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근(부산 자성대교회 원로장로)

사진 천헌옥 목사

시어(詩語)속에 삶의 지혜가 있다/ 김경근

나 없어도 잘만 굴러가는 세상! 사는 일은 어두운 골목을 지나가는 일이어라. 받는 것은 맛이고 주는 것은 멋이라면, 경제적 풍요보다 작은 만족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 행복은 느끼는 만큼 커지고 불행은 빠지는 만큼 더 해진다. 지난날의 번뇌를 낙조에 흘려보내는 것이 지혜로운 행복이다.

세상은 덩치 크다고 자랑할 게 아니다. 머리 좋다고 더더욱 자랑할 게 아니다. 그래서 공룡이 망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고 사람 냄새가 묻은 것은 ‘하이에나’도 먹지 않는다고 동물학자는 말한다. 새들도 죽을 때에 우는 울음이 가장 빼어나다 하지 않던가. 일출보다 일몰이 아름답다 하듯이 앞모습보다 뒤통수가 그 사람의 성숙도를 가름한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번잡 속에서도 간소하게, 복잡 속에서도 단순하게, 남들은 굵고 짧게 단명으로 한세상을 살다 가는데 골골 팔십 장수하는 게 복인가? 팔팔한 백수(白壽-99세)에 하나를 더 보탰더니 현세에 백수(百壽)는 거뜬히 채운다.

건달은 초 태생 무임승차한 사람이고 백수는 부득이 도중 하차한 사람이라 말한다. 부산진역에 노숙자 태반이 백수다. 뱀 꼬리 물었는데 통장에 수억 원을 넣어두고도 한 끼 벌려는 졸부들도 있으니 세상은 참 irony 하다.

하늘도 바다도 쉬지 않고 일하는데 왜 붉은 머리띠 두르고 정부에 의존하는지? 도박꾼이 대박을 터뜨리려다가 광박 쓰고 피박에 설사를 만나 쪽박을 차고는 ‘명박이’ 보고 돈 내놔라. (이게 이명박 정권 시절) 유행어가 한창이든 시절이 있었으니 권불십년이라더니 참 현실은 냉혹하다. 6박자를 짚는다는 세상이 어찌 이 모양 요 꼴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세상은 내 편이 아니라도 서로 공통분모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모양새가 나와 다르다고 모두 틀린 건 아니다. 계산 없이 주는 사람 멀리 보고 생각해라.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이쁜 임이 싫다 할 이가 어디 있든가? 인생은 모두 나가리(일본어)다. cancel이란 의미다. 원한은 모래 위에 새기고 은혜는 바위에 새긴다는 말이 있으나 요즘 사람들은 은혜는 강물에 띄우고 원한은 가슴에 새긴다네.

성경 율법서에 모세에게 돌비에 새겨주시듯, 은혜는 심비心碑에 새기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를 내세우는 표면적 공감보다 남을 칭찬하고 높여주는 심층적 공감을 가져라. 가슴에 품으면 사랑이 되고 검불에 붙으면 화마(火魔)가 된다.

서로 제 목소리를 크게 내고는 다들 제 목소리에 놀라서 혼비백산 도망을 치는 세상이다. 사소한 실수가 폭발력을 가지고 있으니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입에 망을 씌우고 혀에 재갈을 채워야 한다. 요전에는 황사가 유행하더니 어느새 미세먼지에 민감한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안면을 가리니 누가 누구인지 분별이 어렵다. 合議(합의)가 안 되면 協議(협의)를 하고, 토론이 여론을 남기고 여론이 세상을 만든다. 회의會議에 회의懷疑를 느낀다면 누가 주먹구구 단을 외울까?

불평과 원망은 몸도 되고 마음도 되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 시행착오가 있어도 방향이 분명하다면 그것 때문에 원망 불평할 게 아니라 도리어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불평 NO 감사는 YES!’ 라고 긍정적으로 살면, 세상이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행복은 소유에 비례한 것이 아니라 감사에 비례한다. 네가 있으니 내가 있고 내가 있으니 고로 세상이 존재한다. 코끝에도 찾아오는 행복, 내 손에 쥔 것 가지고 감사하면 그게 행복이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