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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한국교회의 딜레마

박광서 목사(큰사랑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

본지에 기고되는 나의주장,은 순수한 기고자의 주장임으로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국가들이 적지 않다. 그중 하나가 대한민국이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징계 채찍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심각성을 이 민족 성쇠의 시금석인 한국교회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마음 아파하며 눈물짓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민족과 교회를 지키려 애쓰는 분들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 가득하다.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1.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교회의 영성

혹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좌파가 될 수 없다. 유신론자가 어떻게 무신론자가 되냐? 그 사람은 참된 기독교인이 아니다”며 단죄하고, 또 다른 사람은 “복음을 제대로 알면 좌파에 빠질 수 없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요 불신자다”라며 비판한다. 그렇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좌로 기울어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또 좌로 기울어진 사람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일까? 안타깝지만 그들도 예수를 믿고 있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이 좌로 기울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한국교회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영적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상을 아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복음에 분명히 서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독서량이 불신자보다 적은 그리스도인의 인문학적 기초는 허약하기 그지없다. 체제와 사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세상 지식의 기초는 차치하고 성경은 제대로 잘 알까? 성경 역시 잘 모른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저 쉽게 흔들리는 취약한 체험을 의지할 뿐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영적 현주소다. 필자의 평가를 부인하고 싶은가? 한국교회가 바로 서 있었다면 오늘의 위기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신자가 복음에 바로 서 있기만 하면 절대 좌로 기울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인간에 대한 지나친 긍정은 무리다. 이유는 이 땅은 천국이 아니요 신자 역시 여전히 불완전한 죄성의 영향 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가까이해도 인간은 이데올로기에 노출되어 중독되기 쉽다. 특히 어릴 때부터 집단적 지역 정서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자라게 되면 성경적 가치관도 쉽게 무력해진다. 집단세뇌와 정서가 그렇게 무섭다. 그로 인해 신자의 내면에 두 가치관이 공존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탈출구가 준비되지 않는 사람은 보수우파로의 전향이 쉽지가 않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나름의 자정 운동을 펼쳐왔다. 그중 하나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방점을 찍는 윤리갱신운동이다. 그 공헌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윤리를 복음으로 착각한 한계, 그것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위기에 일조를 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마저 든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와 부활 복음의 회복이 절실하다. 어찌 되었건 작금의 한국교회의 문제는 복음에 확실히 서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세상적인 기초가 탄탄한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영적 상태라는 점이다. 어떻게 해야 이 사회와 한국교회가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양자의 균형 잡힌 기초가 탄탄해야 온전한 분별력도 가능할 것이다.

 

2. 지독한 세속적 욕망과 순교 신앙의 실종

오늘 위기의 또 다른 원인을 든다면 교회의 지독한 세속 욕망과 순교 신앙의 실종을 들 수 있겠다. 이는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인 자기 정체성과 사명을 잃었다는 의미다. 죄 된 세상은 스스로를 변화시킬 자정 능력이 없다. 성경은 오직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분명히 한다. 문제는 교회가 이 부분에서 너무 멀어져 있다는 점이다. 목회자나 그리스도인의 세속 욕망이 이미 한계를 넘어섰고 지독할 정도로 뿌리가 깊다. 소명과 사명보다 세속적 성공과 욕망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풍요의 시대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종교인들에게서 순교적 영성과 강인한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는 순교 신앙에 기초한 야성을 잃은 지 오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채찍이라는 처방이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기독교는 온실 속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고난의 비바람을 견디며 그 속에서 빛을 발하고 순교적 영성의 꽃을 피운다. 교회는 유람선(遊覽船)이 아니고 영적 전함(戰艦)인 것이다.

힘을 잃은 한국교회의 한 단면을 생각해보자. 최근 기독교대학들이 동성애자들의 고소고발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문제는 기독 대학생이나 선교단체들이 그에 대해 항의는커녕 너무 조용하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선교단체가 영적 전투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캠퍼스 선교의 맥이 끊어지고 있다는 한탄이 오래전부터 나왔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왜 무반응일까? 포스트모던 시대요 이기적인 세대이기에 그런 것일까? 기독 학생들의 신앙은 모교회 목회자의 영성을 반영한다. 안타깝지만 인정하든 안 하든 목회자들도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는 상태다. 그들의 목양을 받는 부모세대는 오죽하겠으며, 그런 부모의 영향을 받고 자란 자녀들에게서 사자의 전투력을 기대한다고? 있을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 대학의 영적 현주소다. 기독교 대학들이 과거의 명성에만 집착하며 실낱같은 자존심만 드러낼 뿐이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이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것일까? 그것은 한국인의 정서가 공산사상과 친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이전의 조선을 생각해보자. 조선은 왕을 중심으로 한 계급사회, 지주와 노예로 구성된 농경사회, 국민의 60% 이상이 노예로 구성된 한(恨)많은 불안정한 사회였다. 이런 바탕에 20세기 초 공산주의자들이 착취, 억압, 해방, 평등을 강조하며 다가오니 국민의 다수가 공산사상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해방 이전 한국인의 70%가 공산사상에 긍정적이었다. 오늘날도 이 정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민족은 서구 국가들처럼 ‘개인’과 ‘자유’의 가치를 위해 큰 대가를 치르거나 고민한 깊이가 얕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잘 모른다. 그런 민족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승만, 박정희라는 탁월한 지도자들을 통해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라는 복을 허락하셨고, 오늘과 같은 유사 이래 최고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축복의 소중함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이 축복은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오늘의 위기와 관련하여 지난 40년을 돌아보자. 오늘의 30~40대는 전교조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격동의 80년대를 지나온 50대는 나을까? 그들은 더욱 편향된 세대다. 전 세대적으로 좌로 기울어진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그럼에도 현 집권 여당은 20대의 이탈 원인을 전 정권의 반공교육을 탓하고 있으니 실소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과 정당의 90%가 좌파라는 베네수엘라와 같지는 않겠지만, 대한민국의 좌편향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보수우파는 나을까? 별반 다르지 않다. 보수라 자처하면서도 보수 가치가 무엇인지 몰랐다. 오늘의 위기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보수가 뭔지 고민하며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근본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 한국교회는 전혀 관계없는 것일까?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소리보다 인간과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인 결과가 아닐까? 수렁에 더 깊이 빠져들기 전에 교회는 분별하고 돌이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화를 재촉하게 될 것이다.

최근 미국 하와이의 한 감리교회가 동성애 반대 대책모임을 가졌다는 한 가지 이유로 교단의 레즈비언 감독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다. 예배당, 교회차량, 하다못해 목회자 사택 보증금까지 탈탈 털어갔다고 한다. 거리로 내몰린 목회자와 교인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해변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고, 현지인 예배당을 빌려 남은 교회재정을 동성애반대 집회하는데 전부 사용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난으로 인해 교인들이 흩어졌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뭉쳤고, 더 강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체험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순교신앙이다. 주의 뜻을 위해 죽고자 하는 자가 사는 역사다. 뜨겁든지 차든지, 흑이든 백이든 해야 한다. 교회의 본향은 이 땅이 아니며, 이 세상 것은 목적이 아닌 수단에 불과하다. 정말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을 위하여 내려놓을 수 있음이 교회의 참된 영성이다. 교회가 헛된 탐욕을 고집한다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예배당과 온갖 자랑거리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정리해보자. 이 시대의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신앙인으로서의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다. 아직도 떨쳐내지 못한 지독한 세속적 욕망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순교신앙의 야성을 잃었다는 점이다. 기억하자. 기독교는 유희를 위한 유람선이 아니다. 고난을 감내하며 하나님을 뜻을 위해 존재하는 영적 전함이요 천성을 향해 전진하는 하늘의 군대다. 기독교는 결코 온실 속 화초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예하는 구별된 주의 군대다. 기독교의 정수(精髓)는 ‘순교신앙’(殉敎信仰)에서 꽃피우는 것이다.

 

박광서  myr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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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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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ephen 2019-03-12 18:02:07

    한홍구 교수(『유신』, 2014:29)는 특히 유신체제란 한 정치 지도자가 자기의 권력을 절대화하기 위한 기도(企圖)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절대화된 권력마저 정당화해 준 가장 효과적인 사상적 도구는 - 반공을 기독교적 가치(사랑, 진실, 정의, 평화 등)보다 더 상위에 두어 절대화하는 - ‘반공 이데올로기‘였을 것입니다. 이에 우리 신자들은 우리의 사회·역사 속에서 복음의 가치에 합당한 삶을 도모하기 위해 소위 진보의 이데올로기만 아니라 이른바 보수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삭제

    • stephen 2019-03-12 17:56:23

      잘 알다시피, 신약성경에서 우상숭배의 본질이 바로 탐욕임을 밝혀줍니다(골3:5, 엡5:5). 이런 탐욕의 대상은 물질에만 제한되지 않으며, 특히 권력(혹은 지배욕)에 대한 탐욕도 우상숭배임에 틀림없습니다(마4:8-11).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한국현대사의 정치 지도자들을 논하면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이런 영성 분별의 측면을 결코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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