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5.26 일 20:17
상단여백
HOME 주장과 논문 논문
이 시대 기독대학의 사명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로드십과 가치에 대한 신앙고백 -
이 글은 지난 12월 14일(금) ‘이 시대 대학의 사명과 핵심적인 교수역량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고신대 제3회 카이퍼 강좌에서 강의한 정주채 목사의 강의 원고이다.

 

이 시대 대학의 사명과 핵심적인 교수역량은 무엇인가?

- 기독교의 로드십과 가치에 대한 신앙고백 -

정주채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연 그리스도의 교회인가? 깨어 정신을 차리고 자타에게 물어야 할 긴급하고 중요한 질문이다. 한국교회의 타락상은 한국기독교가 예수님 당시 유대교나 중세의 천주교처럼 다른 종교가 돼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게 만들고 있다.

전도는 종교적인 판촉행위로, 세례는 교인 만들기의 형식으로, 교회 리더십은 세속의 리더십으로 변질되었고 직분이 명예와 권세가 되면서 시몬이즘으로 타락하였다. 교회지도자들의 질적 저하는 윤리적인 타락과 더불어 회복 불능의 상태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되는 교회의 그 공동체성(koinonia)은 교리적인 고백으로만 남아있는 실정인데다 교파는 약 400여 개로 분열돼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에 대한 신앙고백의 허구성과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대한 무지와 무시이다.

이런 시대에 기독교대학이 갖는 위치와 교육적 사명은 너무나 분명하고 중대하다. 장로교가 강조하는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에의 충성이다. 그리고 고신대학교는 일본의 신사 앞에 무릎을 꿇었던 죄를 회개하고, 한국교회를 말씀의 터 위에 바로 세우고자 열망했던 선진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다. 한국교회의 개혁과 진정한 부흥을 위하여 우리 학교가 갖는 교육적 사명은 참으로 막중하다. 고신대학교는 이스라엘의 포로송환기의 에스라학교(조직적 실체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같고, 1599년 칼뱅이 설립한 제네바아카데미와 같아야 한다.

필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기독교대학에서 봉사하는 교수들이 갖추어야 할 핵심역량은 주 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가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과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1. 기독교 로드십

기독교의 터와 기둥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것은 물론 기독인 각인의 신앙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신앙고백이고 동시에 교회의 반석과 기둥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터가 흔들리고 기둥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할뿐 개인생활에서는 물론 목회, 직분, 행정, 정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찬탈과 반역적인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우리는 이 신앙을 속히 회복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주시라는 성경의 선포와 서술은 수없이 나온다.

시 2:7-9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주권과 영광에 대해 끊임없이 강조하며 가르친다.

엡 1:20-22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골 1:15-20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에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주권과 영광에 온전히 충성할 것을 거듭거듭 맹세하고 다짐한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고 선언하심으로써 이런 성경의 선포들을 확인해주셨다.

 

1) 로드십의 훼손

그러나 요즘 교회 안에는 주를 경외함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주님의 임재와 다스림에 대한 믿음도 두려움이 없어져 가고 있다. 교회의 모든 행사 특히 당회나 제직회 등의 회의에서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자체가 사라져 가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주님의 자리를 없애버리거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엄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로마천주교는 교황을 비롯한 사제들이, 오늘의 한국기독교는 교회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권세와 영광을 찬탈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이 아주 허약할 뿐 아니라 허구에 차있다는 증거는 범사에서 드러나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예를 두세 가지만 들면 아래와 같다.

 

(1) 교회에서 직분을 얻기 위한 선거운동

교회의 직분은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세우신다. 엡 4:11에서 바울 사도는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라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시니 곧 내리셨다가 하늘 위에 오르신 자시다(4:10). 그리고 장로교 헌법의 교회정치원리에서도 (교회의 직원)이란 조항에서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께서 그 몸 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직원을 세우신다.”(제3조)고 밝히고 있다.

물론 직원을 부르고 세우시는 방법은 달라졌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세우셨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하고 신약교회가 시작된 후로는 회중들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하셨다. 신약교회에서 처음으로 7인의 직분자를 세울 때 사도들은 회중들에게 “택하라”고 명하였고 교회는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라고 하였다.(행 6:1-6)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였으므로 세례 받고 성령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고 인정하여 교회의 의사결정권을 회중에게 준 것이다.

상식이지만 국가에서 하는 선거는 주권재민사상에 근거하여 국민들의 여론을 모우고 확인하는 방법이지만 교회에서의 회의나 선거는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찾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과 주를 경외하는 믿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범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한가? 언젠가부터 교회직분이 세속적인 명예가 되고 권세가 되면서 시몬이즘이 교회를 덮고 있다. 목회자들 중에는 교인의 수를 늘리는 방편으로 또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얻거나 교회 재정의 확충을 위해 직분을 이용하는 사례가 많고, 교인들은 명예를 얻거나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기 위해 직분자가 되려고 선거운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거운동은 교인들보다 목사 장로들이 앞장서 있고 더 노골적이다. 교단의 총회장이 되거나 교회연합기관의 대표가 되기 위해 돈을 쓰면서까지 당선을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묵인할 뿐 아니라 방조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훼손하고 찬탈하는 범죄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눌러버리고 있다. 또한 어떤 자들은 이것이 범죄라는 사실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며 지원하기까지 한다.

 

(2) 치리회의 권위와 신뢰 상실

교회의 모든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역시 장로교 정치원리에 보면 “치리권은 전 교회로서나 그 선정된 대표자로 행사함을 불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뿐이다.”(제7조)라고 하였고, 제8조에서는 “교회의 권징은 세계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위에서 온 것이므로”라고 하였다. 그러나 치리회와 거기에 속한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 권세와 권위에 대한 신앙고백이 약하거나 주를 두려워함이 부족함으로 그들에게 신뢰와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교회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경외심이 허약하므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에 대한 경외심은 더욱 허약해진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열정도 부족하고 또 그의 뜻대로 행하고자하는 충성심도 약하기 때문에 교회정치와 치리를 공의롭게 수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치리회의 결정이나 판단에 대한 신뢰는 더욱 약화된다. 치리란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뿐인데, 치리자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충성하기보다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경도되다보니 그 결정과 판단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한국교회의 치리회는 정치적으로 흘러서 신뢰를 잃고 있기 때문에 교인이나 교회지도자들이나 치리회의 결정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여겨지면 거의 무시해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은 교회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갖고 가는 것이다. 시비가 일어나면 거의 모두가 세상 법정에 호소한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세상 법정의 판사들의 치리 하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교회 치리자들에 의해 짓밟힘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를 무시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법원에서 목사의 자격과 위임에 대한 판결까지 내렸다. 국가가 교회를 무시하고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자업자득이다.

 

(3)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우상화와 제왕적인 행태

교회들 중에는 그 주권자가 누구인지 분명치 않은 교회들이 있다. 목회자를 우상화하는 교회들도 있고, 목회자가 스스로 제왕적인 자리에 앉아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세를 누리는 자들도 있다. 대형교회로의 성장은 주로 목회자의 카리스마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목회자의 사역을 통해 은혜 받은 교인들은 그 목회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고,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거의 절대적인 리더십을 갖게 된다. 거기다 심지어 자기를 선전하고 과시하며 자기 우상화를 조장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이런 영광과 권세를 스스로 추구하는 목회자가 있을 경우 그 교회에서는 주인이 그리스도인지 담임 목사인지 불분명해지게 된다.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증거는 대형교회들에서 거의 일반화돼버린 담임 목사직 세습이다. 교회의 사유화가 대물림되는 경우다. 목회자들 중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이 이룬 업적과 영광을 자녀에게 대물림하는 사람들이 있고, 혹은 담임 목사가 가진 리더십이 워낙 절대적이다 보니 그 리더십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지고, 또 교인들도 그 목사의 지도 아래 계속 안주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세습이라는 불가피한 세속적인 행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2) 로드십에 충성된 인재양성

다윗 왕국은 견고했고 강력하였다. 다윗은 자신이 훌륭한 왕이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는 충성되고 강한 용사들이 많았다. 역대상 11,12장에는 다윗의 용사들의 명단이 기록돼있다. 다윗 왕에겐 자랑스러운 명단이요 용사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명단이다. 그들은 자신을 던져 주군을 받들어 섬긴 자들이다. 충성은 그리스도가 왕이신 하나님나라가 요구하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에는 이렇게 충성된 일꾼들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런 젊은이들을 길러내야 한다. 기독교대학은 바로 그 일선에 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바로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그 우상숭배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인본주의 우상숭배다. 사람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리고 모든 일을 사람들이 좌우지하고 있다. 이에서 회개하고 돌이키지 못하면 결국 교회도 이스라엘과 다름 없는 운명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에 대해 매우 예민하다. 이런 일에 조그마한 손상이 있어도 분노하며 견디질 못한다. 교회지도자들은 이 점에서 더 예민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이 손상을 당하고 그 이름이 훼방을 당해는 일에는 아주 둔감하다.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충성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범사에서 실천적으로 고백하는 충성된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는 쇠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하나님나라의 가치

우리나라의 종교들을 가치관의 관점에서 보면 거의 같은 종교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각 종교들이 신봉하는 대상만 다를 뿐 추구하는 가치에는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란 다 같은 거 아니냐? 착하게 살아 복 받고 좋은 데 가자는 거 아니냐?”고 말한다. 한국기독교신자들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신앙의 대상은 바뀌었는데 가치관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종교인들의 의식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샤머니즘은 21세기 첨단문화 속에서도 그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샤머니즘을 비판하는 지성인들에게 있어 종교란 일종의 휴머니즘이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통 보수를 부르짖는 교회들은 교리라는 도그마에 갇혀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고, 더 안타까운 사실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나라의 건설에 열정이나 충성심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보수적인 교회들은 사도성을 잃어버린 교회로, 세상에서 도피하는 교회로 전락하고 있다. 심지어 보수적인 교회들 중에는 신본주의를 빙자하여 인격과 인권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반면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며 행동하는 진보주의 교회들도 치명적인 약점들을 갖고 있다. 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 하나님나라의 터요 기둥인 복음에 대한 신앙고백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속량을 위한 대속적인 죽음으로 믿기보다 훌륭한 도덕적인 모본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고, 구원을 구조악이나 사회적인 매임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복음화를 인간화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나라를 위한다며 열정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동력을 복음에서부터 얻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활동들이 사회운동이나 정치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올바른 신학과 바른 가치관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롬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 세대”란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패턴 곧 세상의 풍조와 사상, 철학과 가치관을 말한다. 이것을 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에서 “마음”은 감정이 아니라 지성과 의지를 말한다. 이것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변화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이니 하나님나라의 이념과 가치를 말한다.

필자는 기독교 대학의 교수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교수역량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신앙과 충성심이며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대한 이해와 이를 실현하려는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나라의 가치는 무엇인가?

 

1) 생명

생명 곧 인간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는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이다. 이것은 논증이 필요 없는 선험적 가치이며 절대 가치이다. 그리고 절대 가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선악의 기준이 됨을 뜻한다. 생명은 선악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고, 대조적으로 도적을 예를 드시면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선악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끝나지 않은 여행』의 저자 M. 스캇 펙은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아주 쉽고 분명하게 정의하였다. 선은 “생명을 위한 어떤 것(something for life)”이다. 악은 “생명을 대적하는 어떤 것 (something against life)”이다. 사탄은 악의 실체이다. 사탄은 생명을 쇠망케 하는 일에 종사하는 악의 두목이다. 우리가 북한의 정권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체제유지를 위해 “수령”을 신격화시키고 김일성 일가를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하면서, 백성들의 생명과 복지는 초개같이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가치와 관련하여 우리 시대에서 우리가 경성하고 대처해야 할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젊은이들이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일을 귀찮게 여기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소위 생명경시풍조이다. 맘몬이즘과 이기주의로 눈이 멀어서 생명의 귀중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생명의 열매인 자녀들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보지 못한다. 이것은 비인간화의 문제요 존재론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모든 분야에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 일”에 충성스럽게 복무해야 한다.

 

2) 인권

인권이 넓은 의미에서는 생명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엄밀히 보면 다른 차원의 내용이 있다. 생명이 존재론적인 차원에 속한다면 인권은 사회적인 차원에 속한다. 누구나 공동체 속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인권이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누구나 동일하게 갖는 권리가 있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활동하고, 자신의 의지를 따라 능력을 개발하고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를 천부인권이라고 한다. 아무도 이를 무시할 수 없으며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바로 인격적 사회적 살인행위이다.

예수님은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고 하셨다.

사람의 인격을 서로가 얼마나 존중해야 할 것인가를 잘 교훈해 주신 말씀이다. 사람의 인격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해도, 사람은 사람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존중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리라”(마 18:6) 역시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작은 자”란 사람들에게 하찮게 여김을 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존중되어야 하고 어떤 경우라도 무시하거나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한 것으로 여겼고, 또 그 인격의 존엄함을 특별히 강조하여 가르치셨다. 이것은 모든 시대의 분위기나 사상을 뛰어넘는 가르침이요, 하나님나라의 사상이다.

 

3) 자유

또 하나의 절대 가치는 자유이다. 생명, 인권, 자유는 모두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자유가 없는 인격이 성립될 수가 없고, 인격과 인권이 무시되는 생명은 가치가 없다. 인간은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근로의 자유, 행복을 추구할 자유, 신앙의 자유, 등등의 자유가 있다. 이런 자유는 이웃의 자유와 권리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는 실제적인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인격적으로 대하시는지 모른다. 모든 일을 하실 때에 언제나 우리의 자발적인 순종과 참여를 기뻐하신다. 심지어 우리가 잘못할 때에라도 우리의 자유를 무시하거나 꺾지 않으신다. 인간의 잘못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아픔을 당하실지언정 그는 인간의 자유를 꺾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먹지도 못하게 할 나무의 실과를 왜 두셨을까? 라고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생명을 누리고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나아가 이것을 기계적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그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람은 인격자이고 또 그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드러내는 표지판이다. 인간이 인간됨에 있어서 자유는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4) 사랑과 공의

사랑과 공의는 보편적 절대 가치일 뿐 아니라 이런 가치들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사랑과 공의는 인생의 목적이며 동시에 수단이다. 사랑과 공의는 하나님나라의 통치이념이며,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두 기둥이다. 사랑과 공의를 통해 생명과 인격의 존엄과 자유를 실현하고, 이것들을 보존한다.

그리고 사랑과 공의는 하나이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생명을 살리지 못하며 부요하게 못한다. 사랑이 없는 공의는 생명을 죽이는 칼이 될 수도 있다. 빅톨 유고의 『레 미제라불』은 바로 이 주제를 다룬 소설이다. 추상같은 법의 수행자였던 자베르 형사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정의만 가지고는 아무도 살릴 수 없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사랑과 공의를 다 이루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의 성취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셨다.

시 85:9,10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우리도 사랑과 공의로 하나님나라의 보편적 절대 가치를 구현해 갈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율법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 복음을 통해 사랑을 성취할 수 있다.**

 

정주채  juchai215@gmail.com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주채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