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무한정의 에너지라는 것은 없다. 지금 세계는 적어도 우리 세대에는 걱정 없을 것처럼 보였던 석유자원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위기를 느끼고 있다. 여력이 있을 때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사회적 진통이 국가적인 누수가 아니라 창조적인 긴장과 생산적인 에너지를 쌓아가는 성장통이기를 바라며, 결코 남미의 몇몇 나라처럼 귀환불능 지점을 넘어서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은 한국 교회의 거울이다. 한국 교회는 지난 세기 세 번의 기회를 맞았다. 첫번째는 1907년 평양대부흥을 통하여 이 민족이 일제 암흑시대를 이겨내고 순수한 복음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을 축적하였다. 두번째는 1948년 제헌 국회를 개원할 때 기도로 시작하였고, 6·25 때 민족의 선두에 서서 눈물의 기도를 쉬지 않으며 이 민족과 영적인 호흡을 같이했던 때였다. 당시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전국의 산지는 밤낮으로 기도의 메아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70년대부터 한국 교회의 부흥이라는 세번째 기회를 가져왔다. 교회의 영적 잠재력은 폭발적으로 가속화되었고, 100명의 성인 출석 교회가 300∼400명의 주일학교 학생들을 감당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으며, 부흥의 여진은 80년대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주일학교 등에서 이루어진 부흥을 내실화하는 시스템에서 실패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이 금쪽같은 기회를 복음의 발산으로 이어가지 못한 채 현실에 안주하면서 서서히 에너지를 소진하였고, 그 때문에 9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한국 교회가 겪는 현재의 어려움은 10년 전, 15년 전부터 교회가 자기 정체성과 영적인 역동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세속주의에 잠식되면서 교회의 교회됨을 포기했던 결과일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10년, 20년 후 이 민족의 운명은 지금 교회가 취하는 태도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 교회는 여기에만 만족한 채 교회의 또 다른 날개인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소명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경향이 있다. 초대교회의 스탠스는 양립적이었다. 하나님 앞에 서 있었지만 세상 앞에 서 있었고, 세상 앞에 서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 교회의 운명은 무엇이 교회를 채우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거룩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교회는 세상을 바꾸었지만, 세속주의에 물든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할 뿐이다.

항해하던 배가 갯벌에 좌초되었다면 그 좌초된 배를 어떻게 끄집어낼 수 있을까? 내려가서 온몸에 진흙을 묻히며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갯벌에 박혀 있는 배를 손상 없이 끌어내는 길은 딱 하나밖에 없다. 밀물이 쏟아져 들어오면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갯벌에 좌초돼 있는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소명을 지속하는 길은 성령의 능력에 붙들림으로써 은혜의 밀물, 기도의 밀물이 쏟아져 들어오면 되는 것이다.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까지 세상은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되며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당시 로마의 반기독교 사상을 격파시키고 변혁시킨 교회를 보면서 "그리스도는 모든 황혼을 새벽으로 바꾸어 놓으셨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몸된 한국 교회가 보혜사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회복함으로, 이 땅에서 하늘의 능력을 보이는 교회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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