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순수이성비판>으로 유명해진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프로이센 령 쾨니히스페르그에서 마구사(馬具師)의 열 한 자녀 중 넷째로 아들로 태어났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칸트를 포함해 4명이었을 정도로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죽지 못해 살아남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시작하여 2천여 년을 발전해온 철학을 다 함께 아우르고 집대성한 위대한 철학자로 모든 철학자가 추앙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를 한순간 그 위대한 자리에 올려세운 것은 그가 쓴 <순수이성비판>이라는 한 권의 책이었다.

<순수이성비판>은 이성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성을 더욱 깊이 고찰하는 것이었다. 비판은 오늘날처럼 ‘판정’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면밀한 검사’ ‘검증’ ‘한계 규정’ 등의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순순하게 이성만으로서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이라고 말한다.

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이성은 이론이성(직관, 개념, 원칙, 이념의 도움을 받아 인식을 추구함)과 실천이성(실천적 원칙을 받아 의지의 규정을 추구함)이 있는데, 여기에는 준칙(주관적으로 타당함)과 실천법칙(보편타당함)이 있고 그 실천법칙에는 가언적 명령(조건적으로 보편타당함)과 정언적 명령(무조건적으로 보편타당함)이 있다.

그 정언적 명령에서 의지의 준칙이 윤리의 법칙을 만들어 내고 선한 것이 바로 윤리의 의지라고 정의한다. 그 윤리의 의지는 의무로 자리 잡는다. 칸트는 말한다. “의무, 너 위대하고 숭고한 이름이여!” 

윤리 법칙은 우리에게 경향성 없이 혹은 경향성에 반해서라도 도덕적 강제에 따르라고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 숭고함을 표현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런 유명하고 위대한 말을 남겼다. “자주 그리고 오래 생각할수록 늘 새롭고 더욱 경탄과 외경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내 위의 별빛 찬란한 하늘과 내 안의 도덕률이다.”

이러한 그의 철학을 토대로 그는 <순전한 이성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글을 썼다. 지식은 공간과 시간에서 나타나는 사물들로 제한되었기에 신에 대한 믿음이 지식을 통해 증명되기를 바라는 독단론은 불가능해 졌다. 그러나 칸트는 지식의 관점에서 종교의 불가능성을 표명하면서도 행위의 관점에서는 새로이 종교를 정립시켰다. 

이론이성은 그 무엇도 행할 수 없다. 기껏해야 그것들을 구체적 이념으로 허용하고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실천이성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 우리 안에 정언적 명령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자유의 존재를 확인해 내듯 증명할 수는 없지만, 불멸성의 존재를 느낀다는 것이다. 

윤리 법칙은 최고의 덕을 실천하여 최고의 행복을 누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아무 선입견 없이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덕의 상태란 지상의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것임을 충분히 확인한다. 그런 상태에 도달하려면 감성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 이성적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윤리 법칙의 목소리는 단순히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절대적 윤리성을 지닌 선을 행하라고 요구한다면, 윤리적 인격에 대해서는 내세에서의 정당한 보상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천이성은 이론이성이 제시할 수 없는 신 존재의 확실성도 제시한다. 수미일관한 도덕적 행위는 자유와 불멸성과 신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도덕적으로 행하는 사람은 이런 것을 믿고 있음을 자신의 행위에서 나타내는 것이다. 윤리적 행위는 실천적 신의 긍정이다. 

여기서 도덕과 종교의 관계와 관련해 분명해진 것은 칸트의 사상에서 도덕은 근원적인 것이고 종교는 부차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종교는 도덕에 어떤 요소를 더해 주는 것인가? 종교는 우리의 의무를 신의 계명이라고 인식한다. 의무는 이미 윤리법칙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다. 종교는 이 의무가 신에 의해 우리 이성에 부여된 것이라 설명한다. 종교는 신의 의지의 장엄함이란 옷을 의무에 입힌다. 

다시 말하면 칸트는 자신이 세운 이성적 도덕률에 종교를 차입해와 옷을 입힌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소위 말하면 종교를 이용해 자신의 철학을 빛나게 했다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종교를 도덕의 종교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종교는 도덕과 내용적으로 합치한다.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선의 원리와 함께 내재하는 악의 원리에 관하여 또는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근본악에 관하여 (2)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싸우는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 사이의 투쟁에 관하여 (3)악의 원리에 대한 선의 원리의 승리 및 지상에서 신의 나라의 건설 (4)선의 원리의 지배 아래서 봉사와 거짓 봉사에 관하여 또는 종교와 승직 제도에 관하여.

칸트는 이런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보았을 뿐 아니라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종교철학적 연구가 종교 자체에 공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종교의 공적 대변자들과 일부 다른 철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검열기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칙령을 받았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프로이센 군주이신 프리드리히 빌헬름 폐하께서 귀하께 인사를 보냅니다. 고매한 학자이시며 국왕의 충직한 신하이신 분이여! 폐하께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귀하의 행동에 심한 불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귀하께서 철학을 남용해 성서와 기독교의 많은 근본교리를 왜곡하거나 비방하고 있으며, 특히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는 그런 귀하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귀하께 신속히 양심적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며, 폐하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더 이상 이런 사태를 유발하지 말라 당부 드리고 귀하의 의무에 따라 폐하의 의도에 더욱 부합하는 방향으로 명성과 재능을 살려나가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귀하께서 이에 순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불편한 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충실한 신하인 귀하께. -국왕 폐하의 각별한 명을 받고서 뵐너 드림- 

칸트가 정부에 보낸 답신에는 ”국왕 폐하의 충실한 신하로서는 그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며 앞으로 어떤 강의나 서술에서도 종교에 관한 언급은 삼가겠다." 고 말했다. 그는 70세였고 이미 그가 하고픈 말을 한 뒤였다.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으나 끝내 그의 소신을 굽히지는 않았다. 철학은 결과가 원인을 살펴보는 작업이다. 쉽겠는가? 원인이 결과를 살펴야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종교를 자신의 철학에 이용하는 이런 일이 비단 칸트뿐이었을까? 오늘 날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종교를 자신의 명예나 부를 위해 이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성경을 읽어놓고 자기 철학을 강론하는 목사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소위 학위를 받았다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지식을 뽐내는 설교를 남발하고 있지는 않은가?

구원의 종교가 도덕의 종교로 타락한 것은 오래 되었다. 그리고 사회도 그렇게 기독교를 바라보고 있다. 여타 종교와 꼭 같은 종교로 기독교를 인식하고 있다. 뭐가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너무 철학에 매몰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종교개혁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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