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공지영의 산문집에 한 산악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의 8000m급 14봉을 완등하고 극지방까지 탐험한 이력이 있는 라인홀트 메스너.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라는 책에서 고비사막을 횡단하게 된 변을 남겼다. 감동적이다. “나는 편안히 내 삶에 안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이 드는 법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 내 마음속의 사막 한가운데서 멈추지 않고 반짝이는 오아시스를 향해 행군하고 싶었다.”

그는 충분히 편안한 안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만한 안주는 적어도 8000m급 이상의 고봉을 완등했던 그에게 결코 비난거리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편안한 안주보다 끊임없는 행군, 반짝이는 오아시스를 향한 전진을 선택한 라인홀트 메스너.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반짝이는 오아시스, 혹시라도 신기루일지 모르는 오아시스를 향한 행군을 멈출 수 없도록 만든 것일까? 그의 말대로라면 살아가는 법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인생의 의미가 활어처럼 뛰노는 나이 듦의 미학이기 때문이었을까?

누구나 편안함에 취하고 싶어한다. 누구나 안주하는 인생의 덫에 걸려들기를 꿈꾼다. 아닌 척하지만 언제나 자신을 내몰기보다 편안한 의자 하나 장만해 앉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들을 향해 속물이라고 몰아세우지만 적어도 자신의 자식만은 안락한 삶을 누리기를 기대하는 이중적인 존재가 우리 아니던가.

열네 개의 고봉을 점령한 라인홀트 메스너라고 해도 고비사막 횡단이 식은 죽 먹기식 놀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화려한 등정 이력을 가지고도 날마다 산으로 오르기 전 짐을 싸면서 등정이 두려워 울었던 사람이라는 소문을 남긴 인물이 왜 굳이 고비 사막을 건너려고 한 것일까?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사막을 횡단하는 것은 단숨에 되지 않는다. 사막을 횡단하려면 작은 걸음들이 수백만 번 필요하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이 길의 한 부분이 되고 경험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모든 탐험이 매번 진짜 삶이었다.” 그렇다. 그는 삶을 말하고 싶었다. 정말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기록하고 싶었다. 결코 단숨에 되지 않는, 작은 수백만의 걸음으로 인생이 채워진다는 것을 조용히 써내려가고 싶었다. 단숨에 뭔가 이루기를 꿈꾸는 사람보다 한걸음 한걸음 길을 만들어가는, 그래서 모든 발걸음이 진정한 삶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인생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리스도인에게 편안한 안주는 없다. 아직 다 잡은 것이 아니다. 과거에 누린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앞에 놓인 것을 향해, 빛나는 오아시스인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 행군하는 것이다. 멈추지 않는 행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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