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도 존폐에 대해서 교회가 너무 깊이 관여할 필요는 없다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 연구위원장, 미포 사무총장)

사형제도 존폐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기독교는 육신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육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를 위하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육신의 생명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최근 사형제도 존폐를 놓고 다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사형집행이 없는 실제적 폐지 상태에서 이제 법적 폐지를 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다. 남의 생명을 의도적이고 잔인하게 빼앗은 자를 국가의 세금을 허비하면서 살려두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국민적 정서가 일어나는 경우를 대비하여 사형제도를 형식적으로 살려두고 사형제도를 지금과 같이 집행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성경에서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입장을 말하는 중요한 본문 중의 하나는 창세기 9장 5~6절이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어떤 사람이 (다른)사람의 피를 흘리면, (피 흘린 자의) 피가 사람에 의해서 흘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이 본문의 말씀이 노아 홍수 이후에 주어진 점을 생각해야 한다. 홍수 심판 이후 인류 보존을 위한 보편적 적용이 가능할 것이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의 피를 다른 사람에 의해서 흐르게 하는 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 피의 보복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피의 보복을 하는 주체는 개인이라기보다는 공권력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국가의 법질서에 의한 사형제도가 형벌로서 존치된다.

이것은 보복법으로 연장된다. 보복법은 형벌의 최대치를 규정하는 법이다. 눈을 다치게 한 일에 대해서 눈 이상을 벌하지 않도록 규정한 법이다. 최대치의 법 규정은 인간의 완악함(타락성)을 고려한 율법의 특징을 가진다. 율법에 들어있는 온전함을 고려할 때, 예수님은 용서하도록 규정하신다. 그러나 일반 사회에서 이런 용서의 법을 적용하지 못한다.

따라서 보복법의 특징을 적용해서 사형제도를 이해해 보면 이렇다. 고의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친 경우에 기독교는 사형으로부터 시작해서 용서까지 적용되는 넓은 공간을 가지게 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사망을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가 적용될 때는 반대가 된다. 따라서 사형과 용서 사이 어느 지점이 하나님의 가장 적절한 뜻인가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보수적인 기독교의 입장이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것이고 진보적인 입장은 폐지라고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성경의 관점은 어떤 것을 특정하지 않는다. 그 시대의 형편을 따라서 국민적 합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결정을 내리면 된다. 인간의 죄악 됨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가 사형일 수도 있고 종신형일 수도 있다. 사회적 비용의 문제는 합의가 필요하다. 기독교는 이런 논의에 너무 많은 것을 쏟지 말아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피조된 생명에 대한 어떤 절대적 태도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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