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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한국교회: 개혁신학적 성찰(VI)

코람데오닷컴의 중요 기고자 가운데 한 분인 김영한 교수의 성실한 글쓰기에 감사를 표하며,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3.1운동을 개혁주의신학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3·1운동과 한국교회: 개혁신학적 성찰” 6번째 시리즈 글을 소개한다. - 편집장 주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교수(金英漢, Yung Han Kim, 1946년 10월 18일 ~ )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기독교철학자이며 신학자이다. 1996년 한국개혁신학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역임하였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을 설립하고 초대원장, 2대, 3대, 5대 6대 원장을 역임하였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를 은퇴하고 1998년부터 기독교학술원 원장을 지내고 있다. 2010년 샬롬나비(샬롬을꿈꾸는 나비행동, 개혁주의 이론실천학회) 시민운동을 창립하고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개혁신학회,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한국해석학회, 그리고 한국기독교철학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해석학과 기독교 문화 그리고 현대신학 분야에서 학술적으로 큰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III. 3·1독립선언의 정신

3·1운동의 이념과 정신에는 그동안 일제에 대항하여 전개된 여러 민족운동의 정신과 이념이 종합적으로 융합되어 담겨있다. 부르주아 중심의 갑신정변(1884)을 기점으로 반봉건 ․반외세의기치를 올렸던 갑오동학농민혁명(1894), 국권수호와 민권신장을 선도했던 독립협회(1896)활동등이 ‘역사적 모태’라 할 수 있다. 「3․1독립선언서」는 단순한 독립선언을 너머서서 자유, 민주, 자주, 인류공영, 세계평화, 새 시대,  정의, 인도, 공생, 존영(尊榮) 정신을 천명하고 있다.

 

1. 자주독립(自主獨立) 정신 

「3·1독립선언서」 첫 대목은 “吾等은 玆에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고 선포하였다. 위 내용에서 보듯 3․1운동이 추구한 주된 이념과 정신은 ‘자주와 독립’이다. 「3·1독립선언서」는 일제의 무력에 의한 강점기를 산 조선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했던 자유와 독립을 선언했다. 일제 무단 통치 10년 동안 자유와 독립보다 더 절실한 문제는 없었다. 3·1운동은 대내외적으로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조선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회복하는 것을 제일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를 자손만대에 알리며 민족자존(民族自尊)의 정권(政權)을 영유(永有)케 하려했던 것이다.

조선이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것은 국제정세에 어두워서 무너지는 중국에 종속하는 가운데 자주 독립이 결여되어 군국주의 일본을 막아내지 못한 조선 정부의 무능한 국가경영에서 비롯된 것이다. 1894년 조선을 여행한 오스트리아 귀족 출신 작가이자 여행가 헤세-바르텍(Ernst von Hesse-Wartegg)의 기행문 『조선, 1894년 여름: 오스트리아인 헤세-바르텍의 여행기』(Korea : Eine Sommerreise nach dem Lande der Morgenruhe, 1894)는 ‘서양인의 눈으로 본 개항기 조선의 사회, 문화 보고서’로서 당시 조선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다음같이 묘사하고 있다: “당시 조선은 나라도 아니었다. 이렇다 할 산업 없이 농사와 고기잡이로 연명하는 나라, 도로가 없어 제물포에서 한양까지 산길이나 뱃길로 가야 하는 나라, 열심히 일해 봐야 세금으로 빼앗기니 차라리 노는 것이 더 나은 나라. 국고는 비었고 돈을 찍어 나라를 운영하다 보니 경제는 파탄 났고 (당시 1달러가 엽전 6000냥, 무게로는 6kg에 달했으니 지금 베네수엘라보다 더 엉망), 군대에는 화포 하나 변변히 없고, 일본과 청나라 군사가 자기들 안방처럼 드나들어도 항의할 힘도 없는 나라. 당시 조선은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나라였다.”

이 기행문은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이자 여행가인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이 1894년 여름에 조선을 다녀가 1895년 독일에서 출간한 여행기로, 서양인의 눈으로 본 개항기 조선의 사회, 문화 보고서다. 헤세-바르텍은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해 부산에 상륙한 다음, 배편으로 서해를 거쳐 제물포, 서울을 직접 발로 누볐다. 1894년, 그해에 조선에서는 안팎으로 큼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조선의 남부 지방은 정부에 대한 봉기가 극심했고, 동아시아의 두 강대국인 일본과 중국은 조선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전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1월에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6월에는 갑오개혁이 실시되었으며, 8월에는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그런 만큼 중국과 일본, 조선의 정치적, 문화적 관계를 이해하기에 적기(適期)였던 것이다.

당시 서구 식민지 쟁탈의 온상이 되었던 청국(淸國)만을 바라보던 대한제국 정부는 쇄국정치로 우물안 개구리 같이 나라다운 국방력과 경제력이 거의 상실된 상태에서 서구 식민주의의 시대적 물결에 편승한 일본제국주의에 여지없이 국권을 강탈(强奪)당한 것이었다. 3·1독립선언서에서 민족대표 33인은 대한제국 정부가 상실했던 나라의 자주독립 정신과 의지를 표방함으로써 국제사회에 한국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한국민족의 자주독립 능력을 표현한 것이다.

헤세-바르텍은 1894년 6월 말 부산에 도착했다. 그에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비교적 깔끔하게 정비된 일본인 거주지였다.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자마자 그는 조선의 쇠락한 모습을 여기저기서 만나게 된다. 부산을 떠나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이르러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500년을 이어온 왕조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서울은 너무도 초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조선이 처한 일반적 조건은 그의 판단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 이미 중국인과 일본인을 접해본 그의 눈에 조선인은 앞의 두 나라 사람들에 비해 뒤질 것이 없어 보인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능가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고했으나 조선인들에 관하여는 다음같이 긍정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조선인들의 내면에는 아주 훌륭한 본성이 들어 있다. 진정성이 있고 현명한 정부가 주도하는 변화된 상황에서라면,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깜짝 놀랄 만한 것을 이루어낼 것이다.” 조선인에 대한 그의 직관은 당시에는 비현실적으로 보였으나 미래를 예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5년이 지난 후 한국은 세계의 경제 대국이 되어 2018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 3만불 소득국가가 되었다. 한국은 2018년에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6개국에 이어 일곱 번째로 ‘30-50클럽’ (일인당 국민소득 3만불, 국가 인구가 5천만명 되는 국가)에 가입한 국가가 되었다.

영국 출신의 더 타임즈, 가디언, 전 주한 기자 클럽 회장 마이클 브린(Michael Breen)은 그의 최근 저서 『한국. 한국인』(The New Koreans, 2017)에서 한국의 세 가지 기적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남한의 경제발전을 일컬었던 한강의 기적, 군사정권에서 벗어나 자유 민주주의 발전, 한국의 문화적 표현인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한류(韓流)다. 그는 “서문: 한국, 한국인, 한국경제 그리고 한국사회를 말한다”에서 한국인의 발전 원동력이란 외세 점령과 국가 분단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외세의 점령과 국가의 분단이 남과 북 사람들의 정체성을 파괴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 남한의 발전에 대해서 지금은 명백히 보이는 무언가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발전의 원동력이 일본의 식민 통치뿐만 아니라 한국인을 참담한 현실을 이끈 역사 전체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82년 처음 한국에 와서 36년째 서울에서 거주하면서 한국 및 북한 담당기자로서 날카로운 시각과 통찰로서 한국사회를 추적한 저명한 저널리스트이다.

브린은 이어서 오늘날 한국의 세계무대에서 확보한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같이 피력한다: “이제 나는 한국 스토리의 진정한 중요성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되었던 나라가 두 세대 만에 이와 같은 성취를 이를 수 있다면, 그 어떤 나라든지 단기간에 민주화를 이루고 국민의 생활 수준을 높여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이라는 나라”라는 장에서 “환상적인 나라다. 제3세계를 예상하고 왔는데 그저 놀라울 뿐이다”라는 표제 문장을 달고 서술하면서 다음같이 맺음말을 하고 있다: “21세기에는 한국이 시스템, 정치문화, 기업 경영방식, 기타 보편적인 일처리 방식을 진정한 선진국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을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의 국제적 명성이 발전의 직선을 앞서기 시작했다. 세계는 이미 한국을 선진국으로 간주하여 더 이상 한국을 용, 호랑이 또는 다이아몬드로 부르거나 지적을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코리아는 이제 잘 알려진 나라다. 한국 버전으로 말이다.” 이러한 푸른 눈의 영국 기자 브린의 언급은 1세기 전 1894년 오스트리아 기자 헤세-바르텍의 언급이 한국인의 자주 독립 능력에 대해 바로 평가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자유민주(自由民主) 정신 

「3·1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식민통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주독립권 회복의 궁극적인 목적이란 조선백성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함’이며 ‘오직 自由的인 精神을 發揮할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조선인이 본래부터 지켜온 自由權을 지켜 왕성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려한다”(我의 固有한 自由權을 護全하야 生旺의 樂을 飽享할 것). 여기에는 자유·정의·인도·인류 평등이라는 높고 고상한 이상이 담겨 있다. 자주 독립국가 건설됨으로써 조선 백성의 각 개인의 자유권과 기본권이 보장된다. 자주적인 독립국가가 있어야 그 안에서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이 보장된다. 이렇듯 자주독립국을 세우려는 근본목적은 ‘자유민(自由民)’ 곧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민이 되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주독립된 나라를 세우려한 근본목적과 취지는 한국민들이 자주독립된 나라의 구성원 모두의 자유를 보장받기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인 자유민주사회, 곧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주독립된 나라 건설은 자유민주사회의 기반이다. 3·1운동 이후 설립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2조는 “남녀, 빈부귀천을 포함해서 모든 계급을 초월하는 나라를 만든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두가지 의미가 포함한다. 하나는 황제가 지배하는 군주국이나 양반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사회가 아니라 신분이 평등한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이다. 또하나는 과거의 봉건 계급사회도 아니지만 인민계급사회도 아니라는 것이다. 빈부 귀천 남녀노소 누구나 다 기회를 얻어 함께 평등한 시민사회를 이루자는 것이다.

3·1운동은 근대적 개념의 국민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대한제국의 신민(臣民)은 국가가 망한 후 왕조를 다시 세우려는 복벽주의(復辟主義)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점차 근대적 개념의 국민으로 변환되었다. 국가 백성들의 자유와 민주정신을 담보하지 않는 자주독립국가 건설은 3․1정신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자유민주정신’은 3․1운동이 우리에게 준 더없이 소중한 정신적 유산으로 기리 지켜나가야 할 민족사적 최대 덕목이라 할 것이다.

1919년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자유민주이념으로 세워진 정부였다. 당시 소련은 볼세비키 혁명의 공산주의 이념을 퍼뜨리기 위해 극동피압박민족대회를 만들어 약소민족의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이고, 막대한 자금을 주었다. 당시 대부분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소련의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임시정부를 지킨 사람이 바로 주석(主席) 백범 김구였다. 그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도와 안창호, 그리고 조소앙과 같은 인사(人士)들과 함께 임시정부가 공산주의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켰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 미국 선교사인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1883-1979)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해 한인들을 도운 한국 독립운동과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 상하이한인교회의 한진교 장로, 미국의 교포들이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1943년 김규식은 미주동포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임시정부가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만일 이 때 임시정부가 공산주의로 넘어갔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을 때,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대한민국이었다. 그런데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이 갑자기 세력을 갖고. 8월 9일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인민위원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해방 후 3년 동안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공화국을 세울 것인가? 아니면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인민공화국을 세울 것인가를 놓고 싸웠다. 그 결과 북한은 소련을 등에 업고, 인민위원회를 만들어서 인민공화국을 만들었다. 남한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삼권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기독교인들은 민주공화국을 만드는데 기여한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지도자들은 자유민주 이념을 분명히 했다. 대한민국은 3·1운동의 자유민주 정신으로 만들어진 임시정부에 기초해서 세워진 자유민주국가이며 그 밑바닥에는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다

 

3. 인류공영(人類共榮)의 평화정신(平和精神), 사해동포주의

1) 인류공영의 세계 평화 정신

「3·1독립선언서」는 “조선의 독립은 조선만이 아니라 일본이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중국 또한 몽매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 ‘東洋平和로 世界平和와 人類幸福에 필요한 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본이 대륙 침략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향후 한․중․일 3국이 동양평화를 이룰 때 세계평화와 인류행복, 곧 인류공영의 평화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3·1운동은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양육강식의 제국주의를 종식시키고 정의와 인도에 기초한 민족자결을 통해 평화의 세상을 이루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3·1운동은 국내외 거주하는 한민족의 평화운동이었다.

3·1운동 평화사상은 성경의 평화(샬롬 שלום, 에이레네 ειρηνη)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이사야서 11장에 선포된 평화와 3·1운동의 평화사상이 서로 상응하고 일치한다. 3·1운동은 중국·베트남·필리핀·인도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이 바로 그 사례다. 독립선언서에는 조선 독립이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동양 평화를 그 중요한 일부로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라를 잃었어도 숭고한 이상을 품은 선조(先朝)의 정신은 지금도 놀라움을 준다. 인류 공영(共榮)이란 공화 정신으로 공동체 정신이다. 개인의 자유와 독립보장을 너머서 사회구성원이 함께 번영하고 공생하는 사회공동체를 이루며 개인과 민족의 번영을 너머서 인류의 공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공화정신을 이루는 데는 하버드대 교수 니콜슨(Nicholson)이 말하는 것처럼 서구문명의 유산으로 내려온 대의제도, 법치제도, 시장경제, 자원단체 등의 사회적 제도가 필요하다.

3·1정신이 선언하는 바같이 한국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세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1892년 '찬송가'에는 만왕, 만국, '끄릴난 어름산과 인도 산호섬과 아프릭 더운 내에 금모래 깔린 곳 강과 산과 넓은 들', 이런 글들이 쌓여 있었다. 1906년 존 무어 선교사는 한국이 구원의 횃불을 드는 날 세계문제가 해결되되 제대로 해결되고 만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예언하고 있었다. 

비록 식민지로 일제에 종속상태에 있으나 3·1정신은 조선왕조의 쇄국정신에서 벗어나 동양평화를 말하고 인류의 공영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3·1정신에는 근대화 신문명을 수용함으로써 잠자고 있는 조선민족의 혼을 일깨운 기독교적 세계동포주의의 사상에 기인한다.

3·1운동 정신은 인간은 타인과 다른 생명들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통찰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들이 함께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이 땅 위에서 살아갈 수 없다. 3·1정신은 모든 인간 및 생명들과의 연대와 사랑으로 확장을 강조한다.

 

2) 안중근 동양평화론 정신 구현

 「3․1독립선언서」에 담겨있는 동양평화와 세계평화 및 인류공영의 평화정신은 3․1운동이 일어나기 꼭 10년 전 1909년 이토 저격을 결행한 안중근 의사가 제창한 ‘동양평화론’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안중근 의사가 제시한 동양평화론을 거론할 여유가 없지만 그는 동양 3국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복안을 제시한 바 있다. 3·1운동의 평화사상은 민족의 자주가 동양평화와 세계평화와 반드시 연계된다. 안중근이 제안한 ‘3국 평화안’은 현재 유럽연합국(EU)에서 거의 유사하게 현실화되었다. 작금 과거사 문제와 독도 및 생카쿠열도(釣魚島) 문제 등을 놓고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한․중․일 3국의 현실에 유념할 때 매우 주목해야할 정신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현재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일본 사이에 끼어있는 한반도, 더욱이 남북으로 갈라져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민족의 운명이 달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3․1정신의 주요 덕목중의 하나인 인류공영과 평화정신을 체화하고 실현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 할 것이다.

3·1독립정신이 강조하는 비폭력 정신은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강 이승훈은 철저히 예수의 정신에 따라 비폭력에, 평화에 힘이 있다고 주장했다. 비폭력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행동의 규범이었고, 무슨 일을 하든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예수의 정신, 십자가는 비폭력적 저항이 부활의 신념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비폭력이란,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으로 삼켜서 원수를 녹여내겠다는 것이다. 비폭력으로 원수를 삼켜서 원수를 내 편으로 만든다는 훨씬 더 강한 개념”이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은 우리뿐 아니라 압제하는 일본, 함께 고통받는 중국 등 동북아 주변 국가들과의 평화가 독립의 목적이지, 우리 힘으로만 독립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와 한일 관계는 초계기 사태, 강제징용 배상 판결 등 악재가 잇따라 터졌다. 하지만 2019년 3월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일본인들은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위대한 인물을 추모하는 데 시기는 따로 없다"고 했다. 전 요코하마(橫浜) 시립중학교 교사 스즈키 히토시(鈴木仁·66)는 1994년부터 안 의사 추모식에 참석해왔다. 그는 안중근과 그의 동양평화론을 미래를 바라보는 통찰로 평가하였다: 안의사는 "미래를 내다보는 훌륭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현재도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통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100여년 전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볼 때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는 분이었다." 2002년부터 안중근 추모식에 매년 참석해온 스가와라 도시노부(菅原敏允·86)는 미야기(宮城)현 구리하라(栗原)시 국제교류협회 회장이다. 구리하라시(市)는 뤼순 감옥에서 안 의사와 인연을 맺은 일본 헌병 지바 도시치의 고향이다. 그는 "고향 사람인 지바 도시치와 특별한 인연을 가진 안 의사를 추모하며 자연스럽게 한국과의 인연이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5년 동안 일본인 500여명에게서 성금을 모아 구리하라시에 안중근 의사와 지바 도시치의 이름을 새긴 추모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안중근의 평화정신을 실천하는 일본인으로 다음같이 피력했다: "지바 도시치는 중국 뤼순 감옥에서 매일 안 의사를 감시하다가 그가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런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평화운동이다." "일본에서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범죄자'로 인식되지만, 역사를 깊게 공부한 사람은 안 의사는 (테러리스트라는 개념을) 넘어선 인물임을 알게 된다."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평화는 찾아올 수 없다." 일본인 가운데는 이러한 평화의 정신을 가진 훌륭한 분들이 있다는 사실은 한일간의 미래적 관계의 전망을 밝게 한다.

3·1독립선언서에 나타난 동양평화와 세계평화 및 인류공영의 평화정신은 10년 전 1909년 이토 저격을 결행한 안중근 의사가 제창한 ‘동양평화론’에 선구적으로 표명되었다. 오늘날 안중근의 순국희생에 감동을 받은 일본인들 사이에 그의 평화정신에 감동받아 이를 실천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선한 일의 파급 효과’라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라고 신학적으로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아베 일본 정부가 군국주의(軍國主義) 과거로 회귀하고 중국의 시진핑이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의 패권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동북아의 긴장 속에서 3·1독립선언서의 동양평화론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평화, 더 나아가 동북아의 평화, 세계 평화를 실천하는 정신으로 파급되는 불씨가 될 수 있다.

 

4. 후대(後代)가 나아갈 민족화합의 새로운 시대를 향한 꿈과 비전(Vision)을 제시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민족의 새 시대를 선언한다: “아아 신천지(新天地)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來)하도다.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投射)하기 시(始)하도다.” 선언서는 군국주의 시대가 아니라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천명하고 있다. 일제의 총칼에 의해 꽁꽁 얼어붙은 군국주의 세상을 거부하고, 정의, 자유, 평화, 평등, 화해를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을 선언한 것이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새 하늘과 새 땅’ 문구는 우리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희망과 꿈과 비전을 제시해 주고 있다. 요한 계시록 21장 1절의 영향을 받은 종말론적 비전이 제시되고 있다. 이제 이후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음침한 옛집(古巢)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흔쾌(欣快)한 부활(復活)’의 빛을 향해 힘차게 나가자”는 문구는 희망찬 꿈과 비전 제시하며,  새 시대를 향해 한민족 구성원 전체를 하나로 묶어내고 있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꿈과 비전은 남궁억의 기러기, 홍난파, 김형준의 봉선화 등의 노래에서 나타났다. 1920년 남궁억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란 찬송가를 불렀다. 그런데 그는 '기러기'란 노래를 짓는다. 짝 잃고 멀리 벽공(碧空)에 날아가는 기러기가 나라 잃은 우리 같았다. 그런데 3절에는 희망의 북소리가 요란하다: "곡간 없이 나는 새도 기를 자 뉜가 하늘 위에 한분 계서 네길 인도하신다. 너 낙심치 말고 목적지 가라 엄동 후엔 난풍(暖風)이요 고생 후엔 낙이라!" 당시 새문안 교회의 홍난파와 김형준이 '봉선화'를 지어 온 겨레가 소리 높이 목쉬도록 불렀다. 가을 바람에 처량하게 시든 봉선화 같은 우리지만 그런데 3절에는 화산이 터지는 듯하다. "엄동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이러한 민족을 향한 꿈과 비전은 일제하 독립운동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의 정신과 삶 속에도 반영되어 있다.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은 「100세 일기」에서 다음같이 17세 때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강연을 들었다고 회상하면서 도산(島山)의 삶과 정신을 소개하고 있다: “도산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라사랑과 인재 교육이었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잊어서는 안되며, 그 사랑을 애국정신으로 보답하자는 간곡한 호소였다. 도산은 웅변가였다고 하지만 민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더 컸다. 웅변이기 보다는 기도하는 열정이었다.”

3·1운동은 중국·인도 등 외국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의 전개에도 큰 기여를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등은 매년 3·1절에 기념식을 열고 거족적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만주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통합, 신간회와 독립당촉성회 결성, 좌우 합작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도 3·1운동의 경험에 힘입은 바 크다.

 

5.  정의, 인도(人道), 공생, 존영(尊榮)의 인도주의 정신

독립선언서 <공약삼장>은 “금일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 인도(人道), 공생, 존영(尊榮)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는 격(格) 높은 정신을 천명하고 있다. 정의, 인도, 공생, 존영이란 정신은 일제가 총칼로 조선 민중의 자유 독립 정신을 말살하려는 무단정치에 대한 격(格) 높은 도덕주의적 정신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산상 설교 정신에 부합하고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5-6).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9-10).

이러한 공약삼장의 인도주의 정신은 기독교 정신에 합치하며, 애국가 후렴이 노래하는 바같이 “하느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기독교 정신으로 귀결된다.

3·1독립운동 당시 군국주의 일본에도 조선 민중의 독립만세소리와 동행한 동조층이 있었다. 도꾸도미 소호(德富蘇峰)와 나까라이 기요시(半井淸)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전자는 일본 최고층 인사였고 후자는 당시 총독부 고위관리였다. 이들은 당시 군국주의 일본 안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를 여기고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추구하는 인도주의(人道主義)를 신봉하는 일본의 상류층 지식인들이었다. 도꾸도미 소호(德富蘇峰)는 일본 최고의 국수주의자로 '일본국민사' 100권 총서를 저술한 황도파(皇道派)인물이요 조선총독에 버금가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울 프레스' 총감독으로 있으면서 3·1운동 당시 1919년 3월-11월 수십편 논설을 통해 인도주의를 외치고 총독부 군경의 만행을 매섭게 고발했다. 도꾸도미 소호(德富蘇峰)는 일본 교토(京都)의 가톨릭 대학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 출신인데 그가 받은 이웃 사랑의 기독교 정신이 인도주의를 신봉하는 세계시민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그는 일본 안의 기독교회가 이웃나라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료 기독교인들에 대한 총독부의 살벌한 핍박과 잔학(殘虐)한 행위에 대하여 일체 언급이 없음이 신기할 뿐이라고 야유했다.

나까라이 기요시(半井淸)는 3·1독립운동을 왜곡해서 공격한 자들을 ‘참으로 난처한 사람들이며한국교회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글을 내었다. 당시 일본 국내 언론 '요미우리신문'이나 '아사히신문'도 역시 일본 군경의 만행(蠻行)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기사를 내었다. 이 두 언론은 3·1독립운동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민중들의 집단행동이 아니고 지식계급이 중심이 되어 있다는 점, 총독부의 강압(强壓)정치가 정도(正道)를 벗어나고 있었다는 것, 총독부가 변하는 세계사조와 사상 추이의 대세에 눈이 어두워 있었다는 것, 총독부의 강압적 정치는 천박했다는 것, 일제 군경의 소요진압 방법이 ‘벨기에 훈족들(the Huns)과 다름없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등 총독부의 무단(武斷)정치를 규탄하는 글들을 썼던 것이다. 이러한 비판 논조는 당시 일본 언론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놀라운 3·1독립운동에 동조하는 논조(論調)이었다. 당시 총독부 내사국장 우사미 가쯔오(宇佐美勝夫)도 한국교회를 계속 옹호하고 그 곤경을 동정하고 있었다. 3·1독립운동 때 나타난 양심과 인도주의에 입각한 일본 고위층이나 일부 일본 언론의 3·1독립운동 옹호는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미래지향적 화해와 공존공영에 희망의 다리를 놓은 보석과 같은 존재들이라 생각되어진다.

이상의 3·1정신 자주독립, 자유민주, 인류공영, 민족화합과 새시대 꿈과 비전, 정의, 인도, 공생, 존영(尊榮) 정신 등은 서구 근대화 정신을 수용한 것이며, 이것은 기독교 정신과 부합하는 것이다. 기독교 정신은 선진민주국가의 가치인 자유, 진리 정의다. 당시 신자들은 자유를 찾는 것은 신앙을 지키는 길임은 물론 민족의 자존과 번영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확신했다.(계속)

 

김영한  yunghankim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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