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피랍 유경식씨 ‘이제야 말한다’]


2007년 한국사회와 교회를 소용돌이에 몰아 넣었던 아프가니스탄 피랍 봉사대원의 뒷이야기가 공개됐다. 유경식(56·현 샘물교회 강도사)씨는 근간 '본질과 현상' 여름호에서 피랍 기간에 있었던 실상과 오해를 소상하게 밝혔다. 유씨는 원고지 250장 분량의 탈레반 피랍일지 '아프간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아픔'을 통해 "당시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증인으로서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고 진행되었는지 사실대로 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유씨의 증언은 일지형식으로 당시의 일을 소상하게 복원하고 있어 한국교회 선교의 실상과 봉사대원들의 두터운 신앙심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피랍 후 6개팀으로 분산돼 수용=2007년 7월18일 밤 11시에 마자리샤리프를 떠났다.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가는 길이 위험하기 때문에 그 구간을 가장 안전한 낮 시간에 통과하기 위해서 일부러 밤늦게 출발한 것이다. 우리가 아프간 대사관으로부터 비자를 받을 때 위험하기 때문에 초청장을 못 보내준다거나 위험하니 오지 말라는 말은 전혀 없었다. 외교부에서도 문제삼지 않았다. 아프간에서 팀원들은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현지 복장과 차도르로 얼굴을 가렸다. 남자들은 수염까지 길렀다.


7월19일 피곤에 지친 우리는 버스 안에서 모두 잠들어 있었다. 오후 2시30분경 머리에 터번을 두른 남자 두 명이 AK-47 소총을 겨누며 차에서 내리라 했다. 내려 보니 배형규 목사가 쓰러져 있었다. 이미 팀의 리더를 파악해 가격한 것 같았다. 탈레반 무장대는 우리를 한 가옥에 가두고 서툰 영어로 자신들이 경찰이며, 알카에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임시로 붙잡아 둔 것이라며 안심하라고 했다. 현금과 짐은 돌아갈 때 모두 돌려주겠다면 빼앗아 갔으나 나중에 우리는 돈도 짐도 돌려받지 못했다. 우리는 6개의 작은 팀으로 분산되어 산속 토굴로, 농가로 계속 이동해야 했다.


◇의연했던 배 목사와 버팀목이었던 심성민=그때부터 43일간의 피 말리는 억류생활이 시작됐다. 탈레반은 구덩이를 파 놓고 그 앞에 우리를 세웠다. 그들은 소총과 기관총, 로켓포 등으로 무장하고 비디오를 찍었다. 움막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배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너무 염려 마세요. 전세계 성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우리 중 한두 명을 죽일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는 제가 제일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저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고문하고 죽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폭력으로 대항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핍박과 조롱을 견디시고 십자가를 견디시며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저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배 목사는 "온전한 헌신은 자신의 마지막 것을 드리는 것"이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다.


심성민 형제는 주변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불안해하는 자매들에게 그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는 탈레반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가 살해되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다국적군이 감동한 이지영의 양보=우리는 이와 벼룩, 전갈이 득실거리는 좁은 움막과 당나귀 우리, 토굴에서 지그재그로 잠을 자야만 했다. 먹을 것이라곤 어린아이 주먹 만한 감자뿐이었다. 우리는 반쪽씩 나눠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탈레반과 달리 피랍 기간 중 만난 아프간 현지인들은 순수했다. 전쟁과 폭력,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아프간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8월29일 납치 43일 만에 석방됐다. 석방의 기쁨도 잠시, 2명의 대원이 피살된 것과 고국의 비난여론이 상당하다는 사실에 무거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아프간 파견 한국군 지휘관이 호텔로 찾아와 이지영 자매가 누구냐고 물었다. 지휘관은 그녀에게 조그만 상자를 건넸다. 그 안에는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지휘관은 '탈레반이 두 명의 여성을 석방할 때 그녀가 김경자씨에게 먼저 가라고 양보한 사실이 큰 감동을 주었고 이 사실을 안 다국적군 교회 군인들이 조금씩 모금을 해서 목걸이를 만들어 자신에게 줬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이지영 자매에게 '정말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말을 전달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일은 의기소침해 있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국내의 오해와 기독교 비판=아프간 사정상 사실이 잘못 전달되다 보니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비난과 오해를 받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수십 차례 가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왜 갔냐'며 안전불감증 환자라고 몰아세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위험하다고 경고한 것은 출국 안내판뿐이었다. 또 마치 호화버스를 타고 티셔츠를 입고 시장에서 쇼핑하고, 길거리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예수 믿으세요"라며 외친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리고 내가 사실을 다르게 말해 마치 언론플레이를 한 것처럼 알려졌는데 그것은 일부 방송이 기자회견 내용을 잘못 알렸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많은 분들의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지금은 여행 금지국이라 갈 수 없는 땅이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모습은 우리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다. 그 땅에서 흘린 땀과 눈물의 기도가 사막에 생명으로 피어나고 열매 맺길 기도하고 있다. (국민일보제공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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