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지 박사(코닷 자료실)

기독교통일포럼(상임대표 이원재 목사)의 2월 정기모임이 9일(토) 아침 서울 반포동 소재 남산감리교회에서 열렸다.

2월 정기 모임에서는 유관지 박사(북한교회연구원 원장)가 “「로동신문」의 종교관련기사 분석 중간보고”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유 박사는 종교기사가 아니고 종교관련기사라고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로동신문」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기사가 실리는 일은 없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평양신학원 개원이나 봉수교회 설립 같은 것은 일체 보도되지 않았다. 국가의 시책에 종교단체들이 어떻게 협력하고 있느냐 하는 점들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종교기사’라고 하지 못하고 ‘종교관련기사’라고 하고 있다.”

유 박사는 “「로동신문」의 종교관련기사들은 분단 후 북한교회의 얼마되지 않는 일차자료이기 때문에 우리는 행간을 읽는 지혜를 가지고 이런 작업에 힘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독교통일포럼은 매월 둘째 토요일 아침에 남산교회 세미나실에서 정기모임을 갖고 있는데, 3월에는 김영식 목사(한국 포타미션 대표)가 “탈북민의 변화과정”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할 예정이다. 다음은 유관지 박사의 로동신문 종교관련기사 분석 보고서 전문이다. 

 

기독교통일포럼 2019년 2월 정기모임 발제(2019년 2월 9일)

「로동신문」의 종교관련기사 분석 중간보고

유 관 지(북한교회연구원)

 

왜 이 작업을 하게 되었나?

발제자는 현재 북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로서 북한의 공식 대변지 역할을 하고 있는 「로동신문」에서 종교관련기사들을 검색하여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창간 초기의「로동신문」부터 검색하고 있는데 작업의 진행속도로 보아서 2020년대 초기분까지 검색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창간호부터 검색하고 있다’고 하지 못하고, ‘창간 초기’라고 한 것은 발제자가 이용하고 있는 통일부 북한자료센터(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 5층 소재)에는 창간된 해인 1945년의 신문이 하나도 소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 해인 1946년은 하루, 1947년은 닷새 분의 신문만 소장되어 있고, 1948년은 전체가 미소장이며, 1949년은 1월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역시 그러하다. 6․25 전쟁 중인 1950년의 후반부에서 1952년까지도 미소장분이 많으며, 1953년 이후에도 미소장분들이 약간씩 있다.

발제자는 대북선교방송에 활용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로동신문」을 종종 참고했다. 그 때 「로동신문」 1면에 크리스마스트리의 사진이 등장한 것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주변에 알린 일이 있었다. ‘강량욱 연구’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작성할 때도 이 신문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지금은 「로동신문」이 ‘특수자료’로 분류되어 있고, 열람절차가 간편해졌으나 1988년에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이 나오기 전까지는 ‘불온문서’로 규정되어 있었고 열람하려면 무척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와 같은 일들로「로동신문」이 낯설지는 않았으나, 거기에서 종교관련기사들을 검색하고 분석하는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북한교회사 연구의 개척자인 김흥수 박사(목원대 명예교수)의 말에 영향을 받아 이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 김흥수․류대영 공저인 「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다산글방, 2002)에 부록으로 “「로동신문」 종교기사 목록(1970-2001)”이 실렸는데, 이 부록을 통해서 북한교회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많이 받었다. 김흥수 박사에게 이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하니까 김 박사는, “의미 있는 작업이기는 한 데 정리 작업을 한 분이 북한종교 전문가가 아니어서 종교용어가 들어 있는 경우만 종교기사로 알고목록을 작성했기 때문에 허점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1983년 1월 9일에 강량욱 목사가 사망한 일이 빠진 것입니다. 당시 「로동신문」은 강량욱 ‘부주석’의 사망과 장례식 소식을 연일 대서특필로 보도했으나 강량욱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지 못하는 담당자가 이를 그대로 넘겼지요 「로동신문」의 종교기사들은 북한종교에 대한 얼마되지 않는 일차자료인데, 북한종교 전문가가 다시 한 번 이 작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발제자는 이 말에 공감하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2015년 9월부터 매주 목요일에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 5층에 있는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서 이 작업을 하고 있다. 먼저 「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 수록분의 뒤를 이어 2002년부터 2018년까지를 검색하고 이를 분석하는 작업을 마쳤다. 이어 「로동신문」 창간 초기로 되돌아가서 검색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재 1959년까지를 검색했다. 이 두 작업에 걸린 작업일수는 113일이었다.

작년 하반기와 금년 1월에 이 작업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세 편의 글을 발표했다. 오늘의 발제를 통해 혹시 이 일에 관심을 갖게 된 분들이 있으면 이 글들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①졸저. 「북녘교회 이야기: 현행 행정구역에 따자 재구성한」(대한기독교서회, 2019년 1월)

-부록으로, “2002-18년 《로동신문》의 종교관련 기사 목록” 수록

②「기독교사상」 2018년 9월호

-“「로동신문」의 종교관련기사(2002-2017) 분석“

③사단법인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사무총장 최태육) 「통일문화」창간호

-“「로동신문」의 불교 관련 기사 분석”

 

이 작업의 진척도는 이제 겨우 전체의 4분의 1을 넘은 상태인데, 이렇게 글들을 발표하고, 발제를 하는 일은 너무 성급한 행동인 것 같지만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뒤에 적었다.

 

「로동신문」과 종교관련기사

「로동신문」은 1945년 11월 1일에 창간되었는데 북한은 11월 1일을 출판절로 제정하여 지키고 있다. 처음 이름은 「정로(正路)」였는데 1946년 9월 1일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다.

한글전용이며 조간이고, 6면으로 발행되고 있는데 최근에 이르러 때때로 8면을 발행하기도 한다. 발행부수는 초기 기록에는 150만 부로 나오나 대북제제의 여파로 2017년에는 60만부, 2018년에는 20만부로 줄이고 개인 집 공급을 중단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중앙렸보」 2018년 2월 22일) 그 뒤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60만부로 늘였고, 150만 부를 발행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국민일보」 2015년 4월 24일)

「로동신문」은 로동당의 선전선동과 조직교화의 핵심적인 도구로서 보도와 편집의 초점이 이에 맞춰지고 있다. 지면구성은 고정화되어 있고, 단조로우며 격식화되어 있다.

「로동신문」에는 ‘우리가 알고 있고, 생각하는 종교기사’가 실리는 일은 거의 없다. 다시 말해 종교단체들의 활동 소식 같은 것은 실리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여기고 있는 평양신학원 개원이나 성서출판, 그리고 봉수교회가 세워진 일 등은 아예 지면에 비춰지지 않았다. 종교단체들이 국가의 목적을 위해서 낸 성명이나 활동에 관한 소식들이 보도될 뿐이다. 남한의 종교단체들이 남한당국의 정책에 항의해서 벌이는 시위 소식에 관한 보도는 등장빈도가 매우 높다. 발제자가 ‘「로동신문」의 종교기사’라고 하지 못하고 ‘종교관련 기사’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제자는 폭을 넓혀서 예전에 종교시설이 있던 장소들의 소식 등도 종교관련 기사로 취급하고 있다. 장대현교회가 있었던 장댓재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태양상 모자이크 벽화가 건립된 기사가 좋은 예인데, 이 기사는 2012년 4월 10일 자 신문의 1면에 실렸으며, 제목은 “태양조국의 수도에 솟아 천만년 빛날 수령영생의 기념비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태양상 모자이크 벽화 평양의 장대재언덕에 건립”이었다. 2017년 7월 8일 5면에는 “장대재언덕에 울리는 영원한 그리움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장대현에 건립된 평양학생소년궁전을 예찬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이 기사 역시 같은 범주의 기사로 간주하였다.

이에 앞서 2011년 4월 2일 2면에는 “남산재가 전하는 사연”이라는 제목으로 김일성이 남산재에 인민대학습당을 건립하게 된 연유를 보도했고, 2018년 1월 21일 5면과 7월 8일 5면에는 인민대학습당을 예찬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그 자리는 예전에 남산현교회를 중심으로 감리교 기관들과 학교들이 있던 자리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종교관련 기사로 취급했다.

2009년 1월 22일 2면에는 “불멸의 혁명사적지 포평혁명사적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기사 중에 김일성 일가가 출석하던 포평례배당에 대한 기사가 있어서 종교관련 기사로 취급했다.

종교관련 기사들은 대부분 4면이나 5면의 구석에 크지 않게 실린다. 그런데 종교관련기사들 가운데에도 통치자와 관련된 내용은 1면에 실린다. 예를 들어 2013년 9월에 WCC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는데 이들의 도착과 동정과 출발은 22일과 25일, 26일의 4면에 실렸다. 그런데, 이들이 김정은에게 선물을 드린 일은 25일 자 1면에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 세계교회협의회 사무총장이 선물을 드리였다”라는 제목 밑에 “우리 당과 인민의 최고령도자이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 우리 나라를 방문하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 사무총장이 선물을 드리였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 드리는 선물은 올라프 픽새 트베이트사무총장이 24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전달하였다”(원문대로)라고 보도되었다.

WCC 대표단은 24일 만수대의사당으로 김영남을 방문했다. 이 사실을 보도한 기사에는 조그련 강명철 위원장과 관계부문 일군들이 참석했다고 나왔는데, 김영남이 대표단과 찍은 사진에 강명철은 들어 있지 않아서. 조그련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음을 짐작하게 해 주고 있다.

 

2002년~2018년 기사 요약

현재 검색과 분석을 모두 마친 것은 2002년에서 2018년까지의 17년까지이다. 양적으로는 길지 않은 기간이나 최근의 일들이라는 사실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의 종교관련 기사는 모두 423건인데, 그 특색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종교관련 기사 가운데 제일 많은 것은 남한 종교인, 또는 종교단체들이 남한당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거나 성명을 발표했다는 내용이다.(전체의 4분의 1)

⚫2010년 초에 「로동신문」에 제일 많이 등장한 인물은 2012년 6월 12일부터 21일까지 북한을 방문하여 활동한 한상렬 목사이다.

⚫「로동신문」에 나타난 정백사원(러시아정교회) 기사들을 살펴보면 정백사원은 ‘제2의 러시아 대사관’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찰 관련 기사들은 ‘문화재로서의 사찰’이 부각되어 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종교관련 기사가 격감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매년 30건 내지 50건의 기사가 실렸는데 2014년에는 8건, 2015년에는 10건, 2016년에는 22건, 2017년에는 5건, 2018년에는 13건에 불과하다.

2016년의 건수가 높은 것은 종교단체들이 미국에 대해 비난성명을 낸 일이 여럿 있었고, 셔먼호 격침 150돌 토론회도 있었으며, 류미영, 오익제 등 천도교 중진 인물들과 관련된 기사가 여러 건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북으로 가서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하여 여러 요직을 역임한 류미영은 북에서 고위인사로 대접 받으며「로동신문」에 등장빈도가 높았던 인물 가운데 하나인데 이 해 11월 24일에 사망했다.

2018년은 WCC 대표단과 일본 불교계 대표단, 로씨야(러시아) 정교회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한 일 때문에 건수가 많아졌다. 2018년의 보도 가운데는 김정일이 2002년 하바로프스크 ‘인노겐찌’ 러시아정교회 사원을 찾았을 때(이 방문이 평양 정백사원 건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부가 종을 울리며 “우리 사원에 태양이 오셨습니다”고 예찬했다는 내용도 있다.

최근에 이같이 종교관련기사가 격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조선중앙통신에는 종교관련 소식들이 여럿 실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종교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이런 작업이 많아져야 한다.

 

「로동신문」을 면밀하게 살피는 일은 북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발제자에게 많은 유익을 주고 있다. 발제자의 북한에 대한 기본 인식틀은 이 작업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발제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북한의 어문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소득이 있었으며, 발제자가 계획하고 있는 「DMZ와 교회」와 「북중접경, 기도하며 걷다」 수정증보판 원고를 쓰는 일에도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소득은 역시 북한 종교정책의 진면목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로동신문」의 종교관련 기사들은 북한의 종교에 대해서 많은 사실을 알려주면서도 ‘참고자료’에 그칠 뿐 그 이상의 것이 되지는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앞에서 이미 말할 것과 같이 대하기 어려운 북한 종교관련 일차자료라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역사 연구를 비롯하여 여러 분야에서 “자료의 취급은 실증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한국기독교사연구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머리글”)는 분위기가 정착되고 있다. 정확하지 못한 사실을 말하면 신뢰를 잃는 정도가 예전에 비해 훨씬 커졌다.

북한교회에 대한 한국교회는 정확하지 못한 말을 많이 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조그련(처음 이름 북조선기독교도연맹) 창설자인 강량욱 목사를 김일성의 외숙부라고 말하는 분들이나 그렇게 기록된 글들이 많다. 아니다. 외종조부이다. 강량욱 목사는 김일성의 외조부인 강돈욱의 육촌동생이다. 전에는 강량욱 목사가 김일성의 외숙부라고 해도 못들은 척 했으나 지금은 반드시 정정해 준다.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을 ‘권사’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것은 남한 교역자들의 무책임한 ‘멋대로의 임명’이다. 그가 권사였다는 기록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거의 없다. 4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1892~1932), 하리교회(출가 전, 그 자리에 칠골교회가 세워졌음)-송산교회(출가 후, 그 자리에 김일성군사대학이 세워졌음)까지는 비교적 안정된 교회 생활을 했으나 20대 이후에는 남편 김형직과 함께 강동 봉화리-중강-림강-팔도구로 계속 옮겨 다녔기 때문이다. 당시 권사 제도가 있었는지도 살필 필요가 있다. 발제자는 오래 전에 부산에 거주하는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부터 “강반석과 송산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피난온 분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데, 강반석이 집사였던 기억도 없고 주일학교 반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하더군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로교가 여성에게 집사 직분을 허락한 것은 1922년의 일이었으니 이것이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분단 전 북한의 교회 숫자에 대해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3,040개라고 알고, 그렇게 말해 오고 있다. 이는 1990년대 후반 한기총을 중심으로 북한교회 재건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질 때 나온 숫자였다. 최근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북한기독교사전」편찬작업을 하면서 일차자료들을 가지고 확인한 결과 분단 전 북한지역에 있었던 장로교와 감리교 숫자가 2,118개였다.(「국민일보」2019년 1월 25일) 여기에 성결교와 그밖의 군소교단을 합해도 2,500개가 넘지는 못할 것이다. 총독부 통계에는 1940년 당시 이북 5도에 2,289개의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여기에는 강원도와 경기북부지역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산출한 숫자와 비슷하다. 3,040개라는 숫자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북한교회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기 위해 일차자료를 들치고 분석하는 작업이 더 많아져야 한다. 우선 더음과 같은 작업들을 권할 수 있다.

⚫「로동신문」외에 「민주조선」, 「청년전위」, 그밖의 신문들을 통일선교의 눈으로 살펴보기

발제자는 강량욱 목사에 대한 논문을 쓸 때 「평양신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김일성 전집」을 통일선교의 눈으로 살펴보기

1950년대 후반 이후 북한교회의 대표적인 수난사건으로 이만화 목사 사건이 있는데, 「김일성 전집」에서 그 사건에 대해 김일성의 발언한 것을 읽고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하게 되었다. (더 조사해 보아야 하겠지만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이 사건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김정일 전집」을 통일선교의 눈으로 살펴보기

⚫북한의 교과서들을 통일선교의 눈으로 살펴보기

⚫북한의 잡지들을 통일선교의 눈으로 살펴보기

⚫조선총독부 관보에서 북한지역 교회들에 대한 사항을 살펴보기

관보의 ‘휘보(彙報)’란에는 포교소 설치, 포교소 이전, 포교소 담임자 변경, 포교소 폐지 등이 게재되어 있다.

 

「로동신문」의 종교관련 기사 분석 작업은 북한교회 연구의 격과 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이다. 이같은 노력에 동참하는 분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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