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 연구위원장, 미포 사무총장)

3.1운동은 일본제국이 한국을 힘으로 억압하여 국권을 빼앗고 식민 지배를 하던 시절,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종교인들이 연합하며 나아가 운동의 중심이 되어서 고통 받는 민족의 고난을 대변하면서 독립을 외치면서 국민이 주인되는 민주국가를 천명한 혁명적 사건이다. 100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이를 기억하면서 오늘의 교회 현실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교회가 처한 장으로서 국가와의 관계를 다시 조명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먼저 당시에 소수에 불과했던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결단으로 옥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족의 고통에 참여한 3.1운동을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주는 복음적 가치를 살피는 작업을 해보자.

일본 측의 기록이지만 3.1운동 관련 전체 피감자 19,525명 중에 기독교 신자는 3,373명으로 17.7%에 달하였다. 여성의 경우는 471명으로 65.6%에 이른다. 기독교인으로서 적극 가담자의 비율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전체 인구가 이천만이 안 되는 시점이고, 기독교인의 숫자가 20만을 헤아리던 시절이었다. 1-1.5%의 기독교인들이 민족과 국가의 고난을 짊어진 참여 사건이다. 당시의 기독교 신앙은 기복적이며 성공지향적인 오늘날의 신앙적 태도와는 달랐다는 학계의 평가이다. 희생과 고난을 짊어지고, 종말론적 전망으로 이를 극복하는 신앙이었다. 민족의 수난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를 과연 우리가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자신을 인자로 칭하실 때가 자주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역할을 선명하게 인지하고 알려야 하는 상황이다.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선언,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선언 등이다. 또한 인자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곧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표이라는 선언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러한 인자됨을 성취하는 방식을 말하는 중요한 본문이 마가복음 10장 45절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는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이다. 그리고 섬김의 구체적인 방식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즉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섬김과 희생의 방식을 통해서 복음을 형성하시고 이를 믿는 자들에게 은혜로 적용하는 구원을 이루신다. 인자되심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복음적 방식이 바로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다.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는 인자의 복음을 바울 사도는 어떻게 계승을 하였는가? 바울 사도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는 고린도교회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하는 중에 언급한 말씀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지식이 중요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덕을 세우는 사랑이라고 강조했다(고전 8:1). 그래서 지식적으로 모든 것이 가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원칙을 세운다(고전 10:31). 바울은 이어서 다르게 적용하면서 표현하였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간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한다. 전제로 부음이 되는 삶이다(담후 4:6, 빌 2:17). 많은 사람의 유익이란 바울이 걸어간 삶의 표어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 되신 인자되심을 담아내는 복음의 삶을 말한다.

사실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시는 예수님의 복음의 고향은 이사야서에 언급된 고난 받는 종이다(사 43:22-24, 53:11-12).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였다(53:11).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53:12).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제물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바울 사도는 그 희생제물에 부어지는 전제로서 살았다. 이제 예수님과 사도의 전승을 따라서 복음을 받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조국의 고통과 고난의 현실을 직면해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무수한 고난을 당했다. 마치 고난 받은 자기 백성의 편에서 함께 고난을 받았던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었다고 인정을 받은 것과 같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민족의 많은 백성들이 억압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는 현실에 동참하기를 기뻐하고, 앞서 고난을 받기를 기뻐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자의 복음을 가진 신앙이었다.

오늘 한국교회의 복음은 무엇인가? 성공과 기복, 이기적주의적이며 개교회주의적인 신앙이 아닌가? 희생과 잃어버림은 사라지고, 영광과 누림을 추구하는 신앙이 아닌가? 이런 신앙이 만들어낸 거품이 세상과 차이를 잃어버리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비난이 되는 현실이다.

삼일운동 백년을 맞으면서 과거를 기억하는 절실함의 첫째는 바로 희생과 고난의 복음을 잃어버린 교회의 현실이다. 참된 복음을 잃어버린 우리의 현실이다.

천안에 위치한 유관순열사기념관, 유관순 동상

두 번째 고려점이다. 3.1운동 서명자들 중 16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 중 9명이 감리교이고, 7인은 장로교도였다. 민족의 문제를 놓고 장로교 감리교 두 교단의 대표자들은 연합하였고, 나아가 다른 종교와도 협력하였다(천도교 15인, 불교 2인).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자리인 한국 사회, 민족의 최대의 아픔을 당면하여서 기독교인들은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희생을 감내하였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연합과 희생의 섬김은 한국 기독교가 이 사회를 위한 위로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각인시켰다.

오늘 한국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들이 연합하며, 바른 질서를 견지하여서 사회의 어떤 단체들보다 사회와 민족을 위로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은 세상보다 더 힘을 더 의지하고 권력을 지향하며 돈과 수를 지향하는 집단이 되었다. 여기에는 경쟁만이 있고, 함께 협력하고 함께 낮아지는 복음적 섬김이 사라지게 된다. 한교총, 한기총, 한기연, KNCC로 분열된 교회 연합기관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 간의 건강한 질서를 만들고, 세상을 향한 낮은 섬김을 감당하는 것이 이 시대의 과제이다.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 이바지해야 한다. 좌우의 이념적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는 복음적 대안과 섬김을 제시해야 한다. 빈부의 격차와 양극화, 노년 세대의 삶과 청년 세대의 실업 등으로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식으로 점점 이기적으로 되어가는 시대에 교회들이 연합하고 함께 위로하고 섬기는 모습을 만들어 가야 한다.

셋째는 세속적 힘과 권력을 저항하는 복음적 가치이다. 힘과 권력을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하였던 3.1운동은 세속적 권력과 물질적 탐욕에 저항하는 복음적 가치를 담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힘과 권력 그리고 물질 지향적 조직과 성도들이 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명성교회의 세습이다. 노회를 숫자와 금권으로 무력화하여 불법을 저지르고 세습을 강행하고 승인했지만, 통합 총회가 이를 바로 잡는 결정을 한 것은 다행이다. 교회의 가치가 진리와 복음이고, 정의와 공평임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세습과 같은 행위를 하는 교회의 모습은 한국 사회로 하여금 교회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양심의 가치를 지향하게 만드는 순기능을 가진 집단으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오히려 철저하게 힘과 권력 지향적이며 이기적인 집단으로 보게 만든다. 삼일절은 맞아서 한국교회는 힘과 권력과 숫자에 기반을 둔 세속적인 세력 지향을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하며 의와 공평으로 돌아서는 기회를 얻어야 한다.

이상의 내용을 기반으로 해서 삼일운동 백년을 맞는 시점에서 우리 고신교회와 함께 하는 기도를 작성해본다.

 

온 세상 나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

오늘 삼일절 100주년을 맞아서 저희 성도들이 함께 우리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일본=제국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고 억압과 학대를 함으로 신음하던 현실이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나라와 동족의 고통을 보고 희생을 각오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외쳤습니다. 고난 당하는 자기 백성과 함께 하였던 모세와 같은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동족을 섬기는 신앙의 결단이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자기의 유익과 탐욕, 성공과 번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난과 희생을 복음의 진수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을 전제로 부은 사도 바울의 길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소수에 불과했지만 억압과 폭력을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면서 많은 동족의 고통을 짊어진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하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피로써 드린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일본의 제국주의로부터 건져 주신 하나님의 기이하신 일을 찬송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가졌던 신앙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돌아보면서 돌이키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와 지도자들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가결함으로 신앙의 순결을 지키지 못한 과거를 회개합니다. 오늘의 혼란하고 바른 질서가 없는 교회의 현실들은 우리의 죄입니다. 세상이 경제발전과 번영을 추구하는 흐름에 맞추어 교회도 복음을 희생과 섬김이 아니라 성공과 기복으로 변질시킨 죄들을 회개합니다. 교회의 지도자 된 우리들이 사욕과 욕망 탐욕의 현장으로 교회를 세우고 있음을 회개합니다. 산아제한의 어두운 시대에 동참한 우리의 비굴한 죄들을 회개합니다.

이제 우리가 새롭게 복음에 헌신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복음을 받고 희생과 섬김 그리고 종말적 신앙을 가지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한 길, 민족을 섬기는 교회를 세운 것과 같이 우리도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태도를 버리고, 희생하고 섬기고 잃어버리는 복음으로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장로교와 감리교가 함께 민족의 고난의 길을 함께 하도록 했습니다. 오늘 무질서한 교회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 힘쓰는 고신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억압과 신음을 당하며 고통을 당했던 시대를 기억하면서, 이 땅에 사회적 약자와 탈북자. 난민. 이방인 된 나그네를 섬기고 위로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아가서 우리 국가와 사회가 되도록 힘을 쓰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원합니다. 서로의 부족을 돌이키며, 함께 짊어지고 함께하는 자유로운 나라가 되기 원합니다. 북한 동포들에게 일용할 양식과 자유와 복음을 허락해 주시기 원합니다.

주님,

복음에 성실한 우리 고신교회가 되며, 교회의 지도자 된 이들이 먼저 복음에 대한 헌신이 살아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에 충성된 교회로 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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