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욱(하나교회 담임 목사)

우리는 늘 선택하며 삽니다. 매일 우리 앞에 갈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월요일에 옷을 사러 갔습니다. 처음 본 옷이 좋아 보였지만 가격이 과하였습니다. 결국 다른 곳에서 절반의 가격으로, 두 벌의 옷을 샀습니다. 

화요일과 수요일에 강도사고시가 있었습니다. 신학위원으로 참석하여 시험답안지를 채점하고 면접을 하였습니다. 어떤 고시생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통과시키는 것이 자신과 교회를 위해 유익한 것인지 고민스러웠습니다. 

목요일에 한국찬송가공회이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통일찬송가’의 계속 출판을 허락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21세기 찬송가’로 통일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하여 결코 허락하면 안 된다는 의견과, 현실을 인정하고 허락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으로 나뉘었습니다. 

주중에 시골에 있는 후배의 긴 문자를 받았습니다. 지난날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를 말하며, 그 부분에 대한 도움을 구하는 글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맞는지... 그분의 처지를 생각할 때 어떤 방법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좋은지 아직도 고민 중입니다.  

이따금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못한 길’을 읽어 봅니다. 장영희교수가 번역한 시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습니다. ‘... 지금으로부터 먼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느 숲속에서 두 갈래 길을 만나 나는 사람이 적게 다닌 길을 택했노라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만 아닙니다. 때로는 여러 갈래가 나있어 더 헷갈립니다. 그 길에서 우리가 하는 작은 선택들이 모여서 결국 우리자신의 역사가 됩니다. 먼먼 훗날 후회스럽지 않도록, 아니 우리가 걸었던 그 길이 아름다움 역사가 될 수 있도록 갈래 길에서 선택을 잘 해야 하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 그렇게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좁은 길, 좁은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성육신, 구유 탄생, 가난한 목수의 아들, 결국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100년 전 우리 믿음의 조상들도 그랬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조용히 살 수 있었습니다. 당대의 출세를 위해 눈 딱 감고 친일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은 그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받고, 가족들이 죽을 고생을 하더라도 독립운동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분들이 걸었던 그 길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의 해입니다. “대한독립만세”소리와 손에 잡은 태극기들이 휘날렸던 봄입니다. 또한 사순절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계절입니다. 조용히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돌아봅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아름다운 역사가 되는 길인가를 묵상하며, 그런 길을 걷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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