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강영안),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좋은나무 32호

이 글은 강영안 교수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좋은나무 32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 기윤실 사이트 바로가기

가짜뉴스의 등장

강영안 교수(서강대 명예교수, 전 고려학원 이사장, 현 미국 칼빈신학대학원 교수)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쩍 많이 듣는 말이 ‘가짜뉴스’란 말입니다. 카카오톡 문자로, 전자 메일로, 유튜브나 신문 기사로, 거짓 뉴스가 대량 생산, 유포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가짜뉴스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이른바 ‘황색신문’이라 부르는 신문들이 한 개인이나 집단에 관한 선정적인 이야기나 음해하는 이야기를 실어 날랐습니다. 그때에는 이런 신문 기사에 사람들이 크게 영향받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여러 매체들을 통해 전달되는 가짜뉴스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편을 나누어 서로 싸우게 만듭니다. 건강한 공동체, 신뢰 있는 공동체를 허물어뜨리는 역할을 가짜뉴스가 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가 국내의 일만은 아닙니다. 며칠 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뉴욕타임스>와 대담하는 자리에서 ‘가짜뉴스’라고 번역되는 ‘페이크 뉴스’(fake news)란 말을 자신이 만들어 내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CNN이나 뉴욕타임스 같은 매체를 ‘가짜뉴스’생산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대통령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을 비판하는 기사를 모조리 가짜뉴스라고 부르니 뉴욕타임스는 대통령의 발언을 기사화할 때마다 ‘팩트 체크’기사를 나란히 싣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하는지, 사실을 어떻게 왜곡하여 발언하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소위 ‘가짜뉴스’가 나오기 전에도 여러분이 잘 아는 일에 대하여 신문이나 방송이 정확하게 보도하지 못하는 것을 자주 경험했을 것입니다. 기자가 정확하게 취재를 하지 못했거나 한쪽 편의 의견만 대변하여 보도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교계 언론이 이 점에서 일반 언론보다 조금 더 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저는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고 유튜브를 누구나 찍어 올릴 수 있게 된 지금은 과거보다 가짜뉴스가 훨씬 더 많이 생산, 유통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금만 읽어보아도 가짜뉴스임이 분명한 소식들을 스마트폰 문자나 카카오톡 문자를 통해 저도 많이 받았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가짜뉴스를 퍼 나르는 역할을 앞장서서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짜뉴스 현상이 나타난 배경

21세기 초, 사람들이 훨씬 더 문명화되었다는 이 시대에 가짜뉴스 현상이 왜 이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날까요?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에 참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매체 환경의 변화, 사실과 참에 대한 무관심, 권력 의지, 이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는 매체(media)의 변화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소식을 전달할 매체라고는 입 밖에 없었던 때에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전달되었습니다. 이때에도 거짓 소문이 전달되거나, 사실이라 해도 과장이나 축소, 왜곡의 과정을 거쳐 전달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종이가 나오면서 방(榜)이나 신문처럼 문자 매체로 소문이 좀 더 널리 전달되기 시작했고, 20세기에는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전파 매체가 등장하면서 전달 범위가 더 넓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원하기만 하면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나 유튜브를 통해 누구나 뉴스를 생산하거나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가운데 의도적인 가짜뉴스가 함께 섞여 폭넓게 배포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체의 보편화와 다양화, 매체 영향력의 증가로 원하기만 하면 가짜뉴스를 퍼뜨릴 가능성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만일 오직 진실에만 관심이 있고 사실 전달이 매체 존재의 이유라면 가짜뉴스를 만들어 내거나 전하는 일은 없었겠지요. 이 시대에 와서 어느 때보다 가짜뉴스가 많이 생산, 유통되게 된 배후에는 사실과 참에 대한 무관심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난 몇 백 년을 돌아보면 서양 근대에 이르러 검증할 수 있는 사실만이 참이라는 생각이 서서히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모두 미신이거나 편견이거나 착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사실이고, 사실만이 참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근대 문화의 확산과 함께 널리 퍼졌습니다. 특히 과학적 지식을 중시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굳이 근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예컨대 누군가가 “지금 비가 온다”라고 말하면 바깥을 내다보고 참인지 거짓인지를 확인해 볼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200년을 돌아보면 모든 사실은 어떤 관점, 어떤 세계관에서 ‘해석된 사실’일뿐 맨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서양 사상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진리’니 ‘사실’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주관적이라고 보는 생각입니다. 니체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생각이 꽤 많이 퍼졌습니다.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참이란 “우리 동료들이 우리말에 동의해 주는 것”(what our peers will let us get away with saying)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에 서 있는 사람이 그 말이 옳다고 동의해 주는지, 수용해주는지에 달려 있다고 보는 생각입니다. 만일 지지자들이 있고 동조자가 있다면 거짓이라도 참이 됩니다. 사실, 진리, 진실, 옳고 그름은 여기서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진리 이후(post-truth)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이라면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습니다. 가짜뉴스를 만들 때는 약간의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믿고 싶은 내용을 뉴스에 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뉴스를 보는 사람들이 많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믿어주고, 따라준다면 그렇게 생산된 뉴스는 마치 참인 것처럼 행세하게 됩니다. 그러면 가짜뉴스를 만들어 낸 사람도 마치 그것이 사실이고 참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런 방식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기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유통시키는 가짜뉴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사실이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뉴스를 지지하고 환호할수록 가짜뉴스 속에 담긴 메시지는 진실의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결국 힘에 대한 의지,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문자로, 영상으로 전한 뉴스는 지지자들을 열광하게 만들고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고 단결시켜 원하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어 내는 수단이 됩니다. 트럼프의 트위터 정치나 국내 여러 인사들의 유튜브 방송이나 카카오톡 문자 발송 배후에는 강력한 권력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가짜뉴스와 한국 기독교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가짜뉴스를 만들고 운반하는 역할을 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종교 가운데서도 기독교만큼 거짓을 가증스럽게 생각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가 서양 문명에 들어오면서 거짓말에 대한 엄격한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진실과 상당한 거짓이 섞여 있는 메시지임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인이 가짜뉴스를 만들어내거나 유포하는 일을 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이유에는 사람들을 선동하고 결집하는 목적이 있다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원하는 목적이 옳다면 수단도 정당화된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목적이 만일 적을 괴멸시키는 것이라면 적의 괴멸에 도움이 되는 뉴스는 비록 가짜라 할지라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이 가짜뉴스와 연유되는 까닭은 무찔러야 할 적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최근 상황을 보면 동성애, 이슬람, 차별금지법이 괴멸해야 할 적으로 등장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로는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여성운동이 은연중 이런 적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오래된 적은 공산주의와 공산주의를 표방한 북한이었습니다. 과거정부나 현정부에 대한 적대감이나 선호감도 여기에 관련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때 기독교가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며 ‘독단적’ 집단이란 비난을 받아오더니 이제는 교회 안의 젊은이들 눈에도 기독교가 ‘반인권’, ‘반통일’, ‘반노동’, ‘반여성’, 심지어는 ‘반과학’집단으로 오인될 정도로 적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앞에서 열거한 것들이나 아니면 예컨대 현 문재인 정부나 동성애를 한국교회의 적으로 일단 삼게 되면, 이 적을 무찌르기 위해 생산되고 유포된 뉴스는 진위 여부를 떠나 모두 유익한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 현상황이 아닐까 진단해 봅니다.

 

가짜뉴스와 그리스도인의 윤리

그러면 가짜뉴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가짜뉴스의 선동에 휩쓸리지 않고 건강하게 생각하고 건강하게 판단하고 건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진실과 사실에 대한 관심과 그리고 가려서 볼 줄 아는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실과 진실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개인이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저는 오히려 일시적인 회의론자가 되는 편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회의론자’로 번역되는 서양 말 스켑틱(sceptic)은 원래 ‘찾는 이’, ‘모색하는 이’를 뜻합니다. 최종판단을 내리기까지는 일단 일시적으로 ‘판단중지’(epoché)를 하고 참인지 거짓인지, 사실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 그럴만한 개연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얻을 수 있는 자료를 토대로 최대한 검토해 보고 모색해 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여러 매체들을 통하여 교차 점검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나의 사안에 관해서 한 매체만 의존하지 않고 여러 매체들을 서로 비교해 보고 보도 방식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실이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끝까지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회의적인 태도와 여러 매체들을 통해 사실의 개연성을 검증해 보는 태도 못지않게 비판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비판적 사고는 근거가 있는지 생각해 보고 따져 보는 방식입니다. 가짜뉴스가 근거가 있는지, 말이 되는지, 사실과 부합한지, 논리적 모순은 없는지 따져 보고, 나아가서 가짜뉴스를 통해 누가 이익을 보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보고 가려내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비판’은 ‘가려내는’일입니다. 따라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읽고 듣고 본다면 가짜뉴스로 유통되는 내용이 잘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사람, 이 지역 사람이나 저 지역 사람, 남자나 여자, 어른이나 아이, 모든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시민들이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메시지인지, 반대로 이런 공동체를 파괴하는 메시지인지 어느 정도는 가려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양한 신앙과 다양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 사회에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는 누가 뭐라 해도 역시 ‘공동선’(common good)일 것입니다. 한 개별 집단이나 계층, 한 개별 종교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모두가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면서 다 같이 살 수 있는 삶을 생각하고 함께 그 길로 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뉴스의 단순 소비자에 그치지 않고 비판적 독자, 비판적 시청자의 입장을 계속 지닐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2018년 4월, 기윤실에서 ‘한국교회, 가짜뉴스에 대해 말하다’는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가치

가짜뉴스와 관련해서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선, 진실의 추구, 평화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안을 다루거나 문제를 생각할 때 ‘공동선’이 언제나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추구하는가, 아니면 일부 계층, 일부 지역, 일부 이념을 가진 사람들만 고려하는가 질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동선을 추구할 때 특별히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약자에 대한 관심입니다. 뒤떨어지는 사람, 뒤처지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것보다 앞서야 함은 물론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 가운데 진실을 말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 자라가라”(엡 4:15)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언제나 진실을 추구하되 진실 추구는 사랑을 동기로 해야 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키의 크기까지 자라가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세 번째는 평화를 중요한 가치로 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 14)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함 못지않게 화평, 곧 평화를 추구함이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평화를 추구하여 평화를 따라 살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떠난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 7)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포로로 잡아간 성읍 바벨론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면 조국에 살고 있거나 조국을 떠나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갈등과 분쟁, 전쟁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더욱더 조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맺는 말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가짜 신, 짝퉁 신(偶像) 앞에 절하지 않고 그것을 단호히 거부해야 하듯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유령처럼 떠도는 가짜뉴스, 짝퉁 뉴스 역시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것을 퍼 나르는 역할은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어사전을 처음 만든 새뮤얼 존슨은 “악마들끼리는 지옥에서 서로 거짓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본질이 거짓인 악마들조차도 서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까닭은 만일 자기들끼리 거짓말을 하면 지옥이 유지되지 않고 무너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횡행하는 곳에서는 삶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삶을 타인들과 함께 감사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최대한 진실을 추구해야 합니다. 진실 없이 정의가 들어설 수 없고, 정의 없이 평화는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편 가르기와 갈등이 지극히 심한 이때, 공동선과 진실, 정의, 평화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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