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구(서울영동교회 담임목사)

고난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나로 인한 고난이 있는가 하면, 남으로 인한 고난도 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언제 어떤 종류의 고난이 올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만 생각합니다. 고난에 대해서 늘 방어적이고 수동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고난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일까요? 고난을 이런 방식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일까요?

고난에는 고난을 피하게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치유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원하는 고난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벧전 2:20-21). 성경은 믿는 이들은 바로 이 자원하는 고난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온갖 종류의 고난을 다 겪으셨는데, 모두 다 마지못해 당한 고난들이 아니었습니다. 다 자원하는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 사랑을 위해 십자가란 고난을 스스로 자원하셨습니다. 이 고난은 마침내 고난을 치유했고 이기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종류가 다를 뿐 다 고난을 당합니다. 문제는 고난 속에 담긴 역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고난을 자원할 때 그 고난이 우리를 다른 무가치한 고난들에서 건져준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을 위한 능동적인 고난은 무의미와 무기력이란 수동적 고통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 고난은 고통 이기게 하는 은혜가 넘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 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문제들 ‘때문에’ 고난을 받고 사는 것을 인생의 본질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고난을 자원하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본질이라고 가르칩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고 주님과 더불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서 고난에 직면하는 겁니다. 맡은 직분에서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고난이 역설적으로 인생의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행복도 행복 자체를 구하면 얻을 수 없듯이, 고난도 고난 자체를 피하려고 하면 피할 수 없습니다. 자원하는 고난이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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