들은 길선주, 김창준, 이명룡, 유여대, 이승훈, 이필주, 김병조, 양전백, 이갑성, 박희도, 신석구, 정춘수, 박동완, 최성모, 신흥식, 오화영, 모두 16인이었다.

25) 예를 들면, 서울의 세브란스 의전, 연희전문, 배재, 경신, 이화, 정신, 배화, YMCA영어학원, 성서학원, 협성신학교. 개성의 호수돈, 송도고보. 재령의 사립숭의, 명신. 평양의 숭실전문, 숭덕, 숭실, 숭의, 광성, 취명. 선천의 신성, 보성. 정주의 오산, 의주의 양실. 강계의 영실, 명신. 원산의 진성, 성진의 보신, 함흥의 영생, 공주의 영명, 부산의 일신. 마산의 창신, 의신. 대구의 계성, 신명. 전주의 기전, 신흥. 군산의 영명. 광주의 숭일, 수피아. 목포의 영흥, 정명 등에서 주도하였다.

26) 『독립운동사 제2권 3.1운동사(상)』 (원호처, 1971), 442-448.

27) 김승태, “평양에서의 3.1운동과 김선두목사” , 『기독교사상』 통권713호(2018, 5), 91-100. 참조

28) 『原敬日記』 1919년 4월 4일. 윤병석, 『3. 1運動史』 (서울: 정음사, 1975), 149에서 재인용

29) 일제시대 경찰기관 11,624개, 헌병장교(경시 겸무) 96명, 하사관 및 준하사관(敬部) 323명, 헌병 상등병(경찰임무) 2,525명, 헌병 보조원 4,749명, 정탐군 3,000명, 순수경찰(경시 35명, 경부 223명, 순사 2,321명, 순사보 3,019명).

30) 이만열. 『한국기독교 의료사』(서울: 아카넷), 391.

31) 『삼일운동 그날의 기록』, 64.

32) Henry Chung, The Case of Korea (NY: Fleming H. Revell, 1920), 181.

33) Congregational Record, 1919, 7. 17. 2, 855. 마펫. “三.一運動과 外國人 宣敎師” 348에서 중인.

34) Congregational Record, 1919, 7. 15. 2735. 마펫. “三.一運動과 外國人 宣敎師” 348에서 중인.

35) 각종 피해에 관하여는 『한국기독교의 역사 II』, 44-47의 도표들 참조.

36) Anonymous by Request, General Survey, The Christian Movement, 1920, 201. 민경배, 앞의 책 343에서 중인

37)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서울: 서울신문사, 1946), 96.

38) cf. 金鎭鳳, “三.一 運動과 民衆”, 『三一運動50周年 紀念論文集』 (서울: 東亞日報社, 1969), 351-361.

39) 朴慶植, 『朝鮮三一運動』 (1976), 186-188.

40) 朝鮮總督府 法務局, 妄動事件處分表, 朝鮮總督府, 1920, 1. 장신, “삼일운동과 조선 총독부의 사법대응,” 『역사문제연구』 2007. 10월호에서 중인.

41) The Korea Situation, Number 2 & 5.

42)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3). 345.

43) cf. 국회도서관 편,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 편, 2) (1978), 271-274.

44) 김승태, “재판속의 3.1운동”, 『기독교사상』 통권711호(2018, 03), 30.

45) 민경배, 『한국교회의 사회사』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08), 242.

46) Chong Sik Lee, The Politics of Korean Nationalism, 124.

47) 金鎭鳳, 『三·一運動史硏究』 (서울: 國學資料院, 2000), 217.

48)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 356-361.

49) cf. Samuel A. Moffett, “Korean Christian in Adversity,”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September 1919, 811-812.

50) 민족대표 33인의 1인으로 독방에 수감되어 요한계시록만 800독을 하고 신약을 13독, 구약을 7독하였다. Annual Report of Peng Yang Station to the Chosen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U. S. A. for Fiscal Year 1920-1921, 4.

51)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2권(서울: 조선뉴스프레스, 2015), 711.

52) 김희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세계사적의의.” 『3.1운동과 1919년의 세계사적의의』(동북아역사재단, 2010), 14.

53) 洪一植, “3.1 獨立宣言書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집(1989), 207.

54) 李基白, “三一運動論,” 『民族과 歷史』 (서울: 一朝閣, 1971), 243.

55) 전택부, “3.1운동의 기독교사적 의미”, 『基督敎思想』 1972년 3월호 42-43.

56) 박재순,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 80.

57) 金斗憲, “獨立宣言書의 思想史的 檢討‘” 『三一運動50周年 紀念論文集』 (서울: 東亞日報社, 1969), 621.

58) 洪以燮, “三一運動의 思想史的 位置,” 『三一運動50周年 紀念論文集』 (서울: 東亞日報社, 1969), 603-604.

59) ‘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게 보내는12인의 기독교인이 보낸 장서’ 『한국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서울: 한들,1997), 129-130.

60) 박재순,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 38.

61) 김희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세계사적의의”, 14.

62) Henry Chung, The Case of Korea(NY: Fleming H. Revel Company,1921), 37.

63) Henry Chung, The Case Of Korea, 37.

64) 박재순,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143.

65) 박재순,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134.

66) 박재순,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102-103.

67) 박재순,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133.

68) 宋吉燮, 『韓國神學思想史』(서울: 大韓基督敎出版社, 1987), 255.

69) Nym Wales and Kim San, Song of Arirang (San Francisco: Rampart Press, 1941), 75.

70) Arthur J. Brown, The Mastery of Far East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19), 568-560.

71) 李承薰 警察 訊問調書, 1919, 7. 17. 李炳憲, 『三一運動秘史』 (서울: 時事時報社出判局, 1959),356.

72) 金良善, “ 三.一運動과 基督敎界”, 270.

73)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356-361.

74) 1947년 2월 트루만 독트린 이후에야 소련 팽창에 대한 봉쇄정책으로 반공정책이 펼쳐졌다.

75) 본스틸 대장은 후에 주한 미8군 사령관을 지냈고, 딘 러스크는 케네디 대통령 재직시에 국무장관이 되었다.

76) 소련군에서 상장은 미군의 중장과 대장 사이의 계급이다. 정치군인으로서는 최고 계급이며 당시 소련에는 4명의 상좌가 있었다.

77) 박명수, “해방 후 건국준비 위원회와 기독교의 역할”, 박명수, 안교성, 김권정 외, 『대한민국건국과 기독교』(서울: 북코리아, 2014), 62-112.

78) 박태균 외, 『쟁점한국사』 (서울:창비, 2017), 46-47.

79) 랭던은 1933-1936까지 서울에서 미국총영사로 근무 후에 심양과 도쿄에서도 근무하여 한중일 전문가였고 미군정기에도 서울총영사로 근무하며 하지 장군의 정치고문 및 미소공위원회의 대표였다. “Some Aspects of the Question of Korean Independence”, Feb. 20. 1942. (895.01/79), RAIAK, 1940-1944. cf. 김지민, “해방전후 랭던의 한국문제인식과 미국의정부수립정책”, 『한국사연구』 제119호(2002, 12).

80) cf.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서울: 선인, 2004); 임영태, 『대한민국사』 (서울: 들녘,2008); 『韓國學生建國運動史』 (서울:社團法人: 韓國反託 反共學生運動紀念事業會, 1986).

81)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6권, 340-341.

82) 홍종인, “정계와 언론의 정당”, 『新天地』, 1946년 6월호, 25.

83)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6권, 479-480.

84) 『基督敎公報』 제1호, 1946년 1월 17일자.

85) 1948년 3.1 경찰의 발포가 기점이 되어 4.3봉기가 시작되어 1954년 9.21일 까지 제주에서 무력 충돌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김달삼 이후 이덕구가 그 자리를 이었다. 허명섭, “4.3 사건과 제주기독교”, 『해방공간과 기독교 I』 (서울: 도서출판 선인), 283-311를 참조.

86)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6월 1일자. 『白史 李允榮 回顧錄』 (서울:史草, 1984), 136-137.

87) 이 주장은 독립운동가로서의 적장자 주장이었고 1948년 8월 15일의 해방3주년 기념사에는 ‘대한민국의 탄생’이라고 했고 1949 8.15 기념사에서는 ‘민국건설 제1회기념일’이라했고 1950년 광복절 기념사에서는 ‘민국독립 제2회 기념일’이라고 했다. 공보처 편, 『대통령 이승만박사 담화집』 (서울: 공보처 1953, 5), 38쪽. 이주영 엮음, 『대한민국은 왜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가?』 (서울: 뉴데일리, 2011), 30에서 중인.

88)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7권, 441-443.

89)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7권, 441-442.

90)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였다.

91) 1907년 안창호 전덕기, 김구, 김규식, 최광옥, 양기탁, 이회영, 이동녕, 등이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독립사상,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국민 역량 축적을 강령으로 감리교, 장로교의 후원으로 항일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 결사 단체였다.

92) 이에 대해 건국혁명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김영호, 『대한민국의 건국혁명 1, 2』 (서울: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15)참조.

93) 백낙준, “사회변천과 새교육,” 『韓國의 理想과 現實』 上 (서울: 동아출판사, 1963),93-94.

94) 金良善, 『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 (서울: 大韓예수교長老會宗敎敎育部, 1956), 130-135 참조

95) 『서울신문』, 1946년 6월 4일자.

96) 박헌영,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 『개벽』 , 1925년, 11월호 64쪽 이하. 민경배, 『교회와 민족』 (서울: 연세대출판부, 2007). 480에서 중인.

97) 허명섭, 『해방이후 한국교회의 재형성』 (서울: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2009).참조

98) 강인철, 『한국개신교와 반공주의: 보수적개신교의정치적 행동주의연구』(서울: 중심, 2007).

99) 이진구, “3.1운동에 대한 개신교의 표상과 기억의 정치,” 박헌호·류준필 편집, 『1919년 3월1일에 묻다(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9), 547.

100) 박찬승, 『한국근현대사를 읽는다』(서울: 경인문화사, 2014), 327.

101) 서대숙,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서울: 이론과 실천, 1993), 1-2장 참조.

102) 노치준, 강인철, “해방후 한국종교의 특성과 변화”, 『한국현대사회와 사회변동』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97), 223.

103) 김종대 “8.15 해방과 서울의 교계”, 김흥수편, 『해방 후 북한교회사』 (서울: 다산글방,1993), 343. 연규홍, “해방정국과 기독교건국운동”, 이인호, 김영호, 강규형 편,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서울: 기파랑, 2009), 333.

104) 김권정, “해방 후 기독교 세력의 동향과 대한민국 건국운동,” 박명수, 안교성, 김권정 외, 『대한민국건국과 기독교』 (서울: 북코리아, 2014), 28-29에 나타난 인물들 참조.

105) 김구, “강한나라를 세우자”, 『활천』, 1946년 1월호, 2.

106) 김규식, “자기를 정복하여라”, 『활천』, 1946년 1월호, 4-5.

107) 이승만, “하나이 되자”, 『활천』, 1946년 1월호, 4-5.

108)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2권 (서울: 조선뉴스프레스, 2015),420-422.

109) 연규홍, “해방정국과 기독교건국운동”, 『韓國敎會史學會誌』 Vol. 14 (2004). 95-119.

110) 최재건, “맥아더의 전후 일본에서의 종교정책과 한국에 끼친 영향”, 『한국교회사론』 (서울:CLS, 2018), 857-899 참조.

111) 김흥수엮음, 『해방후 북한교회사』 (서울: 다산글방, 1992), 56-58.

112) 한경직, “건국과 기독교”, 『한경직목사 설교전집 』 1 (서울: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10),106. 이혜정, “한경직연구의 관점: 기독교적 건국론”,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0호, 157-181 참조.

113) 한경직, 『건국과 기독교』(서울: 보린원, 1949; 기문사, 1954 재판) 참조.

114) 韓稚振, 『民主主義 原論』 3. (서울: 조선문화연구사, 1947), 82.

115) 백낙준, “사회변천과 새교육,” 『韓國의 理想과 現實』 上 (서울: 동아출판사, 1963),93-94.

116) 그의 이상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독재자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강인철, 『한국교회와 국가·시민사회』(서울: 한국 기독교 역사연구소, 1996),162.

117) 한 알의 밀알’이란 말도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성경번역은 “한 알의 씨알”이어야 한다고 하는 제안도 있다. 박재순,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서울: 홍성사, 2015), 12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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