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 교회는 사람의 회집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 연구위원장, 미포 사무총장)

현대 사회에서 교회는 건물, 모이는 회중의 수, 가용할 수 있는 재정, 할 수 있는 역할 등으로 환산되고 있다. 성장이 멈춘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직분자들은 의욕이 꺾이고 있다. 개척교회와 작은 교회들은 생존의 기로 속에 있다. 한국 교회가 처한 환경인 우리 사회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사회의 순기능에 기여하는 지를 철저하게 감시받는 중이다. 과연 교회는 무엇으로 그 존재를 증거하는가? 달리 말하면 교회의 영광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12제자들을 부르는 본문이 눅6:12-19절 말씀이다. 본문을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해본다. 왜 12명인가? 구약에서 야곱의 12 아들과 이스라엘의 12지파와 연결된 숫자로서 신약의 십이사도는 어떤 연속과 불연속을 가지는가? 두 번째 예수님께서 십이사도를 부르신 시점이 언제인가? 이것은 교회의 역할에 대한 누가의 본문 기록 당시의 이해를 정확하게 보게 된다. 어떤 문맥에서 교회를 이해하고 있는가? 세 번째는 십이사도들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두 번째 질문과 연결된 질문이자 실질적인 측면을 가진다.

먼저 왜 12명의 사도를 부르셨는가?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하신 후에 날이 밝자 제자들 중에 12명을 부르셨다(12-13).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13). 예수님의 제자들은 12명 이상 많은 무리들이다(17). 제자들 중에 12명을 왜 부르셨는가? 그 12명을 제자들과 구별되게 사도라고 불렀다. 사도는 누가-행전에서 직분과 관련해서 사용된다. 특별히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제비뽑을 때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대신할 자를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행1:25). 직무라는 단어가 본문 비평의 대상이 된다.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기를 기다리는 시점에서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선택하는 일이 직전에 이루어진다. 교회는 12사도가 정리됨으로 신적인 기관으로 인준된다. 사도가 사도행전에서 교회를 지도하는 직분적 위치임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봉사를 위한 직분을 선택하는 장면에서 12사도는 역할의 구분을 선포하고, 직분 선출을 주도한다(행6:2). 사도는 제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선 자들이다. 하나님 백성들인 교회의 중심적 지위를 가진 자들이다. 교회의 공적인 인준이 사도들에 의해서 확인된다.

12명은 구약과의 연속을 전제한다. 구약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의 12아들과 12지파를 기억나게 하는 숫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억나게 하고, 사도들이 야곱의 12아들처럼 신약 교회, 하나님 백성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구약과의 불연속이 있다. 12아들과 12지파를 혈통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 주변에는 12명의 사도들과(17a) 많은 제자들(17b) 그리고 예수님께 몰려온 많은 백성들이 있다(17c). 사도들은 중심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고, 많은 백성들은 관심자들이다. 많은 백성들 중에서 제자가 되고, 나중에 사도가 되기도 할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도는 12명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바울 자신을 사도로 부르기 때문이다. 많은 백성들 중에는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온 이방인들도 있다. 이것은 후일에 사도행전에서 로마에까지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는 일을 염두에 둔 누가의 기록 의도를 보여준다. 은혜의 해가 유대인들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도 해당이 된다는 누가의 기록 목적과 연결된다. 이것은 구약의 12아들 혹은 12지파가 지향하는 참된 복의 대상인 모든 민족을 담고 있다.

정리하면 12명을 사도로 세우신 것은 구약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계속되지만, 이것인 인종적인 연속성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이 모든 민족에게 이르게 되는 실질적인 약속의 성취를 의미한다. 온 세상 모든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의 중심으로서 12사도들이다.

두 번째 12사도를 부르신 시점이 언제인가?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하신 후에 날이 밝자 제자들을 불러서 12명을 세웠다. 기도하신 다음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행위는 사건의 특별한 발전을 가지고 온다. 세례를 받으신 후에 기도하실 때에 삼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들의 지상에서의 사역을 인준하였다(눅3:21-22). 사탄에게 시험받음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질병을 고치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이때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서 기도하신다(5:16). 물론 4:42절도 병행 구절인 막1:32절과 비교해서 한적한 곳에 가진 이유가 기도하신 것이다. 가버나움뿐 아니라 갈릴리 모든 동네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기로 작정하신다. 한 지역에 정착함을 거절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동네에서도 제자들을 부르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다. 병자들이 몰려오자 예수님이 다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5:16). 기도하신 이후에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앞에 놓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선언을 하신다. 단순히 병을 고치는 분이 아니라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진 인자로서 스스로를 드러내신다(5:20). 기도는 예수님을 공적인 생애로 나아가게 했고, 한 동네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네로 나아가게 하면서 제자들을 부르고 병을 고쳤다. 그리고 다시 병만을 고치는 분이 아니라 죄 사함을 주시는 인자임을 선포하신다. 병과 귀신 그리고 모든 결핍의 근거는 죄 때문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사역 본질을 드러내셨다. 그것이 인기와 안정과는 전혀 반대되는 길이었다. 한 지역에서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떠돌이로, 그리고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오는 인기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신성모독이란 정죄의 자리로 나아가셨다.

죄 사함의 권세를 행사하신 것은 신성모독 죄에 해당한다(5:21).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단지 병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의 문제를 다루시기 위해서 기도하셨다. 죄 사함의 권세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5:32). 죄인인 세리 레위를 부르셨다. 그리고 죄와 죄인의 문제는 율법의 문제와 연결된다. 죄를 규정하는 것은 법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율법은 정죄의 율법이었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복음으로 바꾸시는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고 있다. 은혜의 해가 성취된(눅4:19) 때는 잔치의 때이기에 금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안식일은 아무것도 않는 정죄의 날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고 선을 행하는 날이라고 선포하신다(6:9). 안식일의 율법이 복음이 되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인자는 이제 죄를 규정하는 율법의 주인이란 선언을 하셨다. 예수님의 손에 쥐어진 율법은 복음으로 변했다. 생명을 살리는 안식일의 율법이 되었다.

정죄의 율법을 복음으로 바꾸어서 안식일의 주인인 인자가 되신 것은 결국 당시 율법의 기득권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을 죽이도록 재촉한 일이었다(6:11, 비교 마12:14). 죄 사함의 권세를 소유할 뿐 아니라 율법의 주인이신 인자이신 예수님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죽이려고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이유이다. 그리고 내려오셔서 제자들 중에서 12사도들을 뽑으신 것이다.

12사도를 세우신 것은 오순절 이전에 이미 교회를 세우신 것이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중심을 세우신 것이다. 왜 세우셨는가? 예수님이 죽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누가 통치하는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것인가? 바로 12사도가 중심이 된 교회이다. 마태는 "내 교회" 세우실 것을 말씀하셨다(마16:18).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무리들을 보시고, 하나님 나라가 계속해서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밤새 기도하시고, 얻은 결론이 바로 12사도를 세워서 교회를 이루시는 일이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는 인간적인 욕망을 하나님에게 강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 기도이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출발선이다.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시간이다. 자기의 욕망을 관철하는 것을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이방인의 기도이다(마6:7-8). 예수님이 기도하심으로 죽음 이후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일들이 어떻게 계속될 것인가를 하나님께 묻고 그 답이 12사도를 세워서 교회를 다스리도록 하신 것이다.

12사도가 세워진 상황이나 시점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된다. 이것은 주님이 없을 때, 주님이 계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계속되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다. 따라서 12사도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는 바로 지상에 계시는 주님이시다.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의도를 따라서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고도 했다. 교회가 바로 예수님 자신인 것이다.

교회 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홀로 남겨진 주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복음을 전파하도록 세우신 신적 기관이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다. 교회는 규모가 크거나 적거나 관계없다. 교회는 재정이 넉넉하거나 부족하거나 관계없다. 교회가 얼마나 많은 사업을 할 수 있느냐와 관계없다. 수가 얼마나 많고 적으냐도 아니다. 그리고 건물이 얼마나 화려한가는 더더욱 아니다. 교회 됨은 바로 예수님 때문에 의미가 있다. 교회 됨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히 인간들만의 회집도 아니고, 놀이터도 아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셋째로 12사도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은 자기 죽음, 떠나심을 고려하면서 12사도를 세우셨다. 하나님 백성들을 교회로 질서 있게 세워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세상 나라와 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조직하신 것이다.

12사도들에게 주님은 무엇을 가지고 직무를 감당하게 하시는가? 17절을 보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다. 평지에 선다. 사도들과 제자의 많은 무리와 함께 유대를 넘어서 두로와 시돈에서 온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 했다고 알린다. 누가는 두 가지의 목적으로 이방의 백성들까지 포함해서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규정한다. 말씀을 듣는 것과 병 고침이다. 실제로 누가는 먼저 병 고침을 18-19절에서 보인다. 그리고 20절-49절까지 말씀을 전하신다. 마태의 산상수훈의(마5-7) 축소판이다. 병 고침과 말씀이 예수님을 찾는 무리들에게 나타나야 할 두 가지 요소이다. 이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신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함께한 사도들과 제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말씀은 산상수훈의 요약이기에 율법을 복음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태는 율법의 완성이란 관점에서 율법을 복음으로 변화시켰다(마5:17). 누가는 은혜의 해가 도래하는 수단으로 율법을 복음으로 바꾸었다(눅4:19).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다. 세상에서 비난하고 정죄하는 요소들은 변화시켜서 은혜의 수단으로 바꾼 것이다. 복음의 말씀이 예수님과 12사도들로 대표되는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다. 또 하나는 병 고침이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했다(18). 이유는 능력이 예수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능력은 나병환자를 만지실 때 드러났다(눅5:13). 나병은 부정이 가장 강한 상태의 병이고, 만지면 부정이 전염된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지실 때 부정이 물러가고 깨끗하게 되었다. 오히려 부정이 예수님에게 굴복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가진 자가 권세가 있다고 부른다. 능력과 권세는 연결되었다. 모든 부정과 질병, 그리고 결핍과 부족은 모두 죄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병 고침의 능력은 다르게 말하면 죄 사함의 권세와 연결된다(눅6:23). 예수님은 이것을 더 알기를 원하셨다. 실제로 죄 사함의 권세가 드러날 때 질병도, 부정도, 결핍도, 굶주림도 해결된 것이다.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현상적인 역전은 가능하지만 중요한 것은 병 고침을 죄 사함의 권세의 실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지려고 했다. 미신적인 능력 발현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믿음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자들을 향해서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눅5:20). 만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통해서 죄 사함의 효력이 발생한다.

12사도들이 많은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은 효력의 사역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가지신 것을 가지는 것이다. 먼저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병 고침의 능력으로 표현되는 죄 사함의 권세를 드러내는 것이다. 병 고침을 왜 죄 사함의 문제로 환원하느냐고 시비할지 모르겠다. 병 고침의 능력이 없는 자가 가진 변명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병 고침을 위해서 예수님을 만지려는 행위의 정당함은 없다. 예수님은 계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계신 것처럼 병 고침이 가능한 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믿음은 그 지향점이 죄 사함의 권세로 가야 한다. 병 고침이란 부수적 능력이 죄 사함의 권세의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리하자면 12사도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지상에 계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복음의 말씀과 죄 사함의 권세를 주셨다. 교회의 영광과 실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예수님이기에 영광스럽다. 나아가서 교회는 부활 후에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복음과 죄 사함의 권세를 가졌다. 교회가 건물을 가진 것이, 많은 수를 가진 것이, 혹은 세상의 지위 있는 자를 가진 것이, 나아가 재정이 풍부한 것이 교회 됨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수가 없으면, 돈이 없으면, 조직이 없으면, 건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좌절하지 말자. 교회는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복음과 죄 사함의 권세를 가졌다. 죄를 해결하는 문제는 세상의 학력과 능력과 첨단의 기술과 경험이 이루지 못한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이 해결한다. 교회는 이 복음을 가지고 죄 사함을 선포한다. 그래서 누가가 선포한 은혜의 해를 온 세상에 이루도록 역사한다. 복음과 죄 사함의 권세 이것이 교회의 영광이며 주님 교회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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