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끌고 와 예수님 앞에 세웠다. 모세의 율법은 투석형에 처하라고 했는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올무에 빠뜨리기 위한 흉계였다. 돌로 쳐 죽이라고 할 경우 사랑을 외친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순되어 대중의 신뢰를 잃고 선교에 타격이 온다. 더군다나 사형 선고와 집행권은 로마 정부에 있기에 국법과 마찰을 빚게 된다. 그렇다고 용서해주라고 할 경우 율법을 어기는 것은 물론 간음을 권장하는 꼴이 된다.

온 무리가 이 기막힌 한판 승부를 숨죽여 지켜볼 때 예수님은 즉답은 피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셨다.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요 8: 6). 왜, 무엇을 쓰셨을까? 적수들의 질문에 가시가 숨어 있음을 아시고 잠시 대응할 시간을 벌기 위해? 아무 말씀도 못 들으신 척 짐짓 외면하면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야수성을 폭로하기 위해? 자괴심에 가득 차 고소자들의 눈들도, 구경꾼들의 눈들도, 심지어 여인의 눈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기에? 아니면 타인의 죄는 쉽게 찾아냈지만 자기들이 몰래 저지른 더 큰 죄악들은 은폐하고 있는 고소자들의 죄목들을 일일이 적으셨을까? 그것도 아니면 '간음한 남자는 어디에'라고 쓰셨을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 땅에 무엇인가를 썼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이 손가락은 간음자를 돌로 치라고 규정한 그 율법의 근간이 되는 십계명을 돌판에 새긴 그 하나님의 손가락이 아니던가?(출 32: 16) 하나님의 손가락은 여인이나 고소자들이나 무리들의 면전을 향해 정죄하고 힐책하는 집게손가락이 아니었다. 아래로 굽혀 마음의 땅에 쓰신 사랑과 용서의 손가락이었다.

글씨를 쓰시는 예수님을 적대자들이 재차 다그쳤다. 그때 몸을 일으켜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 7) 그리고는 또 다시 몸을 굽혀 무엇인가를 땅에 쓰셨다. 왜, 무엇을 또 쓰셨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연장자 순으로 하나 둘 손에 쥐었던 돌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현장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잠자고 있던 양심이 슬그머니 기지개를 켠 것이었다. 적수들과 온 무리가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고 패퇴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국회에서 주무 장관을 심문하는 실황을 본 적이 있다. 때로 인격을 짓밟는 발언도 서슴지 않고 나왔다. 영락없이 고양이가 쥐를 몰듯 죄인을 추궁하는 형국이었다. 들끓는 국민의 분노를 대변하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지나쳤다. 저 무서운 국가 이기주의 앞에 누가 누구에게 삿대질을 하리요? 스스로 죄 없다 하는 손가락은 높이 치켜세워 고성을 지르며 정죄하지만 하나님의 손가락은 오늘도 아래로 굽혀 무엇인가 땅바닥에 글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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